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제가요] 트로트 양식의 시작점과 시대적 양상
-가요사,,,이애리수와 고복수 그리고 이난영과 남인수까지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예인들의 눈부시고도 고달픈 삶은 그들이 부른 노래와 세월만큼이나 천차만별로 회자되며 빛과 어둠 사이를 오갑니다. 하여 트로트 양식이 시작된 지점과 변화의 양상을 짚으며 해당 분야에서 이름을 남긴 가수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일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여정만큼이나 신산한 흔적과 고달프고도 오래된 기억과도 마주치는 일일 것입니다.

화향백리, 주향천리 ‘인향만리’라는 말,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향기는 천리를 간다 하는데 어째서 인간의 향기만은 유독 만 리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여타의 종(種)들과는 달리 스스로 업적을 쌓고 그 치적으로 말미암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0세기 초에 시작된 우리의 대중가요도 작은 물방울이 냇물을 거치고 강을 이루다가 마침내 바다에 이르듯이 부침과 우여곡절을 거듭한 후에야 오늘날과 같은 서민 풍의 노래 장르로서의 위치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윤심덕의 ‘사의 찬미’도 굴곡진 가요사의 한 단면이겠네요. 어떤 이들은 ‘사의 찬미’를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라 하는데요. 윤심덕이 관비 유학생으로서 동경음악학교에서 서양음악을 전공한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인 것은 맞습니다만. 그녀는 음악 활동과 신극 운동에 참여하다가 ‘메기의 추억’과 ‘어여쁜 새악시’ 등 외국의 번안곡을 취입하러 일본행 배에 오르게 됩니다. 녹음은 오사카에 있는 닛토 레코드사에서 했다고 하고요. 직접 가사를 지었다고 하는 ‘사의 찬미’는 막판에 윤심덕의 주장으로 수록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더라도 이 곡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느린 선율로 변환하여 가사만 입힌 번안곡에 불과했습니다.

‘사의 찬미’는 제목 그대로 죽음을 찬미하고 삶에 회의적인 지극히 암울하고도 퇴폐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주인공은 노래 제목과 부합하는 행동을 결행하고 맙니다. 귀국 도중 현해탄 선상에서 목포 갑부의 아들이자 유부남인 극작가 김우진과 동반 투신자살을 하고 말았으니까요. 이일은 그야말로 조선 최고의 초특급 스캔들로서 구구한 억측과 화제성을 증폭시키며 인구 약 2천만인 가난한 나라 식민 조선에서 10만 장이라는 당시로는 경이적인 레코드 판매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아무튼 대중가요의 시작점은 1932년 이애리수가 내놓은 ‘황성 옛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어 고복수의 ‘타향살이’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 이르러 트로트 풍의 노래 양식이 완성되고 정돈되었다는 것이 평단의 대체적인 정설입니다.

이후 뛰어난 미성의 소유자인 남인수가 등장하여 ‘애수의 소야곡’과 ‘낙화유수’를 내놓으며 20년 이상 최정상의 자리를 지킬 불세출의 가수가 출현했음을 알립니다. 뒤를 이어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이 출시되며 트로트는 더한층 대중들의 곁으로 다가섰던 것, 한편 일제 막바지에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막’과 ‘나그네 설움’이 나와 큰 호응을 얻었고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과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서민들의 취향과 사회적인 관심을 저격하며 40년대를 일단락 짓습니다.

이 지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노래의 시대적 양상과 변화입니다. 30년대 노래에는 나라를 잃은 설움이 주조를 이루었는가 하면, 일제 말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는 강요된 친일노래가 판을 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땅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지고 이에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은 왠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거라 삼팔선’을 통하여 강대국들이 우리 땅에 임의로 그어놓은 3.8선에 구애받지 말고 남북이 자유롭게 오가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니까요. 트로트가 친서민적이요 대중들의 삶에 기반한 노래 장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50년대에 들어서자 백설희는 그 유명한 ‘봄날은 간다’로 옥구슬처럼 탱글탱글하고 멋진 목소리를 뽐냅니다. 이 곡은 화려하지만 덧없고 변덕스러운 봄날의 속성에 빗대어 대중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역설의 미학을 발휘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와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발표되는데, 이때는 또 6.25가 끝나 환도(還都)와 귀향(歸鄕)으로 바쁜 데다 공산주의를 피해 3.8선 이남으로 남하한 실향민들까지 뒤엉키는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피난살이를 마치고 떠나는 청춘 남녀의 엇갈린 운명을 표현하고 있지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50년대는 혼란과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는 해야겠는데 너 나 없이 가난한 사람들로 넘쳤습니다. 그렇더라도 남인수의 음반은 요즘으로 치면 초 대박급인 수만 장이나 팔렸다고 합니다. 대중예술의 힘일까요. 팬심의 발로일까요. 그의 목소리는 고음에서조차 흐트러짐 없이 한결같이 맑고 시원한 넘사벽 그 자체였다고 하고요. 예술가의 매력과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문화예술이란 결국 자연의 모방이자 인간의 상호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소박한 창법과 단순한 음악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복수의 ‘타향살이’가 인기를 얻은 시점은 만주로 연해주로 타향살이 타국살이를 위해 조선 땅을 떠나는 사람들의 많았던 30년대 초였고, 같은 고복수의 노래 중 첫 소절이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하는 ‘짝사랑’은 흥미를 유발하는 의문형 기법이 재밌고 매력적이어서 인기를 부르는 요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부인 황금심의 ‘뽕따러 가세’는 요즘 모 방송 프로그램의 타이틀로 차용되면서 시대적 트렌드와 맞물리며 재소환의 예를 보여주고 있고요.

다시 이난영과 남인수의 예를 들어봅니다. 네이버의 한 기사에 의하면 ‘목포의 눈물’은 대중가요의 전성시대를 연 공전의 히트곡이며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명소로 되살리는 마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데서 보듯 시대성, 화제성, 예술성, 대리만족 등 여러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기에 남인수와의 로맨스는 다른 예술인들이 갖지 못한 엄청난 차별점이 됩니다. 아마 이일은 그들의 음악적 궤적을 논할 때마다 인간적인 매력의 근거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음악인들이 추구하는 진선미의 결정체는 무엇일까요. 가수든 연주가든 작곡가든 자신들의 음악행위 앞에 명곡과 명음반, 명가수 명연주와 같은 말이 헌정되는 일이 아닐까요? 각각 44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1천여 곡을 부른 남인수와 48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5백여 곡을 부른 이난영입니다. 하더라도 그들이 함께 써 내려간 러브스토리야말로 둘의 음악 인생에 있어 최고의 화룡정점이라 생각합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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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2 22:14 2020/09/02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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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제가요] 오래된 트로트명곡에 대한 단상
-1930년대 ‘목포의 눈물’과 1950년대 ‘봄날은 간다’-⑤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우리 정통대중가요에도 명곡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분명 1930년대부터 시작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90년 가요사에서 60년대 이전의 가요에 국한해 짚어보자면 최고의 대중성을 획득하고 있는 노래는 1935년도에 레코드를 취입한 이난영 씨의 ‘목포의 눈물’에서 시작하여 백설희 씨가 1953년도에 부른 ‘봄날은 간다’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지만 두 곡은 오늘날까지 노래 제목에서부터 내용 일부분이나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만인에게 회자되며 사랑을 받고 있다 생각되는 곡이기에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포의 눈물’과 ‘봄날은 간다’가 “어떤 점에서 명곡일까?”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봅니다. 먼저 ‘목포의 눈물’은 제목부터 묘합니다. 문학적 수사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도시 이름에 눈물이라는 말을 매칭 시킨 것은 무척이나 이질적이고도 엉뚱한 표현이라 할 수 있지요. 이처럼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언어를 접목하여 은유든 직유법이든 의미 전달에 성공하는 경우에는 상식을 파괴하는 표현법으로서 희소성을 갖습니다. 예술 분야에서만 허용되는 특별한 문법체계이겠지요. 더하여 발표 당시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꾸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경우엔 좀 더 우월한 존재감을 발휘합니다.

그렇습니다. 시어나 노랫말이 다양하게 해석될수록,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생각의 파장이 넓고 깊을수록, 명곡.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하겠습니다. ‘목포의 눈물’은 이런 점에서 제목부터 한 점 따고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겠고요. 노랫말도 그렇습니다. 내용이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고 뚜렷하게 잡히는 것이 없지만 애매하고도 추상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이 직선보다는 곡선의 멋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감성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특이한 점이죠.

 

‘목포의 눈물’의 존재감은 시대 배경과도 무관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목포는 눈물’이다. ‘목포는 설움이다’라는 정서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노래가 나온 시기는 1935년 일제 강점기입니다. 목포 주변에 있는 1004개의 섬들은 결코 기득권층이 사는 곳이 아니었고요. 섬은 목포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기대어 염전을 일구고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식민 백성들의 터전이었습니다. 목포가 대처로 나온 가난한 집의 맏형이라면 주변의 섬들은 형의 출세 소식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는 두메산골의 동생들이라고나 할까요. 신흥도시 목포의 뒷자락엔 그렇게 숨죽이고 사는 사람들의 터전 천여 개가 있었습니다. 목포는 지금도 ‘섬들의 수도’라 불리며 애잔한 정취를 발산하고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노래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첫 구절은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으로 시작합니다. 이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으로 끝나는데요. 여인은 이별로 인하여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그게 바로 ‘목포의 설움’이라고 주장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 노래의 청자들은 그 같은 주장에 이의 없이 동의하는 사람들로 보이는 점이죠. 여인의 눈물이 ‘목포의 눈물’이고 이어 목포의 눈물은 곧 ‘망국의 설움’이라는 식의 가치 전도가 예상되는 가운데 이 역시 이심전심 이해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원곡자인 이난영(이하 경칭 생략)을 보죠. 약간의 콧소리 섞인 고음에 대책 없이 넓은 음역 대에서 애조를 가득 띠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난영에게서 배태되는 애조는 일제 강점기라서 그런지 유난히 세기말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목소리는 맑고 좋다는 식으로 단순 명쾌하게 규정할 순 없습니다. 그렇다고 탁음이 섞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문득 “요즘 가수들 중에 누가 저처럼 치명적으로 애조 띤 음색으로 변화무쌍한 결을 드러내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백설희의 목소리는 이난영에 비해 굵고 맑은소리를 자랑합니다. 참 백설희 이전에 꾀꼬리라는 애칭을 가졌던 황금심에 대해서 소개해야겠네요.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보다 3년 늦은 1938에 발표됩니다. 이후 1953년에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가 나오면서 우리 정통대중가요 계는 그야말로 최고의 여가수 3인방을 배출하는 모양새였습니다. 백설희의 목소리는 은쟁반에 알이 굵고 실한 옥구슬이 구르는 소리라 한다면, 황금심의 소리는 백설희의 것보다는 조금은 더 얇고 맑고 섬세하게 구르는 옥구슬 소리라고 밖에는 더 이상 알맞은 표현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현대에 와서도 즐겨 소환되는 노래에는 그만의 특장점이 있습니다. 정상급 가수들 중에서 다시 부르기를 꾸준히 하고 있는 곡이죠. 그런데 발표 당시에는 대박이 나고도 세월이 흐른 후엔 관심이 덜한 경우가 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멋과 한 그리고 대중성이 조금 더하고 덜한 차이에서 난다고 생각합니다. 탁월한 보이스의 소유자인 황금심의 노래는 앞의 두 곡보다는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별화가 됩니다. 이에 비해 ‘목포의 눈물’과 ‘봄날은 간다’는 멋과 한 그리고 대중적인 면에서 항상 기시감을 주고 있습니다. 곡의 수용자들이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응용하고 대입할 수 있는 융통성을 허락하는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봄날은 간다’도 ‘목포의 눈물’에 못지않게 제목 멋있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곡입니다. 이 노래는 6.25동란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나온 곡으로서 우리나라 시인 100명이 응답한, 광복 이후 대중가요 중 가장 아름다운 노랫말 1위로 선정된 곡으로 알려져 있죠. 노랫말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라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첫 구절은 특히 시각적 이미지가 강하죠. 그림 한 폭이 그려집니다. 연분홍 치맛자락을 휘날리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 한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1953년이라면 망국의 아픔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습니다. 더구나 6.25의 상흔 한복판에서 힘든 생활고를 겪던 때였고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물로 허기를 달래는가 하면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이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래의 첫 소절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라며 낭만이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랫말의 힘이죠. 그런데 현실에서는 누군가의 요란한 약속도, 연인의 사랑의 맹세도 공수표로 맴돌고 있는 사이에 봄날은 흔적 없이 가버립니다. 열아홉 처녀는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꽃이 필 때도 울고 꽃이 질 때도 울었다 합니다.

2절도 3절도 ‘봄날은 간다’로 끝나는데 맥락은 똑같습니다. ‘실없는 그 기약에 매달리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봄날은 갔다 하고 ‘얄궂은 그 노래만 듣다가’ 봄날은 또 속절없이 갔다 합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거듭되는 약속과 맹세에도 불구하고 봄은 쉽게 오지도 않거니와 왔다가도 눈 깜짝할 사이에 가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봄날은 간다’ 역시 곡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속적 향토적 감성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아주 모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봄날은 간다’와 ‘목포의 눈물’은 우회적인 표현과 곡선적인 미학에 세대 불문하고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부르기 좋은 다면성을 가지고 있는 노래로 여겨집니다. 하여 인간의 내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까지 실어 담을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해주면서 변함없이 사랑받는 곡으로 살아남아 있습니다. ⑥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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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향, 제가요] 매스미디어환경과 방송채널시장
-방송채널의 속성과 상업방송의 허와 실
-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그동안 정치 쪽 기사와 칼럼을 주로 써온 기자로서는 다소 뜬금없는 분야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마침 불붙기 시작한 트로트 장르에서 일어나는 관심과 유행, 대중문화현상에 대한 소회까지를 폭넓게 밝혀보고자 합니다.】

 

코로나19와 TV시청

코로나19 소식이 여전히 들리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로 최고 호황을 누리는 업종은 아무래도 매스 미디어계 방송채널업자와 각종 배달업체가 아닐까 합니다. 방송은 재빨리 비대면 프로를 늘리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고, 배달과 택배업은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도 웬만한 것은 다 해결할 수 있으니 요즘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한 서비스 업종으로 자릴 잡았나 봅니다. 외출 자제하기, ‘다중이용시설’ 방문하지 않기 여기다 사회적 거리 두기까지 권하는 사회가 되다 보니 성장 추세를 높이높이 이어갈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매스 미디어계와 TV 시청하기는요? 입시를 앞두고 있는 학생과 취직시험에 다급한 각종 취준생 말고는 귀가 후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무리 지적 호기심과 지식욕이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전처럼 종이책을 통해서만 정보를 취하는 것도 아니고, 내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을 터치하여 읽고 싶고 접하고 싶은 것을 얻는 세상이 된 데다 코로나19는 날개를 달아주는 모양새입니다. 각종 매스미디어 이용은 그래서 우리 몸에 피를 공급해주는 대동맥만큼이나 사회를 관통하는 혈맥이 돼버렸습니다.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인데요. 필자가 TV를 켜는 시간은 주로 밤 10시 너머입니다. 하루 일과를 끝내면서 맘 편히 있다가 잠에 빠져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TV 프로라는 것이 어디 맘에 맞는 것만 있나요. 채널은 많은데 볼만한 프로가 의외로 적습니다. 인생은 유한하고 시간은 한정돼 있는 인간인지라 마냥 TV만 볼 수는 없고, TV도 가려봐야 하고 나름 절제해야 합니다. 자연히 채널과 방송프로의 선호도는 취향과 여유시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죠. 그래서 TV 시청은 선택과 집중 차원에서라도 자신에게 유익하고도 최선인 프로를 골라야 하는 것이어서 제약이 만만치 않습니다.

 

매스미디어환경과 방송채널시장

요즘 TV는 ‘영상물 공해 집합소’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재방(再放), 삼방, 사방은 기본이고 수개월에서 수년 전 아니 수십 년 전에 제작된 데다 화질과 내용면에서 결코 후한 평가를 받지 못하던 C급 D급 콘텐츠들까지 안방극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유는 미디어 환경과 방송 채널업자들의 사정 때문입니다. 유튜브를 비롯한 1인 미디어에서부터 기존의 거대 방송국들까지 각종 영상물이 홍수를 이루다 보니 이에 뒤질세라 플랫폼 사업자들도 난립하고 있습니다. 허나 질적인 수준은 이를 못 따르고 있고요. 방송계 사정은 그야말로 외화내빈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딱 그 모양 그 지경입니다.

그 많은 채널에게 “방송시간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우나?” 질문을 해보면 짚이는 것이 허다히 떠오릅니다. 그들 중에는 콘텐츠의 질과 품격은 뒷전이고 시간을 때우고 송출에만 급급한 곳이 꽤나 많습니다. 이 세계에서도 적당히 현상 유지나 하다가 권리금이나 받고 채널을 팔아넘기려는 얍삽한 장사꾼 심리가 없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요. 이것저것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저질 콘텐츠를 경계해야 할 이유는 널려있기만 합니다.

방송미디어 업계는 살벌한 정글의 세계입니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됩니다. 아시다시피 방송 채널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작 능력이 있던지 좋은 작품을 사들일 자본과 안목을 갖춰야 합니다. 이른바 영상물 제작에는 자본과 제작 여건이 필요하고 창발 적 의지와 영감이 따라줘야 합니다. 자본이 투입돼야 각 분야별 전문팀이 꾸려지고 이들이 저마나 씨줄과 날줄이 되어 온갖 창의적이고도 특별한 직조물을 생산해내는데 공헌을 해냅니다. 이후 시장에 나간 작품들은 평작, 히트작, 대박, 초대박 작품 등으로 가치가 매겨집니다. 초대박 상품은 엄청난 재화를 창출해내는 요술 양탄자라 할 수 있지요.

이 현대판 요술 양탄자는 극장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에서뿐 아니라 유튜브와 넷플릭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또는 멜론이니 기존의 빌보드 차트를 막론하고 거침없이 유영(遊泳)하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요술 양탄자를 많이 가진 업자들일수록 천문학적인 부와 영예를 거머쥐게 되겠지요.

 

나쁜 채널, 나쁜 방송

예컨대 매스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업계 사람들은 늘 ‘대박 칠 꿈’을 꿉니다. 그러려면 아이디어든 자본이든 투자가 선행돼야 하겠습니다만 주야장천 같은 작품을 우려먹기만 하는 곳이 있다 보니 이런 곳은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받기 십상입니다. 그 끝은 인수합병되거나 문을 닫는 수순이 될 것입니다. 상당히 친숙하다고 생각했던 채널이 어느 날 번호가 확 바뀌어 있거나 채널 이름은 똑같은데 기존의 포맷은 온데간데없이 낯설고도 엉뚱한 프로그램만 돌려대는 채널을 볼작시면 영락없이 문제가 발생한 나쁜 채널과 나쁜 방송이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채널들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금쪽같은 시간 버려가며 굳이 더럽고 무섭고 야비하며 잔혹하기까지 한 영화로 몸과 마음에 음습하고도 부정적인 기운을 드리우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폭력과 낭비를 조장하거나 선악에 대한 판단력을 무디게 하는 프로, 맥락과 필연성도 없이 황당한 스토리에 스케일만 강조하는 영화에 유료채널을 표방하며 끼어드는 성인물까지 결코 건전한 영상물이라 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취향과 착각은 자유라서 판단하는 관점이 다 같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럼 ”뭘 주로 보느냐?”라는 질문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검증된 명작을 소재로 만들어진 콘텐츠, 국악 채널, 각종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채널, 예술과 관련한 프로를 만나는 경우엔 정말이지 TV라는 문명의 이기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란하지 않고 허풍스럽지 않고 뒤틀린 가치관으로 세상을 호도하려 들지 않는 이야기라면 흠이 될 리 없습니다. 이름께나 알려지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 떼거지로 나와 웃고 떠드는 프로보다는 어렵게 뜬 사람이나 새롭게 조명 받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는 분명 가치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계해야 할 방송 채널은 세뇌 성 홍보 방송을 너무 자주 하는 곳, 뻔뻔할 정도로 편향된 방송, 한 번 뜬 프로라 해서 한도 끝도 없이 우려먹는 행위를 노골적으로 반복하는 방송사입니다. 시청자들은 볼만한 프로를 찾아 헤매는 술래와 같습니다. 브라운관을 보며 숨은 그림을 찾아 헤매는 헌터와 같습니다. “어디 좋은 프로 없을까?” 수준 높은 콘텐츠를 골라보려 채널 돌리기를 반복하는 수고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이런 수고는 누가 보상해 줄지, 이는 개인을 넘어 국가적으로도 대단한 전파낭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각종 순위 장사에 뛰어든 플랫폼사업자들의 폐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뭐든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성상 순위 장사를 하는 사업시장 역시 확장 일로에 있는 것 같습니다. 순위 플랫폼사업자들은 시청자들과 팬심을 이용하여 경쟁을 부추기며 유료 방문을 하도록 자극합니다. 서로 자기가 선호하는 연예인이나 가수에게 ‘투표하라!’는 식의 ARS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는 겁니다. 

올바른 비평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보고 즐겨야 할 방송프로의 수준과 유익한 미디어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건전하고도 올바른 비평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트로트가 대세라며 방송가는 온통 트로트 열풍으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채널 사업자 중에는 트로트를 아예 사골 뼈 우리듯이 우려먹고 또 우려먹으려 작정을 하는 통에 고개가 절로 흔들어집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한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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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2 22:07 2020/09/02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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