그린비 출판사 노동조합 3

분류없음 2013/05/17 05:15

어떤 분이 이 글 http://soonpoong.tistory.com/1 을 읽어보라고 알려주셨다. 

(블로그 쥔장께서는 기억하실지 몰라도) 개인적으로 일면식이 있는 분이라 애정을 듬뿍 담아 읽을 수 있었다.

잘 읽었고 그리고 글쓴이의 진심이 묻어난다는 것을 읽으면서 내내 알 수 있었다. 오랫만에 이런 글을, 상투적인 표현이긴 해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글을 읽게 되니 씁쓸하면서도 ‘뿌듯’하다.

 

감히 조언을 드리자면,
앞으로 회사를 공동체를 지향하는 ‘회사답게’ 운영하셨으면 좋겠다. 잠깐! 그런데 이 분이 회사를 운영하는 처지에 계신 분인지, 아니면 자기가 운영한다고 믿고 계신 분인지 그게 분명하지 않아서 감히 드린 조언은 일단 철회. (사실확인 뒤 복구 가능)

 

다만,

 

공동체를 지향하는 회사(1) -> 회사 규모 커짐 -> 노동조합 생김 -> 분쟁 발생 -> 회사(2)

 

위의 도식에서 회사(1)이 지향했던 바를 잃지 않고이른바 ‘경영합리화’에 성공하는 회사(2)가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힌다. 어느 회사든 그 회사를 보면 그 회사의 노동조합 수준이 드러나는 것 같더라. 역으로 노동조합을 보면 그 회사의 수준도 알겠고. 그래서 그 둘을 운명공동체라든가 뭐라든가 하는가 본데 어쨌건,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게, 커뮤니티를 일군다는 게 어떤 건지, 그 지향점을 잃지 않고 갔으면 좋겠다, 는 뭐 그런 절실한 바람이다. 뭐라, 공동체를 지향하는 회사가 가능하냐고? 아니, 왜 불가능해? 우린 그저 규모가 커짐에 따르는 문제를 겪고 있는 것 뿐이라고! 우린 할 수 있다고! 불가능한 걸 처음부터 왜 하려고 했어? 처음부터 그럼 구라였어?!
 

그리고 몇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게 있어 그린비출판사를 애정하는 한 사람으로 이 밤의 끝을 다시 시작한다. 시바, 잠 다 잤네. 뭐, 어차피 나는 노동조합도 없는 비정규직노동자.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활동’에서 ‘노동’으로 돌아갑니다.
--> 우선 제목부터 상당히 거슬립니다. ‘노동’을 어떻게 규정하시는지 좀 그러네요. ‘노동’은 노동입니다. 노동은 사람들이 뭔가를 대상으로 해서 그 대상에 뭔가의 힘을 가해 그 대상이 과거의 대상의 존재와 다른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노동’은 순결하거나 순진무구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에요. 그냥 ‘뉴트럴’입니다. 이건희도 노동하고 저도 노동합니다. 자신의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그 대상에 담아낸다는 것, 좋은 말입니다만 당분간 이 좋은 데피니션, 묻어둡시다. 그건 그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영역(정치/정치경제학)의 문제와 결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결국 명실이 상부하지 않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자본이, 시장이 왕인 세상에 살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가진 게 몸뚱아리밖에 없는 사람들이 자기 몸뚱아리를 시장에 내놓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꺼리를 장만하기 위해 하는 일이 ‘노동’으로 되어 버린 겁니다. 그게 어때서요? 그리고 ‘활동’이란 말이 나온 김에. 한국사회의 이른바 ‘활동’가들 가운데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온전히 하고 살아가는 활동가? 거의 없어요. 백만 원도 안되는 ‘활동비’(라고 쓰고 월급이라 읽는다) 받아가면서 초근목피하는 활동가들이 태반입니다.

 


‘사측’이라는 익숙하지 않는 말
-->  ‘회사’와 ‘사측’이 아무리 잘해도 ‘개량’이라거나 ‘악덕’이라고요? 왜요? 잘하는데 왜 그런 말에 신경써요?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이 책 사줄 것 같아요? 안사줘요.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은 책 안봐요. 그냥 팜플릿 보거나 책 요약해놓은 것 보거나 아니면 복사해서 봐요. 우리 안의 ‘사측’포비아를 없애BOA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당신은 잘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의 ‘활동’과 앞으로의 ‘노동’


[…] 그럼에도 결코 인문서 수백 종의 매출이 ‘소아과’와 관련된 타이틀 서너 종의 매출을 넘어선 적도, 그 근처에 가본 적도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린비’는 그런 상황에서도 인문서를 계속 출판했던 것일까요?
-->  이미 앞에서 답하셨잖아요. “잘 알려진 것처럼 ‘그린비’는 ‘소아과’의 놀라운 매출 덕에 마음 놓고 인문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린비’의 구성원들이 인문학을 좋아해서 인문출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 그린비가 한참 추진했던 온라인 블로그, 무가지 gblog, 웹서비스, 독자초대세미나, 학술심포지엄 등 여느 출판사에서 하지 않았던 사업들은 다양한 차원에서 인문학의 동력을 얻고자 했던 노력이었습니다.
-->  이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이 동기와 ‘소아과’의 놀아운 매출이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냈던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건대, 이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이 모든 노력과 열정으로 만들어간 활동들이 한순간에 노동자를 착취하여 일구어낸 것으로 비춰지는 상황이 억울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  “노동자를 착취하여 일구어낸 것으로 비춰지는 상황”으로 비춰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를 착취하지 않으면 이윤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린비출판사가 이 잉여가치를  ‘착취’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린비는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지금의 그린비가 없다니!!! 착취는 나쁜 것이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울해하지 마세요, 당황스러워하지 마세요. 다만 그것을 인정하세요. 착취? 사실, 뭐 그거 별 거 아니에요.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젖을 주시는 어머니를 착취하고 사니까요.


[…] 단지 출판노동자의 피를 빨아먹고, 노동자의 정당한 저항을 탄압하는 회사가 되어버렸습니다.
-->  Nononono, 그렇지 않아요. ‘착취’와 ‘피를 빨아먹는다’는 표현은 한참 달라요. 제 생각엔 착취는 그냥 정치(경제학)적 표현이고 피빨아먹는 건 뭐랄까, 브램 스토커의 책에서나 볼 수 있는 뭐 그런 거 아닐까…그리고 노동자의 정당한 저항을 탄압하는 회사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일정 맞는 것 같군요.

 

‘회사’와 ‘사측’이라는 어휘가 낯선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 ‘노동자’라는 어휘도 익숙하지만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동안의 그린비의 활동들을 ‘노동’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좀더 솔직하게는 ‘회사에서 하는 일 = 노동’이라는 등식을 뛰어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솔직한 고백 고마워요. 그리고 그린비의 그간 활동을 ‘노동’이라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스스로 ‘노동자’라는 생각도 안 해 보신 건가요, 혹시?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정해진 시간까지 일을 하고,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고, 대가를 받아 정해진 시간 이외의 시간에는 좋아하는 것을 하는 그런 ‘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  아, 소외된 노동을 말씀하시는 거구나. 아, 이제 알겠다. Got it! 앞으로는 일일이 답변을 달지 않아도 되겠어요. 이해했어요.


[…] 이러한 지향과 운영방향이 누군가에게는 인격적 예속이었고 억압일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한 운영방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치 유토피아 같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다는 점, 역시 인정합니다. 유토피아 때문에 지옥이 생겨났고, 그 지옥으로 인해 예전의 그린비가 지향했던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
-->  그냥 인정하는 게 아니라 왜 인정하시는지를 말씀해주시면 생각이 더 명료하게 다가올 것 같아요. 그리고 단한 번의 어떤 ‘실수’가 ‘실패’를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 “‘노동자’들이 원하는 회사”에 대한 상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죠.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인데 사람들은 현실이 너무 지옥같으니까 종교를 통해, 창작을 통해, 혹은 정치를 통해 유토피아를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순서가 바뀌지 않았나 싶은...

 


그린비, 일과 놀이와 공부가 분리되지 않았던 곳
-->  네, 좋아요. Sounds nice! 님은 좋은 사수(supervisor)를 만났던 거겠죠? 이젠 님이 후배편집자들에게 좋은 사수였는가, 그것을 돌아보면 되겠네요.


유토피아 혹은 지옥, ‘계몽’을 넘어서고 싶었으나 ‘계몽’의 대상이 된 회사
그런데 지금은 제가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했던 부분이 ‘전근대’적이며 ‘회사’로 각성되지 못한 미개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근대’를 넘어선 삶이라고 여겼던 부분이 어떤 이에게는 계몽되지 못한 지옥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서로의 감성과 생각이 다른 데서 시작된 문제 […]
--> 우리는 늘 전근대와 근대, 현대와 탈현대를 넘나들며 살아갑니다. 어느 한 순간에도 한 ‘시대’에 머물 수가 없어요. 인문(학)을 다루는 사람이면 그 간극과 분열이 더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전 탈식민주의를 공부하다가 그 열패감에 시달렸어요. 그래서 그린비책을 사려고 왔다가 이 사단을 알게된 거죠. 그리고 노동조합(원)과 비노동조합(원)의 차이는 감성과 생각의 차이라기 보다는 입장과 처지의 차이인 것 같아요. ‘내’가 놓인 ‘세상’이 ‘내’ 정치를 결정하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 차이에 대해 조금은 냉정했으면 좋겠어요.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➀ 일이 즐거운 미개인

[…] “참 밝다” “분위기가 좋다”[…]
-->  미래를 보는 사람은 그 말의 이면을 늘 기억해야 그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➁ 장인(匠人)이 되고 싶었던 도제
-->  다시 말씀드리지만, 님께서 사수를 잘 만난 인연을 일반화하는 건 곤란해요. 왜냐하면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 4-5년, 3년 이런 수치는 사실 그냥 수치죠. 사실 어떤 편집자는 1년차에도 책을 너끈히 만들어내기도 하고 어떤 편집자는 5년이 넘어도 똑같은 실수(사고)를 밥먹듯이 반복하기도 하고 그래요.


[…] 이제 제가 후배들에게 그런 선배가 되고 싶었습니다. […]
--> 그 진심은 저도 충분히 이해해요. 사실 그 진심을 높이 삽니다. 존경합니다.


➂ 이벤트도 행사도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죄
-->  죄는 죄죠. 그런데 더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어떤 노동자들이 소외당하지 않았을까. 그것을 먼저 헤아려야 할 것 같아요. 해봐서 아시겠지만 소외당하면 아무리 주지육림에 빠져도 거참, 재미없거든요.


➃ 자기 성장만을 고려했던 평가
-->  아예 이번 기회에 Performance Evaluation 기준을 마련하세요. 분회와 함께 마련하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노동자 개개인이 겪는 어떤 미세한 부분을 사수(supervisor)가 어떻게 서포트할 수 있는지 그 부분에 초점을 두고 평가 기준을 마련하세요. 한국식 근무고과평가가 아니라 그린비만의 독창성을 갖는 그런 기준을 마련하시고 노동자 개개인과 혹은 집단으로 토론하세요. 그러기 위해선 그 토론을 주도할 사수들이 열렬히 공부하고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게 필수겠죠. 사람없이 어떻게 인문(학) 서적이 나오겠어요.

➄ 진심은 통할 거라는 순진함, 혹은 어리석음
-->  네. 훌륭합니다. 진심은 통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날밤을 까는 겁니다.


➅ 가슴을 뛰게 했던 인문 : 자율성, 자유, 민주에 대한 다른 관점
[…]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
-->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큼 앞으로는 더 많이 ‘사람’을 좋아해주세요. ‘그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요.


➆ 투명하게 떳떳하게
--> 글쎄요, 너무 ‘업계’가 업계답게 흘러가다보니까 구구절절 말씀하신 부분들이 마치 ‘비정상’적으로 그러니까 뭔가 특별한 것처럼 들리는데요, 말씀하신 바대로 해야 하는 게 원래 맞는 거 아닌가요?

➇ 직원 수의 증가와 회사다움에 대한 고민
--> 제가 사랑했던 그린비는 visioning이 확실한 출판사라는 점이었어요. 이 vision에 맞는 사람을 찾는 게 힘들다는 것 잘 알아요, 거기에 님의 고뇌가 있었겠죠. 징계는 필요하면 해야죠. 취업규칙이든, 회사편람이든 제일 마지막에 의지할 부분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필요한 건 사실이에요. 사람끼리 하는 일인데 왜 대화가 안 되겠어요, 그래도 just in case, 필요해요. 규칙이라는 건.

--> 그리고 새로 들어온 직원들이 잘못하거나 실수할 때는 님의 1-2년차를 돌아보시면 돼요. 나의 사수는 나를 어떻게 단련하도록 했으면 내 실수를 어떻게 서포트했는가. 뭐, 우울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편집과 편집프로세스 실험과 관련하여
--> 네. 편집은 일반화하기가 어려운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장 자』(莊子)의 「양생주편」(養生主篇)은 좋은 예시이기는 하나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살아있는 소가 느낄 고통을 생각하니 소름이...
--> 각 출판사는 각 출판사만의 고유 편집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발행인과 편집장이 책임지는 부분이라 사료되옵고 각 편집자는 필자와 논쟁하여 그 편집의 방향을 관철하거나 compromise하면 될 일입니다. 어찌되었든 최종책임은 발행인과 편집장이 지는 것입니다.


➁ 편집프로세스는 전문출판사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 그것은 이윤을 위해서 노동강도를 높이려는 전략은 더더욱 아닙니다. 편집프로세스는 한국사회에서 전문출판사가 생존하기 위한 방법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
--> 편집프로세스는 한국사회에서 전문출판사가 생존하기 위한 방법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것은 이윤을 위해서 노동강도를 높이는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즉, 잉여가치를 –잉여노동을- 더더욱 뽑아내야 하는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실제로 일을 하는] 노동자들과 합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전략은 전략이 아닌 것으로 됩니다. 폭력이 됩니다.
--> 너무 불필요하게 자세히 말씀하셨어요. 막말로 노동자들 갖고 생떼쓰지 마시고 문화관광부(정부) 같은 데나 출판인썸씽 같은 데에서 전국 공공도서관 확보하는 투쟁 같은 거라도 벌이세요. 삼천 군데 공공도서관이 생겨서 기본적으로 종당 천부는 소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세요. 왜 자꾸 압력을 아래로만 하세요? 상상력을 좀 바꾸세요, 제발!!!
--> 출판원가와 종당 출고가를 다 알고 있거든요. 어떻게 아냐고요? 해 본 사람이면 다 알죠. 여기에서 그런 것까지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그런 것까지 저도 ‘까놓고’ 이야기하게 되거든요. 좀 슬퍼요, 그런 게.  
--> 역자가“역자를 착취해서 출판사가 먹고 사는 거 아니냐? 순 날강도 아니냐?”라고 말하면 시바 너랑 책 안해, 그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제 생각엔 그렇게 말하는 역자들이 누구인지 감이 좀 잡히거든요. (특히 교수들이나 썩 많이 배운 사람들이) 책을 번역한다는 게 어떤 구조인지, 어떤 benefits이 (그 일부) 역자에게 가는지 더 날 것 그대로 얘기하고 싶은데 그냥 여기까지만 할께요. 그리고 어렵고 고된 길이지만 묵묵히 견결하게 자기 길을 가려는 건강한 인문(학) 역자를 발굴하세요. 번역이 영 시원치 않더라도 뛰어난 편집자가 함께 작업하면 어떤 훌륭한 책이 나오는지 더 잘 아실 것 같아요.
--> BeP.조차 볼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좋은 역서를 내는 일은 참 잘하는 일입니다. 박수!!!
-->  ‘21세기 생산혁신 전략’이라는 책이 1997년에 나왔어요.  앨빈토플러가 다품종 소량생산 얘기한 건 훨씬 이전이지 싶고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를 폭넓게 거론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즈음일 거예요. 님께서 진단하실 때에 이제 우리 그린비가 충분한 생산설비를 갖췄고 시장의 요구도 부응할 겸 다품종 소량생산, 도요타생산방식이 나을 것 같다는 건 뭐 그렇다 쳐요. 틀린 말씀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다만 ‘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는 얘기는 별반 호소력이 없는 것 같아요. 여기에서 제가 구직할 때마다 듣는 소리가 경제가 안 좋다, 인데 꼭 그 소리 같거든요. 뭐, 경제가 언제 좋았던 적이 있나요?


상황은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희망에 대해서도 절망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절망을 낳는다는 점에서 둘은 같은 말일 뿐입니다. 이 상황에서 믿는 건, 이런 좋지 않은 조건 속에서도, 어쩌면 바보 같은 짓일지 모르지만, 여전히 저자는 책을 쓰고, 역자는 번역을 하고, 출판사는 책을 만들고, 독자는 책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책 만들기의 여러 가지 방법을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 상황은 좋습니다. 그리고 희망은 절망을 낳지 않아요. 근거없는 희망 따위가 절망을 낳기야 낳기는 하겠죠. 인문(학)의 묘미는 희망을, 끊임없는 희망을 생산하는 데 있습니다. 네.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책을 만들기 위해 늘 힘써주세요. 늘 희망을 생산해 주세요.
 

회사가 되겠습니다

 

“회사가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당연한 이 말이, 왜 이렇게 늦되냐 질책받는 이 말이, 제게는 아직도 가슴을 저리게 하는 힘겨운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무엇보다 분회원들이 원하는 대로의 ‘회사다운 회사’가 되어야겠지요. 그 회사의 모습은 지금 전체 편집팀과 디자인팀에게 완전히 맡긴 편집프로세스와 진행하고 있는 단체협상 속에서 모양을 갖춰가겠지만,
--> ‘왜 이렇게 늦되냐’는 질책 빼고 글자 그대로라면 전부 동의합니다. 늦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질책의 이유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질책하고 싶군요.

 

분명한 건, 그 ‘회사’의 모습은 당연히 전과 같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기존에 그린비가 기꺼이 지향했던 가치 속에서 나왔던 행동들이 ‘회사’의 행동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  이 부분은 어쩐지 속상합니다. 왜 결론이 이렇게 나는지 저로서는 그 논리 구조를 따라가기 힘들군요.


돌이켜보면 상품을 생산하고 팔아서 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회사로서, 특히 그 규모가 커질 때 전 구성원이 큰 틀에서 기존에 회사가 가져온 지향을 이해하고 함께 자율성을 발휘해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어리석지 않습니다. 할 수 있지만 다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그린비가 지향한 가치에 비춰본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방식에 기대 사업은 해도 그 운영은 커뮤니티에 걸맞게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불협화음이 없을 수 있겠어요? 그런 데가 있다면 저 좀 소개시켜주세요.


[…] 시도했던 일들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상처가 되었다고 해서, 그로 인해 결국 또 다른 상처들을 낳았다고 해서, 통곡하며 머물거나 돌아설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지금 이 상처를 직시하고, 서로가 직시한 현실이 다르다는 점을 받아들이며, 서로의 생각과 감정이 다른 이 지반 위에서 최선을 다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 합니다. […]
-->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생각과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에 또 다시 격려를 드립니다. 차이에 기반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님의 말에 박수를 보냅니다.


[…] ‘활동’이 아닌 ‘노동’을 해야 함을 받아들입니다. 다만, 이 받아들임이 상처를 최소화하는 길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회사가 되겠습니다.
--> 반복하는 말씀입니다만 저도, 님도, 그린비 식구들도 모두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죽지 않는 한 계속 ‘노동’을 해 왔고 하고 있으며 할 것입니다. 우린 사람이니까요.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린비가 향후 그동안 지향했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는 '회사'가 되지 않는다면 더 큰 저항과 갈등과 상처에 직면할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2013/05/17 05:15 2013/05/17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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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해요 2013/05/20 09:30 Modify/Delete Reply

    꽃개님....팬입니다! 친하게 지내고 싶네요. 저도 진보블로그 아디가 있어야 할까요? 꽃개 님의 구구절절 옳은 말씀. 언제 조용히 사이다나 기울이며(제가 술을 못 마셔서) 조용히 수다나 떨고 싶네요. ㅋㅋ꽃개 님 응원합니당!!

  2. 꽃개 2013/05/20 14:20 Modify/Delete Reply

    (매우 수줍게) 송구하옵니다. 언제 사이다 한 잔 합죠. 홧팅.

  3. 편집자4 2013/05/25 10:07 Modify/Delete Reply

    아주 잘 읽었습니다. 아주 통쾌하네요^^ 아울러, 그린비 노동조합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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