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 출판사 노동조합

분류없음 2013/05/09 00:25

몇 년 전 일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 따라서 이름을 대지 않는다 – 좌파의 소문난 거장께서 한 언론사의 대표(?)로 계셨을 때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했단다. 직원들의 이 말이 사실이었는지 위협(?)적 농담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런데 그 거장은 직원들의 이 말에 “노조라니요, 여러분들이 이 곳의 주인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예능을 다큐로 받은 것인지, 다큐를 예능으로 받은 것인지 그 맥락 또한 내가 알 길은 없다.

사실 노동(조합)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른바 (so-called) ‘노동조합 알레르기’라는 것은 있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알레르기를 극복하지 않는 한 노동(조합)운동의 해방은 없다,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노동조합은 자본운동의 산물이지 않은가. 노동조합이 갈 때까지 발전해봤자 갈 길은 뻔하지 않은가. 물론 현재 한국사회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나를 포함해서- 비정규직노동자, 비공식노동자들에게 당장은 꿈만 같은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도 산업별 지역노동조합 같은 게 있어서 자발적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잡을 때 노동조합이 있는 데를 고를 수는 있다.)

맑스, 스피노자, 벤야민, 라이히, 파농 등 서구 철학의 근간과 대안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인물들의 생각을 끊임없이 건강하게 생산해낸 그린비출판사에 노동조합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싸! 정말이지 빈 말이 아닌 게 그린비출판사는 내 삶의 젓줄* (젖줄 아님)과 같았다. 8-90년대에 잘 나가던 출판사들이 줄줄줄 도산하거나 막아먹히고, 우회전하고 마가릿대처의 주문에 따라 가실 때에도 견결히 한 길을 고집하던 그린비출판사, 막말로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 안 읽어본 진보넷블로거들 있나(요)? 한 검의 양날을 가장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그린비출판사를 보며 언젠가 출판사에서 일할 때에도 우러러보며 내게 그 날이 올 것인가, 그 날을 위해 묵묵히 소처럼 가련다, 그런 자세로 살았던 적이 나에게도 있었더랬다.

노동조합이 생긴 일은 좋은 일이다.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이나 회사와 동등하게 교섭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노동자들이 공식적으로 자기들끼리 뭉칠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는 것은 잘된 일이다, 암만, 잘된 일이지. 더구나 출판사에서 일하시는 -특히 편집부에서 일하시는- 노동자들의 허위의식을 건강한 방향으로 드높이기 위해서라도 노동조합은 필요하다. 결국 그 모든 일들이 사회를 발전적으로 끌어가는 일들이니 말이다. 자본운동을 폐절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조합 운동 또한 갈 때까지 가 볼 일이니까 말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과정에서 불거진 일이다. 징계, 말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이런 불쾌한 전형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된 것이 나에겐 안타깝다. 내 속 모르는 사람들은 어디서 회사편을 들고 지랄이야, 하겠지만 이건 정말 지랄이 아니다. 그러니 속 모르고 먼저 지랄말라.

책을 만들다보면 사고는 부지기수로 발생한다. (혹시 그린비출판사에 그동안 사고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겠지요?) 살다가 실수하는 거랑 비슷하다. 오줌누다가 똥나오는 거랑 비슷하다. 몇년 종사하지 않은 출판사에서 나도 사고 많이 냈다. 우리 사장님께 미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만들어달라는대로 만든 인쇄소, 제본소 노동자들에게 면이 안 서기도 했다. 그 뿐인가, 입고 끝나고 주문나오는대로 배본 시작했는데 사고난 걸 알아버리면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사장님께 보고하고 함께 의논했다. 어디서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함께 찾아냈다. 독자를 생각하는 차원에서 사고를 최소화하고 가장 빨리 그것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뭐, 책 한 권 내고 끝낼 일인가, 장사 한두 번 해봐(요)? 무엇보다 책을 만든, 책을 만들 사람들이 ‘제 정신을 차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 중요했던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조부문 –출판사의 산업 분류는 ‘제조’다- 의 최종책임은 제조 공장의 짱이 지는 거다. 출판사에서 최종 책임은 발행인이 지는 거다. -그게 싫으면 판권의 발행인에서 빠지면 된다- 그리고 나서 종업원을 닥달하면 된다. 나는 그런 책임라인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까웠다는 게 첫째 이유다. 둘째는 그동안 사고가 났을 때 어떻게 처리했는지 나는 그게 궁금하다. 그 관행이 분명 있었을텐데 갑자기 노동조합이 생겨서 그 관행이 바뀐 것은 아니겠지(요)? 사람들은 일견 ‘관행’은 나쁘다, 고 할 수 있지만 모든 관행이 나쁜 것은 아니다. 사고는 사고일 뿐이다. 그것이 회사의 명운을 결정할 정도로 흘러버리면 글쎄, 이럴 경우는 안 생각해봤는데… 그냥 이자율이 가장 낮은 -리스크율이 가장 낮은- 펀드에 돈 넣어두고 기다리며 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속상하다. 최근 들어 이 곳에서 탈식민주의 생각에 박차를 가하게 되어 파농의 책이 급했는데 일이 이 지경까지 되어 버린 마당에 그린비출판사 책을 산다는 건 뭐랄까, 내 양심의 빤쓰에 구멍을 내는 일인 것 같아 당분간 지켜볼 수밖에. 쌀로 밥 짓는 소리, 공자님 껌 씹는 소리를 맛있는 밥내로, 유쾌한씨의 껌씹는 소리로 만드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책상에 앉아 말 같지도 않은 원고를 몇 번 만져 책으로 내 본 주제에 뭔 소리야,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난 그래도 책 만드는 노동자였어, 씨바. 니들이 노동을 알아!

 


* '젓줄'에 의아해 할 분들, 특히 편집라인 출신 분들께: 저는 젓갈을 참 좋아하여요. 밥상에 젓갈이 있으면 밥을 너댓 공기나 먹을 줄 안답니다. 아주 조용히. 따라서 과거의 저는 그린비출판사 책만 있으면 맑스책 안 봐도 배가 불렀더랬어요. 내 삶의 젓갈인, 젓갈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제 맞춤법 오류는 그냥 눈감아 주세요. 덧글에 써주시는 건 완전 환영. :P

 

2013/05/09 00:25 2013/05/09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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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듀 2013/05/09 11:37 Modify/Delete Reply

    간만에 젓갈같은 짭조름한 글, 맛나게 읽었네요!

  2. 너두냐 2013/05/10 10:57 Modify/Delete Reply

    포드식 편집프로세스는 철회한다는데 징계는 끝내 하려나?

  3. 꽃개 2013/05/13 12:18 Modify/Delete Reply

    나듀> 감사.
    너두냐> 포드식 프로세스는 회사(자본) 처지에서 봐도 너무 구식이라 철회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한국 사회에서 출판편집노동은 대단히 유연하지 않으면 당해낼 재간이 없는 분야인지라 포디즘 같은 방식으로는 뭘 할 수가 없을 거예요. 더구나 문제집 만드는 데도 아니고 인문출판사니까요. 징계는 사실, 회사나 노조나 가장 큰 명분이 걸린 문제라서 회사도 쉽게 철회하긴 어렵고 노조도 쉽게 포기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누군가 통큰 결정을 해야 하는데 대개 힘센 측이 그런 결정을 내릴 때 "아주 통이 크다"는 평을 받게 되겠죠. 그런데 아마도 업계에서 갑(회사측)들 간의 연대도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그런 "통큰 결정"을 하기가 어렵겠죠. 그럴 땐 갑의 갑(필자들이나 주주)들이 나서줘야 하는데 글쎄요, 갑의 갑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이, 그냥 새로 포스팅 해야겠어요. 너무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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