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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8
    조중동 중학교 국어교과서 좀 읽어라.
    유이

조중동 중학교 국어교과서 좀 읽어라.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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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신문과 진실


  길가에서 택시 운전사들이 다투고 있었다. 차가 서로 스쳐 차체가 우그러졌는데 누구에게 잘못이 있느냐로 시비를 벌

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말이 다 일리가 있어 어느 쪽 말이 옳은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일상생활에

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신문에는 날마다 몇 건의 교통 사고가 보도되고, 우리는 의심 없이 그 기사 내용을 사실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찮게 보는 교통 사고 보도에서조차, 엄격히 따져 보면, 진실 보도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이냐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단순한 교통 사고조차 진실 보다가 어렵다면, 진실 보다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나 큰 문제는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심지어

신문 기자 자신들조차 진실 보도를 자명한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있으나, 문제를 좀더 파고들어가 생각해 보면, 진실

보도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통감하게 된다.

  ‘진실’이란, 어떤 사건이나 문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란 무엇인가? 존재하는 모

든 사실은 그 존재가 다원적(多元的)이다. 진실을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일수록 그 존재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일면만

보고서는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 앞에서 인용한 교통 사고의 경우도 시비하는 두 운전자의 말을 다 듣지 않고서는 공

정하고 옳은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언론에 있어 ‘진실’이란, 첫째, 사물의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진실’이 알려지

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신문이 사건이나 문제의 전모(全貌)를 밝히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과장하여 선전하기도 하고, 불리한 면은 은폐하여 알리지 않으려고 한다. 이와 같이, 부정확한 보도는 일방적

이며 편파적이다.

  논평에 있어서도 진실한 논평을 하려면 이런 측면 저런 측면을 다 같이 검토하고, 그 바탕 위에서 공정한 판단과 결론

을 내려야 한다. 공정한 논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자유로운 활동이다.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문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거나, 이 문제는 이런 방향, 이런 각도로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곧 진실과 반대되는 곡필(曲筆) 논평(論評)이 된다. 곡필을 하려면 그들은 사고(思考)를 포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곡필은 어느 선 이상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자유롭게 다각도로 사고를 하

면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둘째, 언론에 있어 ‘진실한 보도와 논평’을 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역사적으로 관찰할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어

떠한 사물을 옳게 보도하거나 논평할 수 있으려면, 그 사물의 의미 또는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

의 가치는 역사의 발전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에 인정받았던 가치가 내일에는 부정되기도 하고, 오늘에 부정된 가치가

내일에는 새롭게 평가받기도 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평가하려면 항상 새로운 가치, 발전하는 새 날을 위한 가치의

입장에서 평가해야 한다.

  어떠한 가치에 서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 사람의 안목은 결정된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란, 발전하는 새로운 가치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치고 누가 발전하는 입장의 가치를 거부하겠느냐고 말

할 사름이 있겠지만,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사물을 보는 태도가

달라진다. 이것은 이해 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의 입장, 자기의 이해 관계와 관련된 처지에서 사물을 보기

때문에 같은 사물, 같은 문제인데도 보는 관점이 서로 달라 견해 차이가 생긴다. 따라서, 사물을 볼 때에는 소수의 이익

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퇴보의 가치가 아니라 발전하는 가치라는 원칙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

  셋째, 사물을 볼 때에는 어느 면이 더 중요하고 어느 면이 덜 중요하지를 똑똑히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존재는 다원

적이라고 했다. 교통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버스가 전복했을 때에 차체

가 얼마나 파손됐느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가장 중요한 면이 사건의 근거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사건의 조건이 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이해하려면 사물의 어떤 측면이 근거가 되고, 또 어떤 측면이 조건이

되는가를 예리하게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근거와 조건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그 사건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진

다.

  보도 기사에는 ‘리드(lead)’라는 것이 있다. 그 보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리드’로 하여 기사를 작성한다. 그런데 기

사의 어느 부분을 ‘리드’로 잡느냐에 따라 기사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진다. 사물의 어느 면이 중요한가

는 관심도에 따라 다르며, 관심도는 이해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외신을 다루어 보면, 같은 사건인데도 입장에 따

라, 즉 기자의 국적에 따라 ‘리드’가 제각기 다른데, 이는 곧 사건을 보는 눈에 묘한 차이가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베트남의 최후를 보도했던 각국의 신문을 보면 이것을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반공 진영의 나라와 공산 국가의 신

문 사이에서 베트남 사태를 보는 눈이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반공 진영의 나라에서도 보도에 역점을 두는 측

면이 나라마다 달랐다.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려면 기사를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조금도 주관을 섞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사

를 써야만 정확한 보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이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정확

하고 올바른 보도일수록 객관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훌륭한 의미에서의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사태를 정확하게 알리는

보도일수록 주관적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조금도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윤봉길 의사가 1931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일본 시라카와 대장 등을 폭사(暴死)시킨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만

약, 정확한 보도라는 것이 주관을 전혀 개입시지키 않고 거울처럼 보이는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의 엄숙한 대식전을 피바다로 물들인 엄청난 사건의 ‘테러리스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문은 마땅히

윤 의사를 규탄하는 보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가 사건을 정확히 알리는 보도가 될 수 없

다는 것은 분명하다. 윤 의사의 장거(壯擧)는 우선 역사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으며, 식민지 제도라는 것이 인류 역사상 배격, 규탄돼야 할 역사적 유제(遺制)라는 판단이 앞서야 한다. 또, 윤 의사

의 장거 당시 우리 삼천만 동포가 일제의 착취와 탄압 아래에서 얼마나 신음하고 있었느냐를 윤 의사의 행위와 관련시

켜 보아야 한다. 사건을 전체적, 역사적 근거와 조건을 식별하는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판단이 서야만

이 사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윤 의사의 폭탄 투척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에 이 같은 수많은 사실이 횡적으로 종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우선 알아야 한다. 한 사건을 정확히 보도하는 데 만약 이와 같은 풍부한 지식이 필요하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주

관적 보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확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사회 과학적 소양과 문학적, 철학적 소양이 필

요하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대기자 올솝 형제가 “훌륭하고 정확한 보도는 본래 가장 주관적인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

한 점을 지적해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윤 의사의 의거와 같은 극단적인 예를 든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할는지

모르나, 정확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실일수록, 오히려 고도의 주관적 보도를 통해 진실의 전달이 가능하다

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신문이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설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정확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가치의 편에서 봐야 하며, 무엇이 근거이고, 무엇이 조건인가를 명

확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준칙을 강조하는 것은 기자들의 기사작성 기술이 미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

관계에 따라 특정 보도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기사가 보도되게 하려는 외부 세력이 있

으므로 진실 보도는 일반적으로 수난의 길을 걷게 마련이다. 양심적이고자 하는 언론이이 때로 형극의 길과 고독의 길

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문은 스스로 자신들의 임무가 ‘사실 보도’라고 말한다. 그 임무를 다하기 위해 신문은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진실을 왜곡하려는 권력과 이익 집단, 그 구속과 억압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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