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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 혁명 지도자 케렌스키가 왕정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선포했다.
짜르 체제를 타도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온건 사회주의자'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과정을 살펴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짜르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공화파, 자유주의자, 온건 사회주의자 순으로 권력이 차례 차례 넘어가고 그 다음에 마침내 볼셰비키 소비에트가 천하통일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2월 혁명에 대해 잠깐 되짚어 보도록하자. 1917년 일차대전 중 페테스부르크는 러시아 최대의 공업도시이며 군대 집결지였다. 식량난과 연료난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1917년 2월 14일 국회로 시위 행진 할 것을 결의했다. 볼셰비키등의 반대로 그 행진은 무산되었으나 마침내 23일 여성노동자들이 먼저 파업에 돌입하고 남성노동자들도 흐응했다. 25일에는 파업이 전역으로 확산되고 26일에 시위대에 대한 발포가 있었으며 마침내 27일 노동자들의 아들인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병사들은 감옥의 정치범들을 해방시켰으며 병사와 해방된 정치범들이 페테스부르크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창설한 것이다.
정부는 진압 부대를 출동시켰으나 그 부대는 출동중에 소멸되 버리기도 했다^^ 이 와중에 케렌스키는 의회가 혁명을 대표하게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노동자대표와 사회주의 정당 대표들이 소비에트 결성회의를 여는 것을 보고 잽싸게 국회임시위원회의 권력장악을 선포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민중들의 손에 들어가는 걸 불안해 하고 어떻게든 체제내화 하려는 작자들이 있는 법인게다.
이 당시의 상황은 상당히 희한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소비에트를 따를 것을 천명했으나 관리와 장교는 국회 임시위원회에 충성을 맹세했으니 이른바 이중권력 상태로 돌입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계속 진행을 외치는 국회임시위원회(관리와 장교도 포함)와 침략반대를 내건 병사들은 충돌했고 이 때 레닌이 귀국했고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소비에트는 비로소 정권 수립을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이 와중에 멘셰비키는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참가해 연립정부를 발족시켰다. 육해군 장관을 맡고 있던 케렌스키는 황당하게도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전선에서의 공세를 준비하려 했다.
이에 분개한 민중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 하에 뭉쳤다. 멘셰비키가 이 민중들을 비난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민중들은 연립의 중단과 소비에트 권력의 실현을 요구하며 무장시위를 감행하기 이르렀고 멘셰비키는 이에 볼셰비키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레닌은 다시 지하로 스며들기까지 했다. 이 와중에 케렌스키는 전쟁의 공세 수준을 높였고 열린정부 수반 자리를 꿰차기 까지 했다. 엎친데 덮친다고 군사령관 코르닐로프는 군사독재를 꿈꾸며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역시 볼셰비키와 소비에트가 코르닐로프를 저지시켰다.
지지 기반을 찾아 헤메이던 케렌스키는 9월에 민주주의파 회의를 열어 이른바 예비 의회를 발족시켰고 3차 연립정부를 발족시켰다. 이 연립 정부가 15일에 임시정부 수준을 벗어나 러시아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후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1917년 10월 25일 오전 10시 트로츠키를 위원장으로 하는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가 임시정부의 타도와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선언했다.
늦어서 정말 미안하다. 알다시피 파견, 기간제법이 입법예고 됐고 그 것 때문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이 시간에 올리는 것을 어여삐 봐달라.ㅠㅠ
1960년 9월 14일 이란, 이라크 , 쿠웨이트 , 사우디 아라비아. 베네주엘라 5개 주요 산유국이 국제 석유 수출국 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을 결성했다. 현재는 11개국이 OPEC에 가입해 있다. 그런데 최근 국제 유가가 어떻게 되더라? 배럴당 50달러 정돈가? (아참 1배럴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거다. 물론 나도 잘 몰랐다. 확인해보니 159리터더라. 쌀두가마니 정도 되는 양이다. 그렇게 보면 원유값이 비싼건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두바이산 원유, 텍사스 중질유 혹은 북해산 브렌트유란 이름은 아홉시 뉴스에 종종 등장해서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다.
19세기 미국에서 최초로 상용화 된 이후 석유는 인류 최고의 뜨거운 감자 자리를 내어놓은 적이 없다. 일찌기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는 석유를 '악마의 눈물'이라고 일컬은 적이 있다. 록펠러가 바로 본 거 아닌가 싶다. 석유는 문명 확대에 큰 공헌을 했지만 지구 각지의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자동차, 탱크, 전투기, 항공모함 모두가 석유로 움직인다. 석유 덕에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다가 단추 하나로 미사일을 투하 할 수 있게 됐다. 뿐인가? 대형 유조선의 원유 유출로 기름을 흠뻑 뒤집어 쓴 가마우지의 사진은 잊을만 하면 반복적으로 국제뉴스를 장식한다.
석유가 창출하는 가치는 세계적 빈부격차를 더 심화시키고 냉전 이후 전쟁들에 석유가 한 다리 걸치고 있지 않은 것을 찾기는 어려울게다. 이라크가 세계 제2의 산유국이 아니면 지금처럼 미국의 표적이 되었을까?
뿐만 아니라 원유는 전세계적 로또나 다름없다. 지금이야 유정 개발이 쉽지 않았지만 몇십년 전만 해도 상황은 다르다. 영화 자이언트에서는 반항아 제임스 딘이 한 구멍 잘 뚫어서 일거에 인생역전했고(검은 원유로 샤워하며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린 제임스 딘의 모습이 인상적이지 않나?) 조지 W 부시 또한 텍사스 원유 사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지?
하여튼 OPEC의 등장만을 보면 꽤 긍정적이다. 지난 9월 10일자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2&pid=42) 본란을 통해 '곡물 메이저' 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지만 석유 메이저들도 그에 못지 않다. 온갖 지저분한 합병과 통합을 거쳐 지금은 엑슨 모빌(미),로열 더치 쉘(영국, 네덜란드), BP(영), 쉐브론 텍사코(미)로 정리된 석유 메이저들은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주요 원유생산국들의 석유를 한세기 동안 강탈하다 시피 해왔고 그 기업의 본국들은 석유를 전략무기 처럼 사용해왔다.
결국 그 제국주의 국가들과 석유 메이저들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산유국들이 결성한 것이 바로 OPEC인 것이다. 몇번의 원유 파동을 통해 OPEC은 세를 과시했지만 사십여년이 지난 오늘날 OPEC을 보면 뭐 그렇지도 못하다.
물론 사우디의 아람코나 쿠웨이트의 KPC, 베네수엘라의 PDV(그렇다. 지난 9월 11일 본란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2&pid=43 에서 언급된 베네주엘라의 석유 산업 사보타지의 중심이 바로 PDV다) 등이 OPEC의 역사를 통해 나름대로 국제적 석유 메이저로 등극하기는 했다. 최근엔 러시아 올리가르히(과두 재벌)들이 자국의 국영 석유 회사를 인수해 덩치 키우기에 나서고 있고...
몇번의 석유 파동 동안 아랍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미영등 제국주의 국가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혁혁한 공훈을 했던 OPEC은 이후 여러가지 이유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됐다. OPEC내의 가장 큰 전선은 친미-반미의 전선이다. 그 아래 아랍 민족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지만 첫 째 전선을 벗어난진 못한다. 이라크, 이란, 베네주엘라등이 목소리를 높이고 감산 정책을 펼치면 사우디, 쿠웨이트등 미국 꼬붕들은 급격한 증산을 통해 찬물을 끼얹어 버리곤 했다. 물론 기름 한 방울 안나는 우리나라로선 유가 상승이 큰 부담이 되지...
그러나 농산물이나 석유나 다 마찬가지다. 세금, 각종 부담금, 독점적 정유체계등을 통해서 중간에서 해먹는 돈이 얼마일까? 주유소에서 기름 넣을때 가격하고 배럴당 원유가격의 차이를 비교해 보라. 배럴당 50달러 해봤자. 리터당 가격으로 치면 우리 돈 300원에 물과하다. 주유소에서 넣을땐 근 4배에 달하지? 하여튼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고 있는거다. 시장경제, 자유경쟁을 들먹이는 작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선 왜 말이 없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1993년 9월 13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클린턴이 지켜보는 가운데 PLO의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총리 라빈이 팔레스타인 자치 협정에 서명했다. 1994년 협정 당사자인 아라파트와 라빈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인 페레스는 노벨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그 협정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은 자치는 3단계로 진행하기로 되었다. 1단계는 가자와 여리고, 2단계는 요르단강 서안에서 이스라엘이 철군하고 자치의회 선거, 마지막 단계로 자치정부의 최종 성격확정과 동예루살렘 문제, 해외 망명 팔레스타인 인사들의 귀환, 국경 확정과 이스라엘 정착촌 처리가 마무리 되는 것이다. 몇 번의 논란과 충돌 끝에 1, 2단계는 실시에 성공했으나 3단계는 아직도 난망한 상황이다.
지금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은 베를린 장벽에 버금가는 장벽들로 둘러싸이고 있으며 예루살렘을 둘러싼 갈등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947년 유엔은 '예루살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워질 유태 국가와 아랍국가 양국에 소속될 것'을 제안한바 있고 당시 이스라엘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으나 팔레스타인이 거부한 결과 1차 아랍전쟁이 발발한 바 있다. 이후 1967년 이스라엘은 요르단이 통치하던 동예루살렘을 점령, 합병하고 80년엔 '하나로 온전히 통일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발표했다. 이후 점령지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해외 귀환 유태인들을 대거 이주 시켜 인적 물적으로 이스라엘화를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다. 아니 거의 진행이 완료되었다. 팔레스타인 해방전사들 또한 예루살렘을 결코 양보할 수 없음을 천명하며 투쟁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클린턴의 외교적 배후 조종, 이스라엘 인 치고는 합리적인 캐릭터였던 라빈(뒤에 다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최초의 노동당 출신 수상 라빈은 95년 이스라엘 극우파에게 암살당한다), 이스라엘의 공세와 팔레스타인 내 하마스등의 압박을 양측으로부터 받은 아라파트의 돌파구 찾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팔레스타인 평화협정은 이제 제대로 기억되고 있지도 못하고 별 의미도 없는 실정이다. 제한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물론 팔레스타인 정부는 요르단강 서안지부와 가자지구를 대표하는 합법자치정부이다.1996년에는 입법의회를 구성하고 아라파트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1964년 422명으로 시작된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 만큼의 정통성과 지지를 얻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민족평의회는 1964년 바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창설했고 팔레스타인 국민서약을 제정했으며 망명자들의 의회로 그 역할에 충실했었다. 1974년엔 아라파트의 유엔 연설에 이어 유엔 업저버 자격까지 획득했었다. 그 빛나는 활약과 의지에 비하면 현 자치정부는 너무도 미약해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평화협정에는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수상이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고위 관료들이 그렇듯 이 사람도 군인 출신이다. 6일 전쟁당시에는 이스라엘 참모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주미대사로있던 67년에 이미 중동평화정책의 일환으로 아랍 점령지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주장하다가 이스라엘 내의 강경론자들(지금 수상 샤론이 대표적)로부터 맹공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노동부 장관을 거쳐 이스라엘 본토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수상자리에 올랐다. 이후 국방장관등을 지내다가 다시 수상자리에 올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그 로드맵을 시행했다. 그러던 중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에서의 중동평화회담 지지집회 연설후 극우 유대인청년의 저격을 받고 숨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고 이스라엘의 탄압도 변한바 없다. 이라크에서 최근 벌어진 미국인들의 고문이나 관타나모 기지내에서의 포로에 대한 인권탄압은 사실 이스라엘 군/정보 당국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시행하던 것을 미국인에게 가르쳐준것에 불과하다. 가히 청출어람 청어람이 아닐 수 없다. 한편 현재 이스라엘 전역의 교도소에서는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이 집단 단식투쟁을 하고있다고 한다. 요구 조건은 남자 형제에 대한 면회금지 철회, 사식의 반입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단식투쟁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는 반응은 '음식을 먹든 안 먹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가자지구 정착촌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들.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이번 금요일 (17일) 저녁에 행사를 거행^^하고자 합니다.
자일리톨님이랑 스머프님께서 참가의사를 밝혀주셨고 저에게 개인적으로 참가의사
를 전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습니다. 원활한 메뉴선정과 요리준비를 위해선 참가인원
파악이 필수적이겠죠? 이 아래에 덧글 달아주세요. 그럴리야 없겠지만 너무 많은 사람
이 참가희망하면 선착순으로 마감하겠습니다^^ (이러다가 아무도 안 온다면 무슨
개망신일까--;;
첨언: 오늘자 ‘오늘은’ 은 너무 피곤해서 못쓰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혹 빠뜨려 먹는 날에는 채찍들 매우 휘둘러 주세요. 그래야 좀 강제가 되지
싶네요.
▲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부 각료들의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일성(수상), 다음이 박헌영(부수상겸 외상)
오늘 취재 나갔다가 꽤 고생했다. 이 부분은 취재 뒷이야기 디렉토리에 써야할지 모르겠지만 귀찮아서 그냥 묶을란다. 비 쫄딱 맞으면서 사진 때문에 대오 앞뒤로 뛰어다니느라 춥기도 했고...(근데 나온 사진들을 보면--;;) 사무실 들어와서 술 한잔 한데다가 후배도 사무실에 놀러 온지라 귀찮기도 하고 어차피 스케치 기산데 뭐...하는 맘에 기사도 대강 써버렸는데 막상 기사 쓰는것보다 업로드 시키는데 훨씬 고생했다. 나 원 참, 참 나 원, 혹은 원 나 참. 천상 난 사무실에서 밥이나 할 팔잔갑다.ㅠㅠ 여하튼 집에 와서 또 술 한잔 하고 나니까 추적거리는 날씨랑 노곤한 몸이랑 주중의 스트레스들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묘한 기분을 만든다.
누구의 포스트인지 까먹었지만 ‘진보넷 블로그에 글 쓰는데 부담감이 느껴진다’ 란 글이 있더라. 어느 정도는 나도 공감한다. 막 뽀다구 나는 글을 써야한다는 것보단 속내 드러내기가 눈치 보인다는 거지. 한다리 내지 두다리만 건너면 대강 아는 사람들로 이뤄진 공동체라 그런 거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 먹은 김에 기분도 꿀꿀해서 옛날이야기 하나 써 볼란다. 다른 블로거들의 관음증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다는 부대효과도 있을라나?
세상의 다른 모든 것처럼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거지만 ‘미선이’라는 밴드가 있었다. 멤버중 몇몇이 병역 때문에 흩어진지라 ‘루시드 폴’이라는 원 맨 밴드로 전환되었지. 그치만 사실 ‘미선이’는 알고 보면 꽤 유명한 밴드였다. 뭐 우리가 다 그렇듯이 나도 엥겔계수가 극도로 높은 생활을 해오고 있는데다 특히 책은 종종 사지만 음반에 대해선 극도로 소비절약을 하고 있지만 미선이껀 테잎과 씨디를 합쳐서 몇 장을 소장했었을 정도다..
지금에사 비주류인척 하는 주류인 이현우, 윤도현등 덕에 혹은 시류따라 인디씬에서 오버그라운드로 연착륙한 몇몇 밴드들 덕에 혹은 난체 하고 싶어하는 스노브들덕에 이렇고 저런 밴드들이 모던락이란 간판을 내걸고 꽤 인기를 끌고 있지만 98년 99년 즈음의 미선이는 나름대로 대단한 모던락 밴드였다. 아으 기회주의적으로 비주류를 참칭하는 수많은 주류들의 세상에서 진정한 비주류란 무엇인가?
머 쉽게 말하면 조용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하는 밴드였지만 엄청 드라이한 음악을 했었지..어케 보면 청승 모던 틱하고 미소년 추종자들이 좋아할 만한 밴드였지만. 글쎄...이 밴드가 정말 맘에 들었던 이유는 가사, 멜로디 라인, 보컬, 리듬 모든 것에서 완벽성을 추구하는게 엿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미선이 1집이었던가 2집이었던가는 모르겠는데 내가 꽤 뻑 갔던 노래의 제목은 ‘치질’이었다. 그 뿐이던가? 90년대 말 그 때부터 언론개혁, 국가보안법 문제들을 간간히 유치하지 않게 다룬 가사들을 보고 ‘뭔가 좀 다른데 ...’ 하다가 미선이의 리드싱어가 메아리 출신인데다가 민주노동당 당원이란 말을 나중에 듣곤 ‘하하 역시 우리 편이군’ 하고 혼자서 웃었기도 했었다.(이런걸 보면 나야 말로 원단 스노브다.)
여하튼 미선이가 갑자기 생각난건 엊그제 꿈에 XX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XX는 지금 SBS주말드라마에서 박예진의 동생이자 박은혜의 언니로 나오고 이요원이 시집가기 전에 장혁이랑 같이 나온 쓰레기 같은 드라마 ‘대망’에 출연한 어떤 탤런트를 지칭하는게 아니다. 바로 XX 때문에 미선이도 생각이 났다. 하이퍼텍스틱한 사고? 혹은 서지학적 사고? 하여튼.
제대후 복학 직후에 본의 아닌 스캔들을 잠시 일으켰었지만 그 스캔들은 금방 정리가 되었고 내가 ‘짝’사랑 하게 된건 XX였다. 돌이켜 보면 그닥 스타일이 빼어난 건 아니지만 동그란 눈, 오똑함을 넘어 거의 뾰죡한 코, 도톰한 입술과 나지막하면서 맑은 목소리의 소유자였던 바로 그 XX.....
XX한테 관심을 두면서부터 경쟁자들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다행히 XX는 그 경쟁자들한테 별 관심이 없더라.^^ 다만 XX가 짝사랑한 선배가 있었다는건 알았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즈음에도 역시 난 좀 외강내유하는 척했지만 XX랑 둘이서 술 먹을 땐 종종 징징거리기도 했었다. XX는 그 때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족들 이야기 힘든 자매 이야기도 해줬더랬지. 그런 대화들을 나눌땐 혹여~ 하는 기대도 했었는데 알고 보니 나 말고도 그 이야기 들은 사람들이 몇몇 더 있더라 ㅠ.ㅠ 글쎄...그 때 좀 더 징그럽게 따라다녔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내 생일 이었던가? 하여튼 어느 날 내 이마에 XX가 뽀뽀를 해준 날, 역설적으로 난 ‘아 끝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지금 XX는 어디 있을라나? 아산 어디 깨 현장에 있다던 XX는 아직도 거기 있을라나?
근데 왜 그 때 XX는 자기 운동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 하고 권유하지 않았을까? 내가 영문과라서? 내 선배들이 ㅇㅇㅇ출신이라서? 아니면 나란 인간이 별 영양가 없다고 판단해서? 하긴 나도 그 때 XX한테 내가 고민하는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 한 기억은 없다. 왜 그랬을까?
사실 마음만 먹으면 두다리 정도 거쳐서 XX가 어디 있는지 확인 할 수도 있지 싶다. 가끔 그런 충동을 느끼기도 하고...그치만 휴..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다. 가끔씩 꿈에 나오는, 혼자 술 먹을때면 기억나는 XX... 어디서든 건강하고 자중자애하길 바랄 밖에. 언젠가 한 번은 다시 만나서 둘이 술먹고 싶은 XX...그 때도 가슴이 콩닥거릴까?
바야흐로 히스패닉의 전성시대다. 정치적 슈퍼 파워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지만 Brics니 뭐니 떠들어대도 한 세대 정도 후면 히스패닉이 미국 뿐 아니라 세계를 뒤덮을 것이라는 전망들이 지배적이고 문화적으로 볼땐 벌써 히스패닉의 물결이 너무나 거세다. 아프로 쿠반 음악을 생각해보란 말이지... 물론 문학만 따지자면 서반아어 문학의 전통과 결과물은 이미 풍부하고도 화려하다. 일일이 예를 들 필요가 있을까마는 이십세기 후반만 따져도 요사, 네루다, 옥타비오 파스, 보르헤스 일일이 세기도 힘들 정도지 싶다. 최근에 유행하는 사람들만 따져도 세풀베다니 뭐니 상당히 많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한 사람이 바로 마르께스인데(마르께스는 소설가로서도 일류지만 저널리스트로서도 정말 대단한 결과물들을 남긴 사람이다. 몇 년전에도 탐사 보도물을 하나 내서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지) 아마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말을 유행 시킨 사람이 그가 아닌가 싶다. 마르케스 소설 중에 꼭 읽으려고 하는데 아직 못 읽은 작품이 있다.아 참..진보넷 사무실에 나오면서 겪는 단점이 딱 하나 있다(헤헤 설마 딱 하나일까?^^). 뭔고 하니 책을 제대로 못 본다는거다. 왜 그럴까? 바빠서? 피곤해서? 하여튼 그래서 요샌 출퇴근 할때 시집이라도 들고 다닐려고 애쓰는 편이다.
각설하고 마르께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명불허전 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기대하던 차에 내 유일한 링크 블로그에서 그 소설의 서평 (http://www.happian.net/blog/?no=31)을 읽었다. 서평을 읽고나니 더 기대가 되는군. 가을이라 더 그런가--;;
1973년 9월 11일 칠레 산티아고 대통령궁에서 살바도르 아옌데가 쿠테타 군에 의해 피격되어 사망했다. 아옌데는 피노체트 반란군의 해외망명제안을 거부하고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소총으로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사살당했다.
아옌데 최후의 모습을 담은 사진.
사실 911하면 우리는 지난 2000년의 WTC빌딩에 대한 비행기 테러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지난 삼십여년간 911은 세계민중들에게 아옌데의 죽음으로 먼저 다가왔다. 언제던가? 공중파 방송에서도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를 상영하지 않았던가?
1908년에 태어난 아옌데는 칠레 대학 의학부 재학시절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칠레에는 합법화된 공산당이 있었으나 코민테른의 통제가 칠레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옌데는 사회당의 길을 걸었다. 52년 부터 세차례에 걸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당선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69년 12월 칠레의 대중운동 조직 MAPU를 비롯하여 사회당, 공산당,진보당, 사회당은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는 외교관이자 정치가이며 위대한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였다. 네루다는 후보자리를 양보했다. 권력 싫어하는 사람이야 드문게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진리이지만 인상좋은 할아버지 시인 네루다는 정말 대통령 자리가 싫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인민연합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는 1970년 11월 5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는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권력이 선거를 통한 집권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칠레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자본과 백인 소수 상층부에 의한 경제적 지배, 극심한 빈부격차, 미군에 의해 교육받은 군부를 다 갖추고 있었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인민연합의 구리 광산 국유화, 경제 구조 재편에 대해 자본은 모든 수단을 다해 저항했다. 73년 칠레의 인플레이션은 300%에 달했고 운수자본가들은 상품 수송을 거부하며 사보타지를 일으켰다. 미국은 칠레의 주요 수출품인 구리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비축 구리를 국제 시장에 무차별로 풀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 민중들의 아옌데에 대한 지지는 강고했다. 73년 벌어진 총선에서 인민연합에 대한 지지율은 50%를 넘을 정도였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아옌데는 대통령 재신임 투표를 실시하고자 했다. 재신임안 통과가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바로 그 투표일에 쿠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쿠테타가 벌어진후 일주일 동안 칠레전역에서는 삼만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벤세레모스'(단결하라)라는 노래로 선거운동극을 만들어 온 나라를 누비고 다니던 누에바 깐시온의 기수 '빅토르 하라'도 이 떄 산티아고 경기장에서 총을 맞고 죽고 말았다. 심지어 병석에 누워있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파블로 네루다 또한 살해당할 뻔 하였으나 겨우 살해를 피하고 그해에 자연사했다.(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영혼의 집'을 권한다. 이사벨 아옌데는 피노체트 집권 이후 망명한 저널리스트 출신 소설가이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나왔다. 초호화 캐스팅이었는데 주인공이 누구였더라? 제레미 아이언스 였나?)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의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군사평의회 의장 자리에 앉은 피노체트는 미국과 영국의 비호하에 쿠테타 동료들을 숙청하고 대통령 자리를 거머 쥐었다. 사망자 3천여 명, 실종 1천여 명, 고문 불구자 10만 명, 국외추방 100만 명...이것이 바로 피노체트의 성적표이다.
고령으로 정권을 내어놓은 피노체트가 스페인에서 반인륜적 범죄로 기소되었을때 그의 구명에 적극 나섰던 사람은 바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이다. 대처가 뭐라 그랬더라? '위대한 용기를 지닌 이 인물에 대한 어떠한 법적 기소행위도 반대한다 그랬던가?' 피노체트에 얽힌 아햏햏한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니다. "오늘 군이 봉기한 이유는 이 혼란에서 조국을 구하겠다는 애국심뿐이다. 조국은 혼란 속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의 맑스주의 정권에 유린당했다. 혁명위원회는 사법권과 언론 통제권을 갖게 되며 다음 조치가 있을 때까지 국회는 휴회한다. 이상"-이것이 피노체트 쿠테타 군의 포고문이다--;;
피노체트의 망령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올해 중앙일보는 '남미가 변한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 특집을 진행했다. 그 특집 기사에 따르면 칠레의 포퓰리즘적 전통을 꺠고 경제개혁이라는 길에 매진한 비젼있는 지도자가 바로 피노체트란다. 지랄병도 이 정도면 상당한 수준이다.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자본과 군부, 미국 정부의 사보타지가 일어나고 삼십여년이 지난 오늘..이 역사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베네주엘라에서는 1998년 선거를 통해 우고 차베스가 집권했고 석유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등의 볼리바르 혁명을 이끌고 있다. 기득권, 자본, 미국은 그들이 아옌데에게 했던 만큼 소금 뿌리기를 계속 하고 있다. 02년 4월의 쿠테타 시도, 02년 12월의 석유 산업 사보타지에 이어 얼마전 소환 투표까지...다른 점이 있다면 아옌데보다는 차베스가 군부를 잘 통제하고 있다는 점.(우리나라 보수 신문들을 보면 차베스를 무슨 군바리 출신 독재자 비스무리하게 묘사하고 그에 저항하는 자들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처럼 그리는데 정말 쌍으로 웃기는 것들이라 하겠다)
아옌데 정권보다 차베스 정권의 생명력이 더 강해보이긴 하지만 미국을 등에 업은 베네주엘라 반정부 세력들은 공공연히 무장봉기와 쿠테타를 떠들고 다닌다. 이에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의 저자 타리크 알리를 비롯한 150명이 좌파 지식인들은 국경을 떠나 차베스 정부르 엄호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다.
사실 아옌데 정권의 비극을 두고 나온 분석들이 꽤 된다. 혁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한 개혁을 선택함에 따른 당연한 말로라는 분석도 있고 선거건 뭐건 간에 군대와 경찰이라는 폭력적 국가기관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 직접적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내 생각엔 뭐니뭐니 해도 미국탓이 제일 크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전투를 잠깐이라도 보거나 살바도르 아옌데, 빅토르 하라, 파블로 네루다의 장엄한 최후에 관한 글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콧잔등이 시큰해질껄...앗 노무현 탄핵 당시에 아옌데가 어쩌고 우리가 지켜야할 민주정부 어쩌고 하면서 견강부회 하던 작자들이 많던데 각자 알아서 대가리 박고 반성하기 바란다.
다음은 쿠테타군이 대통령궁을 폭격하던 당시 칠레 국영 라디오와 전화를 통해 방송된 살바도르 아옌데의 최후의 연설 끝 부분이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2003년 WTO 5차 각료회의가 열리던 멕시코의 휴양도시 칸쿤에서 농민운동가 이경해 열사가 할복 자결했다. 이경해는 한국 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 회장, 한국 농어민 신문사 회장, 전북도 의원등 농업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활발하게 펼친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1990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펼쳐진 GATT반대 시위에서 할복한 바 있으며 2003년 2월에도 한달간 제네바의 WTO본부 앞에서 항의농성을 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경해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이었나? 세계화, 좀 더 좁혀 말하자면 WTO, 더 좁혀 보다면 WTO 농업협정이 바로 그것이다.(WTO Agreement on Agriculture) 그리고 그 뒤에는 이미 한국 곡물 수입시장의 60%를 장악하고 있는 세계적 식량 메이저 카길(Cargil)이 있다. 심지어 농업 우르과이 라운드 협정의 기본판을 기초한 사람은 미농무차관 출신의 카길사 부회장이었던 댄 암스투츠이기도 하다. 카길과 WTO농업협정의 목표는 정확히 일치한다. 그것은 바로 남반부 시장의 개방과 농민농업을 기업농업으로 바꾸는 것이다.
현재 WTO규정은 무역에 대한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식량이 어떻게 생산되고 누가 식량생산을 통제하는지 결정하고 있다. 그 핵심에는 카길사의 아시아 시장 장악이 있다. 자족적인 아시아 식량경제를 의존적 경제로 변화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의 전략이다.
카길에 대해 좀 더 짚어 보도록 하자. 흔히 세계 5대 곡물 메이저라고 부르는 회사들이 있다. 카길 외에도 루이 드레프스, 앙드레, 인터콘티넨털등이 그에 꼽히는데 99년 11월 카길은 인터콘티넨털의 곡물 사업 부문까지 인수했다. 카길의 02년 매출은 508억 달러, 순익은 8억2천만 달러. 상장 되지 않은 미국 개인 기업 중에 가장 큰 규모, 75인의 친인척에게 집중된 주식 수, 박정권 당시 쌀 수입과 미국 의회 로비를 둘러싼 박동선 게이트의 배후.

농민을 죽이고 농업을 죽이고 세계의 목줄과 먹거리를 자본으로 통제하겠다는 것이 카길과 WTO농업협정의 목표이고 이경해 열사는 그것을 폭로하며 전세계 농민과 민중을 대신해서 자결한 것이다. 어제부터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전국의 농민들은 쌀관세화를 반대하며 거리로 나선다. 이미 어제 그들은 90여대의 트랙터를 스스로 몰고 자신들의 목숨과도 같은 쌀을 갈아 엎었다. 꿇고 죽을 것인가 일어서서 살 것인가라는 갈림길 가운데 한국 농민들은 후자를 택했다. 오늘 우리는 이경해다.
이경해 열사가 자결한 바로 그 날 사파티스타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칸쿤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일부를 인용함으로 끝을 맺겠다.
"우리들 모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상 안에서 살되 종으로 살든가 아니면 세상 밖에 있으라는, 즉 삶을 버리라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으로 살든가, 아니면 죽으라는 이 선택을 따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안의 세상을 만드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세상에 인간성의 미래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전세계 다섯 대륙 곳곳에 살고 있는 민중들의 손아귀에 그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대안의 세계는 가능합니다.형제자매 여러분, 전세계에 걸쳐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한 이견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자들은 복종과 냉소주의, 어리석음, 전쟁, 파괴, 그리고 죽음 등을 세계화하려 합니다. 아래 있는 사람들은 저항과 희망, 창조성, 지성, 상상력, 삶, 추억,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의 건설을 세계화하려 합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우리는 세계무역기구(WTO)라는 죽음의 열차가 칸쿤은 물론 세계 모든 지역에서 탈선하기를 기원합니다."
홍미루, 곽동각....짱깨집 이름이 아니라 사람이름이다. 홍미루는 노문과 선배 이름이고 곽동각은 고대 영문과 후배 이름이지...가끔 이렇게 중국집틱한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신속한 배달과 서비스 군만두를 무기로 삼는 정말 실력없는 중국집들이 동네마다 산재해 있지만 그래도 신촌엔 괜찮은 중국집들이 꽤 있다. 화교타운으로 유명한 연희동에 가면 본토인들이 하는 중국집들이 수도 없고 그 중엔 비싼 료릿집들도 있지만 허름하지만 짜사이(중국식 김치? 장아찌?) 까지 챙겨주는 저렴하고 먹을만한 식당들이 점점히 박혀있다.(예전엔 화교들이 하는 중국집엘 가면 대만 총통 사진을 떡하니 걸어놓곤 했다. 그런데 요즘 천수이벤 사진 걸어놓은 집은 하나도 못봤다. 왜일까? 아마도 천수이벤이 분리독립주의자이자 대만성 출신이라 실향민 취향에 안 맞는거겠지.)
연희동 쪽 아니라 신촌에도 갈만한 중식집들은 역시 꽤 있다. 물론 고등학교 때 참고서값 삥땅쳐서 구석 방 하나 턱 잡아 탕수육 하나 시켜놓고 간만에 뺴갈 기울이곤 했던 약간 지저분하지만 편안한 그야말로 중국집은 이젠 찾기가 힘들다.
게다가 짜장면이라고 말하면서 자장면이라고 표기하는 바로 그것, 이삿짐 들여놓고 풀기 직전에 먹는, 당구장이나 만화방에서 먹는 바로 그 자장면이 맛있는 곳은 찾기가 힘들다. 예전에 태원 같은 곳은 여기 짜장면 둘 이요 하고 주문하고 나무젓가락을 뽑아드는 순간에 턱하니 자장면이 나와 황당하기도 했었지^^ 요즘은 글쎄....신신원 쟁반짜장이 먹을만하긴 하지만 내 입맛엔 너무 달착지근하게 느껴지더라. 굴짬뽕으로 유명한 복성각 자장면이 먹음직한 갈색에다가 약간의 기름기가 돌면서 물기가 많고 풍성한게 고춧가루 착 쳐서 먹으면 어금니 사이에 신침이 돌게 하더라.
자장면에 한정하면 실망스럽지만 요리 먹을 집들이야 꽤 많다. 좁은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야 하는 점이 외려 중국집 다운 신뢰를 주는 홍매도 그러하고 아까 말한 복성각도 그렇다. 물론 자유총연맹 옆에 있는 복성각은 옛날식 방을 갖춘게 아니라 룸을 갖춘 집이긴 하다. 명물 거리 쪽으로 가보자면 세계 삼대 요리라는 북경오리 카오야 집도 뭐 굳이 따지자면 중국집이긴 하고...(글쎄 여긴 비싸서리...) 매콤한 요리들로 여성팬들의 인기를 끌고 있고 한때 여러 언론을 타기도 했던 완차이도 퓨전 요리집에 가깝지만 난잡스럽지 않아 좋다. (근데 이 곳도 내 입맛엔 좀 맛이 가볍지...)
그리고 완차이랑 맞붙어 있는 리틀 차이나는 정말 강추 업소다. 여긴 좀 불편한 점이 있긴 하다. 일단 식사류를 팔지 않는다는 점, 저녁때만 문을 연다는 점, 테이블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 등이 그 단점들인데 외려 식당이란게 좀 이런 맛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난잡하지 않은 빨간색으로 이미지를 통합한 인테리어 또한 식당과 잘 어울린다. 근데 식당 이름은 좀 너무 없어 보이지 않나? 리틀 차이나가 뭐람. 포인트가 없잖아...
리틀 차이나 같은 경우엔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평일에도 거의 손님들이 테이블을 가득채우고 있다. 술은 아주 다양한 종류를 팔고 있지만 료리가 그리 다양하지도 않다. 대략 열가지 정도? 그 중에서 국물이 있는 음식은 딱 한가지다. 게살스프가 그것인데 맵싸한 맛이 참으로 뛰어나다.그 밖에 요리들도 맛이 잡스럽거나 달착지근하지 않은게 입에 착착 붙는 편이다. 근데 이 집은 식사류를 팔지 않기도 하거니와 식당이라기 보다는 술집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래서 더 맘에 드는지도 모르겠다. 주고객층은 주로 이십대 중후반에서 삼십대 초반 정도.
일전에 이집에 갔다가 카운터 옆에서 숙제에 열중인 초등학교 2,3 학년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주인 딸래미를 보고 '넌 참 좋겠다. 난 어릴적에 우리집이 중국집 하는게 꿈이었었는데~' 하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 말을 엿들은 주인 아주머니 코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웃으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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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번주 금토가 연고전인데 맡고 있는 중책이 있는지라 참석할수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ㅜㅜ 노력해볼게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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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금요일 좋습니다. 그럼 그때 뵙도록 하지요. 맛난 안주에 걸맞는 맛난 술도 하나 가져갈꺼나~?^^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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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 드뎌 일정을 잡으셨군여..며칠동안 소식이 없길래, 거창하게 이벤트 운운하더니 보기좋은 잔치에 먹을것 없다는 말은 아닐거라 기대해 봅니당.금요일, 저도 '대환영'임다. 그럼 그날 뵙죠..
참고로, 요리에 필요한 재료라도 있음 그걸 가져가는걸로 회비를 대신(?)할수는 없으까..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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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 뭐.거의 항상 됩니다.- -; 물론 17일도~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