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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오늘(9.22) 삼성 회장 이병철 (주)한비 국가에 헌납, 매스컴과 학원사업에서 은퇴선언

 

1966년 9월 22일 당시 삼성 회장 이병철은 (주)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매스컴과 학원사업에서 은퇴할 것을 선언했다.


같은 날 국회에선 당시 국회의원 김두한이 ‘나는 야인이 될꼬야~’ 라며 파고다 공원에서 퍼온 똥물^^을 정일권 국무총리와 국회의원들에게 선사했다.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 도중이었다. (주)한국비료가 건설자재로 위장하여 사카린(당시 사카린은 돈 덩어리였다고 한다.)을 밀수했고 그 와중에 중앙정보부와 정부가 연루되어 같이 돈을 챙겼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고급 사치품인 양변기--;; 같은 물건도 꼽싸리로 밀수 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사건으로 인해 삼성의 후계구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 사건 이후 이병철이 잠깐 전면에서 물러서고 이병철의 장자인 이맹희가 사업 전면에 나섰으나 너무 나대고 아버지를 무시했는지 몰라도 결국 팽 당해서(어 김두한도 야인인데...)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현재 CJ그룹 회장 이재현이 바로 이맹희의 큰 아들이다. 결국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셋째 아들 이건희가 이병철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2세 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둘째 아들은 이창희 인데..새한 그룹 창업주이다. 지금 새한은 거의 거덜나다 시피 했지만 한 때는 비디오 테잎 같은거 팔아서 돈 좀 벌었다.)


이병철이 손을 뗀 매스컴과 학원 사업은 도대체 뭘까? 일단 학원 사업, 이병철은 이 사건 이후 대구대학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대구대학은 지금 있는 대구대학하고는 좀 다르다. 당시 청구대학과 이병철이 물러난 이 대구대학이 합병되어 영남대학이 만들어졌다. 이 대구대학은 지금도 유명한 경주 최부잣집의(십대가 만석지기였다는 그 부잣집. 가훈으론 이런게 전해진다고 한다. 벼슬은 진사이상 하지마라, 백리 이내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엔 절대 땅을 늘리지 마라 등등) 마지막 부자 최준이 해방직후 설립한 대학인데 최준이 재산을 설립에 다 쓸어넣은 바람에 유지하기가 힘들어 이병철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벌써 청구대학을 꿀꺽한 박정희는 대구대학까지 합쳐서 영남대학을 만들어 한방에 집어 삼켰다.


그렇다면 매스컴 사업은? 공교롭게도 이 때로부터 딱 일년전인 1965년 9월 22일 중앙일보가 창간되었다. 중앙일보의 경영은 홍진기가 맡았고(홍진기는 이병철의 사돈이다. 이건희의 장인이며 현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의 아버지다. 홍진기는 일제때 판사를 지냈다. 그 때 얻은 딸이 이건희의 부인 홍라희다. 해방 이후에도 당연히 승승장구하여 자유당 말기에는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기는 315 부정선거와 419당시 학살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했으나 홍진기는 아주 짧은 옥살이를 끝내고 이병철에게 픽업된다. 친일하면 삼대가 잘 산다라는걸 온 몸으로 증명하는 집안이다.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는 지금 검사장을 지내고 있다.) 중앙일보 뿐 아니라 나중에 ‘전 두환이라고 해요, 두발이 없다는 뜻이죠, 환장하겠어요,’ 에 의해 KBS2 방송으로 통합되어 버린 TBC 동양방송 또한 이 때 이병철이 소유하고 있던 매스컴이다. 생각해보면 그나마 5공이  잘한게 이 거 아닌가 싶다. 지금 SBS 꼬라지만 봐도 갑갑한데 만일 TBC 까지 살아남아 있고 그거랑 중앙일보가 여전히 삼성 그늘에 있다고 생각하면--;;    


현재 삼성은 중동고와 성균관 대학을 소유하고 있다.  삼성은 이병철의 모교인 중동고를 자립형 사립고로 전환하려고 지속적으로 모색중이다.  삼성의 성균관 대학 소유 이후에 삼성이 성대를 어떻게 컨트롤 하고 있는가를 알리는 문서를 총학생회에서 폭로했으나 많은 학생들은 오히려 

총학생회를 비난했다 . 그 이후 이른바 ‘비권’(성대사랑)이 총학생회를 계속 수권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일보는 수많은 잡지들과 케이블 티비 채널 두개(큐채널과 히스토리 채널)을 가지고 있으며 굴지의 출판사 (중앙 랜덤하우스)를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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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년 오늘(9.21) 고려 공민왕 피살.

 

미안하다. 또 늦었다. 그러나 정국이 정국이 아닌가 독자들이 이해해야지 어쩌겠냐--;;


1374년 9월 21일 고려공민왕이 신하 홍륜 일당에게 피살됐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 다른 고려왕들처럼 원나라에서 성장했다. 공민왕의 몽골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 라고 한다.


그런데 공민왕은 그 당시 고려왕들하고는 좀 달랐다. 고종 당시 원의 침략 이후 고려왕은 몽골의 부마가 되었고 조나 종을 붙이지 못해고 칭호는 왕으로 바뀌었다. 그 밖에 폐하-> 전하 등등 바뀐게 아주 많다. 아 참 왕명에는 반드시 ‘충’자를 붙이게 되었다. 충목왕, 충혜왕, 충정왕, 충선왕, 충숙왕 등등 그런데 공민왕은 자기에게 ‘충’ 자를 붙이지 않았다.


고려가 이 정도로 원에게 꽉 잡혀 살았지만 꼭 그런 것 만은 아니라는 주장들도 많이 전해진다. 일단 원에게 40여년  동안 개기며 버텨낸 나라가 고려를 제외하곤 없고(에..일본이 있네. 여몽연합군의 이차에 걸친 침략을 가미가제-신풍 덕택에 막아냈으니--;;) 고려왕은 몽고황족의 부마를 지냈으며 몽고 황실 내부의 다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단다.  그 밖에 ‘고려양’ 이라고 해서 원나라 대도(수도 이름)에서는 고려의 풍습이 최신 유행을 했다고 한다. 원나라 말기에는 공녀 출신의 고려 여인이 정식 황후 자리에 오르기도 했을 정도니... 

하여튼 공민왕은 원에 대해 독립적이려고 노력했고 또 실제로 그런 정책들을 펼쳤다. 즉위하자마자 몽골 연호와 관제를 철폐했으며 정동행성을 혁파했다. 누나(원나라 기황후) 믿고 까불던  기철 일파를 척결했고 원명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쌍성총관부, 동녕부 등을 공격해 영토의 일부를 회복했다. (이 때 스타로 올라선 인물이 황금을 돌처럼 봤다는 최영과 신궁 이성계..사실 이성계의 아버지는 원나라 다루가치 출신인데 하여튼 이렇게 시대의 변화에 민감해서 변신을 잘 하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대내적으로는 신돈을 등용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했다. 한문을 보면 알겠지만 전민변정도감은 논밭과 노비에 관한 행정을 정비하기 위해 설치된 특별기관이다. 무신정권 이후 권세가들이 토지를 마음대로 겸병하여 병작반수제(이런거 기억 나나? ㅋㅋ 고딩때 다들 국사시간에 배웠을텐데...기억을 더듬어보시길.)를 강요했다. 원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고려의 힘이 약해지면서 부터는 친원파들이나 원나라에 관련된 기관들(정동행성이라던지 제주도에 있던 말목장, 전국에 산재되어있던 다루갖치들)은 한 술 더 떠서 마음대로 토지를 수탈하고 양민을 노예로 삼았던 것이다. 당연하게 세금도 안 내고...


전민변정도감 판사 신돈은 탈법/불법적으로 점유된 토지와 노예에 대해 개경에서는 15일 지방에서는 40일의 기간동안 자진신고하게 하였다. 토지는 원주인에게 돌려줘서 국가의 수조권이 닿게 했고 에서는 노예는 자신들 마음대로 자신의 행보를 결정하게 했다. 이 조치는 민중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나 당연히 기득권 세력과 마찰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신돈은 고려말 등장한 신흥무장세력(최영, 이성계、김방경등등)과의 갈등 뿐 아니라 유교를 바탕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신진사대부 계층과도 물과 기름처럼 지냈다. 공민왕과도 트러블이 발생하여 결국 1371년에 처형--;; 사랑해 마지 않았던 노국대장공주도 죽었고 신돈까지 스스로 숙청한 공민왕은 헤롱헤롱 거리기 시작했다. 귀족집안의 잘생긴 자제들로 고성된 ‘자제위’ 라는 기관을 설치했는데 사실 이게 묘하다. 딱히 하는 일도 정해지지 않은 이 친위집단 자제위가 공민왕의 동성애 상대 집단이었다는 말도 있는데...자제위 소속 젊은이들이 공민왕으로부터 지나칠 정도로 총애를 받은 것은 확실하다. 여러 계비들과 간통사건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그러다가 급기야 자제위 소속 홍륜이 익비를 임신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고 공민왕은 그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 고자질한 최만생과 홍륜을 다 죽이려 하다가 거꾸로 침실에서 자기가 죽음을 당한다.ㅠㅠ


고려말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자주적 대외정책과 대내 개혁을 실시했던 공민왕은 이렇게 허망하게 갔다. 공민왕 사후 이십년도 안되서 고려는 멸망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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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오늘(9.20) 강화도 연안을 침범한 일본 전함 운요오호, 조선 수비대와 충돌

 

흑..한 번에 나흘치를 올린다--;;


1875년 9월 20일 강화도에서 개항과 측량, 식량 및 식수 제공 등등 말도 안 되는 요구안을 내걸며 집적거린 일본 전함 운요오호와 조선수비대의 충돌이 있었다. 일명 운요오호 사건. 이 사건은 미국의 페리제독이 단 한척의 전함으로(일명 흑선, 구로후네) 자신들을 무릎꿇려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지 20여년 만에 그걸 그대로 똑같이 써먹은 것이다. 이 일은  중화 중심주의나 세계제국을 꿈꾸던 원나라와 다른 이른바 근대적, 서구적 제국주의가 아시아에 도입되어 실제로 첫 발을 내디딘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8월말 강화도 인근에 닻을 내리고 왔다리 갔다리 하던 운요오호는 아무런 사전 접촉없이 강화도 초지진 포대에 접근했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에서 나름대로 미제와 프랑스제국주의자들한테 한 깡을 보여준 조선 수비대는 냅다 포격을 가했으나 그것이 바로 일본이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음의 진수라고나 할까? 운요오호는 초지진에 맹렬한 함포사격을 퍼부었고(일본제국주의자들이 근대 무기 도입해놓고 써먹을데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태권도 몇 달 배워서 빨간 띠 쯤 따선 근질근질해져서 ‘만만한 놈 하나 걸려라~’ 하고 학교주위를 배회하던 성질 나쁜 넘들처럼 말야 ) 영종진에도 포격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육전대까지 상륙시켜 살인, 약탈, 방화 ,강간 하여튼 온갖 나쁜 짓은 다하고 ‘니들이 우리를 먼저 공격했다’ 며 배상금을 요구하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근데 재밌는 것은 이 때의 불평등조약은 그 당시의 ‘글로벌 스탠더드’였단 것이다. 요즘 BIS 비율이 어쩌고 개도국의 시장개방이 어쩌고 월스트리트의 투명한 경영이 어쩌고 하며 전세계에 강요하는 글로벌 스탠더드 말이지.19세기 후반에는 제국주의국가가 선택한 항구에 개항장의 건설, 개항장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속인주의 원칙의 적용등이 글로벌 스탠더드였던 것이다--;; 영미는 일본에 그걸 강요했고 글로벌 스탠더드 잘 배운 일본은 조선에 그걸 강요하고...아 참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ㅠㅠ) 조약이라고 역사책에 나온다. 

근대, 제국주의가 강요한 과거의 글로벌 스탠더드들에 대해 오늘날의 평가는 대체로 비슷하다.

쌀관세화, 스크린 쿼터 철폐, 한일 FTA체결 같은 오늘의 글로벌 스탠더드들을 훗날 역사는 과연 어떻게 평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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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오늘(9.19)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 쿠테타로 실각

 

1955년 9월 19일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도밍고 페론이 쿠테타로 실각하고 파라과이로 망명했다.

 

1943년 대령신분으로 쿠테타에 성공해 노동, 사회복지 장관을 거쳐 46년 첫 번째로 대통령 직에 오른 페론은 55년 쿠테타로 실각했으나 73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재집권했다.


우리나라에선 뻑하면 남미병 남미병 하면서 데모하면, 노조가 날뛰면 남미꼴 난다고 아무데다(심지어 노무현한테도!)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한 때를 풍미했던  빨갱이 딱지의 시대가 가고 포퓰리즘 딱지의 시대가 도래했다고나 할까? 특히 아르헨티나를 콕 집어 지적하며 후안 페론의 페론주의와 포퓰리즘 때문에 개판 난 나라라고 헐뜯는다. 과연 페로니즘이 그렇게 나쁜걸까?


모두가 인정하듯 30년대 아르헨티나는 농축산업에 힘입어 세계 7대 부국으로 까지 불렸고 잘 나가는 나라였다. 근데 왜 민중들의 분노는 들끓었으며 페론의 쿠테타가 성공했을까?

페론집권당시 아르헨티나는 참으로 왜곡된 토지소유구조를 지닌 나라였다. (물론 남미 대부분이 그러하지만..아시아 권에서 찾아보면 필리핀이 대표적인 경우고..이런 점에서 볼때 한국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온존해온 것은 해방직후 농지개혁에 힘입은 바가 큰 것 같다.) 극소수가 대부분의 토지와 부를 소유하고 있었고 아르헨티나 상류층은 자신들의 조상 나라인 아르헨티나나 이탈리아를 모국으로 생각하며 제 나라 민중들은 인간 취급조차 안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밑바탕에서 페론의 쿠테타가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포퓰리즘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지주과두제의 시스템을 혁파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과 정책이 포퓰리즘이었던 것이다. 대중들의 사회경제적 욕구가 표출되고 정부가 일정부분을 수렴해낸 것 그것이 바로 포퓰리즘이다. 만일 아르헨티나에서 페론과 포퓰리즘이 없었다면 지금 그 나라는 어떤 형국일까? 내 생각엔 콜롬비아 비슷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약 카르텔들이 실제로 나라를 지배하는...


페론집권기를 한 번 짚어보자. 페론집권기에 아르헨티나 국민 총생산은 127퍼센트, 개인소득은 232퍼센트 증가했다고 한다. 역사상 최대의 산업투자를 했으며 농업 일색이었던 산업구조를 공업과 농업 양날개 체제로 재편했으며 기간산업을 국유화 했다. 뿐만 아니라 전체인구의 60%를 차지했던 극빈 민중들이 페론 집권기를 통해 국부의 33%를 거머쥐게 되었다.물론 이 과정에서 토호 및 제국주의적 해외자본과 마찰이 있었고 그들이 결국 군부를 움직여 쿠테타를 일으켜 페론의 일차 실각을 가져 온 것이다. 페론이 사망해 재집권이 끝난후에는 군부가 장기집권했다. 칠레 피노체트 좋아하는 작자들은 아르헨티나 군부도 칭찬한다. 국민들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혁을 해냈다고....그 경제 개혁이 바로 무제한 개방과 포퓰리즘에 대한  배신이었다. 외채, 빈부격차로 상징되는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해악은 그 군부집권자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뿐인가?


민가협 엄마들이 쓰는 보랏빛 머릿수건은 바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군사독재 희생자 엄마 들이 쓰고 나와 진상규명을 외치던 그 머릿수건에서 유래한 것이다. 포퓰리즘과 페로니즘을 치유하겠다던 독재자들은 ‘국가전복 사범 색출’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민중들을 학살, 고문, 투옥했으며 심지어 그 희생자들의 자녀들을 불법적으로 다른 집안에 강제입양시키기 까지 했다.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아르헨티니 민주화가 진행됐을 때 자신은 군인의 딸인줄 알았던 한 여성이 사실은 고문 희생자의 딸이며 불임한 군인에게 강제로 입양된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실화에 바탕한 영화도 있었다.


에..이야기가 중구난방인데 페론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여성이 있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라는 유언으로 전 민중을 울린 에바 페론(이하 에비타)이다. 하긴 뭐 육영수씨 죽었을때도 우리나라 민중들은 눈물 많이 흘렸다 그러더라만--;; 심지어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도 자기를 필리핀의 에비타라 그랬다나 뭐라나. 그러나 에비타는 그런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다. 에비타는 페론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노동조건 개선, 남녀평등, 공공 의료의 확충을 위해 몸소 뛰었던 한 사람의 정치인이다. (물론 옷이랑 신발 같은건 좀 비싼거 입었던 거 같더라. 근데 아르헨티나 민중들은 그녀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다나? 자신들의 힘으로 잡은 권력이 아니라 아바타를 통한 혁명일 때 이런 현상은 보편적인 듯 하다.)

 사생아 출신의 무명배우 에비타는 1944년 난민구제모금 행사에서 당시 장관이었던 후안 페론을 처음 만났단다. 근데 한참 연애 하고 있던 (나이차이는 좀 나지만) 도중에 후안 페론의 대중적 인기를 우려한 군부가 페론을 투옥시켜버렸다. 우리의 에비타가 이 때 나선 것이다.  그녀는 노동자들 앞에서 ‘당신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누구냐? 페론이냐? 다른 군부냐?’고 외쳤고 노조와 민중들은 총파업으로 화답했다. 27세에 퍼스트 레이디가 된 에비타는 안타깝게도 33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어쩌면 페론의 실각을 보지 못했으니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비타, 체 게바라 어쩌면 리버 피닉스나 커트 코베인까지--;; 젊어서 요절 했기 때문에 이들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아 아직도 추앙받는지도 모르겠다.


참 마돈나가 나온 영화 에비타는 영 ~ 파이더라.


 에바 페론과 도밍고 페론 커플.

 

첨언: 한글 폰트가 안 써져서 한글2002열어놓고 써서 복사해 붙이는데 자간, 장평이 지 맘대로다 어떻게 고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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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오늘(9.18) 미 중앙정보국(CIA) 창립

 

1947년 9월 18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창립됐다. CIA에 대해선 워낙 헐리우드 영화에서 뽀다구 나게 많이 그려놓아서 대강들 알게다. CIA의 전신은 이차대전 중에 생긴 미국 전략지원국(OSS)이다. OSS의 뿌리를 따져보자면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MI-6(영국 대외정보국)의 도움으로 설립된 것이고..하여튼 미국 넘들은 영국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영국도 마찬가지지만... OSS 는 우리와도 관계가 있다. 편이다. 먼저 김성종의 장편소설이자 티비 드라마로 유명한 ‘여명의 눈동자’ 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여명의 눈동자를 보면 여옥이가 곤명의 OSS지구대에서 첩보원 훈련을 받는 장면이 나오고 태백산맥의 김범우 또한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영국군을 거쳐 미군 OSS로부터 국내 진공 훈련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광복군은 미 OSS와 영국군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1945년 8월 하순 국내 진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장준하, 김준엽 등이 실제 OSS로부터 훈련을 받은 광복군들이다.


전쟁 이후 미소의 확장정책이 유럽에서 충돌을 일으키자 미국의 대공산권봉쇄전략의 일환으로 OSS를 CIA로 확장했고 곧 이어 마셜플랜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 때부터 냉전기가 CIA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도 힘 쓰지만 그 때 보단 못 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주요 정보기관은 CIA외에도 NSA(국가안보국-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에 잘 나타난 바 있다. 사실 규모로 보면 NSA가 CIA보다 더 크다), NRO(국가정찰국), DMR(국방지도 제작국), CIO(중앙화상국)등이 있다. 들리는 말로는 요즘 CIO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사행동과 대외정책의 기본이 되는 국가정보요약보고서(NID-National Intellingence Digest)를 작성 총괄하는 주체는 CIA다. 조지 부시 (멍청한 아들내미 말고 그 아버지) 또한 CIA국장 출신이다. 아 참 국정원의 예전 이름이 안기부였고 그 이전 이름이 중앙정보부 였다는 사실은 다 알 것이다.(초대 중앙정보부장-김종필) 그 중앙정보부의 영문 명칭이 바로 KCIA였다.


CIA의 온갖 더러운 짓들은 줄줄이 늘어놓기도 힘들지만 몇가지만 짚어보자. 먼저 본 디렉토리에서 911에 소개한 아옌데의 죽음(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2&pid=43) 뒤에 있는 것도 바로 CIA다. 70년 집권 이후 구리광산의 국유화, 중국/쿠바와의 수교로 미국의 ‘심기’를 거느리자 역시 불법행위 때문에 대통령 자리를 내어놓은 닉슨은 당시 국장 헬름즈에게 아옌데 제거 쿠테타에 대한 오더를 내렸다. 정치사회 경제적 혼란을 조성하는 것 외에 CIA는 직접 행동에 돌입했으니...


트랙2라는 코드네임으로 일단 특공대를 조직했다. 그 특공대 활동의 걸림돌은 엉뚱한데 있었다 바로 당시 칠레 육군참모총장 슈나이더. 슈나이더는 칠레의 다른 군장성들과 다르게 문민통제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내심 아옌데가 맘에 안들었으면서도 헌법 수호를 강조하며 군을 통제 장악하고 아옌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박 모나 전 모 혹은 칠레의 피 모씨들하고는 질적으로 좀 다른 사람이었던 게다. 그리하여 트랙2는 외교행낭을 통해 칠레 우익장교에게 깨끗한 저격용 총기(잘 닦았다는 말이 아니다--;; 총기일련번호, 제조처등을 통해 출처를 알 수 없게 정리된 총이란거지)을 전달했고 몇시간 후 슈나이더는 저격 암살 당한다. 곧 이어 쿠테타 발발, 아옌데 사망 ㅠㅠ.


뭐 이것 뿐 만이 아니자. 쿠바 피그만 침공, 수차례에 걸친 카스트로 암살시도, 체게바라 사형에 대한 최종 결정 이런 것 모두가 CIA의 공작이다. 하긴 뭐 박정희가 김대중을 납치해올 때 그 목숨만은 살려준 것도 CIA라나??


잘 알다시피 KCIA또한 능력은 딸리지만 불법자행 으로 따지면 세계 어느 정보기관에도 꿀리지 않았다. 결국 정보를 중앙집중해서 써 먹으려는 권력자들의 의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양 기관이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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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오늘(9.17)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9월 17일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알파벳 순으로 북한(D.P.R.K)이 160번째 , 남한(R.O.K)이 161번째 유엔 회원국으로 결정됐다. 뭐 유엔이 별건 아니지만 남북 양국이 48년에 실체로서 모습을 드러내고도 43년이 흘러서야 유엔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재밌는 사실은 유엔이 특별나게 남북 양측을 가입 안 시켜 주려고 해서 안 시켜 준게 아니란 것이다. 남한은 북한이 가입하게 될까봐 미국을 내세워 계속 공작을 했고 북한은 남한만 가입하게 될까봐 소련을 내세워 방해공작을 펼쳤다. 특히 남한은 단독가입 아니면 의미없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북한은 남한만의 단독가입 혹은 동시가입은 분단의 고착화라는 논리를 내세웠었다. 그리하다가 서로서로 상대만 안 들어가면 나도 안 들어가도 별 상관없겠다는 인식하에 쭉 지내온 것이다.


긴 세월 유엔 안 들어가고도 서로 불편 없이 살았는데 갑작스레 유엔에 동시가입하게 된데는 몇 가지 배경이 존재한다. 먼저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필두로 한 동구 국가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이 있다. 비록 이북이 그 동네에서 나름대로 독자노선을 걷긴 했지만 전통의 맹방들이 픽픽 쓰러져가고 소련 조차도 페레스트로이카다 글라스노스타다 해서 배반(?)을 때리는 판국이니 뭔가 살길을 찾긴 찾아야 했던 것이다. 남한의 경우를 보자면 경제로서는 이북이 따라오지 못할 만큼 멀찍이 도망간데다가 원님덕에 나발분다고 체제경쟁에서도 남 덕에 승리하게 된 것이 아닌가? 게다가 외화 팍팍 들고 박철언이 이 동네 저 동네 수교하러 다니고...


결국 이런저런 사정들이 겹쳐서 남북이 유엔 동시가입하기로 쇼부를 친 것이다. 소련으로서도 자신들이 미국하고 더 이상 군사력, 경제력으로 경쟁을 못하는 마당에 동북아의 남북 대치 상황이 급변하기를 바라진 않았을거고 어느정도 연착륙하기에는 유엔 동시가입을 마다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동구권은 픽픽 쓰러지지만 당시 북한은 건재하고 김일성도 꽤 팔팔했기 했던걸 감안했을 테다. 유럽의 정치적 격변도 컨트롤 하기 힘든데 열받은 이북이 혹 사고나 치지 않을까 싶었던 차에 유엔 동시가입이란 카드는 동북아 긴장이 어느정도 연착륙 할 수 있는 카드로 다가 왔던 것일테다.


지금 생각해보면 딱 한 세력이 어이없어 했을텐데..그건 바로 남한내 운동세력들이 아닐까 싶다. 동구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우리식 사회주의를 믿으며^^ (이런걸 보면 참 주체적 민족이다 싶다. 남에선 민족적 민주주의, 북에선 우리식 사회주의) 이북을 민주기지로 삼아 남한 해방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지 싶다. 이북이 분단고착화의 상징인 유엔 동시가입을 승인했으니...소비에트 믿던 좌파는 좌파대로 급변하는 정세에 어이없어 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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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오늘(9.16) 한국민주당 창당

1945년 9월 16일 자칭 '민족 진영'으로 구성된 한민당이 창당됐다.이승만 믿고 창당된 한민당은 주도권 다툼 과정에서 이후 이승만에게 팽당하고 민주당으로 계승되었고 신민당, 평민당, 국민회의 등을 거쳐 오늘의 열린 우리당(민주당은 자신들이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에 이르고 있다.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민주당 세력과 개싸움을 벌이며 자신들이야 말로 정통 야당 '한민당-민주당'의 맥을 잇는다고 우기는 걸 보면 참 우습기 그지 없더라. '정통야당' 한민당이 어떤 당인가? 하긴 이승만 자유당이랑 티격 태격 하긴 했지만 그래서 정통야당인가? 대통령하고 사이 안좋다고 정통성 획득 한다면 김대중 정권이래 한국 최고의 정통성은 아마 김영삼에게로 돌아갈거다.

 

그렇다면 한민당은 과연 어떤 집단인지 이야기 해보자. 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국회의원 최익승이 나온다. 제헌의원 최익승의 소속 정당이 바로 한민당이다. 해방 정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정통성을 갖고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친일파 척결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지주, 친일파들이 부랴부랴 '민족진영, 반공'을 내세우며 창당한 것이 바로 한민당인 것이다.

 

한민당의 주요 멤버들은 누가 있었을까? 전라북도 땅 절반이 자기 집안 소유였으며 일제 때 이미 경비행기를 타고 소작지를 둘러보았다는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삼양사, 경방의 사주이자 그의 아우인 김연수는 반민특위 조사 대상이었다.) 경상도 관찰사 출신 악질 지주로 악명을 떨치다가 독립군의 총에 맞아 죽은 친일파를 부친으로 두고 경북 최고의 친일 기업인을 형으로 둔 장택상(장택상은 해방직후 수도경찰청장 자리에 앉아 반민특위 해산, 사회주의 전력자 탄압, 백색테러의 든든한 후견인 노릇을 했다.) 그 외에 경무국장 조병옥등이 한민당의 주요멤버였다.

 

요런 작자들이 모여서 민족진영이랍시고 미군정과 이승만의 딸랑이 노릇을 하며 정부 수립의 주춧돌--;; 역할을 하였으니 참 당시 정국도 개판 오분전임에 틀림 없는 듯 하다. 친정체제 구축에 나선 이승만에게 팽당한 한민당은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그나마 이승만 정권의 치적으로 불리는 농지개혁을 늦추고 누더기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훈을 한 것도 바로 한민당인 것이다. 이 자들은 이승만 독재가 강고해지면서 은근슬쩍 정통야당의 가면을 쓰게 되고 일정 부분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내며 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꾸게 된다. 이 들은 3대 대선에서 조봉암의 진보당에 대해 빨간 딱지를 씌우고 협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조봉암이 간첩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고 진보당이 해산당할 때도 콧노래만 부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방정국에서 온갖 불법적 테러를 자행한 조병옥이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이승만과 맞서 민중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코미디인지 비극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419의 수혜를 혼자 받아 안은 민주당의 총리 장면 또한 일제에 협력했던 자로서 동성학교 교장을 지내며 징용에 한 몫을 했다. 장면 정권은 어떤 민주적 정책을 펼쳤을까? 바로 반공법, 데모금지법 제정이라네..게다가 516 쿠테타가 발생했을때는 수녀원으로 도망쳐서 콧배기도 보일 생각도 안 했고...

 

이런 정당의 후예들이 쿠테타 후예 한나라당 더러 '너네의 역사는 쿠테타가 어쩌고 저쩌고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며 해산해야 마땅하다' 고 외치는걸 보면 얼굴 두께에도 급수가 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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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오늘(9.15) 케렌스키, 러시아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 선언

1917년 러시아 혁명 지도자 케렌스키가 왕정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선포했다.

 

짜르 체제를 타도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온건 사회주의자'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과정을 살펴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짜르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공화파, 자유주의자, 온건 사회주의자 순으로 권력이 차례 차례 넘어가고 그 다음에 마침내 볼셰비키 소비에트가 천하통일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2월 혁명에 대해 잠깐 되짚어 보도록하자. 1917년 일차대전 중 페테스부르크는 러시아 최대의 공업도시이며 군대 집결지였다. 식량난과 연료난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1917년 2월 14일 국회로 시위 행진 할 것을 결의했다. 볼셰비키등의 반대로 그 행진은 무산되었으나 마침내 23일 여성노동자들이 먼저 파업에 돌입하고 남성노동자들도 흐응했다. 25일에는 파업이 전역으로 확산되고 26일에 시위대에 대한 발포가 있었으며 마침내 27일 노동자들의 아들인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병사들은 감옥의 정치범들을 해방시켰으며 병사와 해방된 정치범들이 페테스부르크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창설한 것이다.

 

정부는 진압 부대를 출동시켰으나 그 부대는 출동중에 소멸되 버리기도 했다^^ 이 와중에 케렌스키는 의회가 혁명을 대표하게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노동자대표와 사회주의 정당 대표들이 소비에트 결성회의를 여는 것을 보고 잽싸게 국회임시위원회의 권력장악을 선포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민중들의 손에 들어가는 걸 불안해 하고 어떻게든 체제내화 하려는 작자들이 있는 법인게다.

 

이 당시의 상황은 상당히 희한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소비에트를 따를 것을 천명했으나 관리와 장교는 국회 임시위원회에 충성을 맹세했으니 이른바 이중권력 상태로 돌입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계속 진행을 외치는 국회임시위원회(관리와 장교도 포함)와 침략반대를 내건 병사들은 충돌했고 이 때 레닌이 귀국했고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소비에트는 비로소 정권 수립을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이 와중에 멘셰비키는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참가해 연립정부를 발족시켰다. 육해군 장관을 맡고 있던 케렌스키는 황당하게도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전선에서의 공세를 준비하려 했다.

이에 분개한 민중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 하에 뭉쳤다. 멘셰비키가 이 민중들을 비난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민중들은 연립의 중단과 소비에트 권력의 실현을 요구하며 무장시위를 감행하기 이르렀고 멘셰비키는 이에 볼셰비키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레닌은 다시 지하로 스며들기까지 했다. 이 와중에 케렌스키는 전쟁의 공세 수준을 높였고 열린정부 수반 자리를 꿰차기 까지 했다. 엎친데 덮친다고 군사령관 코르닐로프는 군사독재를 꿈꾸며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역시 볼셰비키와 소비에트가 코르닐로프를 저지시켰다.

 

지지 기반을 찾아 헤메이던 케렌스키는 9월에 민주주의파 회의를 열어 이른바 예비 의회를 발족시켰고 3차 연립정부를 발족시켰다. 이 연립 정부가 15일에 임시정부 수준을 벗어나 러시아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후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1917년 10월 25일 오전 10시 트로츠키를 위원장으로 하는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가 임시정부의 타도와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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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오늘(9.14) 석유수출국 기구(OPEC) 결성

늦어서 정말 미안하다. 알다시피 파견, 기간제법이 입법예고 됐고 그 것 때문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이 시간에 올리는 것을 어여삐 봐달라.ㅠㅠ

 

1960년 9월 14일 이란, 이라크 , 쿠웨이트 , 사우디 아라비아. 베네주엘라 5개 주요 산유국이 국제 석유 수출국 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을 결성했다. 현재는 11개국이 OPEC에 가입해 있다. 그런데 최근 국제 유가가 어떻게 되더라? 배럴당 50달러 정돈가? (아참 1배럴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거다. 물론 나도 잘 몰랐다. 확인해보니 159리터더라. 쌀두가마니 정도 되는 양이다. 그렇게 보면 원유값이 비싼건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두바이산 원유, 텍사스 중질유 혹은 북해산 브렌트유란 이름은 아홉시 뉴스에 종종 등장해서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다.

 

19세기 미국에서 최초로 상용화 된 이후 석유는 인류 최고의 뜨거운 감자 자리를 내어놓은 적이 없다. 일찌기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는 석유를 '악마의 눈물'이라고 일컬은 적이 있다.  록펠러가 바로 본 거 아닌가 싶다. 석유는 문명 확대에 큰 공헌을 했지만 지구 각지의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자동차, 탱크, 전투기, 항공모함 모두가 석유로 움직인다. 석유 덕에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다가 단추 하나로 미사일을 투하 할 수 있게 됐다. 뿐인가? 대형 유조선의 원유 유출로 기름을 흠뻑 뒤집어 쓴 가마우지의 사진은 잊을만 하면 반복적으로 국제뉴스를 장식한다.

 

석유가 창출하는 가치는 세계적 빈부격차를 더 심화시키고 냉전 이후 전쟁들에 석유가 한 다리 걸치고 있지 않은 것을 찾기는 어려울게다. 이라크가 세계 제2의 산유국이 아니면 지금처럼 미국의 표적이 되었을까?

 

뿐만 아니라 원유는 전세계적 로또나 다름없다. 지금이야 유정 개발이 쉽지 않았지만 몇십년 전만 해도 상황은 다르다. 영화 자이언트에서는  반항아 제임스 딘이 한 구멍 잘 뚫어서 일거에 인생역전했고(검은 원유로 샤워하며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린 제임스 딘의 모습이 인상적이지 않나?) 조지 W 부시 또한 텍사스 원유 사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지?

 

하여튼 OPEC의 등장만을 보면 꽤 긍정적이다. 지난 9월 10일자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2&pid=42) 본란을 통해 '곡물 메이저' 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지만 석유 메이저들도 그에 못지 않다. 온갖 지저분한 합병과 통합을 거쳐 지금은 엑슨 모빌(미),로열 더치 쉘(영국, 네덜란드), BP(영), 쉐브론 텍사코(미)로 정리된 석유 메이저들은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주요 원유생산국들의 석유를 한세기 동안 강탈하다 시피 해왔고 그 기업의 본국들은 석유를 전략무기 처럼 사용해왔다.

 

결국 그 제국주의 국가들과 석유 메이저들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산유국들이 결성한 것이 바로 OPEC인 것이다. 몇번의 원유 파동을 통해 OPEC은 세를 과시했지만 사십여년이 지난 오늘날 OPEC을 보면 뭐 그렇지도 못하다.

 

물론  사우디의 아람코나 쿠웨이트의 KPC, 베네수엘라의 PDV(그렇다. 지난 9월 11일 본란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2&pid=43 에서  언급된 베네주엘라의 석유 산업 사보타지의 중심이 바로 PDV다) 등이 OPEC의 역사를 통해 나름대로 국제적 석유 메이저로 등극하기는 했다. 최근엔 러시아 올리가르히(과두 재벌)들이 자국의 국영 석유 회사를 인수해 덩치 키우기에 나서고 있고...

 

몇번의 석유 파동 동안 아랍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미영등 제국주의 국가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혁혁한 공훈을 했던 OPEC은 이후 여러가지 이유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됐다. OPEC내의 가장 큰 전선은 친미-반미의 전선이다. 그 아래 아랍 민족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지만 첫 째 전선을 벗어난진 못한다. 이라크, 이란, 베네주엘라등이 목소리를 높이고 감산 정책을 펼치면 사우디, 쿠웨이트등  미국 꼬붕들은 급격한 증산을 통해 찬물을 끼얹어 버리곤 했다. 물론 기름 한 방울 안나는 우리나라로선 유가 상승이 큰 부담이 되지...

 

그러나 농산물이나 석유나 다 마찬가지다. 세금, 각종 부담금, 독점적 정유체계등을 통해서 중간에서 해먹는 돈이 얼마일까? 주유소에서 기름 넣을때 가격하고 배럴당 원유가격의 차이를 비교해 보라. 배럴당 50달러 해봤자. 리터당 가격으로 치면 우리 돈 300원에 물과하다. 주유소에서 넣을땐 근 4배에 달하지? 하여튼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고 있는거다. 시장경제, 자유경쟁을 들먹이는 작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선 왜 말이 없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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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오늘(9.13)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평화협정 체결

1993년 9월 13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클린턴이 지켜보는 가운데 PLO의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총리 라빈이 팔레스타인 자치 협정에 서명했다. 1994년 협정 당사자인 아라파트와 라빈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인 페레스는 노벨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그 협정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은 자치는 3단계로 진행하기로 되었다. 1단계는 가자와 여리고, 2단계는 요르단강 서안에서 이스라엘이 철군하고 자치의회 선거, 마지막 단계로 자치정부의 최종 성격확정과 동예루살렘 문제, 해외 망명 팔레스타인 인사들의 귀환, 국경 확정과 이스라엘 정착촌 처리가 마무리 되는 것이다. 몇 번의 논란과 충돌 끝에 1, 2단계는 실시에 성공했으나 3단계는 아직도 난망한 상황이다.

 

지금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은 베를린 장벽에 버금가는 장벽들로 둘러싸이고 있으며 예루살렘을 둘러싼 갈등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947년 유엔은 '예루살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워질 유태 국가와 아랍국가 양국에 소속될 것'을 제안한바 있고 당시 이스라엘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으나 팔레스타인이 거부한 결과 1차 아랍전쟁이 발발한 바 있다. 이후 1967년 이스라엘은 요르단이 통치하던 동예루살렘을 점령, 합병하고 80년엔 '하나로 온전히 통일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발표했다. 이후 점령지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해외 귀환 유태인들을 대거 이주 시켜 인적 물적으로 이스라엘화를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다. 아니 거의 진행이 완료되었다. 팔레스타인 해방전사들 또한 예루살렘을 결코 양보할 수 없음을 천명하며 투쟁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클린턴의 외교적 배후 조종, 이스라엘 인 치고는 합리적인 캐릭터였던 라빈(뒤에 다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최초의 노동당 출신 수상 라빈은 95년 이스라엘 극우파에게 암살당한다), 이스라엘의 공세와 팔레스타인 내 하마스등의 압박을 양측으로부터 받은 아라파트의 돌파구 찾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팔레스타인 평화협정은 이제 제대로 기억되고 있지도 못하고 별 의미도 없는 실정이다. 제한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물론 팔레스타인 정부는 요르단강 서안지부와 가자지구를 대표하는 합법자치정부이다.1996년에는 입법의회를 구성하고 아라파트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1964년 422명으로 시작된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 만큼의 정통성과 지지를 얻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민족평의회는 1964년 바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창설했고 팔레스타인 국민서약을 제정했으며 망명자들의 의회로 그 역할에 충실했었다. 1974년엔 아라파트의 유엔 연설에 이어 유엔 업저버 자격까지 획득했었다. 그 빛나는 활약과 의지에 비하면 현 자치정부는 너무도 미약해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평화협정에는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수상이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고위 관료들이 그렇듯 이 사람도 군인 출신이다. 6일 전쟁당시에는 이스라엘 참모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주미대사로있던 67년에 이미 중동평화정책의 일환으로 아랍 점령지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주장하다가 이스라엘 내의 강경론자들(지금 수상 샤론이 대표적)로부터 맹공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노동부 장관을 거쳐 이스라엘 본토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수상자리에 올랐다. 이후 국방장관등을 지내다가 다시 수상자리에 올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그 로드맵을 시행했다. 그러던 중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에서의 중동평화회담 지지집회 연설후 극우 유대인청년의 저격을 받고 숨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고 이스라엘의 탄압도 변한바 없다. 이라크에서 최근 벌어진 미국인들의 고문이나 관타나모 기지내에서의 포로에 대한 인권탄압은 사실 이스라엘 군/정보 당국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시행하던 것을 미국인에게 가르쳐준것에 불과하다. 가히 청출어람 청어람이 아닐 수 없다. 한편 현재 이스라엘 전역의 교도소에서는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이 집단 단식투쟁을 하고있다고 한다. 요구 조건은 남자 형제에 대한 면회금지 철회, 사식의 반입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단식투쟁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는 반응은 '음식을 먹든 안 먹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가자지구 정착촌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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