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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6/04/23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 : 수업 자료에 부가설명하기

일단 배경지식.

 

'경철수고'는 맑스 이후의 맑시즘에서 루카치나 코르쉬 등 서구맑스주의의 '단절론' 주장의 근거로 많이 이용됨.

 

경철수고 - 1부 : 국민경제학 비판  2부 : 소외된 노동  3부 : 헤겔 변증법 비판

 

'경철수고' for 프로이센 입헌군주제 비판

헤겔 - 외화 (현실화한다. 의식이 무언가를 대상으로 하여 나타남 - 긍정적)

맑스 - 소외 (탈현실화 된다. 본질을 외화하는 게 아니라 왜곡한다. - 부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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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 다음에 정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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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 K . Marx

장정 세미나를 위해 간단하게 정리 해보고 싶어서.

일단 이번에 중요한 테제는 3번, 4번 테제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근거하고 있는 것이 변증법과 유물론, 그리고 인간과 역사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이다. 만일 '문화산업'을 단순하게 이해하고 거기에 집중한다면, 아마 세미나는 어설픈 정치경제학과 어설픈 '지배 이데올로기 어쩌구 저쩌구'가 될 것이다. 공부 좀 열심히 해서 세미나 좀 잘 해보자...

 

 

지금까지 모든 유물론 -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포함하여 -의 주된 결함은 사물, 현실, 감성을 대상 또는 관조의 형식으로만 생각했을 뿐 인간적인 감성적 활동, 실천으로,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 감성 = 反 사변, 관념론 / 실천 - 헤겔적인 개념이었음 / 인간적인 감성적 활동(=실천) = 주체

 

그렇기 때문에 능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비되어 관념론에 의해 발전되었지만, 관념론은 현실적, 감성적 활동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발전은 단지 추상적일 뿐이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사유된 대상들과는 현실적으로 분리된 감성적 대상을 추구하짐나 인간적 활동 자체를 대상적[객관적] 활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관념론의 ['능동적 측면'에의] 발전은 단지 추상적일 뿐이었다. - 주관, 객관의 이분법이었다. / 인간적 활동 = 주관과 객관의 통일(?) / 대상적 활동 = 인간이 개입된 혹은 외화된 활동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이론적 태도만을 진정으로 인간적인 태도로 간주하는 반면 실천은 더러운 유태인적 현상형태로만 생각하고 그렇게 고정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혁명적' 활동, '실천적, 비판적' 활동의 의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상적 진리가 인간사유로 귀착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실천상에서 인간은 자기 사유의 진리성, 즉 현실성과 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사유가 현실적인가 비현실적인가를 논하는 것은 순수히 스콜라적인 문제이다.

 

 

- 인간과 환경의 관계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며, 따라서 변화된 인간은 다른 환경과 변화된 교육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학설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설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가지 부분 - 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은 사회를 초월해 있다 -으로 나눌 수밖에 없게 된다.

 

: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뮤물론적 학설 = 계몽사상 다수, 공상적 사회주의 ,포이에르바하...  -> 인간이 수동적, 비주체적이게 되는 것

 

환경의 변화와 인간적 활동의 변화와의 일치성은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진리의 기준은 실천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자기소외, 즉 세계가 종교적, 상상적 세계와 현실세계로 이중화되어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 세속적 토대로 용해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작업을 마친 후에도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따. 왜냐하면 세속적 토대가 자기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스스로 구름 속에서 하나의 독립적 왕국으로 자리잡는다는 사실은 오직 이 세속적 토대의 자기분열과 자기모순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속적 토대 자체는 먼저 모순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 다음은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실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한 예로, 세속의 가족이 신성한 가족의 비밀임이 밝혀진 다음에는 세속의 가족 자체는 이론적으로 비판되고 실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포이에르바하는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못하여 감성적 직관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인, 즉 인간적, 감성적인 활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인간적, 감성적인 활동 = 노동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로 용해한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각 개인에 내재된 추상물이 결코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인 것이다.

 

: 인간적 본질~사회적 관계의 총체 = 본질도 변한다 - 역사를 통해 형성되고 변형되는 것이 인간의 본질

 

포이에르바하는 이 진정한 본질의 비판에는 손을 대지 않으므로,

1. 역사적 과정을 추상하고, 종교적 감정을 따로 떨어진 것으로 고정하며, 추상적인 - 고립된 - 인간 개인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2. 그러므로 그에게 인간적 본질은 오직 유(類)로, 많은 개인들을 자연스럽게 결합시키는 무언의 내적인 보편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감정'이 그 자체로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 개인이 현실에서는 특수한 사회형태에 속한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사회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오도하는 온갖 수수께끼는 인간 실천과 이 실천의 파악 속에서 합리적인 해결을 찾을 수 있다.

 

 

 

관조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 이해하지 않는 유물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은 '시민사회' 속의 개개인의 관조이다.

 

 

 

낡은 유물론의 입장은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사회 또는 사회화된 인간이다.

 

 

ⅩⅠ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 차후에 포테제를 풀어서 정리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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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상상력 - 미학이론과 대중문화 비판

<맑스주의 미학 비평의 두 갈래>

1. 비타협적인 정치적 경향성에 방점(예술가의 정치적 의도)

: 레닌 이후 스탈린적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근간

2. 작품에 내재한 사회적 의미에 방점(작품의 객관적인 사회적 내용은 예술가가 표명한 소망이나 계급적 성분을 넘을 수 있다)

: 엥겔스 이후 루카치를 거쳐 파라 맑시스트 para-marxist들의 견해

[예술적 주제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 따라서 예술작품은 비단 그 창조자가 원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객관적인 사회경향을 표현한다. 즉 작품은 순수 '존재'가 아니고 차라리 주체와 객체 사이의 '힘의 장'이다.]

 

<엥겔스의 리얼리즘과 자연주의의 구분>

리얼리즘 :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상상력을 유기적으로 화해

자연주의 : 예술가 자신이 동화되어 있지 않은 현상적 환경을 기계적으로 반영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문체/스타일>

에세이의 짜임새와 산문 스타일의 독특함 = 모든 문장은 그것이 완전히 이해되기 위해서는 에세이 전체를 통해 '중재'되어야 한다.

[장 자크 고다르 : "당신 영화 시작, 중간, 종말 있는가?" "물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순서로만은 아니다.]

-> "사회에 대한 거부는 그 사회의 언어에 대한 거부도 포함한다." : 독자에게도 작자 못지 않은 충분한 심각성을 가지고 반응하라는 도전.

 

 



 

경제나 정치의 물신화 하는 것을 거부했다면, 마찬가지로 문화를 사회 속에서 따로 떨어진 영역으로서 취급하는 것도 탐탁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예술을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과정들에 대한 일종의 암호언어로 해석하며, 그 암호는 비평적 분석을 통해 해독되어야 한다."

- 사회와 문화와의 관계 = 사회의 온당치 못한 점을 문화가 완전히 초월 할 수는 없는 관계. "문명의 기록 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

- 예술적 창조성이 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제한된다면, 주관적인 예술 감상도 마찬가지로 제한된다. 개인적 '취미'라는 자유주의적 개념은 현대 사회에서 자율적 주체가 점진적으로 해체됨에 따라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 대중문화에서는 거의 완전하게 선호의 조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 "비평의 과제는 문화현상을 야기시키는 특정 이해집단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문화 현상에 표현된 일반적 사회 경향 - 이를 통해 가장 강력한 집단의 이익이 실현된다. -을 판독하는 일이어야 한다. 즉 문화 비평은 사회를 판독하는 인상학이 되어야 한다." - [단, '변증법'과 '부정'의 강조]

-진정한 예술은 현재의 사회를 넘어선 '다른' 사회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마지막까지 간직한 영역.('문화가 사회를 초월한다'의 진실적 측면)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진실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에 상응한다는 주장이 옳지 못하다." -> 모순의 구현 - 사회적 모순이 현실에서 화해하기까지.

=> 미적 영역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영역

 

<베블런의 '과시소비'개념에 대해>

"사람이 현실적으로 발견하는 행복은 과시적 소비와 분리될 수 없다. 사회적으로 형성되어진 욕망의 성취를 약속하지 않는 행복은 없다. 그렇지만 또, 이러한 성취 속에서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약속하지 않는 행복도 없다."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의 대중문화 비판의 핵심에는 '행복의 약속', 즉 다른 사회에의 비전이 점점 '긍정적 문화'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뿌리뽑혀진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

현상을 비실질적인 것이라 하여 무시한 것에 대해, "현상은 진리의 반영으로서, 변증법적이다. 모든 현상을 거부하는 것은 그 현상 밑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가 겉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잡다한 현상을 폐기하면 진리도 폐기되기 때문이다.'"

 

"그릇된 것은 방법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방법이 마치 본질인 듯 생각하는 것이다."

 

<민중 문화에 대하여>

민속 음악은 더 이상 살아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대중음악이 다른 모든 대중문화와 마찬가지로 위로부터 조직되고 강요되는 과정 속에서 자생적인 민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파악한 대중문화의 기본 특징 중 하나>

역사발전을 신화로 대치. 시간성의 붕괴는 자율적 개인의 해체와 은밀히 연관.

 

<대중문화의 부정적 영향>

문화규범의 순응주의, 색채주의적 효과, 정서환기력 동원을 위한 복고풍, 스타, 악기 숭배, 품위있는 음악회 등 - "맛있게 먹어본 음식만을 요구하는 어린아이들 처럼 청음능력이 퇴화된 사람은 전에 들었떤 것이 되풀이 될 때에만 반응할 수 있다."

- 현대사회의 상품적 성격, 통신기관을 포함한 사회 모든 분야의 독점화 경향, 기존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어떤 종류의 위협에도 그 순응주의적 요소를 강화함으로써 대응하려는 사회의 반작용. 그리고 문화적 영역에 존재하는 사회적 적대관계.

'기분전환' - [실질적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 다시 순응]

 

<바그너 비판>

판타즈마고리아 = 자신의 음악이 마치 '자연적' 기원을 갖는 양 보이게 함으로써 자기 작품의 사회심리학적 유래를 숨기려는 바그너의 경향.

 

<벤야민>

Aura = 예술품의 원작을 둘러싸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 "예술작품의 일회적인 독특성은 그것이 전통 속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과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대량복제 시대에 예술의 aura의 종말은 예술적 '교감'의 ㅅ상실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경험(전통에 뿌리박은 경험)의 종말을 의미한다." "진정성이라는 기준이 예술 생산에 적용되지 못하는 순간 예술의 전체적 기능은 더이상 의식(儀式)에 기초하지 않고, 정치에 기반을 두기 시작한다. 기술복제의 출현과 더불어 예술의 의식적 가치는 전시적 가치에 의해 대치되었다."

-> 벤야민은 Aura의 상실(전통적 예술의 '부정적' 기능의 상실도 포함)을 애석해 했지만 정치화, 집단화된 예술의 진보적 가능성 희망.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중문화 비판>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대중문화를 혐오한 것은, 그것이 민주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비민주적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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