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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오늘(9.2)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

1945년 9월 2일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동시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미, 소 양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발표했다.

 

이차대전의 종결 외에 이 사건은 두가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미 최고 사령부(GHQ)가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다는 것(최고 통치자는 맥아더, 전후 일본 국민들은 맥아더를 마치 천황처럼 모셨다. 자신들을 패배시킨 점령군 최고사령관을 뼛속 깊이 통치자로 인정했다는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좀 이상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미 국무부의 대령 두명이 (이 중의 하나는 나중에 미 국무장관까지 오른 러스크이다.)사무실에서 지도를 보며 그은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게 된 점이다.

 

9월 2일 항복문서 조인 이전에 사실 다 짜여 있긴 했지만 미 최고사령부는 천황에게 손을 대지로 안기로 결정했다. 실제 전후 일본에서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 세력은 공산주의자(다른 세력들은 전부다 침략전쟁에 동의, 참여했기 때문에) 밖에 없을 뿐더러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일본도 빨간 물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소비에트의 확장에 대응하기 위해선 천황이라는 구심점을 남겨둬야만 한다는 미국의 판단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 국내에서도 일억 총참회론 이라는 하나마나한 이론이 갑자기 퍼지기 시작하면서 천황은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글들과 가라타니 고진의 여러 책들을 참조하라. 특히 고진의 윤리21은 분량도 작고 쉬운 것이 참 읽을 만 하다.(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서도)

 

일본에 대한 성공적와 대중적 인기의 급등으로 간이 배밖에 나오기 시작한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와중에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기까지 했다.그 유명한 만주 원폭 투하론이 그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좀 아는 척하는 우파들은 625때 만주에 원폭만 투하했어도 통일 된 건데 말야 하면서 헛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결국 맥아더는 하와이로 불려가서 짤리고 말고 미의회에서 나름대로 유명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퇴역했다. 당연히 대통령 후보가 될 줄 알았지만 역시 이차대전의 영웅이고 서민적 풍모를 지닌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자리에 올라 한국전쟁에도 휴전 드라이브를 걸었다.

 

파월이 그나마 부시 정권에서 비둘기파인것이나 아이젠하워가 한국전쟁의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이 된 후 그 공약을 지킨걸 보면 군바리들이 총 무서운 줄 아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반도의 미소 분할 점령 과정은 다들 알겠거니 싶어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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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오늘(9.1) 리비아 쿠테타 일어나 왕정 무너지다.

미안하다. 오늘이 아니라 어제다. 사실 이거 몇명이나 보는지 알 수도 없고 반응도 차가움에도 불구하고 귀찮기는 와방 귀찮은데 확 때려치울까 싶기도 하다--;; 달랑 한 열흘 했는데 이렇게 빨리 위기에 봉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집 인터넷이 갑자기 안되는지라 사무실에서 밖에 못하는 탓도 크다. 이해해달라.

 

1969년 9월 1일 리비아에서 카다피 대위가 쿠테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렸다. 60년대 3세계 쿠테타 열풍의 막차를 탄 것이다. 왕정을 무너뜨린 쿠테타 그리고 그냥 쿠테타가 60년대에는 참 많았다. 금방 생각나는것만 해도 터키, 이라크, 한국, 이집트, 리비아...

 

그 공통점은 한국을 제외하곤 제 나라 민중들의 지지를 받은 쿠테타였다는 것이다.(사실 516 터졌을때 좋아했다란 양반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긴 하다.) 식민지 신세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빅 브러더들은 자신들이 통제하기 쉬운 통치자를 원했기에 부패한 구 왕족들을 골라서 왕권을 쥐어주고 배후조종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왕가들은 민중들의 이해와 요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식민 종주국과 자신들의 이해에만 집중 했었고 불만은 거의 폭발 수준에 달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60년대 동시다발적 쿠테타의 배경이다.

 

60년대에 뽀개진 왕정과 유사한 행태를 보이는 왕정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우디 아라비아.

 

하여튼 리비아 민중들은 쿠테타를 열렬히 환영하고 카다피 대위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뜻 받아들였다. 쿠테타 하자 말자 지 계급장에 지가 별네개씩 다는 짓거리 하는 우리나라 쿠테타 대빵들과 달리 카다피는 쿠테타 이후 이십년이 지나서야 대령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물론 지금 카다피의 공식직책은 국가원수 이다.

 

동아건설의 대수로 공사등으로 인해 우리와도 친숙한 리비아는 카다피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독자노선을 걸었고 카다피는 미국의 공적 2호라면 서러울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매일 잠자리를 바꾸기도 했다는데...

 

물론 리비아가 꾸준히 독자노선을 걸을 수 있는 바탕에는 풍부한 원유매장량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제와 억압위주의 통치가 아닌 민중들의 지지에 기반한 통치가 더 큰 기반이 아닐까 한다. 미국이 섣불리 카다피를 건드리지 못한 것도 그 탓일게고....

 

마냥 멋지기만 하던 카다피도 맛이 가는 모습을 요즘은 조금씩 보이고 있다. 리비아 축구협회 회장인 카다피의 아들이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유벤투스의 이사가 되지 않나? 페루쟈에 선수로 등록하지 않나...

 

국제적으로도 리비아는 조금씩 변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팬암 항공기 폭파 사건의 배후로 오랫동안 경제적 제제를 받던 리비아는 이라크가 박살나는 모습을 보고 쫄았는지 모르겠는데 미국과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다. 이라크 하나로도 벅찬 미국 또한 짝짜꿍을 맞추고 있고..

 

카다피가 맨날 들고 다니는 그린 북(green book, 이슬람과 사회주의의 짬뽕)을 보면 주체사상이 생각나기도 한다.

 

요즘 나타나는 카다피의 적극적 세계화(?)가 민중들의 생존과 자유를 위한 것인지 자기 권력의 연장을 위한 것인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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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오늘(8.31)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 설립

이 연재물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시는 극소수의 독자들에게 유감의 마음을 전한다. 어제는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빼먹고 말았다. 구구한 변명은 하지 않겠다.--;;

 

1980년 8월 31일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Solidarity)가 그다니스크 조선 노동자 레흐 바웬사의 주도하에 설립되었다. 요즘은 이런 연대 저런 연대 참 많지만 ..(난 심지어 '살아있는 연대'라는 슬로건을 내 건 선거팀에도 있었던 적이 있다.)연대라는 말이 아주 흔하지만 solidarity(연대)가 고유명사로 세계적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는 바로 폴란드 자유노조의 설립이었다.

 

앗 인터뷰 해야 된다. tobecontinued

 

사실 폴란드는 동독, 체코와 더불어 구 동구권내에선 선진국으로 분류되었다. 어설프게 김일성 흉내낸 차우셰스쿠가 깽판친 루마니아나 알바니아 같은 국가들에 비해선 정치, 경제적 면에서 확실히 우위를 보였던 것이다. 뿐인가? 좀 경우는 다르지만 교황까지 배출한 국가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또한 현실사회주의 특유의 관료주의, 비밀경찰의 전횡, 보신주의, 노동자 직접행동에 대한 통제등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햇다. 그리하여 연대노조가 설립된 것이다.

 

근데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의 80년은 어떠했던가? 공산주의 국가 폴란드에서 자유노조 가 설립되 위원장이 반정부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고 수만 대오를 이끌고 파업을 했던 그 80년의 한국은 피와 눈물로 점철되있었다. 군부는 자기네 나라 시민들을 향해 총과 칼을 휘둘렀다......

 

연대노조의 정치적 효과는 미묘하다. 레이건 정권은 연대노조에 대해 열렬한 찬사를 보냈고 연대노조를 최대한 이용했다. 공산권을 비난하는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바웬사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두 폴란드 인은 80년대 내내 친미진영의 선전도구로 사용되었었다, 자신의 의도가 어떤가와는 상관없이....

 

바웬사는 연대노조 활동으로 인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수상을 위해 국외로 나가면 다시 입국하지 못할까봐 그는 출국하지도 않았다. 평화상 수상과 이런 저런 일들은 미국에 의해 충분히 이용되었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그는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에 참여해 '연대' 노조와 다른 노조들의 법적 지위 회복, 새로 부활된 폴란드 의회 구성을 위한 자유로운 의원선거, 대통령직의 설치, 일정한 경제적 변화조치의 발표 등을 얻어냈다. 결국 1990년 폴란드의 초대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직 수행기간 내내 벌어진 경제적, 사회적 혼란과 무기력함은 그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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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오늘(8.30) 한국노총 결성

내일 아니지 오늘은 각종 회의와 기사로 인해 바쁠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에 이봉주를 응원하면서 미리 써놓고 자고자 한다.

 

1961년 8월 30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16개의 산별노조와 1개의 연합노조를 거느리고 출범했다.

 

'우리 노동자는 생산의 직접 담당자이고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또한 우리는 사회정의 실현의 선구자이고 평화의 강력한 옹호자이며 전진적 문화 창조의 주역이다. 우리 노동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같은 역사적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하여 장구한 시일에 걸쳐 조직적 통일을 바탕으로 자유·민주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줄기차게 매진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힘찬 전진을 수행해 나갈 것이다.'

 

윗 글은 어디에서 발췌했게? 예전에 하종강의 홈피를 어슬렁거리다가 읽고 감동먹은 글인데 놀랍게도 한국노총 선언의 맨 앞부분이다--;;

 

일제에 의한 자본주의 이식이후 한국 노동운동은 피와 땀의 역사를 써왔다. 일제하에서 수많은 적색노조가 노동해방과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했고 원산 제네스트에는 일본 노동자들도 적극 협력하여 아름다운 국제주의를 구현했었다. 해방 이후 전평의 투쟁에 맞서 이승만이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결성을 지시했다. 이후 전평이 불법화 되어 해산당하고 대한노동조합 총연합회가 결성되니 이것이 바로 한국노총의 직접적 전신인 것이다. 

 

독립촉성노동총연맹은 용산 철도파업, 46 총파업을 깨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웠으니 그 선봉에 선 분이 바로 장군이 아들 긴또깡 (김두한)이다. 아마 '야인시대' 에도 관련된 꼭지가 방영된 것으로 아는데..

 

하여튼 대한노동조합 총연합회는 반공전선, 노동운동 파괴 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며 자유당의 외곽부대로서 그 소임을 충분히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6 직후 해산 되었다가 약 세달 후인 8월 30일 박정희의 재가를 얻어 한국노총을 드디어 건설했다.

 

한국노총은 그로부터 약 삼십년간 사이비, 어용의 한길로 매진해왔다. 물론 한국노총 원풍모방지부, YH노조, 동일방직 노조등 몇몇 민주 노조들이 있었으나 그 노조들은 만날 한국노총에 의해 탄압받기 일쑤였다. 한국노총은 반공궐기대회의 주요 멤버였고 재수 좋으면 위원장들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픽업되기도 했다. 또한 87년 4월 13일 전두환이 호헌선언을 한 이후 한국노총은 예총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호헌지지선언을 하며 '직선제는 안돼'를 외쳤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세워진 이후 한국노총은 설자리를 위협받기 시작했고 90년대 이후에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91년 ILO가입을 필두로 하여 노동법 개악 반대투쟁에선 민노총이랑 연대하기도 하는등 이젠 한노총 위원장이 삭발을 한다거나 한노총 사업장에서 빨간 머리띠가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제 과거의 행적들을 근거로 오늘의 한노총을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첨언: 04년 5월 취임한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한달 만에 한국노총 중앙조직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직급별 호봉 대신 직무 경력과 능력에 따른 다면평가를 실시해 연봉제를 도입한다. ▶성과급을 도입, 상여금 600% 중 200%를 본부별 평가를 통해 차등 지급한다. ▶장기적으로 평가를 통한 개인별 차등지급제를 추진한다'.그 와중에 76명의 한국노총 사무국 직원중 30명이 넘는 인원이 노총을 떠났다. 또한 노총은 또 주5일 근무제 도입에 맞춰 월차휴가와 하계휴가는 폐지하고 연차휴가는 축소하기로 했다. 아햏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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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오늘(8.29) 영국과 중국 난징조약 체결

아 귀찮아 죽겠다ㅠ.ㅠ 하여튼 가는데 까지 가보자.--;;

 

1842년 8월 29일 영국과 중국이 아편 전쟁 종결을 위한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난징조약은 극동에서 맺어진 대표적  불평등 조약이다. 조선, 중국, 일본에서 이후 맺어진 수많은 불평등 조약의 모델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심지어 일본은 미국 해군 제독 페리에 의해 맺어진 자신들의 불평등 조약을 조선에 그대로 써먹기도 했다.(강화도 조약) 

 

난징에 정박중인 영국 군함 콘월리스 호 선상에서(콘월리스라..어디서 들어본 기억이 나지 않나? 헐리우드 영화 '패트리어트'에서 귀족적 후까시를 자랑하다가 맨날 멜 깁슨 에게 뒷통수를 맞던 영국 장군의 이름이 바로 콘월리스다.) 청나라 전권대사 기영과 영국 전구대사 포틴저가 이 조약을 조인했다. 비준서는 1843년 홍콩에서 교환됐다. 주요 내용만 짚어보자면 1) 홍콩의 영국 할양. 2)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5개항의 개항. 3)개항장에 영사 설치 4) 전베 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 몰수당한 아편 보상금으로 600만불 영국 지불 5)공행과 같은 독점상인 폐지(공행은 우리나라의 시전상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6) 관세의 제한 7) 청,영 두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

 

이 강제적이고도 불평등한 조약에 대해 알기 위해선 먼저 아편전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산업혁명 이후 상품시장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영국은 중국과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청나라의 비단, 차, 도자기는 영국 내의 대표적 인기 사치품이었기에 무역역조 현상은 심각했다. 중상주의 정책이 일반적이던 당시로서는 용인 할 수 없을 정도의 무역적자가 발생했던 것이다. 물론 은의 대거 유입으로 청나라의 인플레이션 현상도 꽤 심각했지만...

 

영국이 인식하기에 이 무역역조의 근본원인은 광동 무역체제였다. 중국의 유일한 대외무역 창구는 광주였고 청의 허가를 얻은 공행이라는 독점적 상인길드를 통해서만 거래가 가능했다. 몇번 사신을 파견해 광동 무역체제를 혁파하고자 애썼으나 답답할 것이 없는 청나라가 그것을 들어줄리는 만무했다. 이 때 영국이 비장의 무기로 삼은 상품이 있었으니 바로 그것이 아편이었다. 사실 영국에서 아편은 고급 상품이기도 햇다. 쿨리지를 비롯한 19세기 영국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아편에 취해 쓴 작품들이 많고 또한 아편을 찬양하는 작품들도 다수 있을 정도였으니....

 

영국의 정책은 대성공을 거두어 중국은 아편 중독자로 넘쳐났고 1830년대에 들어선 무역역조 현상이 역전되었으니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드디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청나라 군대내의 아편중독자 급증, 관리들의 아편중독등으로 국가가 흔들흔들할 지경에 이르자 청나라 도광제는 임칙서라는 칼을 뺴들었다.

 

흠차대신(전권대신이라는 의미이다. 김용의 소설 녹정기를 떠올리라. 위소보가 강희의 흠차대신으로서 많은 활약을 하지 않았던가?)  임칙서는 청렴, 과감을 무기로 유명무실했던 아편 금지령을 확고히 하고 영국상인의 아편을 몰수 하였는데 영국은 이에 대해 황당하게도 전쟁으로 대항했다. 지리멸렬한 전투 끝에 결국 그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결국 난징조약으로 연결된 것이다.

 

사실 영국 국내에서도 이 비도덕적인 전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컸었다. 그러나 영국이 이 전쟁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편 재배가 식민지 인도에서 큰 지위를 차지 하고 있었고 아편을 통해 중국으로 얻어진 은이 영국 중심 세계무역의 밸런스를 결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무역상 군사상 근거지 획득이란 요구들을 일거에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편전쟁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어떤 전쟁이 생각나지 않는지?

 

 

첨언: 1997년 7월 1일을 기해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었다. 이 때 영국의 마지막 총독 패튼은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유니언 잭을 내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무슨 의미였는진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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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오늘(8.28) 후안 사마란치,제 1회 서울 평화상 수상결정

1990년 8월 28일 후안 사마란치 당시 IOC위원장이 제 1회 서울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상금은 미화 20만불.

 

서울 평화상이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상이다. 88올림픽이 끝나고 흑자를 좀 많이 봤다고 해서 전두환의 명에 의해 제정된 상인데 그야말로 일해재단이랑 삐까먹는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수상자 면면을 살펴보자. 제 1회 사마란치 IOC위원장, 제 2회 조지 슐츠 당시 미 국무부 장관, 제 3회 국경없는 의사회, 제 4회 코피 아난 UN사무총장, 제 5회 오가카 사다코 UN고등 판무관, 제 6회 옥스팜.

 

사마란치는 올림픽을 통해 세계평화에 이바지 했다는 명목으로 조지 슐츠는 냉전체제를 타파했다는 명목으로(우엑. 이 자는 로널드 레이건의 오른팔로서 군비경쟁을 통해 소비에트를 어려움에 빠뜨린 바로 그 자가 아닌가?)수상했다. 그러나 사마란치가 88올림픽 개최권 획득에 힘 실어줬다는 이유로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마디로 정주영의 불도저식 로비에 넘어가준 댓가로 상도 받는다는것인데....진정한 꿩먹고 알먹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수상자만 보면 3회 부터는 뭐 좀 그럴듯하긴 하다. (이 상은 이년에 한번씩 시상된다.) 그러나 수상자들은 이 상의 권위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금의 액수에 놀라고 있는 형편이고 현재 서울평화상의 주체인 서울평화재단의 이사장은 이철승(해방정국 우익학생운동의 거두이자 사쿠라 야당정치인 출신의 반핵반김 전선의 선봉장)이 세번째로 연임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안 사마란치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후안 사마란치는 카탈루냐 지방의 은행가 집안 출신이다.(그렇다 조지 오웰의 소설 '카탈루냐 찬가'의 바로 그 카탈루냐이다.) 카탈루냐 지방은 스페인 내에서 바스크 와 더불어 독립적인 지역으로서 스페인 내전 당시에 공화파의 중심지역이기도 했다. 카탈루냐 찬가를 읽어보길...프랑코 왕당파가 아닌 스탈린 주의자들에 의해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공격받는 비참한 상황이 상세하게 다뤄지고 있다.

 

하여튼...후안 사마란치는 1920년 출생해 내란 이후 독재자 프랑코의 졸개로서 한 세상 잘 보낸 인물이다. 프랑코 정권의 외교관으로 출발했다가(몽골, 소련 대사 역임) 국제 스포츠계에 발을 들여다놓은 이후 승승장구 IOC위원장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한마디로 박정희 정권 외교관, 경호실 간부 출신으로 국제태권도 연맹을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빵에 들어가 지금은 콩밥을 잡숫고 있는 운용은 사마란치의 작은 버젼이라고 할 수있다.)

 

사마란치가 올림픽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던가? 1980년 IOC위원장에 오른 직후 올림픽은 냉전의 도구로서 사용되었다.(88올림픽이 냉전 올림픽의 마지막 꽃이었다.) 그 뿐 아니라 강력한 상업화 정책을 통해 그나마 체면 차리던 근대올림픽을 다국적 기업의 선전장으로 탈바꿈 시켰다. 막판에 자기 고향에 올림픽 개최 한 번 몰아준다음 명예위원장으로 자리를 바꿔치우고 지금도 잘먹고 잘 살고 있다.

 

첨언: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여전히 사마란치는 초특급 vip대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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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오늘(8.27) 장준하 출생

 먼저 '오늘은' 을 기다리는 극소수의 독자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드디어 빵꾸를 냈다.--;;

변명을 하자면 이사와 결혼식(내 결혼식이 아니다!)을 비롯한 개인적 용무들이 많았다는건데...많은 이해 있기를 바란다. 물론 언젠가 또 빵꾸를 내겠지만 노력하겠다는 말씀 다시 드린다.

 

 1918년 8월 27일 장준하(1918-1975)가 평북 의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꼿꼿한 대쪽의 그것이다. 장준하는 삭주 대관 보통학교를 거쳐(리영희도 삭주 대관 보통 학교출신이다.) 선천 신성중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일본신학교에서 학병으로 징집된후 이른바 '6천리 장정' (장준하의 '돌베게'와 김준엽의 '장정'을  참고하라. 나 개인적으론 돌베게보다 장정을 흥미롭게 읽어싸.)을 통해 광복군에 몸을 담았다.

 

그의 광복군 생활은 일년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특기할 만한 사실은 김준엽과 함께 OSS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OSS- CIA의 전신으로 이차대전 당시 미군 정보기관) OSS교육은 국내진공을 위한 것이었으나 일군이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을 국내진공하고자 하는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김구가 일본의 빠른 항복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만일 일군의 항복이 좀 늦어졌고 광복군이 진공을 했다면 해방정국의 방향추는 아마도 좀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여러 증언들에 의하면 장준하는 해방정국에서 장준하는 광적이리만큼 반공적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우익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의 교무처장을 역임했는데 조선민족청년단은 육이오 와중의 부산정치파동(이승만 장기집권을 위해 국회를 압박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에 연루되기도 한 조직이다.

 

또한 장준하는 술 먹는 자리에서 잔을 뒤집어 놓고 성경책을꺼내 술상에 놓는 사람이었다고도 한다. 족청 교무처장으로 지낼 당시 훈련생들이 무기명으로 쓴 논문의 필적을 조사해, 누구 누구가 공산당 같다고 할 정도로 극우 사상을 가졌었다고도 전해진다.

 

장준하의 이런 극우성은 어디서 비롯된것일까? 물론 리영희도 통역장교 출신, 문익환도 마찬기지이고 함석헌은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의 배후 조종자 였을정도로 당시 서북출신 기독교문화권의 지식인들은 특히 우익적 면모를 강하게 보였었다.

 

한가지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보자면 장준하가 몸담고 있던 광복군이 적들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이나 다니고 마지막에 가까스로 미군에 의해 훈련을 받게 된데 반해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는 항일 전선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데 대한 자격지심은 아닐런지? 

 

장준하의 반박정희 투쟁은 너무나 잘알려졌기에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2공화국 당시인 1961년 1월 장준하는 국토건설본부의 기획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이은 516 쿠테타로 그 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국토건설본부의 사업안은 이름만 바뀐채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도용되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포천 약사봉에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은 실족사로 밝혀졌으나 의심의 여지가 너무나 많았고 아직도 의문사 진상규명 대상에 포함되어 있고 국정원이 제시판 과거사 과제에도 포함되어있다.

 

첨언: 청년 장준하라는 뮤지컬이 한참 공연중이다. 이부영은 장준하 기념사업회 회장이란 명목으로 자기 선전에 장준하를 잘 써먹고 있고 노무현도 직접 관람했다. 장준하 정신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발언도 남기면서...그리고 8월 28일 자이툰 부대 본진이 성남공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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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오늘(8.26) 미국, 여성 참정권 인정

 1920년 오늘 미국은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1792년 <여성권리옹호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적극적으로 여성의 평등과 권리를 주장한 이래로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 치세의 19세기말과 20세기초  영국의 활동가 에밀리 굴덴 팽크허스트와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는 주목할 만 하다. 제국주의 영국의 팽창과 더불어 남성들의 선거권은 점차 확대되고 있었으나 여성 정치권은 무시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경우 1913년 한해동안만  12차례 단식 투쟁을 벌였다고 한다. 또한 시위의 양상은 점점 격렬해져갔다. 1913년 WSPU의 일원인 에밀리 데이비슨이란 여인이  경마장에 난입해 시위를 벌이다가 말발굽에 밟혀 사망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투쟁은 더욱 강화디었고 건물들이 파괴되고 불타기에 이른다.

 

결국 일차대전의 발발과 여성 노동력에 대한 수요의 급증으로 영국에선 1918년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뒤이은 1920년 미국에서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미국의 여성 참정권 획득은 수잔 B 엔터니에 빚진바가 크다. 1820년 태어난 그녀는 재산권법 제정으로 시작하여 여성의 권위 향상을 위해 지칠줄 모르고 뛰었으나 결국 참정권 획득을 보지 못하고 눈감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1898년 <여권통문>이라는 글을 통해 최초로 여성 참정권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후 1919년 4.11 대한민국 임시정부 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여귀천및 빈부의 계급이 무관하게 일체평등' 이라고 명시했다.

 

실질적으로는 대한민국 제헌의회 선거 부터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으나 한국의 여권이 그만큼 인정 받았다고 말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한국의 여성참정권이 정부수립과 동시에 보장된 것은 여성의 목소리와 투쟁에 의해 획득 되었다기 보단(근우회등이 일제강점기 부터 여성운동을 펼치긴 하였으나 김활란등 일부 상층부가 열매를 다 따먹었다는 평가가 있다) 좋은거 다 갖다 붙인 헌법  덕인 부분이 크다고 말할 수있지 않을까? 스스로의 투쟁에 의해 얻어지지 않은 권리이기에 소중함이 덜 했었을 수도 있는듯 하다.(사실 이런 말 하기 상당히 조심스럽다)

 

참정권의 획득은 첫발에 불과하다! 평등세상의 대장정에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광 있기를..

 

첨언: 2004년 5월 16일 쿠웨이트 내각은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마침내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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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오늘(8.25) 박홍 주사파 파문 터뜨리다.

1994년 8월 25일 당시 서강대 총장 박홍이 여의도 클럽 토론회에서 1987년 이후 전국 대학에서 배출된 주사파 세력이 15,000에서 30,000명에 이르고 이들이 졸업후 정치, 언론등 각계로 진출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취임 당시 '어떠한 동맹도 민족에 우선할 수 없다'라는 파격적 취임사를 통해 전향적 모습을 보였지만 김영삼의 개혁드라이브는 94년으로 접어들어가며 흐지부지 되는 모습을 보였다.뒤이어 94년 봄 김영삼은 우루과이 라운드 쌀개방 파동을 통해 '대통령 직을 걸고 쌀개방만은 막겠다'던 자신의 호언장담을 썡까버렸다.

 

곧 이어 정국돌파용으로 김영삼은 김일성에게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놀랍게도 김일성 또한 그 회담을 전격적으로 수락했다.(정국 돌파와 여론 반전을 위한 김영삼의 노림수와 대북봉쇄와 자연재해, 천리마식 경제개발의 한계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김일성의 속셈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속셈이야 어떻든 전향적인 제안이었고 남북관계는 유화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조선일보 조차도 어리둥절해 했고 대놓고 반대하지 못했던 하여튼 김영삼 특유의 퍼스낼러티가 발휘된 사건이었다.

 

한편 민족주의 정국에도 불구하고 94년 6월 24일 지하철 노조는 파업을 벌였고 철도 기관사들 역시 전평 총파업 이후 최초로 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좌파 학생들은 농활을 미룬채 궤도 농활을 외치며 연대투쟁에 돌입했으나(나 또한 미제의 압잡이가 되기 위한 카투사 원서를 찢어버리......고 간게 아니라 투덜거리면서--;; 합류했다)   가열찬 투쟁은 남북 정상회담에 묻혀 학생운동의 다수였던 NL계열의 큰 호응을 얻진 못했다.

 

이러던중  별안간 들려온 김일성의 사망 소식은 정국을 급반전 시켰다.

 

어리둥절 해 하던 다수 언론과 다르게 조선일보는 발빠르게 김일성 까대기를 시작했고 뒤이어 정부가 조문을 할 용의는 없는지 물었던 당시 민주당 이부영 의원에 대한 공격, 각 학교에서 터진 조문 파동.....유화적이었던 사회분위기는 공안정국으로 급반전됐다. 언론, 보수정치권, 경찰, 검찰, 안기부는 그야말로 물만난 고기가 되어버렸다. 당시 우리과도 과방을 싹 뒤집어서 관련 문건들을 정리했을 정도였다.

 

이 때 독재에 저항했던, 학생운동권의 친구였던, 술고래라는 설명과 함께 범상치 않은 외모를 자랑하면 (BGM 두둥)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가 바로 그 였다.

 

박홍 총장은 94년 8월 25일 그 유명한 주사파 발언을 하였다. 주사파가 몇만명이고 그 중에 자신이 회개 시킨 사람이 수백이라는 둥, 예수께서도 일찌기 성전앞의 환전상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셨다는 둥 심지어 사노맹 뒤에 사로청이 있고 그 뒤엔 김정일이 있다는 골때리는 발언까지 하셨다.

 

물론 뭐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당시 주사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주사파가 사회 각처에 진출한것도 사실이다. 노무현의 오른팔로 삼성에서 승용차로 불법 정치자금 수십억 떙긴게 뽀록나 지금은 영등포 구치소에서 김대중의 오른팔이었던 박지원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있는 안희정, 그 안희정도 그 유명한 구국동맹의 일원 아니었던가? 미문화원 점거를 배후에서 기획했다던 전 삼민투 위원장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도 계시지 않던가? 어디 주사파 뿐인가? 에전엔 남로당원들도 많았고 남로당원들도 사회 각처에 진출하지 않았던가?(대표적인 예가 박정희^^)  

 

하지만 당시 박홍 총장의 그 발언은 우습지만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언론들은 박홍 총장을 용기있는 지식인, 시대의 양심으로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주사파를 구체적으로 거명하라는 질문들에 대해서 박홍은  스스로 나타나기 바란다고 말했으며 증거가 있냐는 물음에 대해선 증거 묻는 사람이 바로 주사파라는 심오한 답변을 내어놓았다--;; 그 뿐인가? 김일성 장학금을 탄 사람이 교수가 되어 있다는 연속된 발언들을 통해서 박홍 총장은 자신의 선배격인 매카시의 수준을 우습게 뛰어넘어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을 빵으로 보내 콩밥을 멕였던 박홍 총장은 이후 서강대 예수회 재단 이사장으로 영전해갔다. 그리고 박홍 총장 아니 박홍 재단 이사장님은 오늘날까지 이 사회의 공산화를 막기위한 험난한 길의 중심에 서 계신다. 지난 8월 17일 박홍 재단 이사장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부 사학의 비리를 이유로 모든 사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것은 사회주의화 교육을 하자는 것이고 공산주의화하자는 것이다. 사학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지원은 못해 줄 망정 경영권을 빼앗아 교사ㆍ교수들에게 주자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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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오늘(8.24) 미국, 공산주의자 단속법 제정

 헥헥 자정 이전에 그날 글 쓴다는게 역시 힘들군....

 

1954년 8월 24일 미국 의회는 '공산주의자 단속법'을 제정했다. 국가보안법이라던지 치안유지법 같은 그럴 듯 한 이름을 가진 법들도 많은데 역시 미국은 화끈하게^^ 공산주의자 단속법(Communist Control Act) 이란 이름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공산주의자 단속법 하면 바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조지프 R 매카시 위스컨신 주 상원의원. 상원의원이 대단한 권세이긴 하지만 한 주당 두명씩 있는것이 상원의원이니 상원의원 명함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는 힘들지만 매카시는 그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이다. 우리에게 50년대는 한국전쟁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미국의 50년대는 '매카시 시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매카시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 들어있는 종이 몇장을 말아쥐고 ' 이 안에 소련과 내통해 간첩행위를 하는 자들의 명단이 있소이다' 고 외쳐서 온 세계를 떠들석 하게 한 이후 이른바 '비미국적 반동행위' 상원청문회(HUAC, House committee on Un-Americas Activites)를 열고 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비미국적 반동행위 상원 청문회(헥헥 길기도 길다. 예전엔 집회 이름도 긴 것 많았는데 '우리민족 가로막는 반동적 제국주의 미국 규탄과 전노구속을 위한 서부총련 투쟁대회' 뭐 이런식 말이지...) 를 장식한 명단들을 화려하다. 로널드 레이건, 월트 디즈니, 엘리아 카잔등은 매카시의 압잡이로서 동료들을 팔아먹었고(이 당시 레이건은 연예노조 위원장이었다. 어디에나 자기 조직 팔아먹는 이런 개쉑들이 있다.)  찰리 채플린, 아서 밀러, 번스타인, 브레히트 등이 이 떄 톡톡히 고생한 사람이다. 결국 찰리 채플린은 스위스로 망명하기에 이르렀고ㅠㅠ

 

몇년전 이상한 역사 재평가 흐름을 타고 배신자 엘리야 카잔이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묘하게도 왼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앉은채로 침묵하거나 야유를 보낸 반면 오른 쪽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다수는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찰리 채플린이 죽기 얼마전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을 탈 때 전 관객이 일어서서 끝없는 기립박수를 보내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1949년 폴 스위지가 만든 먼슬리 리뷰 창간호에 Why Socialism? 이라는 멋진 글을 발표하여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자랑스럽게 해준 아인슈타인 조차도 공산주의자 단속법의 거미줄에 포착되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단속법 자체가 수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는데가 아인슈타인의 대중적 인기는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너무나 높았다. 그리하야 미 연방수사국과 매카시는 아인슈타인을 단속 대상에 넣는 대신에 괴상한 천재의 이미지를 퍼뜨리기 시작했고 아직도 아인슈타인에 대한 괴상한 천재란 이미지는 지배적이다.

 

이후 매카시의 뻥은 점점 실체를 드러냈고 미국시민 사회도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매카시의 정치적 생명은 끝장이 났고 법 제정 한지 삼년이 지나 불행한 죽음을 맞았다. 결국 공산주의자 통제법은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판정을 받아 소멸되고 말았다.

 

그리고 조지 부시는 2001년 10월 역시 그 이름도 황당한 '애국법'(Patriot Act)를 만들었다. 애국법은 미국 민중 뿐 아니라 해외인사에 대한 무차별적 도청, 감시, 통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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