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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오늘(9.26)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결성

1974년 9월 26 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결성됐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던 카톨릭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 무효를 선언하는 양심선언 이후 구속되자 그해 9월 명동성당에서 김승훈, 함세웅, 김병상등 300여명의 젊은 사제들이 모여 정의구현 사제단을 결성한 것이다.

 

한국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기독교 성직자들 특히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빚진바가 많다. 사제단은 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 김지하 구명 운동, 인혁당 진상규명운동등에 나서며 때때로 로마교황청이라는 우산을 쓰면서 박정희 독재정권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80년대 들어선 은폐된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히는데 애썼으며 특히 87년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축소조작 은폐된 것을 폭로하여 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독재정권에 맞서 십자가를 들고 조용히 서 계시던  사제들과 수녀들의 모습을 보고선 무신론자들이라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가슴이 찡해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1972년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해방신학'을 출간한 이래 라틴아메리카의 신부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프락시스'를 위해 때로는 기관총을 들기도 했다. 프레이리의 교육학과 체 게바라의 소총 그리고 신부들의 해방신학이 남미에서는 해방을 위한 세로운 삼위일체로 불릴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정의구현 사제단은 좀 모자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싶다. 그러나 대한민국 땅에서 지난 삼십년 동안 어느 조직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꺾이지 않은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한 목소리를 내왔겠나?

 

물론 정의구현 사제단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카톨릭 교회 특유의 수직적 구조를 혁파해내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못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신부들이 신학적으로 그들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증명해냈던 반면에 한국의 신부들은 학문적이나 철학적 토대를 쌓아내지 못했다. 단지 정의감 만으로 수직적이고 보수적인 카톨릭 교회의 구조와 기득권에 구멍을 낼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유기적 연결 고리를 가지지 못했다. 물론 권호경등 실천, 노동사목을 하는 개신교 목사, 전도사들과 카톨릭 노동사목이 연대활동들을 펼치기는 했지만 장공 김재준으로부터 시작된 기장(기독교 장로회)의 학문적 실천적 성과들과 상호 침투하지 못한 것 또한 큰 문제점으로 지적 될 수 있을 것이다.(이것은 기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장공 김재준 이래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등 실천과 이론을 겸비한 개신교 목사들이나 한신을 중심으로한 개신교계의 실천과 정의구현사제단은 그냥 별개로 흘러온게 아닌가 싶다는거다.

 

그러나 이런 저런 췌언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정의구현 사제단은 한국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참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보다 적적한 표현이 있을까) 가장 필요할 때 정의를 구현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02년부터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대표를 맡고 있는 부안천주교회 문규현 신부와 형인 문정현 신부는 부안 방폐장 반대 싸움에서 항상 앞자리에 서있었다. 지금 용산 미군들이 옮겨간다는 평택에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며 미군기지를 거부하는 평택 민중들과 두 문 신부는 항상 함께 하고 있다. 노조와 농민들과 신부님들이 손을 잡고 평화를 이야기 하는 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의 이른바 메이저 시민 단체들이 현정권에 대해 쓴소리를 하기를 주저하고 자신들 머릿속으로 만든 거대 개혁 전선에 얽매여 있을 때 과감하게 파병 강행이면 정권 퇴진이라며 현 정권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 민중운동 진영에 힘을 실어준 단체 역시 정의구현사제단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얼마전 국가보안법 존치 입장을 밝혔을 때 정의구현 사제단 평신부께서 자신의 신분을 무릎쓰고 추기경에게 정면으로 맞서 쓴소리를 내어놓았다. 이런 실천들 앞에 창백한 이론들은 때론 설자리를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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