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성모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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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만에

나주 성모동산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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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첫토요일은 지키려고 한다.

가는데 모두 함께 가는 버스로 왕복 5만원에

김밥 3천원 저녁밥 5천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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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 기도소로 들어가니

광주, 전주, 대구,부산,인천,수원 등 전국에서 모여왔다.

개인차로 온 팀도 있고 나처럼 자차가 없는 사람들은

셔틀을 타고 같이 출발하는 방법으로 모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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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텔라 수녀님께서

나주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그동안의 연역을 설명해주고 계신다.

20여년 전 아무 것도도 되어 있지 않을 때 그것도 어둑어둑할 때 갔던 

기억에 비해서 여러가지지 시설이 많이 갖춰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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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도 아름답게 꾸며 있었고

동산에 입장 하기 전에 차량이며 기타의 시설들은

동산 아래서 해결하도록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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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객들은 2시30분부터 십자가의 길을 하고

 

기도를 하다가 새벽 2시 몇분인가에 미사를 봉헌하고

거기서 완전 4시17분인가에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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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여러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드렸다.

한,미,새,5.18영혼들, 부모님 등

각각 미사예물을 각각 넣어 최소 5대의 미사를 봉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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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십자가의 길을 한 후

어두어진 장면일 거야

그라시아 자매와 김 율리안나 자매님의 안내를 받으며

 

십자가와 겟세마니동산고 장 신부님 묘소 등

여러 군데를 들리면서 예를 표했다.

장 신부님 묘지 앞쪽 나무 위 동산에서

성모님을 뵈었다.

태양 위에 푸른 망도를 입으신 어머니께서

우측으로 움직이는 모습고 온갖 무지개색깔을 빗살이

성작에서 빛나듯이 햇살이 비췄다.

경의롭고 놀랍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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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오니 하얗게 눈이 깔리고 있었다.

아름답고도 고요한 아침이었다.

집에 와서 소제대를 꾸미고 거기서 사온

촟불을 켜고 기도를 드렸다.

님 향한 사랑의 길 책도 다 읽었다 다음은

장 신부 님의 자서전이 있다 하니

그것을 사와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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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8 00:16 2025/01/08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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➁ ‘김대중을 지킨 18년 맹장’, 김종선 수행기사

-DJ 가는 험난한 길 모두 동행하며 새 역사 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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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선은 DJ를 수행하면서 세 번의 창당과 세 차례의 대선을 겪는다. 그 과정은 길고도 험난했다 걸림돌과 장애물이 숱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굴곡진 현장과 돌출 상황에서도 김종선은 눈길, 빗길, 자갈길, 오르막길, 내리막길 가리지 않고 차를 발진시키고 운전대를 잡곤 했다. DJ는 김종선의 이런 수고를 잘 알기에 ‘자넨 내 생명을 지켜주는 사람이야!’라는 말로 고마움을 표시하곤 했다.

그때마다 김종선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DJ가 가야 하는 길이었기에 어떤 처지에서든 자신은 몸 사리지 않고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DJ가 목적지로 이동하면서 가끔씩 들려주던 말마디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실감하곤 한다.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말이 특히 그렇다. 이 말은 작금의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에도 적용되고 있는 금언이 되고 있다. 그야말로 거대 여당은 다수당의 횡포를 유감없이 자행하는 중이고 이에 맞서는 대통령은 현명한 정치력을 구사하기 보다는 비상식적인 계엄 선포로 인해 대한민국의 국격과 정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DJ도 포악한 정치에 자주 당하곤 했다. 걸핏하면 가택연금과 연행과 입건을 당했고 테러와 납치로도 모자라 현해탄 한복판에서 수장당할뻔했었다. 승기를 잡았다 싶은 대선에서는 ‘우리가 남이가’와 같은 ‘초원복집’ 사건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요 개중에는 전화위복으로 치환되기도 했다. 역사의 정반합(正反合)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DJ와 같은 탁월한 경륜의 소유자는 모든 정치놀음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통틀어 ‘정치는 생물이다.’와 같은 금언을 발신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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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선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지켜보며 자신의 지난 시절을 소환해 본다.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임박했을 때 1997년엔 IMF 국제금융 위기가 닥쳤고, DJP연합을 성사시켜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을 지켜본다. 드디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대망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청와대 입성의 순간이 오자 김종선은 운전대를 잡으며 충직한 수행비서로서의 소임을 이어갔다. 김종선은 그날 DJ가 들려준 또 하나의 금언인 ‘서생 적 냉철함을 장착하고 상인 적 현실 감각을 발휘하며’ DJ의 영광의 일정을 대과(大過) 없이 소화했다.

대통령이 차를 비워두고 국정을 소화하는 시간 틈틈이 자신을 DJ에게 보내준 김병오 의원을 생각했고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김종선은 서울 중구 약수동에서 여러 대를 이어 살아온 서울 토박이였다. 그러던 것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구로동 단칸 셋방에서 온 가족이 도시빈민으로 살아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교 진학을 앞둔 시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불행까지 닥친다. 세상에! 가난도 서러운데 어머니의 보살핌도 끊기고 학업마저 중단해야 되다니. 종선은 이때부터 건설 현장의 막노동과 채소장사며 옷 장사 등 여러 경험을 쌓는다. 김종선의 이런 경험들은 고난의 정치인인 DJ를 모시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DJ도 학력이나 용모나 언변과 같은 겉모습이 아닌 신뢰와 믿음의 동지로 김종선을 예우한다.

 

종선이, 우리 꽃시장엘 좀 들리지!

“어르신은 집안 공기가 무겁다 싶으면 꽃시장으로 차를 돌리라 하셨습니다. 서초동 꽃 시장에선 실내용 다년초를 구입하시고 벽제 구파발 쪽에서는 당굴장미를 사다가 울타리 밑에 심었습니다. 지금도 그 표정이 선합니다. 핑크색 꽃잔디를 정원에 심으시고 좋아하시던 그 모습요. 어른은 이른 봄의 진달래도 참 좋아하셨습니다. 패랭이꽃, 샐비어 분꽃 등 덩달아 외우게 된 꽃 이름입니다.” 김종선은 현재 나이가 상당한 노장이다. 하지만 당시의 DJ를 모셨던 자부심이 유난하다. 그의 형형한 눈빛을 보면 그 어떤 장수의 눈빛이 김종선 만 하랴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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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군, 음악 좀 틀어보게!

“어르신은 판소리 여섯마당을 훤히 꿰고 계셨습니다. 남도 육자배기에 호남가를 부르는 임방울 명창의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손바닥 장단을 치며 흥얼거리며 고신극기 끝에 도달한 명창의 경지에 깊이 공감하시곤 했습니다. 아 참 1997년쯤이었을 겁니다. 선거 전략을 세우기 위해 드라이브를 하시다가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를 청하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40대 중반이었는데 노랫말에 담긴 젊은이들의 생각과 시대감각을 익히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차 안에서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젊은이들도 힘든 점이 많을 거야. 성적이다. 입시다. 숨통을 조이는 일은 많은데 저들만의 공간은 없는 형편인 거야. 그나저나 교육문제가 빨리 바로 잡혀야 할 텐데’하셨습니다.”

DJ가 젊은 층의 노래를 찾아듣는 것을 보며 김종선은 아내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음기를 띠었다. DJ와 아내와 아이들에 얽힌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생각나서다. 하루는 중학생인 작은 녀석이 ‘가정환경조사서’를 가지고 와서는 아버지 직업란을 두고 ‘뭐라 쓸까?’ 고심하는 눈치였다. 아버지가 모시는 어른이 핍박을 받는 상황이고 보니 어떻게 기입해갈지를 두고 고심하였던 것이다. 알아서 하라는 조로 외면한 김종선은 아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결과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불러 세운 아내가 녀석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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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직업 뭐라 써냈어?"

“응, 선생님이 아빠 직업 훌륭하시데!”

자초지종은 이렇다. 아빠의 직업란을 비워둔 것을 본 선생님이 ‘왜 아빠 직업난 비워뒀냐’고 물었고, 아들은 ‘우리 아버지 직업 김대중 할아버지 비서에요.’하고 대답하게 된다. 그러자 녀석의 담임선생님은 ‘네 아버지는 매우 훌륭한 일을 하시는 분이야!’하고 등을 토닥여 주더란다. 김종선은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이해시키고 싶은 마음이 늘 굴뚝같았지만 그러지를 못했기에 마음 한구석으로는 못내 켕기곤 했었다. 하지만 아이 학교 선생님 덕분에 이런 걱정이 간단하게 해결되고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나, 한 15분만 잘라네!

“선생님은 바쁜 일정을 소화하시다가도 차에 올라서는 짧은 토막잠으로 피곤을 풀곤 하셨지요.” DJ는 깨우지 않아도 얼마간의 잠을 자고 난 후 기재기를 켜며 개운하다며 눈을 떴다. 토막잠은 그렇게 DJ가 누리는 최소한의 휴식 노하우였던 셈이다. 한편, DJ가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김종선 일가도 청와대 관사로 이사를 갔다. 그런 후에는 밤낮이 따로 없이 ‘2분 대기조’가 되어 대통령의 호출 시에는 2분 내로 대기한다는 자세로 일을 했다.

김종선은 청와대 관사로 이사를 한다. 그의 공식적인 직함도 대통령 경호실 부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때를 계기로 선거에서 패배한 상대 후보들의 수행비서들을 초대한다. 선거에 패배했을 때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는 터였기에 그들에게 위로 파티를 베풀려는 것이었다. 그동안에는 이긴 팀에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하지만 김종선은 선거에서 패배한 팀의 수행비서들을 초청하여 위로 파티를 열었다. 그것이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김종선 그의 형형한 눈빛을 보라! 그도 DJ와 함께한 수많은 장수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유독 ‘김대중의 18년 맹장’이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그 별칭은 오늘도 유효하다. 지난 세월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확인하려면 오늘도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을 보면 느낄 수 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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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3 16:48 2025/01/0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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➀ ‘김대중을 지킨 18년 맹장’, 김종선 수행비서

-어디서나 ‘자넨 내 생명을 지켜주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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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토막잠, 판소리와 서태지, 드라이브, 아이스크림!’ 무거운 것 말고 “김대중 대통령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스피드 퀴즈를 내듯이 기자가 물었다. 이에 김대중 제15대 대통령의 경호실 부장 김종선 씨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위의 대답을 내놨다.

김종선 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18년간 수행하고 지킨 동교동의 맹장이다.’ 그러나 18년이란 숫자는 김종선이 DJ와 함께 보낸 기간을 단순 계량한 수치에 불과하다. 김종선의 가슴 속에 DJ는 영원한 나의 ‘어르신, 대통령님, 민족의 큰 지도자’와 같은 이름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틈만 나면 동작동 국립 현충원의 DJ 묘역에 나가 옛 동지들과 함께 대중 선생에 대한 추모의 예를 다하고 있다. 이 밖에도 DJ를 만나는 방법은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때마다 어김없이 현장감 넘치고 진심을 다하는 시간을 보낸다.

예를 들어 ‘길 위에 김대중’과 같은 영화며, 작년 1월에는 ‘화해·통합·평화’ 정신을 기치로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일산 킨택스에서 열렸다. 역시 얼마 전인 작년 11월 11일에도 여의도 국회박물관 회의실에서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출간된 <김대중과 함께한 길 위에 100인, ‘동지’>에 글쓴이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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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선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대중 선생이 미국에서 귀국 한지 한 달 닷새 만의 일이었다. 그가 동교동으로 DJ를 찾아간 날은 살갗을 파고드는 꽃샘추위가 오랜만에 뚝 그친 85년 3월 13일이었다. 김종선은 밝은 햇살이 포근하게 등을 감싸주는 가운데 동교동의 벨을 눌렀고 DJ를 첫 대면하게 된다. 종선은 그 자리에서 선하게 웃고 있는 모습과 초면인 자신을 오랜 식솔처럼 편하게 대해주는 대중 선생의 다정함에 마음을 열게 된다. 김종선은 그 시작을 “선생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표시하였고, 이후 파란만장한 18년의 여정을 DJ와 함께 펼쳐나가게 된다. 이는 당시 제11대 국회의원(구로 을)인 김병오 의원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어느 날 김병오 의원은 자신의 충직한 비서 김종선을 부른다. “자넨 이제부터 나보다는 더 큰일을 하실 분을 모셔주면 좋겠네! 김대중 선생님이 비서를 구하신다는구먼, 그래서 내가 자네를 추천했네.”라며 DJ를 모셔줄 것을 부탁한다. 이어 “선생님은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시라네. 사고로 위장한 자동차 테러까지 당하셨네. 그분을 모시게 되면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걸세. 자네 내 마음 알겠지?”

김대중의 귀국에는 곡절이 많았다. 군사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그가 아닌가. 하지만 사형수에서 무기형으로 감형 받은데 이어 20년 형으로 감형되더니 돌연 신병 치료 차 석방되어 미국의 워싱턴으로 떠났던 그가 돌연 2년 2개월 만에 귀국을 강행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DJ의 귀국은 국내외 적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DJ의 귀국을 전두환 군사정부에서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지지자들 중에서는 신변이 걱정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전자는 김대중의 귀국으로 인해서 정권에 타격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였고, 후자는 그분에게 테러와 총격과 같은 치명적인 위험이 닥칠까 봐서였다. 그 얼마 전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퀴노’ 상원 의원이 미국에서 귀국하다가 필리핀의 마닐라 공항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피살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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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사정은 필리핀 보다 더 한 상황이었다. 박정희의 18년 독재에 이어 광주학살과 체육관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직을 꿰찬 전두환 신군부정권은 탄생부터가 정당성을 결여하고 출발한 정권이었다. 때문에 민주화의 상징인 대중 선생이 귀국하는 순간부터 정권의 안위가 걱정되는 판이니 DJ의 귀국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김대중은 귀국길에 올랐다. 에드워드 케네디 민주당 상원 의원 등 미국의 저명한 정치인들이 대중 선생의 호위를 자처하여 인간 방패가 돼주는 가운데서다.

이 같은 시기에 김종선은 김대중 선생을 모시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필시 운명이야!’ 종선은 DJ를 모시는 것이 내심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붙어 있는 껌 딱지만 한 작은 불안까지는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왜들 김대중 선생을 못 잡아먹어서 난리지?” 두고 보라지. ‘눈물로 씨 뿌린 자 웃음으로 단을 거둔다.’는 말도 있잖아“ 하며 간단치 않은 여러 감정을 애써 누르며 새삼스럽게 각오를 다지곤 했다.

 

DJ를 수행하면서 처음 겪은 어려움은 무엇인가

“시청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민추협 공동의장인 선생이 회의 차 무교동에 있는 사무실로 가시는 길에 시청 앞을 지날 때였어요. 경찰들이 선생의 차를 완전히 포위하여 꼼짝도 못 하게 에워쌌습니다.” 경찰은 이때 DJ가 탄 차를 견인하려 했다. 더구나 사람이 타고 있는데 통째로 말이다. “당사자인 선생님은 그런 일에 얼마나 힘이 드셨겠어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저 역시 처음 당하는 일리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누군가 조금만 길을 터주면 신나게 달려서 선생이 원하시는 장소에 내려드릴 수가 있을 것 같은데 김종선은 안타깝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일이 전개됐나요?

“그때 동승하고 있던 비서 중 한 사람이 차에서 내려 민추협 사무실에 미리 와 있던 동지들에게 연락을 하고, 수행차를 뒤따르던 동지들 또한 차에서 내려 선생이 타고 있던 차를 에워싸고 길바닥에서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교통은 순식간에 엉망이 됐지요. 어쩔 수 없었던지 결국 견인을 포기하더군요. 하지만 계속되는 경찰의 통제로 차는 동교동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DJ는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로 총 55회의 가택연금을 당한다. 그가 6.29선언으로 완전히 해금 당하기 2개월 동안에 받은 핍박은 더욱 길고 힘든 것이었다. 무려 78일간이나 자택에 갇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87년 6월 항쟁으로 DJ에게 가해지던 온갖 족쇄가 풀린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관련자 전원과 광주 민주항쟁 관련자 15명을 포함하여 모두 2300여 명이 사면 복권되기에 이른다. 김종선은 그제야 위대한 정치인의 면모란 어떠해야 하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정치인이란 때로는 목숨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주저 없이 정면 돌파를 시도해야 함을, 담대한 결기를 보여줘야 함을, 자신의 안위를 위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야 함을, 그러고서야 비로소 위대한 정치인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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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3 16:40 2025/01/0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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