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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6/04

포테제 내 맘대로 정리(?) 한거...

포테제는 각 번역 판본마다 다르게 적혀있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이해도 잘 안가게 써져있어서 문제다. 번역은 백의 출판사 것이 가장 나은 것 같기도 한데 장정 커리로 넣기에는 옛날 판이어서 문제가 되는 부분도 좀 있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선집에 있는거나 아니면 독이데 뒤에 붙어있는 걸로 해야겠다. 여하간 새내기들이 이거 읽으면서 이해 안되요~ 이럴 때 나도 당황할까봐 대강 쉬운말로 풀어서 적어본다. 물론, 많은 부분에서 괴상한 축소/확대 해석도 있고 유치하게 바꾼 부분도 있겠지만 일단 15분만에 적은 것 치고는 괜찮은 것 같아서 일단 올려놓고 나중에 수정해야겠다.

 

1.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의 한계는 대상, 현실, 감각이 단지 객체 내지는 직관의 형태로만 파악되었을 뿐, 그것을 인간의 감성적인 활동 즉 실천으로 파악하지 않았으며,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은 데 있다.

즉 대상, 현실, 감각 = 인간의 실천과 관련된 것이어서 주체적인 관점에서 봐야한다. but 지금까지의 유물론자들은 이걸 직관적으로 파악되는것으로 보았다. 직관은 고요히 앉아 세상의 실제적 문제는 고려하지 않고 머리로만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의) 활동적인 측면은 기존의 유물론자들은 하지 못하고 오히려 관념론자들이 요상하게 해왔다.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주체적인 활동'이 요상한 것인 이유는 순수한 '정신'이 이것도 하고 저것도 느끼고 한다는 것인데, 실제 사람은 정신으로 그런 짓을 하는게 아니라 먹고 자고 하는 '몸'을 가지고, 그리고 더 정확히는 사회 속의 몸 혹은 인생 속에서 이런 활동이나 실천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나름대로 관념론에서 말하는 사유 객체가 아니라 감성적인 객체를 파악하려고 했지만 추상적인 감각이나 이론적으로 어떻다라고 하는게 아니라 인간의 활동 자체가 객체적 활동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실제 역사 속의 인간이 행동을 하는 것이 역사를 바꾸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인간의 사유가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다. 이 세상 역사 속의 인간과 관련한 진리는 그 역사적 행위로 현실에 드러나는 것으로 진리임을 실증하는 것이지 않아서 펜대 돌린다고 진짜 진리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백날 펜대 굴려보라, 역사가 그렇게 돌아가나.

 

3.

인간은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고 따라서 인간이 변화려면 다른 환경과 변화된 교육이 필요하다라고 유물론에서 주장하는데, 여기에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인간이고 교육자 자신도 누군가로부터 교육받은 존재라는 사실이 빠져있다. (즉 인간은 단지 수동적으로 사회에 맞추어지는 존재라기 보다는 그 자신의 활동과 역사적 삶 속에서 세상에도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또 그것에 의해 영향 받기도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걸 잊고 있으면 사회에 대해 엘리트 주의가 되며, 꼭 그런 엘리트주의자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 그리고 자신이 엘리트라 한다. 결론적으로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 변화의 문제는 실천으로, 역사 속에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4.

포이어바흐는 종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종교가 실은 세속적 세계의 일부라는 걸 밝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이 종교를 만들고 보다 성스럽고 좋은 세상을 허공에 만든 건 세속의 세상 자체가 그렇게 양분(즉 더 좋고 우월한 사람들과 더 낮고 못 사는 사람들? - 이 부분은 다시 생각해봐야 할 듯)되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종교건 예술이건 현실과 무관할 수는 없고 현실의 모순을 표현 - 직접적이건 그 존재로서 웅변하는 것이건 - 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로 나타나는 그런 모순은 현실 세계에서, 즉 역사적인 지금 여기에서의 실천으로 바꿔야하는 것이다.

 

5.

결론. 포이어바흐는 자기 머리로 상상한 '인간', 자기 기준에서 파악한 '감성적 인간'을 '인간'이라 부르면서 비판이건 주장이건 하고 있는 것이다.

 

6.

하지만 그런 '인간', 혹은 인간의 '본질' 같은 건 없다. 3번 테제에서 보았듯이 인간은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므로 고정된 본질 같은 건 없고 다만 사회적 관계, 역사적인 맥락과 행동들의 총체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을 빼고서는 로빈슨크루소처럼, '객관적인 인간'을 이야기하는 넌센스 밖에는 안된다.

 

7.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심성이건 추상적 개인이건 다 일정한 사회 형태에 속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8.

결론. 사회적 삶, 역사 속의 인간, 진짜 인간은 행동하는 인간, 곧 실천이다. 추상적인 인간을 가정하고 궁시렁대는 것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이 실천을 이해하는 것 밖에 없다.

 

9.

위에서 살펴본 포이어바흐와 같이 직관적으로 세상을 보는 유물론이 도달하는 '인간'에 대한 결론은 '시민사회'에서의 개별적인, 원자화된 개인이다.

 

10.

즉 이전까지의 유물론의 근본은 시민사회(이전까지의 유물론의 주장 혹은 유물론자들의 바탕은 시민사회의 산물이라는 말)이고 새로운 유물론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적 사회이다.

 

11.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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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 : 수업 자료에 부가설명하기

일단 배경지식.

 

'경철수고'는 맑스 이후의 맑시즘에서 루카치나 코르쉬 등 서구맑스주의의 '단절론' 주장의 근거로 많이 이용됨.

 

경철수고 - 1부 : 국민경제학 비판  2부 : 소외된 노동  3부 : 헤겔 변증법 비판

 

'경철수고' for 프로이센 입헌군주제 비판

헤겔 - 외화 (현실화한다. 의식이 무언가를 대상으로 하여 나타남 - 긍정적)

맑스 - 소외 (탈현실화 된다. 본질을 외화하는 게 아니라 왜곡한다. - 부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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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 다음에 정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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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 K . Marx

장정 세미나를 위해 간단하게 정리 해보고 싶어서.

일단 이번에 중요한 테제는 3번, 4번 테제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근거하고 있는 것이 변증법과 유물론, 그리고 인간과 역사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이다. 만일 '문화산업'을 단순하게 이해하고 거기에 집중한다면, 아마 세미나는 어설픈 정치경제학과 어설픈 '지배 이데올로기 어쩌구 저쩌구'가 될 것이다. 공부 좀 열심히 해서 세미나 좀 잘 해보자...

 

 

지금까지 모든 유물론 -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포함하여 -의 주된 결함은 사물, 현실, 감성을 대상 또는 관조의 형식으로만 생각했을 뿐 인간적인 감성적 활동, 실천으로,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 감성 = 反 사변, 관념론 / 실천 - 헤겔적인 개념이었음 / 인간적인 감성적 활동(=실천) = 주체

 

그렇기 때문에 능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비되어 관념론에 의해 발전되었지만, 관념론은 현실적, 감성적 활동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발전은 단지 추상적일 뿐이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사유된 대상들과는 현실적으로 분리된 감성적 대상을 추구하짐나 인간적 활동 자체를 대상적[객관적] 활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관념론의 ['능동적 측면'에의] 발전은 단지 추상적일 뿐이었다. - 주관, 객관의 이분법이었다. / 인간적 활동 = 주관과 객관의 통일(?) / 대상적 활동 = 인간이 개입된 혹은 외화된 활동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이론적 태도만을 진정으로 인간적인 태도로 간주하는 반면 실천은 더러운 유태인적 현상형태로만 생각하고 그렇게 고정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혁명적' 활동, '실천적, 비판적' 활동의 의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상적 진리가 인간사유로 귀착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실천상에서 인간은 자기 사유의 진리성, 즉 현실성과 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사유가 현실적인가 비현실적인가를 논하는 것은 순수히 스콜라적인 문제이다.

 

 

- 인간과 환경의 관계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며, 따라서 변화된 인간은 다른 환경과 변화된 교육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학설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설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가지 부분 - 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은 사회를 초월해 있다 -으로 나눌 수밖에 없게 된다.

 

: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뮤물론적 학설 = 계몽사상 다수, 공상적 사회주의 ,포이에르바하...  -> 인간이 수동적, 비주체적이게 되는 것

 

환경의 변화와 인간적 활동의 변화와의 일치성은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진리의 기준은 실천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자기소외, 즉 세계가 종교적, 상상적 세계와 현실세계로 이중화되어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 세속적 토대로 용해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작업을 마친 후에도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따. 왜냐하면 세속적 토대가 자기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스스로 구름 속에서 하나의 독립적 왕국으로 자리잡는다는 사실은 오직 이 세속적 토대의 자기분열과 자기모순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속적 토대 자체는 먼저 모순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 다음은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실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한 예로, 세속의 가족이 신성한 가족의 비밀임이 밝혀진 다음에는 세속의 가족 자체는 이론적으로 비판되고 실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포이에르바하는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못하여 감성적 직관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인, 즉 인간적, 감성적인 활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인간적, 감성적인 활동 = 노동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로 용해한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각 개인에 내재된 추상물이 결코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인 것이다.

 

: 인간적 본질~사회적 관계의 총체 = 본질도 변한다 - 역사를 통해 형성되고 변형되는 것이 인간의 본질

 

포이에르바하는 이 진정한 본질의 비판에는 손을 대지 않으므로,

1. 역사적 과정을 추상하고, 종교적 감정을 따로 떨어진 것으로 고정하며, 추상적인 - 고립된 - 인간 개인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2. 그러므로 그에게 인간적 본질은 오직 유(類)로, 많은 개인들을 자연스럽게 결합시키는 무언의 내적인 보편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감정'이 그 자체로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 개인이 현실에서는 특수한 사회형태에 속한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사회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오도하는 온갖 수수께끼는 인간 실천과 이 실천의 파악 속에서 합리적인 해결을 찾을 수 있다.

 

 

 

관조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 이해하지 않는 유물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은 '시민사회' 속의 개개인의 관조이다.

 

 

 

낡은 유물론의 입장은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사회 또는 사회화된 인간이다.

 

 

ⅩⅠ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 차후에 포테제를 풀어서 정리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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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상상력 - 미학이론과 대중문화 비판

<맑스주의 미학 비평의 두 갈래>

1. 비타협적인 정치적 경향성에 방점(예술가의 정치적 의도)

: 레닌 이후 스탈린적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근간

2. 작품에 내재한 사회적 의미에 방점(작품의 객관적인 사회적 내용은 예술가가 표명한 소망이나 계급적 성분을 넘을 수 있다)

: 엥겔스 이후 루카치를 거쳐 파라 맑시스트 para-marxist들의 견해

[예술적 주제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 따라서 예술작품은 비단 그 창조자가 원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객관적인 사회경향을 표현한다. 즉 작품은 순수 '존재'가 아니고 차라리 주체와 객체 사이의 '힘의 장'이다.]

 

<엥겔스의 리얼리즘과 자연주의의 구분>

리얼리즘 :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상상력을 유기적으로 화해

자연주의 : 예술가 자신이 동화되어 있지 않은 현상적 환경을 기계적으로 반영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문체/스타일>

에세이의 짜임새와 산문 스타일의 독특함 = 모든 문장은 그것이 완전히 이해되기 위해서는 에세이 전체를 통해 '중재'되어야 한다.

[장 자크 고다르 : "당신 영화 시작, 중간, 종말 있는가?" "물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순서로만은 아니다.]

-> "사회에 대한 거부는 그 사회의 언어에 대한 거부도 포함한다." : 독자에게도 작자 못지 않은 충분한 심각성을 가지고 반응하라는 도전.

 

 



 

경제나 정치의 물신화 하는 것을 거부했다면, 마찬가지로 문화를 사회 속에서 따로 떨어진 영역으로서 취급하는 것도 탐탁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예술을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과정들에 대한 일종의 암호언어로 해석하며, 그 암호는 비평적 분석을 통해 해독되어야 한다."

- 사회와 문화와의 관계 = 사회의 온당치 못한 점을 문화가 완전히 초월 할 수는 없는 관계. "문명의 기록 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

- 예술적 창조성이 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제한된다면, 주관적인 예술 감상도 마찬가지로 제한된다. 개인적 '취미'라는 자유주의적 개념은 현대 사회에서 자율적 주체가 점진적으로 해체됨에 따라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 대중문화에서는 거의 완전하게 선호의 조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 "비평의 과제는 문화현상을 야기시키는 특정 이해집단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문화 현상에 표현된 일반적 사회 경향 - 이를 통해 가장 강력한 집단의 이익이 실현된다. -을 판독하는 일이어야 한다. 즉 문화 비평은 사회를 판독하는 인상학이 되어야 한다." - [단, '변증법'과 '부정'의 강조]

-진정한 예술은 현재의 사회를 넘어선 '다른' 사회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마지막까지 간직한 영역.('문화가 사회를 초월한다'의 진실적 측면)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진실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에 상응한다는 주장이 옳지 못하다." -> 모순의 구현 - 사회적 모순이 현실에서 화해하기까지.

=> 미적 영역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영역

 

<베블런의 '과시소비'개념에 대해>

"사람이 현실적으로 발견하는 행복은 과시적 소비와 분리될 수 없다. 사회적으로 형성되어진 욕망의 성취를 약속하지 않는 행복은 없다. 그렇지만 또, 이러한 성취 속에서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약속하지 않는 행복도 없다."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의 대중문화 비판의 핵심에는 '행복의 약속', 즉 다른 사회에의 비전이 점점 '긍정적 문화'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뿌리뽑혀진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

현상을 비실질적인 것이라 하여 무시한 것에 대해, "현상은 진리의 반영으로서, 변증법적이다. 모든 현상을 거부하는 것은 그 현상 밑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가 겉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잡다한 현상을 폐기하면 진리도 폐기되기 때문이다.'"

 

"그릇된 것은 방법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방법이 마치 본질인 듯 생각하는 것이다."

 

<민중 문화에 대하여>

민속 음악은 더 이상 살아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대중음악이 다른 모든 대중문화와 마찬가지로 위로부터 조직되고 강요되는 과정 속에서 자생적인 민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파악한 대중문화의 기본 특징 중 하나>

역사발전을 신화로 대치. 시간성의 붕괴는 자율적 개인의 해체와 은밀히 연관.

 

<대중문화의 부정적 영향>

문화규범의 순응주의, 색채주의적 효과, 정서환기력 동원을 위한 복고풍, 스타, 악기 숭배, 품위있는 음악회 등 - "맛있게 먹어본 음식만을 요구하는 어린아이들 처럼 청음능력이 퇴화된 사람은 전에 들었떤 것이 되풀이 될 때에만 반응할 수 있다."

- 현대사회의 상품적 성격, 통신기관을 포함한 사회 모든 분야의 독점화 경향, 기존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어떤 종류의 위협에도 그 순응주의적 요소를 강화함으로써 대응하려는 사회의 반작용. 그리고 문화적 영역에 존재하는 사회적 적대관계.

'기분전환' - [실질적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 다시 순응]

 

<바그너 비판>

판타즈마고리아 = 자신의 음악이 마치 '자연적' 기원을 갖는 양 보이게 함으로써 자기 작품의 사회심리학적 유래를 숨기려는 바그너의 경향.

 

<벤야민>

Aura = 예술품의 원작을 둘러싸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 "예술작품의 일회적인 독특성은 그것이 전통 속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과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대량복제 시대에 예술의 aura의 종말은 예술적 '교감'의 ㅅ상실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경험(전통에 뿌리박은 경험)의 종말을 의미한다." "진정성이라는 기준이 예술 생산에 적용되지 못하는 순간 예술의 전체적 기능은 더이상 의식(儀式)에 기초하지 않고, 정치에 기반을 두기 시작한다. 기술복제의 출현과 더불어 예술의 의식적 가치는 전시적 가치에 의해 대치되었다."

-> 벤야민은 Aura의 상실(전통적 예술의 '부정적' 기능의 상실도 포함)을 애석해 했지만 정치화, 집단화된 예술의 진보적 가능성 희망.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중문화 비판>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대중문화를 혐오한 것은, 그것이 민주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비민주적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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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회계고(百回稽考) 일부 발췌 - 아이켄도에서

심(心)
마지막 수련이라 생각하고 기도(合掌)하는 마음으로 임할 것


◎ 검도는 우선 기가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덤벙거려서는 안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발 끝에 기를 넣을 것. 그럼으로써 몸 전체에 기가 들어가게 되고 헛된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지금 하나의 요점은 깔 끝에 기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 칼 끝에 기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죽는 칼이 된다. 즉 검도는 발끝에서 칼끝까지 기합이 충실히 들어 있을 것. 이두가지가 충실해 진다면 삼각구(三角矩)가 이루어진다.

◎ 하수(下手)와 수련하는 것은 어렵다. 상대는 이쪽의 칼끝이나 기세 등에는 상관없이 마구 덤벼 오기 때문에 여차하면 상대에게 휘말려 버려 본래 의도인 수련(稽古)은 무산이 되어 버리고 진지한 분위기는 사라진다.
상수를 상대하든 하수를 상대하든 항상 같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 일관된 자세를 취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맞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일족 일도의 거리에서 이치에 맞는 수련(稽古)을 해 가는 수 밖에 없다.
일족 일도를 근본으로 하고 상대에 따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하수가 어렵다는 것은 가벼운 죽도를 쓰기가 어렵다는 것과 같다. 가벼운 죽도를 무겁게 쓰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
하수를 만만하게 보지말고 시합하는 마음으로 임하라.
처세의 근본 마음가짐은 자비심이다. 자비심만 있다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대응할 수 있다.

◎ 승패의 분기점은 정념(正念)이 없어진 때이다. 즉 기가 상승했을 때, 숨이 멈추었을 때, 이때는 맞지 않아도 진 것이다. 정념이 없어진 곳을 틈이라고 하는 것이다.
검도는 상대를 기다리고 있어도 안되고, 그래? 하면서 덤벼드는 것만으로도 안 된다. (중략) 설령 때렸다 하더라도 엉터리로 한 것이다. 기다려도 안되고 덤벼도 안되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는 상대를 무너뜨려 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가 하나가 되어야 하고 삼매경에 들어야 하는 것이다. 고양이가 쥐를 노리는 것과 같다. 이것을 심기력(心氣力)일치, 공수일치라고도 한다. 이것을 보보청풍(步步淸風)이라 할 수 있겠다.  
필경검도(畢竟劍道)의 근본적 수행은 항상, 기(氣)를 기르는 데 전력을 다하여야 한다.
맹자호연지기(孟子浩然之氣)

◎ 이 수련(稽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것과 또 한가지는 스승을 공경할 것. 즉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된다면 검도는 극의에 도달할 수 있다. 검은 기술이 아니다.
◎ 검도는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벌써 타락하는 시작한 것이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바를 바로 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수행을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이 비결이다. 석가모니도 항상 수행중이었다.

◎ 지금 수행하고 있는 것도(연습량이) 남들보다 많다는 자만심을 버리고 더욱 수련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어렵고도 중요하다. 수행은 죽을 때까지 한다는 원리를 잊지 말라.
서두르지 말고, 게으름피우지도 말고



말(言)
하수와 겨룰 때도 처음 한판은 반드시 따라.

◎ 모찌다 선생이 말하기를
검도는 같은 상대와 몇 번을 겨루든 간에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임해서는 안 된다. 칼끝, 거리, 기합 등을 항상 잘 연구해야만 실력향상을 이룰 수 있다. 아무 생각없이 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예 부터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상대에게 맞을 경우 제대로 맞았으면 가볍더라도 맞았다고 하고 자신은 충분히 때렸다고 할지라도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라. 이러한 겸허한 자세로 한다면 실력향상으로 이어진다. 또 이것은 무언의 교육이 된다.
상대에게 맞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가르쳐 주는 고마운 것이다.

◎ 선생이 말하기를
검도는 뼈를 깍는 수련(稽古)를 하지 않으면 하더라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 일족 일도의 거리에서 기로서 상대를 공격하고 선의 기술로 쳐 보라. 그러면 상대의 숨도 빨리 가빠 올 것이다.
검도는 하수와 겨루더라도 첫 한판은 반드시 딴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면 중요한 것을 놓치는 일이 없다.(후략)

◎ 모찌다(持田)선생의 말
검도시합은 힘든 상대가 있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은 머리치기가 특기인데 상대는 나오는 손목치기가 특기일 경우, 공격적인 상대를 만날 때는 참으로 어려워진다. 이러한 시합의 경우 우선 기와 거리 싸움하면서 은연중에 내 특기를 상대가 알게 한다.(중략) 그런 식으로 상대에게 내 특기를 알게 함으로써 만만하게 덤벼들지 못하게 하면 시합은 별게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 모찌다(持田)선생의 말
심판은 정말 어렵다. 그래서 좋은 공부가 된다. 자신 스스로가 깜짝 놀랄 정도로 알게 모르게 심판을 통해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검도의 심판은 생각을 하면서 진행해야한다.
묘의 도장(모찌다 선생의 수련도장)에서 30분간 아침수련을 하고 심신이 상쾌해진다. 이런 심신으로 심판을 하면 좋다. 그래서 나는 묘의 도장에서 수련을 열심히 하려고 하고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도 있고 건강에도 좋으며 정신상으로도 좋다. 심판은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것이므로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판은 시합자와 일체가 되어 자신이 시합하고 있다고 생각해야한다.

검(劍)
검도의 궁극은 진검 승부이다. 세상의 궁극도 진검 승부다.

◎ 검도는 누구와 붙더라도 어디까지나 진지한 것은 기본이다. 그러한 진지한 가운데에서도 여유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 화평의 기운을 분노 속에서 본다}거나 {망중한(忙中閑) 일월(日月)이 있으니}라 고도 한다.  
인생도 이와 같다. 아침부터 바쁘다 바빠 하고 일하는 가운데서도 이러한 여유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 검도수행은 도장 내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도장이 기본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수련은 일상생활에 있다. 항상 이것을 지속하는 것이 비결이다.

◎ 기술은 중요하지만 이(理)(이치)에 맞지 않는 기술은 안 된다. 형과 일치하는 기술을 써라. 이것이 의미있는 수련(稽古)이다.

 

{검도의 궁극은 진검 승부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결국은 진검 승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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