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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 K . Marx

장정 세미나를 위해 간단하게 정리 해보고 싶어서.

일단 이번에 중요한 테제는 3번, 4번 테제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근거하고 있는 것이 변증법과 유물론, 그리고 인간과 역사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이다. 만일 '문화산업'을 단순하게 이해하고 거기에 집중한다면, 아마 세미나는 어설픈 정치경제학과 어설픈 '지배 이데올로기 어쩌구 저쩌구'가 될 것이다. 공부 좀 열심히 해서 세미나 좀 잘 해보자...

 

 

지금까지 모든 유물론 -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포함하여 -의 주된 결함은 사물, 현실, 감성을 대상 또는 관조의 형식으로만 생각했을 뿐 인간적인 감성적 활동, 실천으로,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 감성 = 反 사변, 관념론 / 실천 - 헤겔적인 개념이었음 / 인간적인 감성적 활동(=실천) = 주체

 

그렇기 때문에 능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비되어 관념론에 의해 발전되었지만, 관념론은 현실적, 감성적 활동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발전은 단지 추상적일 뿐이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사유된 대상들과는 현실적으로 분리된 감성적 대상을 추구하짐나 인간적 활동 자체를 대상적[객관적] 활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관념론의 ['능동적 측면'에의] 발전은 단지 추상적일 뿐이었다. - 주관, 객관의 이분법이었다. / 인간적 활동 = 주관과 객관의 통일(?) / 대상적 활동 = 인간이 개입된 혹은 외화된 활동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이론적 태도만을 진정으로 인간적인 태도로 간주하는 반면 실천은 더러운 유태인적 현상형태로만 생각하고 그렇게 고정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혁명적' 활동, '실천적, 비판적' 활동의 의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상적 진리가 인간사유로 귀착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실천상에서 인간은 자기 사유의 진리성, 즉 현실성과 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사유가 현실적인가 비현실적인가를 논하는 것은 순수히 스콜라적인 문제이다.

 

 

- 인간과 환경의 관계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며, 따라서 변화된 인간은 다른 환경과 변화된 교육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학설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설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가지 부분 - 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은 사회를 초월해 있다 -으로 나눌 수밖에 없게 된다.

 

: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뮤물론적 학설 = 계몽사상 다수, 공상적 사회주의 ,포이에르바하...  -> 인간이 수동적, 비주체적이게 되는 것

 

환경의 변화와 인간적 활동의 변화와의 일치성은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진리의 기준은 실천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자기소외, 즉 세계가 종교적, 상상적 세계와 현실세계로 이중화되어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 세속적 토대로 용해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작업을 마친 후에도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따. 왜냐하면 세속적 토대가 자기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스스로 구름 속에서 하나의 독립적 왕국으로 자리잡는다는 사실은 오직 이 세속적 토대의 자기분열과 자기모순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속적 토대 자체는 먼저 모순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 다음은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실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한 예로, 세속의 가족이 신성한 가족의 비밀임이 밝혀진 다음에는 세속의 가족 자체는 이론적으로 비판되고 실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포이에르바하는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못하여 감성적 직관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인, 즉 인간적, 감성적인 활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인간적, 감성적인 활동 = 노동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로 용해한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각 개인에 내재된 추상물이 결코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인 것이다.

 

: 인간적 본질~사회적 관계의 총체 = 본질도 변한다 - 역사를 통해 형성되고 변형되는 것이 인간의 본질

 

포이에르바하는 이 진정한 본질의 비판에는 손을 대지 않으므로,

1. 역사적 과정을 추상하고, 종교적 감정을 따로 떨어진 것으로 고정하며, 추상적인 - 고립된 - 인간 개인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2. 그러므로 그에게 인간적 본질은 오직 유(類)로, 많은 개인들을 자연스럽게 결합시키는 무언의 내적인 보편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감정'이 그 자체로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 개인이 현실에서는 특수한 사회형태에 속한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사회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오도하는 온갖 수수께끼는 인간 실천과 이 실천의 파악 속에서 합리적인 해결을 찾을 수 있다.

 

 

 

관조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 이해하지 않는 유물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은 '시민사회' 속의 개개인의 관조이다.

 

 

 

낡은 유물론의 입장은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사회 또는 사회화된 인간이다.

 

 

ⅩⅠ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 차후에 포테제를 풀어서 정리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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