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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오늘(9.12) 조선 공산당 재건

1945년 9월 12일 조선공산당이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되었다. 해방이후 남한은 미군진주와 상해임정 세력, 이승만 중심세력, 사회주의 세력들이 할거하여 극심한 혼란상을 보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투쟁했던 유일한 집단은 사회주의 그룹이었고 해방직후 건준조직에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중도 좌파, 좌파가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었다. 대중조직인 건준과 별개로 1945년 8월 16일에는 장안파 조선공산당이 결성됐고 20일에는 박헌영을 중심으로한 '조선공산당 재건 위원회'가 발족했다.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곧 당 재건의 전권을 박헌영에게넘기고 해체됐다. 박헌영은 즉시 조선공산당 재건에 착수했고 결국 9월 12일 드디어 당을 재건해냈다. 1928년 당 해체 이후 17년 만의 일이다. 국내 사회주의의 기원은 1918년 이동휘가 하바로프스크에서 결성한 '한인사회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파 고려 공산당이 국외에서 결성됐었고 국내에서는 화요회, 북풍회 등이 결성되어 활동했다. 지난한 조직 통합을 거쳐 1925년 4월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조선공산당이 건설됐다. 그러나 치안유지법(국가보안법의 모태)과 와 파벌 싸움이 겹쳐 1928년 해산된 것이다. 해산 이후에도 당 재건을 위한 투쟁은 뜨거웠다. 김삼룡, 이현상 등과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한 이재유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가입하며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한 이재유는 1944년 옥사했다. 다양한 부문, 다양한 수준의 그룹들과 협력하며 당재건 투쟁을 이끌었던 이재유의 활약은 가히 전설적이라 할 만하다.그는 야경꾼,벽돌공장 노동자, 농촌 지도자로 계속 변신하며 지하 활동을 했었고 34년 1월 서대문 경찰서에서 탈출하기도 했다. 37년 다시 체포될 때 그가 은신처로 삼은 곳은 바로 경성제대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의 관사 였다. 당시 조선일보의 머릿기사를 살펴보자. "탈주 탈주 탈주 4년간,적색거두 이재유 피체(1937년5월1일 호외)" 그리고 동아일보는 "경성제대 연구실 관사 금번 공산운동의 총본영"이라 보도했다. 정말 아름다운 국제주의의 실천이 아닐수 없다^^ 이재유 체포 이후에도 이재유 그룹 활동가들은 39년 박헌영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결성해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역시 해방후 재건 조선공산당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 재건 조선공산당의 본부는 서울에 있었고 평양에는 북조선 분국이 설치되었다. 북조선 분국의 책임비서는 김일성인데 김일성이 북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러한 것이 겠지만 엄연히 총비서는 박헌영이고 김일성은 박으로 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25년 창당된 조공의 역사가 짧았듯이 재건 조선공산당의 역사 또한 길지 않았다. 그 짧은 역사를 짚어보자. 1945년 9월 19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해방일보가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해방일보가 창간됐다. 해방후 조선공산당은 근택빌딩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지하에는 '조선정판사'라는 인쇄공장이 있었으며 해방일보 또한 정판사에서 인쇄됐다. 그런데 1946년 5월 15일 바로 그 유명한 조선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이 발표되었다.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과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을 비롯한 14명이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해방일보와 조선공산당은 미군정 당국에 의해 불법화 되었다.(사실 정판사 위폐 사건은 조작이라는 증언이 아주 많다.) 결국 당이 불법화 된 이후 박헌영은 강경투쟁으로 돌아선다. 그해9월에는 전평의 철도 총파업, 10월에는그 유명한 대구인민항쟁... 결국 소련의 조정에 의해 공산당 본부는 북으로 이동되고 김일성은 위원장, 박헌영은 부위원장으로 배치된다. 이 때부터는 조선공산당의 시대가 아닌 남조선 노동당, 북조선 노동당의 시대가 전개된다. 해방이후 조선공산당의 활동이 좌경화의 오류를 범한 것이지 강고한 투쟁에 앞장 선 것인지 판단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짧은 조공기간중 남한의 역량은 점차 줄어들고 북한의 역량은 고스란히 보존된데다가 남한의 역량까지 넘어가 날이 갈수록 강화됐다는건 분명한 것 같다. ▲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부 각료들의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일성(수상), 다음이 박헌영(부수상겸 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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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오늘(9.11) 살바도르 아옌데, 쿠테타군에 의해 사망

1973년 9월 11일 칠레 산티아고 대통령궁에서 살바도르 아옌데가 쿠테타 군에 의해 피격되어 사망했다. 아옌데는 피노체트 반란군의 해외망명제안을 거부하고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소총으로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사살당했다.

 

 

아옌데 최후의 모습을 담은 사진.

 

사실 911하면 우리는 지난 2000년의 WTC빌딩에 대한 비행기 테러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지난 삼십여년간 911은 세계민중들에게 아옌데의 죽음으로 먼저 다가왔다. 언제던가? 공중파 방송에서도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를 상영하지 않았던가?

 

1908년에 태어난 아옌데는 칠레 대학 의학부 재학시절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칠레에는 합법화된 공산당이 있었으나 코민테른의 통제가 칠레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옌데는 사회당의 길을 걸었다. 52년 부터 세차례에 걸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당선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69년 12월 칠레의 대중운동 조직 MAPU를 비롯하여 사회당, 공산당,진보당, 사회당은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는 외교관이자 정치가이며 위대한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였다. 네루다는 후보자리를 양보했다. 권력 싫어하는 사람이야 드문게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진리이지만 인상좋은 할아버지 시인 네루다는 정말 대통령 자리가 싫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인민연합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는 1970년 11월 5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는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권력이 선거를 통한 집권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칠레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자본과 백인 소수 상층부에 의한 경제적 지배, 극심한 빈부격차, 미군에 의해 교육받은 군부를 다 갖추고 있었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인민연합의 구리 광산 국유화, 경제 구조 재편에 대해 자본은 모든 수단을 다해 저항했다. 73년 칠레의 인플레이션은 300%에 달했고 운수자본가들은 상품 수송을 거부하며 사보타지를 일으켰다. 미국은 칠레의 주요 수출품인 구리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비축 구리를 국제 시장에 무차별로 풀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 민중들의 아옌데에 대한 지지는 강고했다. 73년 벌어진 총선에서 인민연합에 대한 지지율은 50%를 넘을 정도였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아옌데는 대통령 재신임 투표를 실시하고자 했다. 재신임안 통과가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바로 그 투표일에 쿠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쿠테타가 벌어진후 일주일 동안 칠레전역에서는 삼만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벤세레모스'(단결하라)라는 노래로 선거운동극을 만들어 온 나라를 누비고 다니던 누에바 깐시온의 기수 '빅토르 하라'도 이 떄 산티아고 경기장에서 총을 맞고 죽고 말았다. 심지어 병석에 누워있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파블로 네루다 또한 살해당할 뻔 하였으나 겨우 살해를 피하고 그해에 자연사했다.(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영혼의 집'을 권한다. 이사벨 아옌데는 피노체트 집권 이후 망명한 저널리스트 출신 소설가이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나왔다. 초호화 캐스팅이었는데 주인공이 누구였더라? 제레미 아이언스 였나?)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의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군사평의회 의장 자리에 앉은 피노체트는 미국과 영국의 비호하에 쿠테타 동료들을 숙청하고 대통령 자리를 거머 쥐었다.  사망자 3천여 명, 실종 1천여 명, 고문 불구자 10만 명, 국외추방 100만 명...이것이 바로 피노체트의 성적표이다.

 

고령으로 정권을 내어놓은 피노체트가 스페인에서 반인륜적 범죄로 기소되었을때 그의 구명에 적극 나섰던 사람은 바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이다. 대처가 뭐라 그랬더라? '위대한 용기를 지닌 이 인물에 대한 어떠한 법적 기소행위도 반대한다 그랬던가?' 피노체트에 얽힌 아햏햏한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니다. "오늘 군이 봉기한 이유는 이 혼란에서 조국을 구하겠다는 애국심뿐이다. 조국은 혼란 속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의 맑스주의 정권에 유린당했다. 혁명위원회는 사법권과 언론 통제권을 갖게 되며 다음 조치가 있을 때까지 국회는 휴회한다. 이상"-이것이 피노체트 쿠테타 군의 포고문이다--;;

 

피노체트의 망령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올해 중앙일보는 '남미가 변한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 특집을 진행했다. 그 특집 기사에 따르면 칠레의 포퓰리즘적 전통을 꺠고 경제개혁이라는 길에 매진한 비젼있는 지도자가 바로 피노체트란다. 지랄병도 이 정도면 상당한 수준이다.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자본과 군부, 미국 정부의 사보타지가 일어나고 삼십여년이 지난 오늘..이 역사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베네주엘라에서는 1998년 선거를 통해 우고 차베스가 집권했고 석유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등의 볼리바르 혁명을 이끌고 있다.  기득권, 자본, 미국은 그들이 아옌데에게 했던 만큼 소금 뿌리기를 계속 하고 있다. 02년 4월의 쿠테타 시도, 02년 12월의 석유 산업 사보타지에 이어 얼마전 소환 투표까지...다른 점이 있다면  아옌데보다는 차베스가 군부를 잘 통제하고 있다는 점.(우리나라 보수 신문들을 보면 차베스를 무슨 군바리 출신 독재자 비스무리하게 묘사하고 그에 저항하는 자들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처럼 그리는데 정말 쌍으로 웃기는 것들이라 하겠다)

 

아옌데 정권보다 차베스 정권의 생명력이 더 강해보이긴 하지만 미국을 등에 업은 베네주엘라 반정부 세력들은 공공연히 무장봉기와 쿠테타를 떠들고 다닌다. 이에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의 저자 타리크 알리를 비롯한 150명이 좌파 지식인들은 국경을 떠나 차베스 정부르 엄호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다.

 

사실 아옌데 정권의 비극을 두고 나온 분석들이 꽤 된다. 혁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한 개혁을 선택함에 따른 당연한 말로라는 분석도 있고 선거건 뭐건 간에 군대와 경찰이라는 폭력적 국가기관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 직접적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내 생각엔 뭐니뭐니 해도 미국탓이 제일 크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전투를 잠깐이라도 보거나 살바도르 아옌데, 빅토르 하라, 파블로 네루다의 장엄한 최후에 관한 글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콧잔등이 시큰해질껄...앗 노무현 탄핵 당시에 아옌데가 어쩌고 우리가 지켜야할 민주정부 어쩌고 하면서 견강부회 하던 작자들이 많던데 각자 알아서 대가리 박고 반성하기 바란다.

 

다음은 쿠테타군이 대통령궁을 폭격하던 당시 칠레 국영 라디오와 전화를 통해 방송된 살바도르 아옌데의 최후의 연설 끝 부분이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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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오늘(9.10) 멕시코 칸쿤에서 이경해 열사 자결

2003년 WTO 5차 각료회의가 열리던 멕시코의 휴양도시 칸쿤에서 농민운동가 이경해 열사가 할복 자결했다. 이경해는 한국 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 회장, 한국 농어민 신문사 회장, 전북도 의원등 농업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활발하게 펼친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1990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펼쳐진 GATT반대 시위에서 할복한 바 있으며 2003년 2월에도 한달간 제네바의 WTO본부 앞에서 항의농성을 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경해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이었나? 세계화, 좀 더 좁혀 말하자면 WTO, 더 좁혀 보다면 WTO 농업협정이 바로 그것이다.(WTO Agreement on Agriculture) 그리고 그 뒤에는 이미 한국 곡물 수입시장의 60%를 장악하고 있는 세계적 식량 메이저 카길(Cargil)이 있다. 심지어 농업 우르과이 라운드 협정의 기본판을 기초한 사람은 미농무차관 출신의 카길사 부회장이었던 댄 암스투츠이기도 하다. 카길과 WTO농업협정의 목표는 정확히 일치한다. 그것은 바로 남반부 시장의 개방과 농민농업을 기업농업으로 바꾸는 것이다.

 

현재 WTO규정은 무역에 대한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식량이 어떻게 생산되고 누가 식량생산을 통제하는지 결정하고  있다. 그 핵심에는 카길사의 아시아 시장 장악이 있다. 자족적인 아시아 식량경제를 의존적 경제로 변화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의 전략이다. 

  

카길에 대해 좀 더 짚어 보도록 하자. 흔히 세계 5대 곡물 메이저라고 부르는 회사들이 있다. 카길 외에도 루이 드레프스, 앙드레, 인터콘티넨털등이 그에 꼽히는데 99년 11월 카길은 인터콘티넨털의 곡물 사업 부문까지 인수했다. 카길의 02년 매출은 508억 달러, 순익은 8억2천만 달러. 상장 되지 않은 미국 개인 기업 중에 가장 큰 규모, 75인의 친인척에게 집중된 주식 수, 박정권 당시 쌀 수입과 미국 의회 로비를 둘러싼 박동선 게이트의 배후.

 

 

농민을 죽이고 농업을 죽이고 세계의 목줄과 먹거리를 자본으로 통제하겠다는 것이 카길과  WTO농업협정의 목표이고 이경해 열사는 그것을 폭로하며 전세계 농민과 민중을 대신해서 자결한 것이다. 어제부터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전국의 농민들은 쌀관세화를 반대하며 거리로 나선다. 이미 어제 그들은 90여대의 트랙터를 스스로 몰고 자신들의 목숨과도  같은 쌀을 갈아 엎었다. 꿇고 죽을 것인가 일어서서 살 것인가라는 갈림길 가운데 한국 농민들은 후자를 택했다. 오늘 우리는 이경해다.

 

이경해 열사가 자결한 바로 그 날 사파티스타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칸쿤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일부를 인용함으로 끝을 맺겠다. 

 

"우리들 모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상 안에서 살되 종으로 살든가 아니면 세상 밖에 있으라는, 즉 삶을 버리라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으로 살든가, 아니면 죽으라는 이 선택을 따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안의 세상을 만드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세상에 인간성의 미래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전세계 다섯 대륙 곳곳에 살고 있는 민중들의 손아귀에 그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대안의 세계는 가능합니다.형제자매 여러분, 전세계에 걸쳐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한 이견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자들은 복종과 냉소주의, 어리석음, 전쟁, 파괴, 그리고 죽음 등을 세계화하려 합니다. 아래 있는 사람들은 저항과 희망, 창조성, 지성, 상상력, 삶, 추억,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의 건설을 세계화하려 합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우리는 세계무역기구(WTO)라는 죽음의 열차가 칸쿤은 물론 세계 모든 지역에서 탈선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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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오늘(9.9) 모택동 영면

1976년 오늘 모택동(1893~1976)이 8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사실 이 디렉토리를 꾸준히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마오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늘날 모택동을 이해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아직도 마오주의에 입각해서 투쟁을 하는 세력들은 전세계에 몇군데 있고 중국에선 모택동 부적이 명절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이며 모택동을 냉혈한 마키아벨리스트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뿐인가? 마이크 타이슨의 팔뚝에는 체 와 더불어 마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문신으로 박혀있다.

 

한 인물, 한 사건에 대한 진실한 해석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게 옳을 것이며 마오의 진실은 그에 대한 몇가지 해석 줄기 가운데 어딘가쯤 혼재되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에 대한 반대자나 지지자들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1911년 청년 마오가 혁명전선에 뛰어든 이래로 죽는 날까지 마오는 전근대적 농업사회에서의 반제투쟁과 사회주의 투쟁에 관한 교과서를 한 줄 한 줄 자신의 온 몸으로 써내려간 인물이다. 누구보다 철저한 공산주의자 였으면서도 창의력 있는 혁명가 였던 것이다.

 

모스크바랑 직접 라인을 대고 있던 이립삼 같은 초기 중공당 지도자들이나 프랑스 근공검학 출신인 등소평등과는 다르게 마오는 철저히 중국문화의 세례 속에서 커온 사람이다.(이것은 그의 큰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여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마오가 학습하던 영문판 공산당 선언이 후일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communist party 라는 원문에 마오가 달아놓은 주석은 뭔고 하니 '공산주의자 연회(宴會)'...--;; 파티가 당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잔치(연회)로 해석했다는 말인게다. 믿거나 말거나^^

 

항일 투쟁과 국공 내전 가운데서 마오가 남긴 주옥 같은 어록은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한다. '정권은 총부리에서 나온다'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울 수 있다' 등등

 

결국 대장정을 마치고 이차 국공합작을 통한  항일투쟁 중인 1943년 마오는 중공당 중앙정치국 주석, 중앙서기처 주석에 올랐고 죽을떄까지 중앙위원회 주석직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전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그 이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한국전쟁)에 장남 모안영을 참전시켰는데 모안영은 공중전 도중에 전사했다.

 

이후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 문혁 와중에서 수많은 동지들을 숙청했고 좌편향적 정책들로 인해 인민들에게 해를 입혔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아직도 중국 인민들은 자주독립과 주권 수호,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의 그의 공이 과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중공당은 1981년 6월 당 중앙 11기 6중전회에서 '건국 이래 당의 역사적 몇가지 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그 결의에 따르면 모택동 사상은 중국에서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이고 그것은 여전히 중공당의 중심사상이며 중국인민의 중요한 유산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앞으로 얼마나 우경화 해날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우경화와 별개로 능구렁이 중국인들이 마오에 대한 위와 같은 공식적 평가를 쉽게 바꿀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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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오늘(9.8) 레니 리펜슈탈 영면.

미안하다. 오늘이 아니라 어제다--;; 이해해달라. 그래도 새벽 한시가 넘어서 퇴근하고 이걸 쓰고 있다. 어여삐 봐주기 바란다. ㅠ.ㅠ

 

2003년 9월 8일 다큐멘터리 감독, 극영화 감독, 사진 작가 그리고 스킨스쿠버 다이버인 레니 리펜슈탈이 101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레니 리펜슈탈은 20세기 여성 예술가 중에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미학적, 선동적 측면에서 볼때 이미 20세기 전반에 가장 완성된 형태의 결과물이었다. 무용가, 영화배우로 그녀의 예술 커리어가 시작됐지만 그녀 스스로가 표현대상으로 그치기엔 그녀의 예술적 능력이 너무 뛰어났다.

 

스스로 프로덕션을 차려 제작, 시나리오, 연출, 주연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북치고 장구쳐서 만든 작품 '푸른 빛'은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고 그녀는 곧 나치에 픽업된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전설적인 작품이 바로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 1934 감독 레니 리펜슈탈 출연 아돌프 히틀러, 루돌프 헤스, 파울 요제프 괴벨스' (출연진만 봐도 으스스 해지지 않나?)이다.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이 작품은 21세기 오늘날에도 보는 사람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든다.

 

120명의 스탭, 36대의 카메라, 8개월 간의 편집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난 이 작품은 그야말로 프로파간다의 극치다. 도입부에선 히틀러가 등장한다. 그 장면은 마치 메시아의 강림을 떠오르게 하며 또 다른 장면에선 히틀러가 20만명의 군인 사이를 헤치고 등장하는 샷이 나온다.  이 샷을 잡기 위해 리펜슈탈은 정면의 첨탑에 카메라를 설치하기 까기 했다. 그 외에 부감샷의 사용을 통한 장엄한 장면과 백그라운드 뮤직으로 쓰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Horst Wessel Marsch’까지...정말 이것이 예술이로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작품이다. 미학적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을 뛰어넘은 창작물이 있을까?

'의지의 승리'를 패러디 한 작품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앨런 파커 감독의 '핑크프로이드 더 월'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에 이르기까지...그리고 우리가 2차 대전 자료화면들에서 흔히 보이는 히틀러의 카리스마틱한 묘사들은 거의 전부가 이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심지어 나치 패망 이후 이 작품은 나치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오랬동안 전세계적으로 방영금지작으로 묶여있기도 했다.

 

그녀의 천재성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전세계를 경악케 한 작품이 바로 이듬해 나왔으니 그 작품은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올림피아' 인 것이다. 이후 수많은 스포츠 중계와 상업적 영화들에 영감을 준 이 작품은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생동감 넘치는 경기 장면들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그 뒤로 매 올림픽 마다 만들어지는 기록영화들은 사실 전부가 이 작품의 패러디에 불과하다.

 

'올림피아'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레니 리펜슈탈은 동양에서 온 과묵한 한 청년의 모습에 혼을 팔려버렸으니 그가 바로 '손기정'이다. 올림피아의 꼭지들 중에 가장 긴 시간이 할애된 부분이 바로 손기정의 마라톤 역주 장면인게다. 물론 올림피아 또한 나치스와 아리안 족의 우월성이란 주제의식이 과도하긴 하다. 이 지점에서 내가 미디어 참세상에 올린 기사를 하나 참조하라.- "축구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저항세력 되어 싸웠을 것"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0887&page=2&category1=3

 

어쩌면 당연한것인지 모르겠지만 2차대전 이후 리펜슈탈은 전범 재판까지 받았고(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실형은 안 살았다.) 그녀의 예술은 어떤 자본과 정치세력의 뒷받침도 못 받았다. 결국 리펜슈탈은 돈도 안들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장르를 찾았으니 그것이 바로 사진이었다.

 

그녀는 이후 아프리카의 풍경과 인간들을 사진으로 담아냈고 그 작업들 또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뿐인가? 71세에 스킨 스쿠버 자격증을 땄고 그 떄부터는 해저 카메라맨으로서 그녀의 예술을 이어나갔다. 100세 생일을 맞이하여 공개된 작품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해저의 인상'. 그녀는 이 작품으로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컴백을 전세계적 찬사 속에서 화려하게 해냈다.

 

2003년 레니 리펜슈탈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잘못은 히틀러를 만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예찬자와 비판자 모두에게 경악과 감탄을 남겨준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중 하나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의지의 승리’ 중 두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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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오늘(9.7) 멕시코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영면

1949년 9월 7일 멕시코의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Jose  Clemente Orozco,1883-1949) 가 영면했다.  오로스코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레스코 화가로 꼽힌다. 오로스코 라는 이름만 들으면 누굴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듯 싶어 오로스코와 항상 함께 등장하는 두 이름을 나열해본다. 그 이름들은 바로 디에고 리베라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오로스코, 리베라, 시케이로스 이 3인은 멕시코 벽화운동의 주역으로서 전세게를 휩쓸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소설들 보다 더 일찍 마술적 리얼리즘과 민중의 생활을 프레스코 벽화로 널리 알렸다. 힙합문화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그래피티 또한 이들의 벽화운동의 세례를 깊이 받았고 바스키야를 비롯한 현대 미술들도 이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심지어 80년대 이후 나타난 한국의 벽화운동, 걸개그림 운동들 또한 이들에게 뿌리를 대고 있다.

 

그렇다면 멕시코 벽화운동은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멕시코 벽화운동은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에밀리오 사파타와 판쵸 비야의 혁명에 닿는다. 멕시코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보다 오히려 더 앞선 것으로 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으로 불린다.

 

사파타와 판쵸비야는 결국 혁명 이후 죽임을 당하고 오브레곤이라는 정치지도자가 통일을 하게 되었지만 오브레곤 또한 사파타의 농업개혁-무상 농지 분배, 이 문제로 인해 아직까지도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은 투쟁하고 있다.-을 자신의 혁명정부에서 받아들였고 곧이어 그 혁명정부는 1917년 혁명헌법을 통해 국토와 지하자원이 국가소유임을 명확히 함으로 미국의 간섭을 거부했다.(멕시코는 알고 보면 뜨거운 전통을 지닌 나라다. 멕시코의 대표적 대학인 UNAM대학 또한 전세계 대학중에 투쟁 순위로 따지자면 몇 손가락 안에 들만하다.)

 

뿐만 아니라 정교의 분리, 혁명의 주역이었던 메스티조와 인디언의 지위 향상등에서 볼때 금세기 전반부 멕시코는 눈부셨다. 트로츠키가 왜 뜬금없이 멕시코로 망명해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 뒤에는 이런 배경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여튼 멕시코 혁명을 마무리 지은 오브레곤 정권은 작가 호세 바스콘셀로스를 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바스콘셀로스는 종합적 국가 교육안을 실행했으니 문맹, 무학에 시달리는 농민과 자녀들을 위해 많은 교사들은 하방시켰다. 국가차원의 브나로드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교사들은 살해, 폭력에 시달렸다. 농부들이 교육 받는 것을 두려워한 멕시코 대 농장주들의 짓인 것이다.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대부들은 오늘날에도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교사들은 계속 시골로 시골로 향했고 국가 또한 굴하지 않았다.  

 

이러한 국가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가 바로 벽화 지원 계획이었던 것이다.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벽화(프레스코화)를 그릴 수 있도록  화가들에게 공간과 자금을 지원한 것이다. 멕시코 벽화운동은 이렇게 시작된것이니 오로스코, 리베라와 시케이로스는 벽화운동을 이끌며 민중들을 자극했다. 이 운동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전세계적 이슈로 떠올랐다. 얼마전 이 시대를 다뤘던 영화도 나오지 않았던가? 셀마 헤이엑 주연의 '프리다 칼로'( 사실 이런거 보면 유명하고 대단했던 넘들도 여성들한테 대하는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근데 이런 전통을 가진 멕시코에서 왜 오늘날에도 사파타의 후예들 (사파티스타)들이 치아파스에서 투쟁하고 있을까?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역시 여기에도 적용된다. 멕시코 혁명정부는 1927년 제도혁명당을 창당했다. 제도 혁명당은 라틴 아메리카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당으로 불리는데 너무 성공적인 나머지 70여년을 장기집권 해버린 것이다--;; 제도혁명당의 존재는 모든 급진적인 정치세력들의 부상을 막았고 제도혁명당 지도부는 그들의 투쟁 대상이었던 아시엔다(대농장주)와 미국과 앞으로는 싸우면서 뒤로는 짝짜궁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비판적 지지 뭐 이딴거 생각나지 않나?)

 

그리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메스티조에게 사회적 시민권을, 제국주의의 간섭 철폐라는 사파타의 혁명정신과(제도 혁명당이 배반해버린) 사파타의 후예들이 다시 나타난 게다.  사파티스타는 NAFTA(북미 자유무역협정) 발효에 맞추어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며 치아파스 라칸돈 정글에서 1994년 1월 1일 봉기g했다.  "오늘, 우리는 말한다. 이제 그만좀 해!(Ya! Basta!)"....그들이 내건 선언문의 제목이다. (몇년전에 어떤 학생운동 그룹이 이걸 따와서 쓰기도 하더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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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오늘(9.6)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1945년 9월 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주석은 이승만--;; 헷갈리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지적하는 거지만 건준의 '인공'과 이북의 '인공'은 줄임말은 같지만 다른거다. 건준의 인공은 말했다시피 조선인민공화국이고 이북의 그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말이지.

 

이 디렉토리를 관심있게 읽어보고 있는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사건들은 상호 영향을 받고 있다. 45년 9월 6일 건준이 좀 급작스레 인공을 선언한 것은 4일 전 있었던 일본 항복 조인식(45.9.2) 의 영향이 크다. 미소의 분할점령이 공식화 되자 건준 측에선 마음이 급해졌고 양측 군대가 본격적으로 조선반도 전체를 점령하기 전에 건준의 위상을 기정사실화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좀 급작스럽게 인공을 선언했는데 기정사실화는 커녕 미소양군은 기냥 썡까버렸다.(소련은 약간 다르긴 하다.) 미소양군 뿐인가? 좌에서 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파의 정치지도자들 조차 콧방귀만 뀌어버렸으니...오늘날의 관점에서 볼때 조급한 인공의 선언은 패착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인공 선언 이후 건준은 착착 인민위원회로 조직을 전환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는 극우반공주의자를 제외한 좌파 부터 중도우파까지 다 참여했었다고 한다. (심지어 김대중도...이거 떄문에 빨갱이 소리를 오래 듣긴 했지만.) 그러나 그 인민위원회들을 인공이 제대로 제어 할 수 있었느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올시다ㅠ.ㅠ

 

물론 인공 선언은 조급했지만 그 주체인 여운형은 일제최말기에 이미 건국동맹을 조직했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로 부터 치안유지를 부탁받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직후 대중성이 있으면서도 친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국내 정치지도자는 여운형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각 지역별로 자치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컸기에 45년 8월 31일에는 건준 지부가 전국적으로 145개에 달했다고 한다.

 

하여튼 미 군정의 통제가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이승만이 45년 10월 16일에 미군용기를 타고 귀국해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인공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아버리면서 인공은 점차로 유명무실해졌다. 비극이라기엔 좀 비장미가 떨어지고 소극이라기엔 너무 꿀꿀한 사건이다.

 

그런데.....건준은 뭐가 좋다고 이승만을 인공의 주석으로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렸을까? 임시정부 주석당시의 공금횡령, 조선의 미국편입 주장 논란등으로 임정라인과 사이가 클어진지가 수십년이고 골수 반공주의자라 좌익계 항일세력과도 친하지 않고 미국에서도 장인환, 전명운 의사 재판 통역 거부부터 시작된 지속된 스캔들로 악명을 떨쳤는데 말야..

 

여기서 한 에피소드를 들여다 보자.

 

해방 후 첫 여론조사는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 사이에 실시됐다. 그 결과는 당시 우익 성향의 선구회가 펴낸 잡지 《선구》12월호에 게재됐다.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 1위는 누구일까? 몽양 여운형이다. 2위는 이승만. 1위와 2위의 차이는 12%로 몽양이 33%의 지지를 받았다.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를 묻는 질문에도 몽양은 단연 1위였다. 그러나 정작 ‘내각이 조직될 경우 대통령감으로 적당한 인물’항목에서는 이승만이 1위를 차지했으며 여운형은 외무부장감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 이유가 뭘까? 내가 추측하기엔 이승만도 일단 항일은 항일인게 확실한데다가 큰 항일 단체 옆에서 좋던 나쁘던 항상 소란을 일으켰기에 독립투쟁의 중심인물로서 민중들에게 확고히 인식되었던게 아닐까? 게다가 초대 임정주석이기도 했을뿐더러 일본의 자리를 미국이 차지하게 됨에 따라 미국박사, 영어능통한 이승만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는 클 수 밖에 없었던것 같고..

 

권력을 잡고자 하는 자들이여 이슈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말지어다! 잊혀지는 것보다야 욕먹는게 훨씬 낫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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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오늘(9.5) 북한특사 허담, 비밀리에 서울방문하여 전두환과 회동

1985년 9월 5일 당시 북한 대남담당비서 허담과 유엔대사 한시해가 비밀리에 휴전선을 넘어와 전두환과 회동했다. 허담은 '각하(전두환)과의 평양 상봉이 이뤄지길 기대한다"는 김일성의 친서를 갖고 방문했으며 그로 부터 두달 뒤에는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과 박철언  청와대 보좌관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동을 가졌다.

 

알다시피 휴전 후 대북밀사는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72년에는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상호방문이 있었고 그들은 각각 박정희, 김일성과 회동을 갖기도 했다. 그 결과 물이 7.4 남북공동성명이다.  뿐인가? 516 직후 내려온 비운의 밀사 황태성(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친구로 대구경북 10.1항쟁의 적극적 가담자, 남로당계열로 북에서 경공업성 부상을 지냄)도 있지 않은가? 물론 그 뒤에도 밀사는 있었다.

 

 90년에는 당시 안기부장 서동권이 북에 밀파되어 김일성, 김정일과 연속 회동을 가졌다. 이들은 남북교류협력법이 생기기전에 비밀리에 대한민국을 잠입탈출하여 김일성에 대한 극찬(주석님, 애국자운운)을 하며 고무, 찬양을 하고 한국의 정보를 알림과 동시에 대화를 합의함으로 백번 죽어 마땅한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이다! 그러나 molot는 국보법은 국보가 아닐뿐더러 당장 폐지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기 떄문에 이들을 국보법으로 소급적용 처벌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이런 남북 간의 비밀 회동들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짚어보아야 한다.

 

먼저 516 직후 파견된 밀사 황태성은 간첩죄로 사형 당했다. 박정희와 개인적 친분이 깊었던 그는 왜 사형당했을까? 여기에서 지난  '오늘은'의 한편을 떠올리시라.(이 디렉토리를 꾸준히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의 차이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리비아 카다피의 쿠테타를 설명하면서 60년대 말 3세계에선 청년장교들에 의한 쿠테타가 대유행이었다고 밝힌바 있다. 그 성격은 주로 민족주의적, 반기득권(기득권은 친미세력), 사회주의가 가미된 경제체제를 핵심으로 한다. 한국의 쿠테타 또한 농촌 출신의 청년장교, 사회주의 전력이 있는 박정희 중심, 구체제에 대한 환멸등을 기본 배경으로 깔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케네디 미 행정부로 부터 상당한 의심을 받았던 것이다.

 

그 의심 받은대로라도 하면 좀 좋으련만 박정희군부 세력은 친미만이 살길이요.를 외치고 있던 차라 황태성을 접촉하면 미국이 갈굴까 싶어서 기냥 바로 총살에 처해버린것이다.

 

72년의 남북 밀사 파견 또한 별 다르지 않다. 어느정도 장기집권과 경제성장에 자신을 얻은 남북의 독재자들은 국내정치에 이용하기 위한 속셈으로 밀사를 파견하고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그것에 흥분했던 남북 양측의 민중들만 속은 셈이었다. 자 72년 남북공동성명 이후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의 확립, 김정일의 전면배치, 왕창 숙청하고 그 나마 남았던 제 세력의 숙청으로 이어졌고 남한에서는 10월 유신--;;체제가 들어선 것이다. 도대체 이게 머냐고????

 

이 지점에서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에 대한 기억을 각자 되짚어 보시라. 그리고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라는 개념 또한 떠올려보시라. 남한에선 북한이 독재하니까 우리도 대응하기 위해선 민족적 민주주의(우웩)을 강화해야 한다며 설레발을 떤거고 북한에선 미국의 압잽이 박정희가 독재를 하니 우리도 천리마 정신을 강화해야 하고 주체를 중심으로 뭉쳐야 된다며 민중들은 쪼게 된거다.

 

85년도 그닥 다르지 않다. 뜬금없이 대통령 자리를 꿰찬 전두환은 81년 1월 국정연설에서 조건없는 최고책임자의 상호방문을  여론타개책의 일환으로 제시했다. 북한의 반응은 썰렁했으나 83년 아웅산 테러 이후 북에 대한 국제 여론이 싸늘해지자 84년에 들어서면서 북한 또한 대화의 필요성(혹은 대화하는 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두환은 85년 초에 영원한 의리맨 장세동에게 정상회담 추진을 명했고 결국 그 와중에 남북한의 밀사가 상호방문을 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정상회담에는 이르지 못했으니..그 이유를 짚어도록 하자.

 

당시 안기부 문건에 따르면 남측의 정상회담 추진목표에는 북의 대남혁명전략 포기 유도 및 전쟁방지, 북의 남북한, 미국 3자회담 주장 무력화, 86년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등이 포함돼 있었고 북의 회담 전제조건은 정상회담 내용은 7·4 공동성명에 근거한 통일방안 마련과  불가침 선언이 되어야 하며 그 선행조건은  군사훈련 중단(지금은 안하는 팀스피리트), 상호비방 중지 등이었다. 둘 다 한발짝도 양보 안하니 될 턱이 있다.

 

하여튼 이런 생쇼 특사 파견은 남북 양측 독재자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있어왔다. 앞으론 박터지게 싸우면서 뒤로는 지들끼리 '딜'하고 말야. 그러면서 민중들은 맨날 반공궐기 대회나 미제규탄대회에 동원이나 시키고...

 

결국 00년 615에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전세계에서 이 광경을 보며 가장 배아파 한 사람은 누구? 바로 03)  이전에 비하면 확실히 전향적이긴 하지만 5억불을 싸발랐느니 하며 보수정치권에서 싸우는 꼴이라던지, 우리는 태양민족이에여~ 조선민족이여 일어나세~ 615선언만 이행하면 만고 장땡~을 외치고 있는 일부 운동세력을 보면 내 참. 멀어도 많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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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오늘(9.4) 아파치족 추장 제로니모, 5년의 투쟁을 접고 애리조나주에서 투항

 1886년 9월 4일 아파치족 추장 제로니모가 5년간의 투쟁을 접고 35명의 전사들을 거느린채 아리조나주에서 넬슨 마일드 장군에게 투항했다.

 

사실 널리 알려진 제로니모라는 이름은 인디언 전사의 이름이 아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고야플레이'(하품하는 사람)이고 제로니모라는 이름은 죽기 6년전 네덜란드 개신교회 신자로 개종하면서 개명한 이름이다.

 

투항직전에 제로니모의 목에는 3,000$의 현상금이 걸려있었고(지금 화폐가치로 따지면 거의 오사마 빈 라덴 수준의 현상금이다) 제로니모는 '역마차' '아파치'등등 수많은 서부영화에서 악역으로 등장했다. (개중에 품위있는 전사로 그린 영화도 있다만)

 

아파치 족에게는 호전적이고 잔인한 부족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고 심지어 아파치란 이름은 미군의 주력 공격헬기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하여튼 제로니모는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일대에서 화력과 인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어차피 제로니모가 전투를 시작하게 된 것도 미국연방 정부 때문이다. 인디언들을 서족으로 서쪽으로 몰아내던 미국의 프런티어가 결국 태평양까지 다다르게 되자 미국 연방정부는 19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이라는 우리 안에 가두고자 했다.

 

이에 반발한 것이 바로 아파치족이고 제로니모 인 것이다. 제로니모의 투항을 끝으로 아메리카 인디언과 미 연방정부의 집단적 충돌을 끝이 났다. 그 이후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박제화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제로니모는 1909년 2월 17일 오클라호마의 실 요새에서 전쟁포로의 신분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첨언:제로니모 자신이 구술한 자서전이 올해 한국에서도 출간된것으로 안다. 나도 북리뷰 기사만 봤을뿐 읽어보진 못했다. 출판사는 '우물이 있는 집'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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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오늘(9.3) 통일 베트남 초대 대통령 호치민 영면

1969년 8월 3일 통일 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호치민(1890~1969)이 영면했다. 현실 정치인 중에 그리고 실제로 권력을 잡았던 일인자 중에 호치민 만큼 제나라 민중과 세계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인물이 있을까? 뭐 세종대왕이 있다고???

 

호치민은 등소평 처럼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수학했다. (물론 팔자좋게 유학 간건 아니고 고학을 했지) 1차 대전 이후 베르사이유 강화 회의가 열렸을때 피뜨거운 젊은 프랑스 공산당원 호치민은 호치민은 민족자결 원칙으로 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한참 헛바람을 불어넣은 우드로 윌슨 앞으로 서한을 띄우기도 하지만 전달되지 못했다.

 

이후 모스크바에 체류하며 스탈린, 이립삼들과 교류를 쌓으며 점차 성가를 높이게 된다. 이 와주엥 웃지못할 사건이 있었으니 호치민의 사망설이 널리 퍼지고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가 대형 오보 한 번 했다.) 심지어 1931년 모스크바에선 호치민의 장례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후 41년 고국 땅을 밟은 호치민은 그 이름도 유명한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 주석직에 오른다. 여러 과정을 거쳐 53년 마침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게 된다. 이 와중에 400킬로키터에 이르는 갱도를 둟어서 주요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고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갱도 전투는 이후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된다. (김일성 또한 이에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제국주의 프랑스가 물러난 후 그 자리는 미국이 메꿨고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된다. 그 때부터 또 지난한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이 시작됐다. 여기서 그 지난한 투쟁의 경과를 풀 필요는 없을듯하다.

 

평생을 독신으로 민중의 곁에서 보낸 호치민은 68혁명당시에는 구호로 불리었다. 체와 호는 자유와 저항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아이콘이었다.(물론 일세계 특유의 오리엔턴리즘도 작용했겠지)

 

결국 호치민은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그 옆에는 가족 하나 없었다. 베트남 인민들은 사이공시의 이름을 호치민시로 바꿈으로써 그에게 말없는 찬사를 보냈다.

 

 68년 호치민의 전기를 쓴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쟝 라쿠튀르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세계의 지도자 중에서 실제로 호치민처럼 창조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만들어내는 것을 지키는 수호자이며, 근원임과 동시에 방향을 가리키며, 사상임과 동시에 실천이며, 국가임과 동시에 혁명이며, 고난의 행자임과 동시에 정치지도자이고, 사람좋은 아저씨임과 동시에 전쟁지도자인 인물은 한 명도 없다."

 

첨언: 호치민은 평소에 목민심서를 항상 옆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레이건한테 눈도장 찍으러 가던 전두환도 기내에서 목민심서(한문본)을 옆자리에 두고 있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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