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 관하여

분류없음 2013/07/08 13:47
이 곳에서 낯선 삶을 시작했을 때 가져온 시디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다운로드받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모바일폰을 구입한 뒤 96.3FM을 통해 언제든 클래시컬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의 감사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어느날, 바이올린이 찢어지는 음색이 나자 모바일폰 라디오를 꺼버렸다. / 집안이 부유하진 않았어도 높은 교육열 때문에 어릴 적 큰언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엄마는 날품팔이 행상을 해도 큰언니의 바이올린 활은 꼭 바꿔주셨고 집안에서 울리는 그 깽깽이 소리는 내 유년 시절의 '귀'가 트이는 데(?) 일정 한 몫을 했다. 집인 형편이 나아지자 어머니가 가장 먼저 하신 일은 피아노를 사신 것이었고 나는 늦은 나이에 피아노를 배웠다. 피아노가 이루는 화음과 손가락의 향연을 나는 맛보았고 그 극치가 무엇인지도 사실은 조금 알고 있다. / 음악을 들을수록 양질의 씨디를 사고 싶다. 라디오나 유튜브로는 만족할 수 없는 그런 소리의 차이를 나는 솔직히 말해 '알고' 있다. 오늘 가만히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그 날들을 복기했다. 나는 아마도 씨디를 사면 오디오를, 최상의 오디오를 사고 싶어 할 것이다. 오디오를 사면 이 공동주택, 아파트에서는 누릴 수 없는 양질(?)의 스튜디오를 원하게 될 것이다. 글렌굴드와 헬렌그리모의 라흐마니노프를 선택적으로 최적화해 각각 들을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갖추고 싶어할 것이다. 과거 유럽의 귀족들이 그러했듯이 직접 퍼포머들을 부를 지경은 못되어도 그들의 음악을 마치 '내 것'인 양 듣고 싶어할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 이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렇게 개인의 욕망이 소비로 체계화된다. 지불할 수 있는만큼 그 미세한 '욕망'을 누릴 권리도 갖게 된다. 커뮤니티가 그것을 담보하려면 음악을 듣는 일부터, 각인의 취향이 다른 것부터,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느리더라도 서서히 가면 될 일이지만 이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느림의 미학을 소비의 속도전으로, 아니 그 전에 생산의 속도전으로 대체해버렸다. 나는 알고 있다. 이렇게 내가 '개인'으로 머무는 한 타인은커녕 나의 '귀'조차도 해방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못내 괴롭다. / 예민한 귀를 갖게 된 것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슈베르트 5번 교향곡을 듣고 흥얼거릴 중 아는 섬세함이 주는 쾌감은 내 귀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음악은 사실 얼마나 흥겨운가. 그러나 때론 이 '귀'를 저주하게 된다. 차라리 몰랐으면. 그저 바이올린은 깽깽이 소리에 지나지 않아, 듣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고 다른 친구들처럼 뛰놀기만 했던 유년의 기억만 있었더라면.
2013/07/08 13:47 2013/07/0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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