➁ ‘김대중을 지킨 18년 맹장’, 김종선 수행기사
-DJ 가는 험난한 길 모두 동행하며 새 역사 이뤄
김종선은 DJ를 수행하면서 세 번의 창당과 세 차례의 대선을 겪는다. 그 과정은 길고도 험난했다 걸림돌과 장애물이 숱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굴곡진 현장과 돌출 상황에서도 김종선은 눈길, 빗길, 자갈길, 오르막길, 내리막길 가리지 않고 차를 발진시키고 운전대를 잡곤 했다. DJ는 김종선의 이런 수고를 잘 알기에 ‘자넨 내 생명을 지켜주는 사람이야!’라는 말로 고마움을 표시하곤 했다.
그때마다 김종선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DJ가 가야 하는 길이었기에 어떤 처지에서든 자신은 몸 사리지 않고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DJ가 목적지로 이동하면서 가끔씩 들려주던 말마디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실감하곤 한다.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말이 특히 그렇다. 이 말은 작금의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에도 적용되고 있는 금언이 되고 있다. 그야말로 거대 여당은 다수당의 횡포를 유감없이 자행하는 중이고 이에 맞서는 대통령은 현명한 정치력을 구사하기 보다는 비상식적인 계엄 선포로 인해 대한민국의 국격과 정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DJ도 포악한 정치에 자주 당하곤 했다. 걸핏하면 가택연금과 연행과 입건을 당했고 테러와 납치로도 모자라 현해탄 한복판에서 수장당할뻔했었다. 승기를 잡았다 싶은 대선에서는 ‘우리가 남이가’와 같은 ‘초원복집’ 사건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요 개중에는 전화위복으로 치환되기도 했다. 역사의 정반합(正反合)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DJ와 같은 탁월한 경륜의 소유자는 모든 정치놀음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통틀어 ‘정치는 생물이다.’와 같은 금언을 발신했는지도 모른다.
김종선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지켜보며 자신의 지난 시절을 소환해 본다.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임박했을 때 1997년엔 IMF 국제금융 위기가 닥쳤고, DJP연합을 성사시켜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을 지켜본다. 드디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대망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청와대 입성의 순간이 오자 김종선은 운전대를 잡으며 충직한 수행비서로서의 소임을 이어갔다. 김종선은 그날 DJ가 들려준 또 하나의 금언인 ‘서생 적 냉철함을 장착하고 상인 적 현실 감각을 발휘하며’ DJ의 영광의 일정을 대과(大過) 없이 소화했다.
대통령이 차를 비워두고 국정을 소화하는 시간 틈틈이 자신을 DJ에게 보내준 김병오 의원을 생각했고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김종선은 서울 중구 약수동에서 여러 대를 이어 살아온 서울 토박이였다. 그러던 것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구로동 단칸 셋방에서 온 가족이 도시빈민으로 살아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교 진학을 앞둔 시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불행까지 닥친다. 세상에! 가난도 서러운데 어머니의 보살핌도 끊기고 학업마저 중단해야 되다니. 종선은 이때부터 건설 현장의 막노동과 채소장사며 옷 장사 등 여러 경험을 쌓는다. 김종선의 이런 경험들은 고난의 정치인인 DJ를 모시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DJ도 학력이나 용모나 언변과 같은 겉모습이 아닌 신뢰와 믿음의 동지로 김종선을 예우한다.
종선이, 우리 꽃시장엘 좀 들리지!
“어르신은 집안 공기가 무겁다 싶으면 꽃시장으로 차를 돌리라 하셨습니다. 서초동 꽃 시장에선 실내용 다년초를 구입하시고 벽제 구파발 쪽에서는 당굴장미를 사다가 울타리 밑에 심었습니다. 지금도 그 표정이 선합니다. 핑크색 꽃잔디를 정원에 심으시고 좋아하시던 그 모습요. 어른은 이른 봄의 진달래도 참 좋아하셨습니다. 패랭이꽃, 샐비어 분꽃 등 덩달아 외우게 된 꽃 이름입니다.” 김종선은 현재 나이가 상당한 노장이다. 하지만 당시의 DJ를 모셨던 자부심이 유난하다. 그의 형형한 눈빛을 보면 그 어떤 장수의 눈빛이 김종선 만 하랴 싶은 거다.
김 군, 음악 좀 틀어보게!
“어르신은 판소리 여섯마당을 훤히 꿰고 계셨습니다. 남도 육자배기에 호남가를 부르는 임방울 명창의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손바닥 장단을 치며 흥얼거리며 고신극기 끝에 도달한 명창의 경지에 깊이 공감하시곤 했습니다. 아 참 1997년쯤이었을 겁니다. 선거 전략을 세우기 위해 드라이브를 하시다가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를 청하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40대 중반이었는데 노랫말에 담긴 젊은이들의 생각과 시대감각을 익히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차 안에서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젊은이들도 힘든 점이 많을 거야. 성적이다. 입시다. 숨통을 조이는 일은 많은데 저들만의 공간은 없는 형편인 거야. 그나저나 교육문제가 빨리 바로 잡혀야 할 텐데’하셨습니다.”
DJ가 젊은 층의 노래를 찾아듣는 것을 보며 김종선은 아내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음기를 띠었다. DJ와 아내와 아이들에 얽힌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생각나서다. 하루는 중학생인 작은 녀석이 ‘가정환경조사서’를 가지고 와서는 아버지 직업란을 두고 ‘뭐라 쓸까?’ 고심하는 눈치였다. 아버지가 모시는 어른이 핍박을 받는 상황이고 보니 어떻게 기입해갈지를 두고 고심하였던 것이다. 알아서 하라는 조로 외면한 김종선은 아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결과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불러 세운 아내가 녀석에게 물었다.
“아빠 직업 뭐라 써냈어?"
“응, 선생님이 아빠 직업 훌륭하시데!”
자초지종은 이렇다. 아빠의 직업란을 비워둔 것을 본 선생님이 ‘왜 아빠 직업난 비워뒀냐’고 물었고, 아들은 ‘우리 아버지 직업 김대중 할아버지 비서에요.’하고 대답하게 된다. 그러자 녀석의 담임선생님은 ‘네 아버지는 매우 훌륭한 일을 하시는 분이야!’하고 등을 토닥여 주더란다. 김종선은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이해시키고 싶은 마음이 늘 굴뚝같았지만 그러지를 못했기에 마음 한구석으로는 못내 켕기곤 했었다. 하지만 아이 학교 선생님 덕분에 이런 걱정이 간단하게 해결되고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나, 한 15분만 잘라네!
“선생님은 바쁜 일정을 소화하시다가도 차에 올라서는 짧은 토막잠으로 피곤을 풀곤 하셨지요.” DJ는 깨우지 않아도 얼마간의 잠을 자고 난 후 기재기를 켜며 개운하다며 눈을 떴다. 토막잠은 그렇게 DJ가 누리는 최소한의 휴식 노하우였던 셈이다. 한편, DJ가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김종선 일가도 청와대 관사로 이사를 갔다. 그런 후에는 밤낮이 따로 없이 ‘2분 대기조’가 되어 대통령의 호출 시에는 2분 내로 대기한다는 자세로 일을 했다.
김종선은 청와대 관사로 이사를 한다. 그의 공식적인 직함도 대통령 경호실 부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때를 계기로 선거에서 패배한 상대 후보들의 수행비서들을 초대한다. 선거에 패배했을 때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는 터였기에 그들에게 위로 파티를 베풀려는 것이었다. 그동안에는 이긴 팀에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하지만 김종선은 선거에서 패배한 팀의 수행비서들을 초청하여 위로 파티를 열었다. 그것이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김종선 그의 형형한 눈빛을 보라! 그도 DJ와 함께한 수많은 장수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유독 ‘김대중의 18년 맹장’이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그 별칭은 오늘도 유효하다. 지난 세월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확인하려면 오늘도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을 보면 느낄 수 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