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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 '건강과 사회'

녹색평론 7권에 있는 글입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지금은 거의 구할 수가 없더군요.

허락없이 전문을 타이핑해서 올립니다만...

녹색평론에서 좋아해주실거라 믿습니다.  ^^

(강조는 제가 했습니다. 오타 지적해 주시면 수정할게요. ^^)

 

의료의 소비자나 의료정책의 수혜자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나

불건강한 사회관계를 폐기하고, 건강한 삶의 기술과 주권을 회복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보험드는 것 밖에 대책이 없는 불안한 삶이 두렵다면,

강추합니다.  읽어보세요. 저는 힘이 좀 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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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쓰, <건강과 사회>, <<녹색평론 7권>>

흔한 병에 대해서 전문적인 의학적 진단과 치료를 하는 것이 열중 아홉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한 병의 증상은 분명하고, 치료법도 잘 알려져 있으며 값도 싸다. 그래서 의료전문가들이 병의 치유를 촉진하기는 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맨발의 의사”를 훈련하는 데 3주일밖에 걸리지 않는데, 이들은 공장이나 농장의 노동자로서 일을 계속하면서 일반적인 병에 대한 처치를 하고 약을 나누어주며(그들은 약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나, 함께 사용하면 안되는 약 등을 잘 알고 있다) 어떤 경우에 전문가가 필요한지를 판단한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아주 정확하게 해내기 때문에 현지에 가 본 서양의사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반 일리치가 인용하고 있는 캐나다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치료에 필요한 의료비가 아주 싸기 때문에 현재 인도의 건강지출이 균등하게 분매된다면 인도사람들 모두가 혜택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세계보건기구의 책임자에 따르면, 피부병의 진단과 처치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1주일만에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살바도르 아옌데(그도 의사였다)도 들어 있던 칠레의 의료위원회에 따르면, 질병에 대하여 현저한 치료효과가 있는 약은 겨우 20~30가지 뿐이며 따라서 약전(藥典)은 쉽사리 축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약의 반 이상이 사용법을 첨부해서 자유롭게 팔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난 20년간 모든 산업국가에서 의료장비와 “건강”관계 지출이 엄청나게, 국민생산 속도보다 두세배 정도나 증가하였다.
조제약의 소비는 더욱 빠르게 성장하였다. 프랑스에서 개인당 약품 구매량은 13년간에(1959-1972) 2.7배로 늘어났다.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어른들의 반 이상, 그리고 모든 아이들의 3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이 매일같이 어떤 약인가를 먹는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향정신성 약품(안정제, 수면제 등)에 대한 처방이 그 나라들의 주민수만큼이나 많이 내려지고 있다. 미국의 제약산업은 연간 1인당 18회분의 암페타민과 50회분의 바르비투르산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약품과 의료전문가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삶의 개선이나 생명의 연장에 있어서 그것들은 별로 효과가 없다. 도리어 그 반대여서, 프랑스에서 60세 이상인 사람들의 평균 예상여명은 1900년대보다 겨우 2년 높아졌을 뿐이다. 프랑스 사람 일반의 경우에는 평균 예상여명이 1965년 이후로 변하지 않았다. 지난 약 10년간 모든 산업국가의 40대, 50대 남자의 사망률은 높아졌다. 15세에서 20세 사이의 젊은 사람들의 사망률은 프랑스에서 해마다 2퍼센트씩 오르고 있다. 영국의 50세 이상의 노동자들의 사망률은 1930년대보다 지금 더 높다. 사망률이 반드시 일반적인 건강에 대한 좋은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J.N.모리스는 사망률로 미루어 그 자신이 염려했던 것보다 일반적인 건강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20년동안에 55세에서 60세 사이의 남자들에게서 만성병의 현저한 증가가 있었고, 60대에 들어서는 남자들에게서는 그 증가율이 약 30퍼센트 정도나 높아졌다. 영국 국립보건원은 1970년의 보고서에서 6년동안(1963-1969) 영국인들이 질병으로 인해 잃어버린 날짜들이 20퍼센트 증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크게 늘어난 것은 심장 혈관계 질병과 류머치스, 그리고 기관지염과 폐결핵을 뺀 호흡기 질병이었다.
이러한 통계는 “아픈 사람이 더 많아졌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살기 때문이다”라는 흔히 듣는 말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통계는 또한 건강관계 소비를 더 늘이면 일반적인 건강을 개선시킬 수 있다라고 하는 믿음에 명백하게 반하고 있다. 진실은 훨씬 단순하다. 사람들이 약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은 그들이 더 병들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의료소비의 빠른 증가는 질병의 증가를 전혀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의료는 그 자신이 추구한다고 하는 목표에 별로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의료의 발달은 이제 아무런 혜택도 가져오지 않고, 실제로 의료에 의한 치유보다는 손상이 더 많은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생활방식과 환경이 점점 더 질병 발생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퇴행성 질병들은, 그 이전의 감염성 질병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문명병이다. 윌켄스타인은 질병이 발생한 신체부위에 따라 병명을 부를 것이 아니라 병의 원인에 따라 병명을 붙이고 분류해야 된다고 말한다. 예컨대 풍요의 질병(과식, 오래 앉아있는 것, 담배 등에 기인하는), 속도의 빌병, 현대적 편의에 의한 병(운동과 자연식품의 결핍에 기인하는), 오염에 의한 병 등으로.
최근의 연구들은 심장혈관계 질환, 고혈압 그리고 특히 콜레스테롤 과다증은 이른바 원시인들에게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아주 드물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직 우리 문명에서만 그런 질병이 나이든 사람들을 괴롭힌다.
더욱이, 남자들에게 열 번째로 흔한 병인 대장 및 직장암은 아프리카의 농업지역보다 산업국가들에게서 열배나 더 흔하다. 그것은 섬유질이 부족한 식품이 심각하게 느린 속도로 장을 통과함으로써 조장되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 암연구센터의 히긴슨박사는 모든 암의 80퍼센트가 생활방식과 산업사회의 환경에서 기인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예를 들어 위암은 석탄연기로 인한 공기오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관지 및 폐암은 담배연기의 흡입과 관련이 있다. 영국의 암전문가이며 방영학자인 R.돌에 따르면, “많은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대부분의 암은 환경에 의해 생겨난다고 믿게 되었다. 특히 암의 발생빈도가 나라에 따라서 크게 다르고, 그 차이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주하는 집단에게서 재확인된다는 사실로 보아 그러하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대부분의 암은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다른 통계는 폐암과 만성기관지염에 의한 사망률이 시골보다 도시에서 두배 이상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어와 새스킨은 공기오염을 반으로 낮추는 것만으로 폐암에 의한 사망 25퍼센트, 기관지염에 의한 사망 50퍼센트, 심장혈관질환에 의한 사망 20퍼센트 등을 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일라이 긴즈버그는 “섬유질이 풍부한 다양한 식사가 어떤 새로운 의학발달보다도 사람들의 건강에 더 크게 기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들이 여전히 무시되고 있거나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의료, 의사들, 보건정책, 그리고 대중이 질병을 막는 것보다 환자를 보살피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건강한 사람의 건강은 너무나도 가치가 없어져 버린 것 같다. 기업과 공공기관 국민들 자신이 건강훼손을 어리석게도 거의 하나의 제도적 정책으로 자행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극소수의 환자를 “구제”하거나 혹은 크고 대단히 값비싼 선진 의료설비를 가지고 훼손된 건강을 “수리하는” 경우가 될 때, 그 때는 “생명값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실제로 의료의 혜택은 줄어들고 있는 동안에도 의료비용(특히 병원비)는 성큼성큼 늘어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의료가 가장 효과적인 조치(그것은 예방이다)를 무시하고, 효과가 의심스럽고, 그 비용은 너무 높아서 대부분의 사람이 이용할 수 없는 과시적 의료기술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느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예를 들어, 장기이식 기술을 보자. 과학적 반향은 어떻든간에, 장기이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할 장기가 결코 충분히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생명을-그리고 고통을- 연장할 가능성이 있는 죽어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제공할 생명유지장치가 충분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심장발작 환자들을 구하기 위해 마련된 중환자실을 보라. 그것은 바로 선진 의료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유지 서비스가 그러하듯이, 이곳에는 일반 병실보다 세배나 더 많은 장비와 다섯배나 되는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비용을 고려함이 없이 수백개나 되는 중환자실을 만들 필요가 있는가? 게다가 지방사람들도 이것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한 헬리콥터 수송망까지?
플라트 경이 이끄는 영국의 한 조사위원회가 이 문제를 연구했는데 그 결론은 가정에서의 간호에 비해 중환자실이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위원회는 말하기를 “절반 이상의 사망이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발생하며, 대부분의 시간 손실은 의사를 부르기 전에 생겨난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심장발작환자의 50퍼센트는 의학처치가 가능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위해서 우리는 예방에 기대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의 예방은 아무런 호소력이 없다. 장 피에르 듀피가 잘 예시했듯이, 새로운 초현대식 병원을 짓는 것은 정치적으로 수지가 맞는 일이지만, 환자수가 반으로 줄었다고 해서 한 정치가가 감사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예방수단 덕분에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통계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통계상의 사람들”이다. 그들 자신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혜택을 입은 보호수단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누구 덕분에 일년 내내 병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에게 투표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그에 비해서 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는 구체적인 사람이고 그 사람과 그의 가족들은 그 병원을 세운 정치인이 “이 새 병원을 세운 것은 본인입니다. 본인에게 투표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그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예방보다 처치가 더 수지 맞는다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질병은 고용기회를 만들어내고 따라서 “부”를 만들어 냄으로써 가장 수익성 높은 기업을 돌아가게 만든다. 환자의 수와 “건강”산업의 동시적인 증가는 국가 대차계정에서 플러스 쪽에 표시되지만, 환자가 없어져서 이러한 산업이 사라지면 그것은 GNP의 감소로 번역되고 자본주의에 타격이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질병은 수익성이 높고, 건강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모든 양식(良識)과 페어플레이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의료가 계속해서 발달하는 까닭이다. 수백만의 교외거주자들의 나날의 수송문제보다도 초음속 제트기 콩코드에 더 큰 중요성을 두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건강유지의 문제보다도 선진의료의 모험적인 개척자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 의료기술의 발달은(교통문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결핍과 불평등과 좌절감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로 더 소수의 필요만을 충족시킨다. 그러한 과정에 가장 고약한 환상, 즉 머지않아 의학이 모든 질병의 치료법을 알게 될 것이며 따라서 병을 예방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환상을 유지시킨다.
이러한 환상은 의료용어에서도 발견된다. 건강검사나 퇴행성 질환의 조기진단이, 실제로 아무런 처치나 치료를 하지 않는데도 “예방”이라고 불리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존 캐슬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질병을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은 환자들 개개인의 질병을 살피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집단적인 차원에서의 환경과 병에 걸리기 쉽게 만들고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사회적 심리적 요인들을 다룸으로써였다. 건강은 본질적으로 발병요인들과 사람 사이의 균형상태이다. 건강은 자신의 환경과의 사이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 달려있다. ... 중요한 점은 이 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사회적 지원이 주어질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증가하는 질병, 진정한 예방에 대한 무관심, 건강관리를 위한 엄청난 과잉소비, 그리고 건강을 회복시키지 못하는 약품들. 이러한 터무니없는 상황에 의학과 의사들은 어떻게 적응하는 것일까?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환자와 질병, 의료의 기능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아직도 18세기와 19세기의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에 깊이 젖어 있다. 신체는 톱니바퀴가 고장난 기계로 간주되고 있다. 의사는 수술이나 화학적 혹은 전기적인 수단으로 톱니바퀴들을 다시 제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기술자인 것이다.
고대의 의학과는 달리 부르조아 의학은 개인들만 알았지 전체 인구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물론 의사들이 “그들의” 환자들과 갖는 관계로 볼 때 당연하다. 환자들은 사사로운 개인들이고 고객이다. 환자들은 지금 이곳, 있는 그대로의 세상속에서 의사가 그들의 통증을 덜어주고 치료를 하고 조언을 해줄 것을 청한다. 의사들은 이 요구에 순응한다. 그것이 그들의 직업이다. 의사가 개별적인 사례를 넘어서 그 질병의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원인을 볼 것을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렇게하여 의학은 부분적인 구조들만을 세밀하게 연구하며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구조를 고려하지 않는 괴상한 “과학”으로 변하고 있다.
오직 소수의 개척자들, 선교사들 그리고 “미치광이”들만이 전체인구를 고려하는 방역학과 생리학 혹은 인류학이나 작업관련 질병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 진정한 연구가들과 이론가들은 의료전문가로서의 명예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의료의 실제와 기능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인구전체의 건강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필요한 돈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아무도 그런데 신경을 쓰라고 의사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받은 훈련과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의사들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습관과 환경을 변화시켜 건강을 도모할 수 있을지를 충고해 줄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의사들은 사회체계의 좁은 한계 안에서, 놀라우리만큼 사회규범에 순응하면서, 그들의 직업을 수행한다.
가스와 화학증기, 연기(담배, 녹은 금속, 뜨거운 기름, 석탄의)와 먼지(석면, 면, 화강암의)를 들이마시는 것이 건강에 몹시 해로우리라는 것을 의사들이 어떻게 예견할 수 없었던가? 어떻게 그들은 산업도시와 광산촌의 생활조건, 그들 자신이 날마다 그 처참한 폐해를 보고 있는 그 상황에 맞서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퇴행적 진행(동맥경화증 고혈압, 천식 등)을 - 이러한 증상이 “정상적”인 것으로 그들이 받아들이는 생활에 기인하기 때문에 - “질병”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있지 않는가?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문명과 사회가 전체 인구에게 입히고 있는 손상을 의사들은 어떻게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묻는 순간 이 질문은 당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왜 임금노동자, 시민, 투표자, 납세자인 당신은 국가나 당신을 고용한 사람들에게 질병의 결과나 비용을 감당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면서,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질병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는가? 어째서 당신은 더 많은 병원과 의사 간호원 새로운 약들을 요구하면서, 그런 것들 없이 지낼 수 있게 해 줄 생활조건을 요구하지는 않는 것인가? 왜 불건강한 습관과 생활방식을 바꾸지는 않고 “당신의” 의사에게 그 결과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가?

“의학은 당신에게 아무런 일도 해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만일 당신이 담배를 끊고, 과식을 하지 않고, 걱정하기를 그치고, 집안에 앉아서만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약이 필요없을 것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의사에게 우리는 계속 찾아갈 것인가? 유행성 감기를 우리의 할머니가 치료하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치료하면서 “뜨거운 레모네이드를 하루에 두되쯤 마시고 몸을 따뜻이 하고 쉬십시오. 그러면 약을 먹지 않고도 사흘이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의사에게 우리가 계속 찾아가겠는가?
사실, 의학적 보살핌과 약물의 과잉소비에 대한 책임은 그것들이 효과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팔아먹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고, 사기 당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쟝 피에르 듀비와 세르쥬 카센티가 쓴 책 - <<약의 침략>>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보다 더 풍부한 것을 담고 있는 책 -이 아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들은 의사와 환자 사이에 짐짓 행하여지고 있는 공모체제를 멋지게 분석하고 있다.
물론 환자는 가짜이고 의사는 사기꾼이라는 말은 아니다.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왜냐하면 질병과 건강은 또한 언제나 인식의 문제이고 인식은 각 개인의 성향보다도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증상이라도 월요일과 토요일에 느낌이 다를 것이고, 일을 하기 전과 애인을 만나기 전의 느낌이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자기 관찰에 익숙해져 있는 “교양있는” 사람들은, 보통 무심하게 지내는 “세련되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쉽게 자신이 병들었다고 느낄 것이다. 자신들의 파편화된 일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임금노동자들은, 자기들의 일을 끝내지 못하면 스스로의 사업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장인이나 농부들보다 더 쉽사리 병에 걸릴 것이다.
듀피와 카센티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처럼, 대부분의 경우에 질병은 “스트라이크”이거나 소극적인 항의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일반의(一般醫)의들은 전체 환자의 75퍼센트가 기질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처지 못지 않게 위안을 구하러 온다고 말한다. 이런 환자들이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고, 그대로 방치하면 심각한 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임상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은 이런 경우 “기능상의 부조” 혹은 “신경성”이라고 부르면서, 그러한 증상에 대하여 흔히 값비싼, 독성이 있는 약으로 처치를 하려고 한다. 여기에 바로 속임수가 끼어든다.
실제로, 이렇다할 명명할 수 있는 병은 아니더라도 진실로 아픈 이들은 흔히 자신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도움과 임무면제를 청하러 온 사람들이다. 다른 시대였다면 그들은 분명히 고백을 하러 가거나 성지순례를 하거나 기도에 몰두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자들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자선은 땅에서뿐 아니라 하늘에서도 사라졌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이해서는 그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 신체 이상(異常)-외인성이며 환자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의 형태를 위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이대로 계속할 수는 없어요. 잠도 못자고, 식욕도 없고, 성관계에 대한 흥미도 없어요.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어요. 일주일 휴가를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의 사장이나 상급자가 젼혀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당신의 말을 듣게 하려면 당신의 호소는 불면증이나 당신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해(傷害)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즉, 의학적 면제를 정당화하는 질병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거의 망가질 지경에 처한 사람은 의무의 면제를 허용해줄 자격을 가진 유일한 권위자인 의사를 개입시키기 위해 자신의 불편을 의료적인 문제로 만든다. 그리고 의사는 대개의 경우 그 게임에 합세하여, 기본적으로는 그의 고객이 자기가 직면한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뿐인 것을 화학적으로 처치 가능한 질병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임수 속에는 심각한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것은 이반 일리치가 지적하기 훨씬 전에 전위적인 의사들이 보고 있었던 위험들이다. 이 속임수는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는 구제 요청을 기술적인 처치로 다스리려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근본적으로, 그것은 환자의 그러한 견딜 수 없어하는 상태를 가능한 한 빨리 약품으로 제거할 수 있는 “일시적 이상상태”로 보는 데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사들과 의료가 어떻게 체제유지의 수호자로 되는가를 본다. 의사들의 임무는 환자가 자신의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잘 적응하지 못하게 하는 증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의사들은 물론, “우리에게 와서 될수록 빨리 치료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환자들이므로” 자기들은 비난받을 것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변명이 못된다. 치료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환자들의 역할이다. 진정한 문제는 “의료가 환자를 도울 수 있는가”이다. 일시적이며 원칙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이상상태가 아니라, 그 질병은 건강한 사람이 불건강한 상황에서 나타낼 수밖에 없는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전화교환수, 키펀치작업자, 일관공정작업의 노동자, 전자납땜공 등이 겪는 소화불량, 두통, 류머티즘, 불면증, 우울증은 매일같이 여덟시간씩 계속해서 가해지는 폭력에 적응할 수 없게 된 한 생명체가 보이는 “건강한” 저항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증상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 자체가 나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학교와 군대와 감옥이 시작한 일을 의료가 완성시켜 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할당된 역할에 개인들이 잘 적응하도록(필요하면 화학약품을 써서라도) 만드는 일 말이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역할을 계속 견딜 수 있도록 신경안정제, 흥분제, 항우울증약물, 수면제 등을 의사에게 부탁하는 양심적이고, 나이든, 과로에 지친 피고용자들의 의료관이다. 또, 이것은 노동자들을 병들게 하는 바로 그 일자리로 가능한 한 빨리 노동자들이 돌아오도록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많은 회사전속의사들의 의료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것은 군대, 감옥, 정신병원, 경찰에 소속된 의사들이 의료의 기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감금상태에 적응하려 하지 않는 개인들에 대한 “의료적 처치”를 주저하지 않는다. “불안해 하는” 사람을 진정시키는 약이 있고, “난폭한” 사람을 겁먹은 양(羊)으로 만드는 약도 있고, 동성연애자들을 성적으로 무력하게 만드는 약이 있는가 하면, 고문당하고 있는 사람이 기절하거나 죽지 않게 하는 약도 있다.
이러한 길의 극단에는, 사회적 일탈자, 부적응자, 반항적인 사람,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 게으른 사람 등에 대한 강제적인 정신치료-혹은 세뇌-가 있다. “가장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병이 든 것이다. 그리고 병든 사람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비에트 경찰과 정신의학자들만이 아니다. 서유럽과 미국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저명한 인물들이 있다. 예컨대 B.F.스키너 교수같은 사람이 있는데, 그의 “재교육”방법은 <<기계오렌지>>라는 소설속에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 스페인계 미국인인 델가도는 컴퓨터를 인체내에 심어놓고 원격조종으로 사람의 “정상적인” 행동을 유도하는-정부지도자로부터 시작해서-어떤 세계정신의학자 위원회를 꿈꾼다. 혹은, 함부르크대학의 그로스교수와 스바브교수가 있는데 이들의 인성(人性) 파괴방법은 독일 정치범들에게 무시무시하게 효과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병적인” 증상이 기질적 고장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적 조건에 기인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의사들이 기꺼이 증상만을 다루려고 한다면, 그들은 쉽사리 경찰과 정부의 조력자가 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의료에 대하여, 혹은 더 정확히 말하여, 무엇이 건강과 질병을 결정하는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야 할 때이다. 이반 일리치의 목표는 이러한 반성을 자극하는 일이다. 그는 의료의 실패에 대하여 악을 악으로 다스리는 식으로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의료체제를 더욱 확장하고, 의료의 관할권과 힘을 늘리고, 의료의 사회통제 및 삶의 “의료화” 경향을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리치에 따르면 이 위기에 대한 오직 하나의 건강한 반응은 의료의 비전문화, 즉 건강과 질병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의사들의 독점을 폐기하고,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는 자율적인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기술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그렇게 하려면 근본적인 정치-문화적 변화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의료의 기술적 효율성은 몹시 제한되어 있다. 병원들이 환자의 85퍼센트를 내보낸다 하더라도, 엄격히 의학적 견지에서 그 환자들은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 4분의 3의 경우에, 일반의의 충고와 그것의 연장으로서 불가피하게 주어지는 처방의 효과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옛날에 주문이나 기도나 굿이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효과가 있다. 전체의 75퍼센트에서, 처방된 약품의 유효성은 의료기술에 대한 환자의 “믿음”에 달려 있다. 다른 시대에서 사람들은 기적을 믿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을 믿는다. 나머지 25퍼센터의 환자의 경우에는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전문가의 기술적인 보살핌이 필요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경우의 90퍼센트에서 병은 저절로 회복된다. 이 90퍼센트에서 처방의 주된 목적은 환자에게 회복의 기회를 허용해줄 휴식과 섭생과 적절한 행동을 -물약과 알약과 좌약의 형태로 위장하여-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전체 환자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이러한 수치들을 통해서 우리는 전체적인 조망을 해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의료에서 신화와 신비와 마술적인 의식이 제거되고 났을 때, 전문적인 의료설비들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것이 기술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남아 있을지를 그 수치들은 보여준다. 그것들은 건강관리의 비전문화가 중국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리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진단과 치료에서 해로움보다는 확실히 도움을 주는 경우에 있어서 대부분은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진단과 치료를 위한 물질적 자원이 극히 값싸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본인이나 가족구성원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포장 설계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료의 이러한 비전문화는 “특별한 경우에 필요할지 모르는 전문가를 훈련하는 일과 그 기술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일리치는 지적하고 있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전문가에 대한 의존은 드문 일이어야 하며, 최소한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구성원들에게 최적의 건강을 제공하는 사회는 사람들을 전문치료사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집단에 떠넘기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건강을 지키고 질병에 대응하는 수단과 책임을 전체인구들 가운데 고르게 분배하는” 사회야말로 최적의 건강을 보장하는 사회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짝을 짓고, 아기를 낳고, 인간 조건을 공유하고, 그리고 죽는데 관료적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료해택을 잘 받는 사람이 아니라 “건강한 가정에서 건강한 식사를 하며, 출생·성장·일·회복·죽음에 꼭같이 알맞은 환경속에서 살면서 인구가 무제한 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또 사람은 늙어가고, 병으로부터 불완전하게 회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 죽음이 언제라도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문화를 누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보다 이전의 모든 문화들은 이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한계를 인정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일리치는 상기시켜 준다. 건강관리는 직업적인 기술자들의 배타적인 전문분야가 아니었다. 그 반대로, 건강유지 기술은 삶의 기술이었다. 거기에는 올바른 행동과 위생규칙이 강조되었다. (위생이란 낱말의 본래 의미는 사람의 기술이다.)
이러한 규칙은 특히 “잠자는 것, 먹는 일, 짝짓기, 일하기, 놀이, 꿈꾸기, 그리고 고통을 견디기”에 관계하였다. 그러한 규칙으로 인해 사람들은 “아픔을 견디고, 병을 이해하며, 항상 사람과 함께 있는 죽음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본래 모든 사회적 활동 속에 들어 있었던 삶의 기술(위생)은 산업화와 더불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쉽다. 임금노동이 널리 퍼짐에 따라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작업의 길이, 강도, 속도, 조건 등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독립된 장인(匠人)이나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과는 달리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작업과 휴식과 잠을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생활리듬을 통제할 힘을 빼앗긴 그들은 “일의 문화와 위생술”도 박탈당했다.
그리하여 노동은 노동자들에게 강요되는 외부적인 임무가 된다. 노동자들은 핑계만 있으면 언제고 공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18세기와 19세기의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의 “게으름”을 중시했다. 그 때는 분명히 이 “게으름뱅이”들을 믿고 스스로 자신이 아픈지 아니면 일을 하기에 적당한지 결정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 결정(질병증명 혹은 치료증명)은 “과학적인” 기준을 적용시키는 전문가가 해야 한다. 지난 세기 초에 진료소들이 성장함에 따라 이러한 기준이 가능하게 되었고, 질병은 아픈 남자와 여자, 그들의 노동, 그들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실체가 되었다. 성장하는 자본주의가 이런 발견들을 장악했다. 이제부터는 오직 의사들만이 누가 아픈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가장 일상적인 흔한 고통조차도 의학적 관리와 증명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서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은 것처럼 사람들에게서 병과 건강을 빼앗았다.
그 이후로 건강은 일반적인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단지 질병이 없는 상태, 즉 육체적으로 일을 하기에 적합한 상태로 되었다. 한편으로 질병은 아픈 상태가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해버려야 할 “비정상적인” 장애물이 되었다. 이제부터 연구하고 보살피고 치료하는 대상은 환자가 아니라 질병 그 자체이다. 지금부터 100년도 더 전에 도입된 건강보험으로 인해 건강관리의 전문화·산업화·표준화는 더욱 촉진되었다.
일리치가 반드시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주장은 건강을 회복하려면 강제된 임금노동을 폐기해야 된다는 결론으로 나가고 있다. 노동자들이 그들의 공동작업의 조건, 도구, 목표를 다시 통제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생산활동이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지는 임무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자율성, 다양성과 자연스러운 리듬이 회복되어) 그것이 바로 기쁨이 되고, 교감이 되고, 삶의 기술이 되는 새로운 문화가 필요할 것이다. 건강이 전문가들의 일이기를 그치고 항상 개인과 집단의 생활에 질서를 잡아주며, 어디서나 통용되는 노력이며 가치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각기 의료를 거부할 것을 일리치가 요구할 때 그것을 따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것은 임금노동자들이 병가와 출산휴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실제로, 질병과 건강에 대한 건강하고 “비의료화된” 관계는 우리가 임금노동과 함께 현사회의 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그 “불건강한” 관계(의료기관들과 기업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을 폐기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일리치는 여기에 대하여 어렵지 않게 대답을 한다. “불건강한” 사회 관계의 폐기는, 이 사회의 틀 속에서라도 이미 개인과 집단의 주권, 우리의 환경과 생활방식의 건강성, 그리고 우애와 상호협조에 기초를 둔 인간관계에 대한 욕망을 이미 자기자신의 기본적인 행동규칙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만이 해 낼 수 있는 일이다.

 

 

* 앙드레 고르쓰(Andre Gorz) - 프랑스의 사회이론가. 이 글은 Ecology as Politics(1980)의 일부분을 뽑아 옮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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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트'여 안녕!

드디어 <프롤레타리아트여 안녕>이 번역되었다.

앙드레 고르의 주요 저작으로는 첫번째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10점
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생각의나무

 

고르가 우리나라에서는 '도린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어서,

비전공자가 번역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냥 한 명의 '팬'에 불과한 나로써는 그저 감지덕지할 뿐.

 

반가운 마음에 책을 사면서... '응? 왜 <프롤레타리아'트'여 안녕>이 아니지?'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나는 번역을 정말 모를 뿐더러,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번역이 다양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번역자의 의도를 존중하고 싶고,

한글표기가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이건 정말 잘 모르겠다.

 

아래는 첫머리에 나오는 두 개의 '옮긴이 주'다.

 

9p

'임금근로자'는 노동자와 사무직/서비스직 근로자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피고용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는 '노동자'와 구별하여, 사무직이나 서비스직의 피고용인을 가르킬 때는 '근로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 옮긴이

 

15p

프랑스어에서 '프롤레테르 prolétaire'는 생계수단이 노동력밖에 없기 때문에 생활수준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에서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자', '근로자'와 비슷한 의미이고, 이 프롤레테르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prolétariat'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프롤레테르'는 '프롤레타리아'를 형성하는 구성원 개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프롤레테르'는 추상적 집단 혹은 마르크스의 사고의 산물로서의 집단인 프롤레타리아와 대조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개인적 존재로서의 노동자를 가르키는 경우가 많다. - 옮긴이

 

아마도 '프롤레테르'라는 번역어가 프랑스어 발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믿는다.

프롤레타리아트 prolétariat의 마지막 t가 프랑스어에서는 발음이 잘 안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해야 했을까?

'프롤레타리아'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일반적인 표기를...

'프롤레테르'와 '프롤레타리아'로 바꿀만한 의도가 정말 무엇일까?

 

번역자는 혹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번역어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아닐까?

'근로자'와 '노동자'의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일까?

'노동자'는 사무직이나 서비스직이 아닌 다른 피고용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안그래도 제목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책이...

한국에서도 고생을 많이 한다 싶다.

 

번역자와 출판사가... 정말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 안녕을 고해버렸다.

 

그래도 책은 계속 읽어봐야겠지.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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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 '자유 시간이 진정한 해방의 원천'

아르님 덕분에 고르의 새 글이 번역되었다는 것을 알게됐다.

전문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을 구독해야 볼 수 있나보다.

밑줄 강조는 모두 아르님의 것.

 

 

  경제의 임무는 일자리 제공이나 창출이 아니다. 경제의 임무는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생산요소들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최소의 자원 및 자금과 노동을 투입해 최대의 부를 창출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산업화 사회는 이 임무를 잘해낸다. 따라서 1980년대 말 선진국 경제는 각국이 필요로 하는 노동량을 연간 12% 감축하면서도 부의 창출을 연간 30% 끌어올렸다. 경제적 부의 창출활동은 노동투입시간을 점점 감축시켰다.
  즉, 자유시간이 노동시간을 크게 초과한 것이다. 1946년에 20세의 샐러리맨은 향후 활동 시간의 평균 3분의 1을 노동으로 보내야 했던 반면, 1975년에는 4분의 1, 그리고 요즘은 5분의 1에도 채 못 미친다. 최근의 일이지만 심각한 이 단층들은 지속될 테니, 생산과 무역의 다른 논리들을 도입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재산과 서비스의 규모가 커져, 요즘 경제는 대량으로 이 핵심 자원(자유 시간)을 생산해내고, 근대 이론의 창시자들은 이 자원, 즉 경제적 필요와 구속에서 해방된 시간을 지표로 “진정한 부를 측정”하고 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한 제자는 1821년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12시간 일하는 곳에서 6시간만 일한다면, 그것이 바로 국가의 부, 국가의 번영이다. …부는 자유다. 부는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듯 새로운 비전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자유 시간’이라는 문명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를 고무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고, 그러한 장래에 등을 돌린 채 자유 시간을 마치 재앙처럼 소개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향후 모든 이들이 사회적으로 창출된 부에서 각자의 몫을 가지면서도 일을 더 많이 줄일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사회 시스템이 노동을 더 많이 소모할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하면 생산에서 비축된 막대한 노동량이 고용 창출이라는 단순한 목표만을 지닌 소소한 일자리(예를 들면 비정규직)에 이용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그런데 소소한 일자리가 풀타임 완전고용을 충분히 보장해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제 사람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마치 해방의 시간이 아니라, 필요한 희생, 일자리와 월급 나누기 같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소개하며, 임금 수준을 노동시간과 같은 비율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대표적 사상가 중 한 명인 피터 그로츠가 1987년경 유럽 좌파에게 던진 호소문에는 실망감이 가득 배어 있다.
  “유럽 좌파는 손 닿은 곳에 수백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두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을 단순히 노동 분배의 기술적 도구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제공하는 또 다른 사회를 향해 가는 길처럼 여겼다. 지금 우리에게 부여된 역사적인 이 기회는 인류에게 여태껏 단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다. 개개인이 자신의 의미를 찾는 데 쓰는 시간은 개개인이 노동, 오락 그리고 휴식을 위해 필요로 하는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 좌파는 더 이상의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가? 소득을 축내지 않고 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노동의 해방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하고, 노동시간의 체계적인 감축을 위해 투쟁이 가능해야 한다.”
  여기에서 그로츠는 ‘소득을 축내지 않고’라고 강조한다. 바로 그 순간부터 경제 시스템은 갈수록 줄어드는 노동으로 더 많이, 더 잘 생산해내고, 소득수준은 개개인이 제공하는 노동량의 변동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게 된다. 그에 반해 생산성 향상의 재분배가 모든 이들에게 일을 줄여준다. 심지어 낮은 생산 증대는 개개인의 실질소득은 감소시키지 않은 채, 많은 활동 인구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노동, 자유 시간 그리고 사회적으로 창출된 부의 재분배는 노동시간과 관련된 전반적인 정책을 필요로 한다. 재분배는 필연적으로 두 종류의 소득을 도입시키게 된다. 하나는 노동시간과 함께 감소하게 될 소득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 임금과 노동시간이 단축됨에 따라 상대적 가치가 상승하는 사회적인 소득이다. 실제 노동시간만 기업이 비용을 부담하면 되기 때문에,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에는 영향이 없다.

 

……

 

  시간의 해방이 제 이름값을 하려면 광범위한 방법 중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하루·주당·월간(퀘벡에서처럼) 혹은 연간 노동시간을 단축할 권리, 안식년에 대한 권리, 혹은 캐나다에서처럼 5년마다 1년간의 휴가를 누릴 권리, 광범위하게 실시되고 있는 육아휴가(옛 체코슬로바키아는 36개월, 스웨덴은 12~15개월)를 최종 봉급 대비 70~90%의 유급으로 누릴 권리, 그리고 그 휴가를 부모들이 마음대로 쪼개 쓰고 서로 나눠 쓸 수 있는 권리, 프랑스에서처럼 최종 봉급 대비 70% 유급으로 24개월까지 개인적인 교육을 위해 휴가를 쓸 수 있는 권리, 병든 부모나 자식의 병간호를 위해 유급 휴가(스웨덴 모델)를 누릴 권리 등등이다.
  이를 위해 개개인의 계획이나 가족 상황에서 맞춰 시간과 업무 시간표를 스스로 관리해야 하고, 특히 “기업주들의 착취를 막기 위해 스스로의 자율적 결정에 따른 행위를 중시하는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
  이제, 시간의 해방이 서비스 일자리를 무한 창출할 것이라는 희망은 버려야 한다. 반대로 시간의 해방이 개개인과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존재, 삶의 틀, 도시 생활 그리고 자신의 포부 및 욕망 충족의 정의와 방식, 사회적인 협동 방법의 책임을 증대시킨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시간의 해방이 “이웃 간의 상호 혜택을 활성화시키고, 유급 노동과 무급 생산 활동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을 확립해주길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넉넉한 사회조직이 금전소득의 중요성을 상대화해줄 것이다. 시장경제의 공간을 줄임으로써, 유급 노동과 돈과 무관한 활동, 소비 수준과 자율성의 정도, ‘소유’와 ‘존재’ 사이에 항구적인 중재가 생기게 될 것이다. <선택한 시간의 혁명>의 저자들은 이 중재가 마침내 ‘알뜰한 풍요’를 낳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이를테면 모든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증대된 자율성과 보안을 보장해주며, 점차적으로 시간 부족, 공해, 낭비 및 실망의 근원이 되는 과소비를 없애, 편안하고 즐겁고 자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다. 결국 이 중재가 환경 보존 및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관계 변화 측면에서 필요한 바람직한 규범이 될 것이다.

─앙드레 고르, '자유 시간이 진정한 해방의 원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0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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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에 관한 글 몇가지...

[고진주의자가 되다] 에 이어지는 글...

 

'빈집' 프로젝트가 점점 구체화되면서... 계속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가라타니 고진이다.

게스츠하우스의 구상은 여행중에 만나고 신세졌던 많은 사람들과 장소들을 통해 구체화된 것이지만,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고진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몇가지 글을 보며 다시 고민중...

 

  

박가분,  가라타니 고진 비판 유감 중

 

(현대자동차 노조원이 많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랜드 홈에버 불매운동에 대해 논하며...)

나는 노조라는 기존의 노동운동 조직을 중심으로 '소비자 운동'을 전개하는 이런 형태에 대해 주목한다. 이런 주체성이야말로 노동자-소비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정식과 부합하지 않는가?

 ...

문제는 소비자 운동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물적토대'가 필요한 법인데, 그러한 토대가 잘 갖추어진 노조중심의 노동운동과 달리 소비자운동에는 그러한 구심점이 결여되어 있다. 그게 소비자 운동의 가장 큰 약점인데, 위의 기사와 같이 결국 소비자와 노동자의 정체성은 다르지 않다는 것에 희망을 걸어봄직하다.

이랜드 불매운동이 의미가 있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의 '소비자 운동'은 특정 상품에 대한 불매가 아니라, 상품 일반에 대한 불매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상품 일반에 대해서 불매하면서도 삶이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고진의 관심이 아니었던가?

 

소비자 운동의 '물적토대'를 노동자 운동의 '물적토대'로 등치시키는 것은 노동운동의 한계에서 빠져나온 순간 다시 뒷문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위 기사의 불매운동은 우연히 그 지역에 노조원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울산 홈에버에서 소비하는 소비자는 노조원이 아니라 노조원의 아내와 아이들이다. 여전히 노동자는 노동하고 있고, 소비자는 소비하고 있다. 다만 홈에버가 아니라 이마트라는 것이 다를 뿐. 그마저도 잠시겠지만.

 

소비의 공간은 가족이고, 지역이다. 공장과 노조의 재구성이 필요한 만큼, 가족과 지역의 재구성 역시 필요하며, 이것이 없이는 노동자-소비자 어소시에이션은 존재할 수 없다.

박가분, 가라타니 고진의 질 들뢰즈 중 에서 재인용

 

'푸코의 맑스(갈무리,2004)'에 수록된 들뢰즈와 푸코의 대담 중 일부(192p)를 인용.

  "맞습니다. 하나의 이론은 꼭 연장통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것(le signifiant)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유용해야 하며 기능해야 합니다. 이론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론가 자신부터 시작해 아무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은 가치가 없거나, 시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의 이론을 개정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구축해 냅니다. 우리는 다른 것들을 만들어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묘하게도 이러한 생각을 명확히 밝힌 사람은 순수 지식인으로 생각되어 온 프루스트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나의 책을 바깥을 향한 하나의 안경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그것이 당신에게 맞지 않으면, 다른 것을 찾으십시오. 필연적으로 전쟁 도구가 될 당신만의 도구를, 스스로 찾으십시오.' 이론은 총체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양화의 도구이며, 스스로 다양화합니다. 총체화하는 것은 권력의 본성입니다."

 

윤여일, '몰락 이후' 쉰이 넘어 코뮨주의자 되다  중

 

즉 일하지도 상품을 사지도 말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대중이 일하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정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까닭에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자/소비자 협동조합의 연합’을 제시한다.
...
어소시에이션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시장경제와 닮아 있지만 잉여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또한 공동체의 교환원리인 상호부조와 유사하지만 배타적이지도 구속적이지도 않다.

...

그러나 소비자운동은 실상 입장이 바뀐 노동운동이며, 노동운동 역시 소비자운동인 동안 자신의 국지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소비과정은 육아, 교육, 여가 등 생활세계 전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자/소비자의 협동조합을 통해 자본주의 바깥에서 생활의 지평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

그렇다면 그가 기획한 현실운동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가라타니 고진은 FA(Free Association)라는 또 하나의 조어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라타니 고진은 2002년 「FA선언」을 통해 NAM(New Association Movement)을 해산시킨다.

...

자신의 기대와 달리 NAM은 그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한 지식인들의 모임이 되었다. 가라타니 고진이 「FA선언」에서 밝힌 해산 이유 역시 NAM 운동을 지속할 운동체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다.

...

나 역시 지금의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호의적이고 싶지 않다. 그의 시도는 자신이 서 있는 장소와의 긴장감을 놓쳤으며, 그의 실패는 그마저도 이론적 완결성을 위해 희생되었다.

 

NAM이 구체적으로 어떤 운동을 했는지도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데... 해산했다 하고, 또  FA가 발표되었다고 하고,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이 끝났다느니, 호의적이고 싶지 않다느니... 난리다.

 

그것이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다면,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던 NAM은 시작도 안 한거라고 본다.  FA선언은 보고 싶지만, 아직 못봤는데 FA가 NAM과 특별히 다를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고진이 'NAM 운동을 지속할 운동체가 부재하다'는 것이 사태의 정확한 진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태는 고진의 이론적인 결함과는 무관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는 조직론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NAM을 기존의 노동운동 조직이 정책적 전환만으로 추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기존의 시민운동 조직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만나야 한다는 정도의 얘기라면 가라타니 고진이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얘기다. 공장과 가족이 그대로인 채,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그대로인 채, NAM은 가능하지 않다.

 

자본을 위해 노동하지도 말고, 소비하지도 말라는 대전제가 잊혀져서는 곤란한다. 즉 자본을 위한 생산 공간인 공장/농장과 자본을 위한 소비 공간인 가족/지역이 이 대전제 하에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 그리하여 자본=스테이트=네이션을 넘어선 삶을 구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노동자로서의 소비자운동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디디님의 [고진, 맑스, 공동체 화폐, 가능한 꼬뮤니즘.]  중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노동자는 두 가지 관점에서 자본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일하지 않는 거다.  또 하나는 사지 않는 거다.
하지만 -_- 노동자는 고뇌한다. 딸린 처자식은 어쩌라고!
 
문제는 분명하다.
노동자(=소비자)들이 일하지 않고 사지 않는 것,
즉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비자본주의적으로 일 하거나 살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공동체 화폐는 그러한 장소를 만들기 위한 분투다.
"자본과 국가에 내재하면서, 그 원리를 대체하고 넘어서려는 운동.
([지역통화LETS에대하여])”
내재하는 외부-되기.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화폐의 가공할 속도는
그러한 외부에 자꾸만 폐쇄의 의지를 부여한다.
그러나 자족적인 공동체가 되는 순간 그건 이미 외부도, 운동도 아니다.
그냥 자본이 허용하는 다양성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수많은 공동체 마을들은 관광지가 되고
마을 바깥에서, 자본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비자본주의적으로 일하거나 살 수 있는 장소...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공간, 주거의 공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주거 공간은 단지 소비의 공간이 아니라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생산의 공간으로서의 면모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현재의 전형적인 주거형태인 핵가족 주거, 개인 주거의 형태로서는 불가능하지 않는가?

 

폐쇄의 의지를 근본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자족적인 공동체가 되지 않는 공동체, 꼬뮨...

누구든지 맞아들여 친구로 만들수 있는 공동체, 언제든지 떠나서 친구를 만들고 또 돌아올 수 있는 공동체.

 

아마도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만큼을 소비할 수 있는 비자본주의적인 생산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생산한다는 것이니까.

반대로 비자본주의인 것은... 조금 생산하되 좋은 것을 잘 생산하는 것이며, 또한 덜 소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화폐로 구입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로 얻을 수 있는 자원은 꽤 많다. 자본주의 착취하기.

그나저나...  여전히 궁금한 LETS. 시스템도 다양하고, 운영하는 조직도 다양하고...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몇가지 원칙만 가지고  멋진 LETS의 시스템을 구성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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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이름 공모합니다.

[대보름 빈집들이 합니다. 놀러오세요.] 에 관련된 글.

 

대보름 빈집들이를 기해서... 빈집의 이름을 확정할까 합니다.

이 포스트에 덧글로 논의를 진행하고... 확정은 당일 참가자들의 투표로 결정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저와 아규를 비롯한 주변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1. 지명, 공간의 성격, 예쁜 고유명이 포함된 이름이 좋겠다.

2. 지명으로는... '서울', '남산(골)', '해방촌', 등등

3. 공간의 성격으로는... '게스츠하우스', '베이스캠프', '민중의집', '모델하우스', '민박', '주막', '사랑채', '까페', '객잔', '살롱', '시골집(농가)', '산장', '캠프장'등등

4. 고유명으로는... '다락', '마루', '빈집'

5. 영어, 한자 등 다른 언어로 된 이름도 준비한다.

 

그러니까... 결국 이름은... 예를들어... '서울 게스츠하우스 다락', '해방촌 베이스캠프 마루' 이런식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설명이 좀 필요한 것들로는....

 

'게스츠하우스'는 게스트하우스지만... guests' house 입니다. 복수와 소유격이 중요한 것이죠. '손님들의 집'이라는 말이죠. 독특한 공간의 성격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장점...

 

'베이스캠프'는 산이나 오지로 떠나거나 돌아오는 사람들이 모여서 정보도 나누고 식량도 보충하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좀 걸리는 것은 군의 주둔지라는 의미가 있다는 거...

 

'다락'은 아규가 생각해 낸 것인데... 한자로 多樂 이라고 씁니다. 혀굴러가는게 재밌다는 의견도 있구요. 작고 구석진 곳이지만 자기만의 비밀이 있을 듯도 한 곳의 분위기가 좋아보입니다. 한자로 쓴 의미는 아주 좋구요... 단 약간 폐쇄된 곳이라는 느낌이 있다는 거...

 

'마루'는 제가 생각한 건데... 마루바닥이라는 뜻도 있지만, 어원이 '마리'로서... 머리, 우두머리, 꼭대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바닥'과 '꼭대기'라는 다소 모순되어 보이는 의미가 같이 있다는 게 좋습니다. 또... 내부와 외부의 사이 공간, 사적인 공간으로서의 방과 공적인 공간으로서의 마당 사이의 공간이라는 애매한 위치라는 의미가 좋습니다. 다락같은 재밌는 발음은 아니지만 어감이 괜찮고,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도 말하기 쉬울 거 같다는 게 장점이죠. 단... 옷상표가 있다는 거 ㅠㅠ

 

'빈집'은 지난번 포스팅하면서 갑자기 생각난 건데.. '빈'자가 賓(손님 빈)의 의미가 있어서... 그 자체로 '게스츠하우스'의 의미가 되고...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비어있는 집이라는 의미가 좋네요.

 

 

자... 맘에 드는 이름으로 투표를 하셔도 좋구요...

새로 제안하셔도 좋습니다.

 

상품으로는... 일주일 무료 숙박권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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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 빈집들이 합니다. 놀러오세요.

드디어 오픈입니다.
어떤 공간이 될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지만... 아무튼 대보름 21일부로 '빈집'이 생깁니다.
실제로 짐을 들여놓는 것은 며칠 후니까... 21일부터 며칠간은 정말 말그대로 빈집입니다.

빈집을 어떻게 꾸며야 놀기 좋을까요?
일단 놀면서 생각해 봅시다.
집들이는 주인이 이미 다 갖춰놓은 집을 단지 구경하러는 가는게 보통이지만...
빈집들이는 빈집에 손님들끼리 모여서 어떤 집이 되어야 좋을까를 생각해보는 파티입니다.

현재까지 확정된 것은 지음과 아규와 그밖에 2~3명이 장기투숙객으로 예약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아래와 같은 허황되지만 나름 진지한 제안들이 있다는 것...
거실에는 까페, 술집 등...
옥상에는 텃밭, 정원, 술집, 캠핑장, 풍력/태양력 발전소, 목공작업실, 공연장 등...
방들은 게스트하우스, 민박, 세미나실, 극장 등...
주방은 로컬/유기농/채식/공정무역/ 식당 등...

아무튼 빈집에서 놀면서 앞으로 어떻게 더 잘 놀지 생각해봅시다.
대보름이니까... 부럼거리들은 제가 넉넉히 준비하죠.
옥상에서 쥐불놀이하면 혼날라나? 흠...
각자 먹고 마실거... 먹을 도구, 마실 도구(일회용은 사절입니다.)는 가져오세요.

자고 가시려면 침낭 같은 게 필요하겠네요. 아. 버릴거거나 안쓰는 이부자리는 기증해주시면 좋겠구요.ㅋㅋ
집들이라지만, 대접할 건 없으니... 선물은 절대 가져오지마세요.
또... 알아서 노셔야 하니까... 놀 준비물이 필요하면 가져오시구요.

오픈 시간은 6시.
장소는 남산아래 2호터널과 3호터널이 V자로 갈라지는/합쳐지는 꼭지점에 있는 집 4층입니다.
접근 경로는...

1. 자전거를 타고 알아서 온다.
2. 6호선 녹사평 역에서 내려서 걷거나 버스(143, 401, 406, 4012)를 타고 '3호터널입구'에서 내린다.
3. 서울역에서 내려서 남산순환도로로 도는 버스(4012, 402, 0014)를 타고 '보성여고입구'에서 내린다.
4. 숙대입구에서 내려서 '용산02'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약국'에서 내린다.
5. 자동차는... 타고 올 사람이 있을라나?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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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 궁리...

요즘 하는 거라고는 '먹고 살 궁리'밖에 없는데... 쉽지 않지만 재밌긴 하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하는 문제를 돈 버는 걸로 환원해서... '돈 벌어야지...' 해 버리면 답은 쉽다. 이 때부터가 지옥이지만.

하지만 '누가 어디서 어떻게 생산한 무슨 먹거리를 누구와 함께 먹고 또 버릴 것인가' 라는 질문과...
'어떤 동네에서 어떤 집에서 어떤 가구를 놓고 무엇을 하며 누구와 함께 살고 누구와 함께 이웃해서 살 것인가'하는 질문은 정말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다.

이사를 열흘 정도 남기고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
건축에 관한 글들이 계속 눈에 들어오는 건 그래서다.

오늘도 재밌는 책 한 권 발췌...
녹색은 내 코멘트



서윤영, <<집 宇 집 宙>>, 궁리 중

74p
1661년 정승 이경석, "선조들이 집무하는 방들은 모두가 마루방으로서 온돌은 내간용으로밖에 쓰지 않았는데, 근자에는 모두 온돌로 바꾸니 그 구들을 덥히기 위한 땔감의 낭비가 심합니다."
18세기 초 실학자 이익, "마루방에 잘 때는 병이 없었는데, 온돌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병이 생기고 있다."
19세기 초 실학자 이규경, "얼마전까지만 해도 공경귀척의 큰 집에도 온돌이 불과 한두 칸밖에 없어 노인이나 병자의 거처로 쓰였을 뿐, 여타 식구들은 마루방에서 잠을 잤다."
박지원, <<열하일기>> 중, 온돌의 결점... 바닥이 고루 따뜻해지지 않는 점, 벽체가 허약하여 틈새가 생긴 곳으로 역풍이 들어와 연기가 가득 차는 점, 온돌을 난방하기 위해 많은 연료가 소비되는 점...
서유구... 연료의 낭비, 수목의 남벌과 그에 따른 홍수와 산사태의 피해, 화재 발생의 우려,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 한 방에 많은 가족이 기거하면서 겪게되는 불편함...

내노라 하는 실학자들이 온돌에 대해서 한마디씩 했다는 것이 재밌다.
주거의 형태, 에너지의 문제와 그에 따른 사회, 건강, 생태의 문제는 조선시대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던 듯.
집을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에너지와 탄소 소비를 줄일 수 있는 난방의 문제를 검토해야할 듯.


86p
온돌은 단순히 구들을 데워 겨울을 날 수 있게 하는 것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우리 생활을 변화시켰다. 우선 실내에서 신을 벗는 독특한 문화를 낳았다. ...
둘째로 온돌은 공간의 가변성과 절약성을 낳았다. 민속촌에서 가서 옛 집들을 복원해 놓은 것을 보면 방의 크기가 매우 작다는 걸 느끼게 된다. 실제 한 칸 방의 크기는 그 폭이 여덟자(2.4미터) 정도로, 이는 20평형대 소형 아파트의 가장 작은 방의 크기와도 같다. 하지만 이방을 좁다고 느끼지 않은 것은 가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주택에서는 식탁, 책상, 소파, 침대를 놓고 살지만, 실내에서 신을 벗었던 탓에 방바닥에 앉아 생활하는 일이 많았던 과거에는 이같이 덩치 큰 가구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옷을 넣어두는 옷장과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 밥을 먹는 밥상과 공부하는 책상만이 필요했다. 더구나 상 위에서 밥을 먹으면 식탁이고, 책을 펴 놓으면 책상이 되는 공간의 가변성과 그에 따른 절약성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실내에서 신을 신는 주거 형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
셋째로 아랫목이라는 자리 구분과 함께 보다 끈끈한 가족 중심주의가 발전했다. ...
넷째로 온돌은 ‘혜(鞋)’라는 독특한 신발을 만들었다. ...

현대의 바닥난방은 공간의 가변성과 절약성에 있어서는 아랫목 윗목이 있는 온돌 보다도 유리하다.
그런데 왜 아파트에서는 장롱, 책상, 소파, 침대 등 거대한 가구들이 공간의 가변성을 질식시키고, 보다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100p
개인에게 각자의 침실이 주어지는 것은 사생활과 개인위생에 대한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18세기 이후의 일로서, 그 전에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침실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메소포타미아 궁전,  이집트 왕궁,  로마의  고급 단독 주택, 유럽의 고대와 중세, 고려 시대 봉당 등의 사례가 아주 재밌지만, 너무 길어 생략)

고려 시대 봉당에서 중세 침실까지 가족이 하나의 침실을 사용한 것에 대해, 현대의 우리는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아 아주 불편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해석한 결과일 뿐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생활도 중세인의 눈으로 볼 때 매우 이상해 보일 것이다. ... 식사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일인 반면, 취침은 철저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로 취급되는 이분법의 이유는 사실 우리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가족 모두에게 개인 침실이 주어지고 심지어 나이가 아주 어리거나 노쇠하여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와 노인에게까지 개인 침실이 주어진다는 것은 중세 사람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중세 사람들은 사생활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홀로 있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왕따’를 두려워하듯,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홀로 남겨지는 것은 두렵고 피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현대에도 조금 흔적은 남아 있어서,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에게 내리는 가장 가혹한 형벌은 독방에 감금하는 일이다.

유럽에서 개인의식과 프라이버시의 개념이 싹트는 것은 산업혁명과 관련이 있다. ... 워크숍이나 하우스처럼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이 아닌, 비주거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형식은 주거 건물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과거의 서민 주택은 노동과 생활, 귀족 주택은 정치와 생활이 혼재된 곳이었지만, 비주거 건물이 등장하면서 주택은 노동과 정치와는 유리된 채 점차 주거전용 건물이 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중세의 농노제나 봉공제 등을 대체한 새로운 노동 형태, 즉 임금 노동의 출현과 관계가 깊다.
작업장과 집이 구분되지 않았던 과거의 생산형태 대신 주택 외부에 마련된 공장에 나와 생산에 종사하면서 노동을 시간제로 계산되어 매매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노동 외 시간인 ‘사생활’을 누구라도 갖게 되면서 프라이버시 개념이 싹트고 이는 건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더 나아가 문학에서 고백록이, 회화에서 자화상이 유행하게 된다. ... 당시 거울은 단순한 화장도구가 아닌, 자신의 내면세계를 비춰 보는 역할을 했다. 거울의 등장과 함께 관심이 개인 자신에게 쏠리게 되면서 회고록이나 고백록, 자화상이 등장하고 또한 개인의식과 사생활 및 그에 따른 개인 침실이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재정의되어야 한다.
개인에게 방 하나씩이 원칙이면서도 부부는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또 하나의 이상한 원칙.
지극히 외로움을 타면서도 자기만의 방을 고집하는 사람들...
내면세계, 개인의식, 사생활, 고백록, 자화상의 등장은 푸코를 떠올리게 하는데... 푸코가 학교, 감옥이 아닌 주거공간에 대해서는 어떤 얘기를 했더라...?
노동, 정치, 생활은 혼재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에 맞는 주거형태는?


137p
사랑채란 남성전용 공간이라기보다는 주택 내에 존재하는 사회적 공간이었다. 현대의 주택은 식사, 취침, 휴식, 가족 단란 등과 같이 철저히 사적인 행위만이 일어날 뿐 손님을 접대하거나 행사를 벌이는 등의 사회적 행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 조선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행사를 벌이는 등의 일은 사회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사랑채에서 과객을 맞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신문이나 언론 매체가 없던 시절 사회여론이나 소식을 알 수 있는 채널 역할을 했으며, 이때 얻은 정보와 지식은 후에 경제자본으로 환원될 수도 있는 귀중한 것이었다. 또한 대갓집의 사랑채에는 식객이나 문객이라 하여 오랜 동안 머무는 손님도 있었는데 이를 대접하는 것은 문화 예술을 후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문화나 예술, 학문이란 그 자체로는 생산적인 것이 아니어서 자본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데, 사랑채는 마치 17~18세기 프랑스 살롱의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신문과 언론 매체는 물론 인터넷이 있는 세상에서도, '과객을 맞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의 중요성은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까?
경제자본으로 환원되지 '않는' 귀중한 정보와 지식의 형성 방법...
귀족이야 돈이 남으니까 투자차원에서 식객, 문객을 대접할 수 있다 치자. 우리는 불가능할까?
'자본에 기생'하지 않는 식객, 문객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


146p
민속촌에 마련된 집들을 볼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실내 공간이 매우 좁다는 것이지만, 주택의 본질은 지붕이 덮인 실내 공간이 아니라 마당에 있다. ... 전통 건축에서 마당이 실외로 확장된 생활 공간이었다면, 현대 건축에서 정원은 조망과 휴식을 위해 예쁘게 꾸며놓은 공간이다.

마당의 본디 어원은 ‘맏+앙’이다. 여기서 ‘맏’이란 맏아들이나 맏딸 등에서 쓰이는 것처럼 ‘으뜸’ 혹은 ‘큰’이라는 뜻이며 ‘앙’은 장소를 뜻하는 접미사로서, 가장 큰 으뜸 공간을 뜻한다. 중요한 행사는 항상 마당에서 치러졌으며 평상시에도 가장 자주 사용되는 공간이 마당이었다.

마루의 어원은 '말' 혹은 '마리'로서 높다는 뜻을 갖는다. ... 마루를 뜻하는 한자, 상(床)과 청(廳)은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상이 물리적인 마루, 즉 남방기원설에 근거를 둔 고상주거를 말한다면, 청은 북방기원설에 근거를 둔 지배 공간 내지는 행정기관을 뜻한다. ... 청동기 시대의 마루는 상이면서 곧 청이었지만 철기 시대에 들어 상과 청의 역할이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단순히 여름을 나기 위해 만든 마루는 상이 되고 지배 계층에서 아랫사람을 내려다보기 좋게 만든 마루는 청이 되었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사이의 공간으로서의 마당과 마루...
중요성 만큼이나 어원도 재밌고, 어감도 좋네.


182p
신석기 시대의 움집, 그곳엔 집 한가운데 부엌이 있었다. 집의 가장 주된 기능은 불을 피워 내부를 따뜻하게 하고 실내를 밝히며 음식을 조리하는 일이라서 화롯불은 곧 집과 동의어였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에 들어 집이 넓어지면서 부엌도 점차 전용 공간화되기 시작했다. ...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부엌은 음식을 조리하고 방을 데우는 일만 전담하면서 구석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 고려 시대만 해도 부엌과 안방은 분리되지 않은 채 명칭도 정지와 봉당이라 불렸다. 부엌과 안방이 나뉘어 져 있는 형식으로 굳어지게 된 것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함께 입식 부엌이 도입되고 이름 또한 주방으로 바뀌게 된다. 마당에서 신을 신고 들어가던 부엌은 이제 마루나 거실에서 바로 드나들 수 있도록 실내로 들어온 것이다.
... 그 후로 한 세대가 지난 요즘, 아파트는 과거 신석기 시대의 움집처럼 집 한 가운데 주방이 들어서는 것으로 또한 번 변신을 하고 있다. 주부가 주방에서 일을 하면서도 집안 전체를 통어할 수 있도록 거실과 붙어 있거나 혹은 거실을 제치고 집안의 한 가운데 자리잡기도 한다.

특정 시대나 사회에서 부엌이 구석진 곳에 위치할수록 그 사회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집 안에서 가사에 전념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동일한 시대와 사회에서 어떤 집의 부엌이 구석진 곳에 위치한다면 그 집은 부유한 상류 계층에 속한다. 그리고 노예제 사회나 노동 임금이 싼 사회에서는 부엌이 구석진 곳에 위치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상의 세 가지 경향은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주방이 여성만의 공간이기를 그치고 또 단순한 소비의 공간이 아닌 생산의 공간이 된다면... 주방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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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에 관한 글 두 개

굳이 숭례문이어서가 아니라... 600년을 살아온 하나의 생명이 죽었다는 사실에 다소 슬프고 허했다.
실제의 관문으로서의 숭례문은 벌써 한참 전에 죽은 것이었겠지만...

시끄러운 뉴스 속에서, 아래의 두 개의 글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다.


문강형준의 읽기, 숭례문에 대한 환상  중...

확실한 것은, 박정희가 한국의 문화유산들을 국보와 보물로 지정하면서 나머지는 다 갈아엎었다는 점이다. 서울의 전통가옥들과 전래의 풍속들을 다 쓸어버리면서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를 주창했다.

숭례문을 국보로 남기고 다른 모든 전통을 불지르면서 우리는 우리가 전통을 사랑한다는 환상을 얻은 것이다.

숭례문의 화재보험료가 9,500만원이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국보 1호라는 환상을 대가로 근대화/세계화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그 대가를 지불하는데는 인색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재는 여기에도 있다. '국보 1호'는 환상이지만 '보험료'는 실재다. 모든 것이 교환가치로 변형된 세상 속에서 국보1호의 교환가치는 딱 9,500만원인 것이다.

아이들을 교실에 잡아 가둘수록 원더걸스가 필요한 것이고, 이등병들이 자살할수록 우정의 무대가 필요한 것이며, 엄마를 가정에 묶어들수록 어버이날이 필요한 것이다. 주체가 일어서려면 타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근대의 속성이고, 계몽의 속성이다. 우리는 아마 이 패러독스 속에서 당분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ActionBaseCamp, 숭례문과 KT텔레캅, 그리고 지켜야 할 가치들   중...

기업 지상주의다.
기업이 책임져야 할 영역이 있고,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 있다.
국보1호를 저런 기업의 사회공헌활동 일부분으로 관리했다는게 좀 어처구니가 없다.

돈이 최고의 가치라고 칭송하는 것들이 활기치는 이때 . .
2MB류들이 숭례문의 가치를 알기나 하는걸까?
그게 돈이 되지 않는데, 경제를 성장시키지 않는데? . . .
역사와 문화, 공동체의 가치를 알기는 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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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공간, 조응공간, 집합주거...

재밌다.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지...



손기찬, <외부공간의 회복 - 조응공간> 중, <<우리의 도시주거>>, 도서출판 미건사

"거주라는 단어는 지붕이 뽀족하거나 몇평의 규모를 갖고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다른 사람과 만나 물건을 교환하거나, 대화하거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러가지의 가능한 삶을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둘째, 그것은 다른 사람과 동의하게 됨을 뜻한다. 즉, 어떤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자신의 조그만 세계를 갖게 된다는 의미에서 자기자신임을 뜻한다." - 크리스챤 슐츠 <거주의 개념> 중에서

"'가로의 미학'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내부'와 '외부'의 공간영역에 대하여 확실한 영역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즉 자신의 집 바깥까지도 '내부화'하여 생각할 것, 자신의 집 안까지도 '외부화'하여 생각할 것, 2개의 영역에 대하여 공간을 동일화하여 생각할 것, 또는 공간을 통일하여 생각할 것이 요구된다.
우선 자신의 집을 '내부'의 공간으로 생각해 본다. 그러면 자신의 집 앞에 있는 도로는 '외부'공간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 공간영역을 얼마간 확대하여 생각해 본다. 전면도로와 같은, 자신의 집과 관계가 있는 부분을 내부화하여 '내부'로 생각해 본다. 다시 영역을 더욱 확대하여 동네 안까지를 내부화하여 '내부'로 생각한다. 이렇게 차례로 내부화하여 생각할 때, 어디까지를 내부화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 요시노부 아시하라, <외부공간의 미학> 중에서

"나는 민중이 만드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는 것을 선택하고 싶으며, 민중이 이용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는 것을 만들고 싶다. " - 윌리암 모리스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이동한다. 거기에는 만남이 있고, 부딪힘이 있고, 체험이 있다. 어쨌거나 모든 집합주거는 그 자체내에서 공공적인 특성을 갖는다. 설계의 책임은 이러한 공공의 친교를 유도하는 상호작용을 고무할 수 있는 설정을 제공하는 것이며, 알도 반 아이크가 지적했듯이 공공영역과 개인영역간의 중요한 '사이'공간이 있다고 하였다. 공간이야 말로 공(空)의 간(間) 즉, 공의 관계의 연계로서 발현되며, 이러한 흐름위에 사이공간은 건축적으로도 외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팽개쳐진 '사이'가 아니라 상호의존(공생)적인 유기체 관계망으로써의 너무 완벽하고한 프라이버시와 기능의 배분이 아니라 오히려 적당한, 애매한 공간조차도 가치있는(애매함을 갖지 못한다면 변화될 수도 없는) 교호된 조응공간에 의해서 우리의, 옛날의 자연스러운 조정공간이었던 모여삶의 단란함과 모여 산다는 것의 원형에 대한 재인식이 찾아져야 할 것이다.



황기원, <커뮤니티의 변용과 지향> 중, <<우리의 도시주거>>, 도서출판 미건사

도시주거의 많은 모델들이 실패한 원인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될 것이다.

1) 도시공동체는 촌락공동체와 근본적으로 그 존재양식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도시 주거는 도시 안에 촌락공동체를 재현하고자 하였다.

2) 도시 안에 촌락공동체를 재현함에 있어, 도시 전체를 농촌처럼 바꾸지는 못하고 도시의 일부만 농촌처럼 바꾸고자 하였다. 따라서 개방시스템인 도시의 일부를 폐쇄시스템인 농촌으로 국한하고 '부분적정화'하려는 방식은 처음부터 실패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3) 커뮤니티 개념의 변용
  • 정주성 : 현대도시에서 현대인들은 한 단위 주거에 '거처'를 마련하지만, 삶의 양식은 이동성을 전제로 하므로 생활권은 매우 넓어졌고 복합적으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커뮤니티의 정주성 자체가 이전과는 매우 달라졌다. 장차 예상되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정주성의 개념은 또 한번 변용되어야 할 것이다.
  • 자족성 : 이동을 전제로 한 삶의 양식이라는 것은 결국 커뮤니티 안에서 삶에 필요한 자원을 다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단위 주거에서 많은 가사서비스가 외부에 의존하게 되었다. 따라서 커뮤니티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자족성은 가사부분은 확대되지만, 비가사부분은 점차 축소된다.
  • 동질성 :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동질적이기 보다는 이질적이다. 이 이질성은 도시를 다른 정주양식과 구별하는 중요한 징표이자 존재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이런 성향을 역행하면서 커뮤니티 구성원의 동질성을 강요하는 모델은 실현되기가 어렵다.
  • 규모의 제한 : 자족성을 확보하는 방안은 커뮤니티를 도시 전체 규모로 넓힌 도시커뮤니티, 또는 지구 전체 규모로 넓힌 지구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적으로 불가능하고, 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4) 따라서 공간적으로 전통 커뮤니티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그 내부에 서식하는 인간의 삶의 양식은 이미 그것을 벗어나고 있다. 그래서 규모의 제한과 자족성은 인간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억지로 사회집단으로 얽어매는 기준이 되기 보다는 매우 공리적인 관점에서 제공하는 수준으로 작용한다.

5) 게다가 물적 환경의 조작을 통한 사회공학의 실현은 방법론상에서 큰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과학자, 사회공학자들은 물적 환경에 대해 소홀히 접근한 반면에 환경 설계가들은 물적 환경의 조작에는 열중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사회구조에 대해서는 대단히 소박하게 접근한 것이다.

6)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근대화 과정이 환경의 도시화, 경제의 산업화, 정치의 민주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전통적 주거문화의 급격한 해체와 쇄신된 주거문화의 통합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 주거모델들이 우리 자신의 생활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실패요인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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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을 넘어서

버지니아 울프가 얘기했던 '자기만의 방'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버지니아 울프가 건축가였다면, 그녀는 어떤 집을 지었을까?
신축 풀옵션 원룸 건물을 지었을까?
(나는 버지니아 울프는 읽지 않았다. 대학 1학년 때 독립할 무렵, 그냥 책 소개만 보고도... '아 멋지다. 역시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해'라고 멋대로 감동한 적이 있었을 뿐. 나는 그녀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만의 방'에 대한 얘기를 하는 중이다.)

'자기만의 방'만 필요할까?
자기만의 거실, 욕실, 화장실, 주방, 서재, 옷방, 정원, 수영장.... 은 필요하지 않을까?

개인에게 사적인 공간은 얼마나 필요한 것일까?


루이스 멈포드의 눈에는 그처럼 프라이버시라는 개인적 사람의 영역도 없고, 연인들 간의 내밀한 관계도 보장되지 않는 중세도시의 가족이 근대적인 것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세계로 표상된다. 즉 중세의 가족은 부모자식이나 핏줄을 나눈 친척은 물론, 함께 살며 일하는 도제나 노동자들, 그리고 하인들까지 포함하며, 그들의 공통의 삶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방적인 단위였다. 또한 노동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아서, 주거공간과 작업장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다. ...

작업장이 가정이었고, 상인의 상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족 구성원은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방에서 일하고, 같은 방에서, 혹은 공동 홀에서 잠을 잤으며, 가족기도에 참가하고, 공동오락에 참여했다. ... 조합 자체도 일종의 가부장적 가족이었으니, 가정 내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도시정부와는 전혀 별개로 형제들에 대한 작은 범법 사건을 처벌하고 벌금을 물렸다. ... 이 노동과 가정 생활의 친근한 결합은 중세기 가정집의 살림살이를 좌우했다. ...

하나의 가족과 그 외부자의 경계도 매우 가변적이고 약했다. 친소관계에 따라 함께 거주하는 가족의 외부는 친지와 친구, 이웃으로 구분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집에 드나드는 것이 자유로웠으며, 많은 경우 서로 초대하고 방문하며 함께 지냈다. “로지아(loggia), 이웃집, 널찍한 벤치로 둘러싸인 도시의 광장들은 날씨가 좋은 아침이나 저녁이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집으로 손님을 초대했고, 이 집 저 집으로 자주 오고 갔다. ... 손님에 대한 이러한 환대는 잘사는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덜 잘사는 사람들도 재력이 허용하는 한 자신의 집을 친척과 친구, 이웃에게 개방했다. 심지어 어떤 이유에서건 방랑하는 외부인에 대해서도, 적절한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하는 것이 귀족들의 경우 관대함과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

우리는 주거공간의 역사를 발전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사적 욕망’이나 ‘사생활의 욕망’이라는 뿌리로 귀착시키려는 모든 종류의 관념과 결별해야 한다. 이전의 모든 주거공간을 오직 사생활의 공간을 완성하기 위한 전사(前史)로서 취급하는, 그럼으로써 사생활 자체를 주거 공간에 내적인 본질로, 심지어 존재 자체의 본질과 결부된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종류의 관념과 결별해야 한다. 또한 사생활 내지 사적공간을 일종의 ‘인간 조건’ 내지 주거공간의 초월적 목적으로 간주하는 모든 종류의 관념과 분명하게 결별해야 한다. ‘사생활’에 관한 19세기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의 방식, 새로운 주거공간을 사유할 수 있기 위하여.

- 이진경, <<근대적 주거 공간의 탄생>> 중에서


유럽의 중세를 얘기하고 있지만, 우리의 과거와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방 한칸에 한가족이 몰아서 자던 주거형태...
조그만한 자취방이나 기숙사에 여러명이 같이 살던 주거형태...
가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돈 없는 학생 시절에 일시적으로 있을 뿐인 주거형태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왠지 그 때가 즐거웠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이러한 주거형태는 현대 사회에서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일까?
대학가 앞 '풀옵션원룸'의 확산은 대학생들과 그들의 집단에 가져온 효과는?

돈없는 배낭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6명에서 18명까지도 한 방에서 자는 도미토리 형식의 주거형태는 어떠한가?
여행지에 대한 온갖 정보가 교류되고, 낯선 사람들과 짧은 언어만으로도 소통의 기쁨을 느끼는 공간...
이러한 공간에서 쭈욱 사는 것은 생각할 수 없나?


미구엘이라는 이 멕시코인은 미망인의 아들이었다. 미망인은 무를 재배하여 그것을 부근 도시에서 장사를 하는 어떤 사기꾼 같은 상인에게 팔아 4명의 아이들을 키웠다. 아이들 외에도 언제나 외부인들이 미망인의 집에서 식사하고 잠을 잤다. 미구엘은 뮐러씨의 초대로 독일에 갔다. ...
독일에 간지 6개월 뒤에 써 보낸 편지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뮐러씨는 진짜 신사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일인은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진 가난뱅이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타인을 돕지 않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집에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않습니다.
미구엘의 견해는 과거 천 년간의 상황과 인간의 태도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활의 자립과 자존에 뒷받침된 가정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의 생활자립을 기초 지우는 여러 수단을 빼앗겼으며, 타인에게 아무런 생활자립의 원조도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능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태도 말이다.

- 이반 일리히, <<그림자 노동>> 중에서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의 구분,
소비의 공간과 생산의 공간의 구분.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의 구분.
가족과 이방인의 구분.
이러한 구분을 가로지르는 주거형태는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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