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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4/09

1976년 오늘(9.9) 모택동 영면

1976년 오늘 모택동(1893~1976)이 8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사실 이 디렉토리를 꾸준히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마오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늘날 모택동을 이해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아직도 마오주의에 입각해서 투쟁을 하는 세력들은 전세계에 몇군데 있고 중국에선 모택동 부적이 명절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이며 모택동을 냉혈한 마키아벨리스트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뿐인가? 마이크 타이슨의 팔뚝에는 체 와 더불어 마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문신으로 박혀있다.

 

한 인물, 한 사건에 대한 진실한 해석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게 옳을 것이며 마오의 진실은 그에 대한 몇가지 해석 줄기 가운데 어딘가쯤 혼재되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에 대한 반대자나 지지자들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1911년 청년 마오가 혁명전선에 뛰어든 이래로 죽는 날까지 마오는 전근대적 농업사회에서의 반제투쟁과 사회주의 투쟁에 관한 교과서를 한 줄 한 줄 자신의 온 몸으로 써내려간 인물이다. 누구보다 철저한 공산주의자 였으면서도 창의력 있는 혁명가 였던 것이다.

 

모스크바랑 직접 라인을 대고 있던 이립삼 같은 초기 중공당 지도자들이나 프랑스 근공검학 출신인 등소평등과는 다르게 마오는 철저히 중국문화의 세례 속에서 커온 사람이다.(이것은 그의 큰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여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마오가 학습하던 영문판 공산당 선언이 후일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communist party 라는 원문에 마오가 달아놓은 주석은 뭔고 하니 '공산주의자 연회(宴會)'...--;; 파티가 당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잔치(연회)로 해석했다는 말인게다. 믿거나 말거나^^

 

항일 투쟁과 국공 내전 가운데서 마오가 남긴 주옥 같은 어록은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한다. '정권은 총부리에서 나온다'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울 수 있다' 등등

 

결국 대장정을 마치고 이차 국공합작을 통한  항일투쟁 중인 1943년 마오는 중공당 중앙정치국 주석, 중앙서기처 주석에 올랐고 죽을떄까지 중앙위원회 주석직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전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그 이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한국전쟁)에 장남 모안영을 참전시켰는데 모안영은 공중전 도중에 전사했다.

 

이후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 문혁 와중에서 수많은 동지들을 숙청했고 좌편향적 정책들로 인해 인민들에게 해를 입혔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아직도 중국 인민들은 자주독립과 주권 수호,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의 그의 공이 과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중공당은 1981년 6월 당 중앙 11기 6중전회에서 '건국 이래 당의 역사적 몇가지 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그 결의에 따르면 모택동 사상은 중국에서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이고 그것은 여전히 중공당의 중심사상이며 중국인민의 중요한 유산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앞으로 얼마나 우경화 해날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우경화와 별개로 능구렁이 중국인들이 마오에 대한 위와 같은 공식적 평가를 쉽게 바꿀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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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결과 발표!!!

박근혜와 박근혜 미니홈피 사이월드 백만번째 방문객과의 데이트에 버금가는 빅 이벤트!

 

'peyo와 molot 사이에서' 천번째 방문객 이벤트가 성황리에 마감되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천번째 방문객 행인께서 술을 끊었다고 하시니 행인께는 다음 기회에 감사의 마음을 표할 수 있는 자리를 가지도록 하면 어떨까 싶네요. 박근혜도 아마 백만한번째 사람하고 만남을 가졌다죠?

 

그렇다면 그 다음 1001번째 방문자는 달군 되시겠네요. 달군에게 이벤트 당첨자에 준하는 대우를 하도록 하고 참여를 희망하시는 자일리톨, 스머프 님등을 저렴한 회비--;;(절대 세종대왕 한 분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로 초청하고자 합니다. 추석 연휴 이전에는 반드시 모임을 갖는 것으로 해놓고 시간을 맞춰보도록 하지요. 참석 희망자들은 댓글을 달아주세요.  새끼줄 한 번 맞춰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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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때리는 열린우리당 인권위원장.

 며칠전에 국보법 관련 국회 취재를 나갔다. 민가협 하고 열우 인권위원장 조성래 의원 면담 자리였는데 사실 별 기대를 안하고 갔다. 열우당에도 국보철폐론자들이 꽤 많은 상황이니 인권위원장이면 당연하게 폐지론자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왠일 이람!! 자칭 인권변호사 출신 조성래는 강력한 폐지 반대론자 였던 것이다. 카메라가 없었기 떄문인지 조성래 의원은 황당한 발언들을 민가협 회원들 앞에서 계속 쏟아내더라. 기사화 한게 대부분인데 빠진 몇가지를 들어보자면...'우리한테 표를 주고 말고를 떠나서 국보법 폐지 반대라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우리는 화해와 관용 정신을 가져야 한다.'(이건 국보찬성론자들을 관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웩) '나에게 강요하지 마라'(국보철을)

 

민가협 엄마들은 뒤집어 지기 시작했고 한나라당이랑 다를바가 없다는 발언들을 했다. 조성래 왈 '부산 가서 물어보세요.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항상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람입니다'

 

머 열우 내의 관료출신 어떤 의원이 이런식으로 말한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소위 인권변호사 출신의 인권위원장의 뚫린 입에서 저런 버라이어티한 발언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니까 참 황당터라.

 

조성래가 누군가? 초선의원이지만 노무현 직계 부산사단의 좌장으로 불리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난 조성래가 그냥 나오는 데로 말한게 아니라 어떤 노림수가 있는건 아닐까 하는 속셈이 든다. 그날 아침에 이미 조성래는 열우 전략회의인지 나발인지에서도 그런 말을 한 모양인데...여권이 국보철 하겠다는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심히 우려스럽다. 이 쉐이들이 안 나서면 사실 안 되는것 아닌가?

 

조성래의 황당한 발언들을 듣고 노회찬 의원실에 가서 일러주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멘트 딸라고...

 

첨에 노회찬의원은 안 믿더라. 황당해하면서...그래서 설마 내가 지어냈겠냐고? 진짜라고 몇번이나 강조하니까 믿더라--;; 기사화 하지 않은 노회찬의 말 한마디 '인권 변호사는 무슨 인권변호사 먹고 살라고 변호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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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공지!

이 블로그에 들어오시는 모든 분께 알립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방문자 수가 날로 증가하는 지라 감사의 의미로 이벤트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이 블로그의 1000번째 방문객을 저희 사무실(진보네트워크)로 모셔 제가 직접 요리한 안주로 술을 한 잔 대접하고자 합니다.

 

추세로 보아하건데 오늘 아니면 내일 당첨자가 가려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한가지 있긴 한데...누가 1000번째 방문자인지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여튼 그 방법은 제가 강구하겠습니다. 물론 이 이벤트를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아서 자신이 방문자 이면서도 쌩까는 분이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뭐 꼭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다들 마음의 준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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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오늘(9.8) 레니 리펜슈탈 영면.

미안하다. 오늘이 아니라 어제다--;; 이해해달라. 그래도 새벽 한시가 넘어서 퇴근하고 이걸 쓰고 있다. 어여삐 봐주기 바란다. ㅠ.ㅠ

 

2003년 9월 8일 다큐멘터리 감독, 극영화 감독, 사진 작가 그리고 스킨스쿠버 다이버인 레니 리펜슈탈이 101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레니 리펜슈탈은 20세기 여성 예술가 중에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미학적, 선동적 측면에서 볼때 이미 20세기 전반에 가장 완성된 형태의 결과물이었다. 무용가, 영화배우로 그녀의 예술 커리어가 시작됐지만 그녀 스스로가 표현대상으로 그치기엔 그녀의 예술적 능력이 너무 뛰어났다.

 

스스로 프로덕션을 차려 제작, 시나리오, 연출, 주연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북치고 장구쳐서 만든 작품 '푸른 빛'은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고 그녀는 곧 나치에 픽업된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전설적인 작품이 바로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 1934 감독 레니 리펜슈탈 출연 아돌프 히틀러, 루돌프 헤스, 파울 요제프 괴벨스' (출연진만 봐도 으스스 해지지 않나?)이다.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이 작품은 21세기 오늘날에도 보는 사람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든다.

 

120명의 스탭, 36대의 카메라, 8개월 간의 편집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난 이 작품은 그야말로 프로파간다의 극치다. 도입부에선 히틀러가 등장한다. 그 장면은 마치 메시아의 강림을 떠오르게 하며 또 다른 장면에선 히틀러가 20만명의 군인 사이를 헤치고 등장하는 샷이 나온다.  이 샷을 잡기 위해 리펜슈탈은 정면의 첨탑에 카메라를 설치하기 까기 했다. 그 외에 부감샷의 사용을 통한 장엄한 장면과 백그라운드 뮤직으로 쓰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Horst Wessel Marsch’까지...정말 이것이 예술이로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작품이다. 미학적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을 뛰어넘은 창작물이 있을까?

'의지의 승리'를 패러디 한 작품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앨런 파커 감독의 '핑크프로이드 더 월'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에 이르기까지...그리고 우리가 2차 대전 자료화면들에서 흔히 보이는 히틀러의 카리스마틱한 묘사들은 거의 전부가 이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심지어 나치 패망 이후 이 작품은 나치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오랬동안 전세계적으로 방영금지작으로 묶여있기도 했다.

 

그녀의 천재성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전세계를 경악케 한 작품이 바로 이듬해 나왔으니 그 작품은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올림피아' 인 것이다. 이후 수많은 스포츠 중계와 상업적 영화들에 영감을 준 이 작품은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생동감 넘치는 경기 장면들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그 뒤로 매 올림픽 마다 만들어지는 기록영화들은 사실 전부가 이 작품의 패러디에 불과하다.

 

'올림피아'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레니 리펜슈탈은 동양에서 온 과묵한 한 청년의 모습에 혼을 팔려버렸으니 그가 바로 '손기정'이다. 올림피아의 꼭지들 중에 가장 긴 시간이 할애된 부분이 바로 손기정의 마라톤 역주 장면인게다. 물론 올림피아 또한 나치스와 아리안 족의 우월성이란 주제의식이 과도하긴 하다. 이 지점에서 내가 미디어 참세상에 올린 기사를 하나 참조하라.- "축구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저항세력 되어 싸웠을 것"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0887&page=2&category1=3

 

어쩌면 당연한것인지 모르겠지만 2차대전 이후 리펜슈탈은 전범 재판까지 받았고(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실형은 안 살았다.) 그녀의 예술은 어떤 자본과 정치세력의 뒷받침도 못 받았다. 결국 리펜슈탈은 돈도 안들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장르를 찾았으니 그것이 바로 사진이었다.

 

그녀는 이후 아프리카의 풍경과 인간들을 사진으로 담아냈고 그 작업들 또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뿐인가? 71세에 스킨 스쿠버 자격증을 땄고 그 떄부터는 해저 카메라맨으로서 그녀의 예술을 이어나갔다. 100세 생일을 맞이하여 공개된 작품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해저의 인상'. 그녀는 이 작품으로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컴백을 전세계적 찬사 속에서 화려하게 해냈다.

 

2003년 레니 리펜슈탈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잘못은 히틀러를 만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예찬자와 비판자 모두에게 경악과 감탄을 남겨준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중 하나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의지의 승리’ 중 두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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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냉면의 길

 

새벽녘이면 날씨가 꽤 쌀쌀하기 까지 하고 일교차가 높아 감기 걸린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낮에는 여전히 더운데다가 태풍 불어온다고 습도까지 많은지라 아직도 냉면 생각이 난다.왔다갔다 하다 보면 냉면집에 아직도 사람들이 꽤 많더라. 


일전에 선배에게 식사 대접을 할 일이 있었다.(내가 멀쩡히 돈 잘버는 선배한테 식사대접을 한다는 말은 내가 시간을 내주고 메뉴도 골라주고 계산은 그 선배가 한다는 뜻이다 ^^V 근데 어떤 후배가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접하겠다면 정중히 사양하겠다--;;) 그 선배랑 무슨 일로 이틀간 시간을 같이 보내긴 했지만 좀 느끼한 식사들의 연속이었는지라 저녁은 깔끔한 것으로 먹기로 합의를 봤었다. 정통적 요리를 좋아하지만 에쓰닉한 요리나 각종 퓨전요리도 즐기는 나는 베트남 퍼 를 제안했으나 그 선배는 개운하게 김치찌게를 먹자고 했고 김치찌게를 받아안기엔 속이 그닥 좋지 않다는 반론이  이어진 끝에 냉면을 먹으러 가기로 합의를 봤다. 을밀대를 갈까 하다가 좌회전을 놓치고 을지면옥을 갈까 하다가 저녁시간에 을지로로 차 몰고 들어갔다가 나오는건 죽음이 아닐까 싶어서 신촌으로 왔었다.


기실 신촌에도 그나마 전통을 자랑하는 냉면집들이 몇 군데 있긴 하다. 예컨데 명물거리에 있는 고박사 냉면(이 곳은 정말 명실이 상부하지 못한 곳이다. 사리는 한 젓가락 집으면 끝이고...육수도 글쎄...)도 있고 우정스포츠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냉면집들이 몇 군데 있고 또 현대백화점 에스컬레이트 입구 맞은편의 함흥냉면집도 최상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퀄러티를 보장하는 곳이다. 그런 곳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배를 끌고 간 곳은 율촌냉면(구월산 족발집에서 아래로 오십미터 정도, 현대백화점 일층 옆문 바로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이었다. 왜냐면? 내가 저녁타임에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지성의 명철함보다 대중운동의 우위를 믿는 나로서는 꿩 잡는 게 매라는 고래의 격언을 믿을 수 밖에 없고 사람 몰리는 곳이 맛집이라는 진리의 역관계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뜨, 그러나 냉면을 먹은 후 선배는 나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나는 담담히 그 욕설을 배불리 먹었다. 자, 그렇다면 율촌 칡 냉면이 맛이 없었던가? 따지자면 꼭 그런건 아니다. 가게에 들어 갔을때 테이블이 딱 하나 남아있었던 것을 보고 '음 잘왔군' 하는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었으나 너무 시끌벅적하고 어린 친구들이 많았던걸 보곤 좀 의심의 여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여튼 그러다가 칡냉면 대짜 두 그릇이 서브되어왔다.


이건 뭐...그래 맛있다면 맛있을 수도 있다만 그 맛이라는게...학교 앞 분식점 냉면맛이라는게 문제였다. 나도 매운 음식 좋아하고 매워서 맛있는 음식도 있고 매워야만 하는 음식도 있다. 그리고 단 음식도 마찬가지다.(단 음식 일반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치만 냉면이 그래선 안된다.


근데 이 냉면은 매콤달콤의 극치였다. 고삐리때 학교 앞 분식점에서 그 당시 가격으로 천이백원 주고 먹던 냉면, 지금도 어느 중고등학교 앞 분식점에 가면 이천오백원 정도를 주고 먹을 수 있는 그 냉면...바로 그 맛이었던게다--;;사골육수와 동치미 국물이 조화된 시원하면서 구수한 육수는 간 곳이 없고 사이다에 고춧가루 탄 맛의 육수가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씹히는 맛이 중요한 편육과 채썬 배도 없고 냉면 그릇에 담긴 거라곤 시커먼 칡사리와 오이, 무채, 시뻘건 고춧가루 그리고 마치 물에 빠져죽은 개미떼 같은 통깨들...


물론 나도 이런 음식들 먹고 또 어떨땐 좋아하기 까지 한다. 근데 이건 말이지 라면 집 혹은 수제비 집에서 곁다리 메뉴로 끼워 판다던가 아니면 떡볶이를 서브메뉴로 하는 냉면 전문 분식집의 맛인거지 냉면과 설렁탕을 메인으로 내세우는 식당의 맛이 아닌게다.


언어가 그렇듯이 음식 또한 언중 아니 식중(衆)에 맞춰 갈 수 밖에 없고 또 맞춰가야만 한다만 이런 분식점 냉면을 5500원씩이나 받아먹고 또 그런 식당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건 뭔가 좀 찝찝하다. 나 또한 언젠가  붐비지는 않되 주인과 손님 서로가 만족해 하는 일품요릿집을 했으면 하는 꿈(--;;)이 있어 그런지 모르겠지만 뜬금없이 메이냐드 케인즈의 발언이 생각난다. 뭐랬더라? 자본주의하의 경제가 돌아가는게 미인대회랑 마찬가지긴 한데 개별 주체들이 좋아하는 미인을 고르는게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미인을 고르는거라 했던가? 어쩌면 이 글 읽고, ‘그래 내가 원하던 냉면은 바로 이거야’ 하면서 찾아갈 사람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네.

 

 

첨언: 이 글은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내 글을 수정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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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오늘(9.7) 멕시코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영면

1949년 9월 7일 멕시코의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Jose  Clemente Orozco,1883-1949) 가 영면했다.  오로스코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레스코 화가로 꼽힌다. 오로스코 라는 이름만 들으면 누굴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듯 싶어 오로스코와 항상 함께 등장하는 두 이름을 나열해본다. 그 이름들은 바로 디에고 리베라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오로스코, 리베라, 시케이로스 이 3인은 멕시코 벽화운동의 주역으로서 전세게를 휩쓸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소설들 보다 더 일찍 마술적 리얼리즘과 민중의 생활을 프레스코 벽화로 널리 알렸다. 힙합문화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그래피티 또한 이들의 벽화운동의 세례를 깊이 받았고 바스키야를 비롯한 현대 미술들도 이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심지어 80년대 이후 나타난 한국의 벽화운동, 걸개그림 운동들 또한 이들에게 뿌리를 대고 있다.

 

그렇다면 멕시코 벽화운동은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멕시코 벽화운동은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에밀리오 사파타와 판쵸 비야의 혁명에 닿는다. 멕시코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보다 오히려 더 앞선 것으로 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으로 불린다.

 

사파타와 판쵸비야는 결국 혁명 이후 죽임을 당하고 오브레곤이라는 정치지도자가 통일을 하게 되었지만 오브레곤 또한 사파타의 농업개혁-무상 농지 분배, 이 문제로 인해 아직까지도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은 투쟁하고 있다.-을 자신의 혁명정부에서 받아들였고 곧이어 그 혁명정부는 1917년 혁명헌법을 통해 국토와 지하자원이 국가소유임을 명확히 함으로 미국의 간섭을 거부했다.(멕시코는 알고 보면 뜨거운 전통을 지닌 나라다. 멕시코의 대표적 대학인 UNAM대학 또한 전세계 대학중에 투쟁 순위로 따지자면 몇 손가락 안에 들만하다.)

 

뿐만 아니라 정교의 분리, 혁명의 주역이었던 메스티조와 인디언의 지위 향상등에서 볼때 금세기 전반부 멕시코는 눈부셨다. 트로츠키가 왜 뜬금없이 멕시코로 망명해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 뒤에는 이런 배경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여튼 멕시코 혁명을 마무리 지은 오브레곤 정권은 작가 호세 바스콘셀로스를 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바스콘셀로스는 종합적 국가 교육안을 실행했으니 문맹, 무학에 시달리는 농민과 자녀들을 위해 많은 교사들은 하방시켰다. 국가차원의 브나로드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교사들은 살해, 폭력에 시달렸다. 농부들이 교육 받는 것을 두려워한 멕시코 대 농장주들의 짓인 것이다.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대부들은 오늘날에도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교사들은 계속 시골로 시골로 향했고 국가 또한 굴하지 않았다.  

 

이러한 국가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가 바로 벽화 지원 계획이었던 것이다.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벽화(프레스코화)를 그릴 수 있도록  화가들에게 공간과 자금을 지원한 것이다. 멕시코 벽화운동은 이렇게 시작된것이니 오로스코, 리베라와 시케이로스는 벽화운동을 이끌며 민중들을 자극했다. 이 운동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전세계적 이슈로 떠올랐다. 얼마전 이 시대를 다뤘던 영화도 나오지 않았던가? 셀마 헤이엑 주연의 '프리다 칼로'( 사실 이런거 보면 유명하고 대단했던 넘들도 여성들한테 대하는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근데 이런 전통을 가진 멕시코에서 왜 오늘날에도 사파타의 후예들 (사파티스타)들이 치아파스에서 투쟁하고 있을까?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역시 여기에도 적용된다. 멕시코 혁명정부는 1927년 제도혁명당을 창당했다. 제도 혁명당은 라틴 아메리카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당으로 불리는데 너무 성공적인 나머지 70여년을 장기집권 해버린 것이다--;; 제도혁명당의 존재는 모든 급진적인 정치세력들의 부상을 막았고 제도혁명당 지도부는 그들의 투쟁 대상이었던 아시엔다(대농장주)와 미국과 앞으로는 싸우면서 뒤로는 짝짜궁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비판적 지지 뭐 이딴거 생각나지 않나?)

 

그리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메스티조에게 사회적 시민권을, 제국주의의 간섭 철폐라는 사파타의 혁명정신과(제도 혁명당이 배반해버린) 사파타의 후예들이 다시 나타난 게다.  사파티스타는 NAFTA(북미 자유무역협정) 발효에 맞추어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며 치아파스 라칸돈 정글에서 1994년 1월 1일 봉기g했다.  "오늘, 우리는 말한다. 이제 그만좀 해!(Ya! Basta!)"....그들이 내건 선언문의 제목이다. (몇년전에 어떤 학생운동 그룹이 이걸 따와서 쓰기도 하더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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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 이번엔 꼭 되라!

나도 앙겔루스 노부스를 읽었답니다. 진중권 이름값이 한창 인지라 출간될때 언론도  꽤 탓고 책도 어느 정도 팔린 모양이던데 정작 책이 꽤 나간 후에는 전혀 이슈화가 못 되더군요.

 

그 책을 읽으면서 뭐랄까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지요. 진중권의 최대 장점중의 하나인 스타일 상의 경쾌함이 엿보이지 않더라구요. 아마 온라인 상에서 온갖 글들 쏟아놓고 정치적 이슈들로 이전투구 하는데다가 신문 같은데서도 진중권한테 원하는게 그런 것이니 자기도 좀 힘들었겠죠. 그래서 맘 먹고 쓴 책이라 오히려 역편향을 보인건 아닌가 싶네요.

 

신천사라 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앙겔로스 노부스를 번역한 말이군요.^^ 

 

'미래를 위해 과거를 조직하라!등 뒤의 미래가 아니라 파국의 현재를 바라보라.' 이런 진중권의 벤야민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만...그래도 나 자신은 과거의 재구성, 현재를 조직화 하는 것은 전망을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촌시런, 단선적인, 좀 안이한 관점을 져버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미래로 밀려나다니...머 미래로 밀려나는게 맞기야 하겠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도 같고 ㅠ.ㅠ

 

첨언: 이 글은 新天使(신천사)와 연쇄 작용 에 관한 트랙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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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국으로 살펴본 신촌의 외식 문화

집에서 요리를 잘 안 한지가 벌써 몇달이 지났다. 일단 집에서 밥먹는 횟수가 줄어든 탓도 있고 식 재료를 사놓았다가 상해서 몇 번 버린 이후로(김치 냉장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김치 맛도 유지되고 야채랑 과일도 정말 오래 가던데..)는 기껏 해 먹어봐야 통조림 꽁치 조림, 카레, 김치찌게, 된장찌게 정도다. 레시피도 자꾸 까먹는것 같고 요리 실력도 줄어드는 듯 해서 속이 상한다.(요즘 사무실에선 엄청나게 요리하고 있지--;; 직책수당 신설하랏!)

 나는 음식 만드는것도 즐기고 맛있는 음식 찾아먹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다. 회사 다닐 땐 나름대로 특기와 취미를 살렸는데 요즘은...ㅠ.ㅠ 맛난 음식 해먹는 것, 찾아서 사먹는 데 돈도 필요하긴 하지만 필수적인건 외려 부지런함이다.

 

이렇게 먹는 것에 예민한 나의 관점에서 볼때 내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신촌은 정말 맘에 안 드는 동네다. 이 동네 정말 먹을 것 없다.(패밀리 레스토랑이나 패스트 푸드점 같은 공장표 음식을 제외하곤) 명물거리에 몇군데 돈주고 사먹을 만한 메뉴와 맛을 갖춘 식당들이 있긴하지만...

 글쎄 내 생각엔 20대 여성의 비위 맞추는데 급급한 나머지 맛보다는 음식의 외형이나 인테리어, 화장실 시설에만 신경쓰는 집들이 다수 인 듯 하다. 그러나 어쩌랴 업주들은 여성의 지갑을 여는 것도 여성이요 남성의 지갑을 여는 것도 여성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니~

경상도 음식이 맛없다는건 널리 받아들여지는 통설이지만 부경지역 음식 중엔 손에 꼽을 만한 것이 몇가지 있다. 특히 단품 식사류에 강점을 보인다. 예컨데 돼지국밥, 밀면, 경상도식 추어탕 등등이다. 그 중에서도 첫손을 꼽으라면 그건 지상 최고의 해장국인 복국일게다.

부산 본가(아 물론 삼년전에 이사가 지금은 아파트 촌에 살지만) 주위에 법원, 검찰청, 대학병원, 구 도청, 학교등이 산재해 있었기에 참 맛깔 난 음식점 들이 많았다. 말 그대로 료릿집들도 많았지만 까다로운 공무원들 입맛을 맞추기 위한 재첩국, 복국, 추어탕 집들은 가격대 성능대비가 참으로 훌륭했고 지금도 그렇더라.

하여튼 요즘 복국이 정말 먹고 싶다. 신촌 이 동네도 복집들 몇군데가 있더라만 딱 보면 꽝이라는걸 안다. 새로 간판 올리는 주제에 무슨 무슨 전통의 복집 어쩌고 하는 과대포장을 하는 곳들, 객단가 높일 라고 무조건 복사시미나 복정식을 주메뉴로 떡하니 내미는 곳 하며 정말 맘에 안 든다.  일반 한식류 특히 단품 전문점 같은 경우엔 식당 겉모습과 주인장 인상만 봐도 맛있는 집인지 아닌지 바로 진단이 나온다. 물론 임대료나 권리금이 높은 탓도 있겠지만 객단가 높인다고 어디 매출이 뛰고 회전률이 높아지던가?

 

서린동 SK 본관 옆에 있는 식사 시간이면 대가리 터지는 모 식당의 경우 메뉴는 사시사철 5000원 짜리 대구탕 하나다. 강남권도 그렇다. 무등산 이나 삼원 가든 같은 곳도 물론 있지만 5500 혹은 6000짜리 설렁탕으로 저력을 자랑하는 식당들이야 말로 진정한 그 동네의 강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볼때 신촌의 음식문화는 너무나 저급하다. 이건 기본적인 퀄러티는 유지하되 양과 가격에서 강점을 보이는 대학가 공통의 장점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생겼다가 망하길 반복하고 한 해는 찜닭의 광풍 한해는 불닭의 광풍식의 지랄 용천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으니..이런 저급성은 업주들만의 탓이 아니라 지역 소비자들의 취향에 기인하는 바도 클거다.

 

그나마 신촌에서 저력을 자랑하는 식당(구월산이나 철대문집)은 서대문 지역 아저씨, 아줌마들과넥타이 부대가 주력군인 실정이다. 문화의 불모지 신림에도 순대볶음을 랜드마크로 내밀고 고대 앞은 아직도 제기시장이나 이모집이 건재한데 신촌은 뭘 랜드마크로 내밀 수 있겠나? 신계치나 신선 설농탕도 돈 좀 벌곤 공장이 되버렸다.

복국 이야기 하려다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버렸는데 복국은 정말 훌륭한 음식이다. 일단 복국은 자격증 소지자들이 끓인다.(아 물론 식당 주방에서 메인 볼라면 조리사 자격증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도 개나 소나 다 따는 자격증이 아니라 독극물 관리사에 버금가는 조련과 경력을 쌓아야 얻을 수 있는 복조리사 자격증 소지자들이 끓이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집이던 일단 기본은 유지한다.

 

그리고 모든 뛰어난 음식이 그렇듯 복국은 재료 자체의 맛을 충분히 끌어내는데 역점을 두는 음식이다. 들어가는 거라곤 복, 콩나물, 미나리, 다진 마늘 약간, 소금 약간이 전부다. 쫀득쫀득과 쫄깃쫄깃의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씹는 맛을 지닌 껍질 부터 흰살 생선 특유의 퍽퍽함과는 거리가 있는 담백함을 지닌 속살을 초간장에 찍어 먹는 맛은 말할 것도 없을 뿐더러 시원하면서도 위를 묵직하게 눌러주는 그 맑은 국물 맛에 비견될 만한 것은 없다. 잘 끓인 전주 남부시장식 콩나물국 정도가 비견될 만하다.

아 침이 키보드 위로 막 떨어지려고 하는구나. 특히 술 먹은 담날 사우나 후에 복국 한 그릇 떄리고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을 훔치는 그 맛이란~ 캬....

첨언: 이 글은 약 4개월전 싸이 미니 홈피에 쓴 글을 약간 수정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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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마시께따' 디렉토리 와 어원의 소개

이 디렉토리에선 음식에 관한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간단한 요리교실에서 부터 음식 비평, 식문화 비평, 맛집 소개, 절대 피해야 할 식당 소개까지 그리고 식문화와 사회현상, 철학, 역사 속의 음식 등등 하여튼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들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사실 이런 걸 쓰려면 잘 먹고 자주 만들고 그래야 되는데 요즘 나의 식단은 거의 일식삼찬 수준이고 맛난거 사먹으러 다닐 시간과 능력이...ㅠ.ㅠ 그래서 글을 써서라도 먹거리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이 디렉토리를 만들었다. 초기엔 예전에 내가 썼던 글들이 자주 올라오게 될 듯 하다.

 

근데 걱정 되는게 한가지가 있다. 사실 음식에 관한 웹컨텐츠들이 인기를 끌려면 화려한 사진빨을 자랑해야 하는데 내 능력상 그건 정말 무리다--;; 하지만 화려한 사진 보고 흘리는 침보다 글을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흘리는 침이 양도 많고 훨씬 끈적끈적 할거야^^

 

첨언: 아 참 '라 마시께따'라는 디렉토리 제목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것 같아 어원을 밝힌다. 97년도에 유럽을 세달 동안 돌아다닌적이 있었다. 서유럽에선 비싸서 맛난 것도 잘 못 먹고 닭도리탕이나 해먹고 돌아다니곤 하다가 유럽의 변방으로 가선 참 잘 먹고 다녔다. 그 중에서 이베리아 반도 음식이 참 맘에 들더만....바르셀로나, 마드리드 같은데야 물가 비싸지만 스페인에서도 시골로 내려가면 빠에야 같은건 적당한 가격에 많은 양과 풍부한 맛^^

 

특히 교통이 불리해 남들은 잘 안가는 포르투갈을 갔을땐 정말 죽였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버스를 타고 그리 오래 가지 않으면 카보 다 로카 (로카 곶,유럽의 끝이다. 거기서 헤엄쳐서 계속 가면 아메리카 대륙이 나온다. 섬하나, 바위 하나 보이지 않는 끝없는 수평선이 보이는데 정말 매혹적인 곳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해남 땅끝은 좀 별로다. 섬들이 워낙 점점히 박혀있는지라 땅끝이란 기분이 안 난단 말이지.)   

 

아 잡설이 너무 길었다. 하여튼 그 리스본 뒷골목에 있는 포르투갈 정통요리 전문 식당(파도 공연도 한다.) 의 이름이 바로 '라 마시께따' 이다.................라고 할 줄 알았겠지만 '열라 마시께따'(맛있겠다)란 경상도 사투리에서 그냥 '열'을 떼버린고 지은 이름이 바로 '라 마시께따' 인 것이다. ㅋㅋㅋ

 

뭐라고??? 열받는 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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