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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보자,
나는 하루 13시간반씩 일한다.
식사시간도 없다.
운이 좋으면 식당이 여는 시간에 잠깐 짬을 내서,
과장님 눈에 안 띄게 슬쩍 빠져나가 10분만에 뱃속에 밥을 우겨넣고
다시 돌아와 일해야한다. 이 닦을 시간도 없다.
그나마도 다행이다. 밥 때 놓치면 굶거나 빵 우유로 때워야 한다.
거의 한순간도 딴생각하거나 쉴 시간 없이 계속 일한다. 13시간 반동안.
휴일? 없다.
매일 매일 그렇게 일한다. 토요일 일요일도 없다.
첫 5일간은 수련기간이라고 하루 19시간씩 일했다. 휴일? 당연히 없었다.
그러고 나니 심지어 13시간 노동은 '할만하네' 싶었다.
원래 시간보다 보통 1시간 반씩 더 일하는데,
그렇다고 추가수당 따위 결코 없다.
집에 와서 자고 일어나,
일하러 나가야한다.
지금도, 일기 그만 쓰고 빨리 자야한다.
내일은 18시간 연속근무다....
촛불에서 멀어져야 할 날이 다가옵니다.
제 마음이 어떨지 아실까요...
말 안해도 누가 알아주길 바라는 거... 이거야 말로 연인들마저 싸우게 만드는 이유 1순위라죠... ^^
작년 한해동안 촛불 열심히 들었습니다.
뭘 이만큼 열심히 해본적이 없었다 싶을만큼, 막 뛰어들고 내던져가면서요.
저는 많은 걸 바랬습니다.
처음엔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로 시작했지만,
저 개인의 마음에 품었던 목표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지요.
우리가 언제 한번 이루어보지 못했던, 사람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을,
피 보지 않고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혈 혁명. 아니, 어쩌면 혁명이라는 말 조차 낡은 것으로 치부될, 인류의 진보가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꿈꿨습니다.
(장르로 치면 거의 판타지죠... ㅋ)
그래서 6월 10일날, 인파에 낑겨가지고 뒷사람이 든 촛불에 머리카락 타면서도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꿈을 꾸는 대가로 제가 본 것, 겪은 것들은 저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상처'라는 말을 떠올리는 순간 즉각 떠오르는 이 생각들이 만들어지기 까지,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저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그 와중에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을 얻기도 했습니다.
2008년을 너무나 소중하게 만들어준 사람들이요.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사람들.
행동함으로써 저에게 배울 것을 만들어주시는 분들.
꾹꾹 참고 있던 눈물도 그 앞에서는 맘껏 터뜨릴 수 있게
온 마음을 다 열고 안아주시는 분들.
어디서 뭘 하며 사시다가 지금 이렇게 만나게 되었는지...
신기하기만 할 뿐인... 그런 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어디서 뭘 하고 있든, 이분들과의 대화와 경험이 제 행동과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거라는 직감이 듭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 어느때보다도 나약해져 있습니다.
촛불 든 이유가 무엇이냐, 고 누가 묻는다면 제가 대답할
일차적인 목적들은 아직까지 모두 좌절되었거든요.
천사들을 만나는 축복을 받았지만,
천사들을 만나기 위해 촛불 든건... 사실 아니었으니까요.
이제 잠시 촛불을 내려놓아야함을 받아들이면서 뒤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 현실 위에서, 이 나약한 인간이, 돈과 출세의 가치관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곳으로 나아가서
'역사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외치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점점, 직접행동의 광장에 나와서 우리가 겪는 수모는 모질어집니다.
매일, '촛불 들면서 가장 치욕적이었던 날'의 날짜가 경신됩니다.
'이제 나도 많이 독해졌구나. 이정도로는 눈물도 나지 않으니 말이야' 하고 생각한 다음날이면
또 다른 믿을 수 없는 일이 나를 압도해, 그간 쌓아온 '독한 이성'을 허물어버립니다.
앞으로 더 심해질텐데. 님들은 계속 이 괴로움을 겪어야 할텐데
나는 거기서 한발 물러나있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요 며칠간은 생각없이 뛰어들기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아까는 시민을 납치해가는 버스 앞을 막고섰는데, 아랑곳 않고 코앞까지 다가오는 버스 앞유리의 운전석을 보며
그래 그대로 지나가라 하는 생각을 해버렸습니다.
버스 진로 방해한다고 경찰이 떠다밀어 넘어져서는,
위로 겹쳐넘어지는 사람들의 무게에 잠시 압사의 공포를 느꼈다가,
그도 나쁘지 않지, 란 생각이 들어버렸습니다.
아마 오늘처럼
내일 밤에도 저는 멀쩡히 살아있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날쯤 부터 '마음의 촛불은 항상 타고 있을거다!'란 말을 스스로 경멸하며
제 인생의 한 줄기를 따라가기 시작할겁니다.
병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
한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얼마나 멀어지게 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 나의 인생에 급 반전을 불러올지...
지금은 전혀 모르겠습니다.....
용산학살 전날 밤
용산 현장 길 건너편에 깐돌아비님하고 서있다가
건물 꼭대기의 깨진 창문가에 나와서 담배 피우시던 철거민 예닐곱분한테
팔로 큰 하트모양을 만들어 응원을 했던 것이,
고작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
또다시 그 자리에 선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과연 우리는 승리할 수 있을지,
'우린 승리해야 한다' 라고 말할 순 있어도,
'우린 승리할 것이다!' 라고 큰소리 쳐도 되는건지,
그 말이 나를 아프게 하고
남을 아프게 하지 않을지
한없이 조심스러워지고
아파지는 날입니다.
거의 모든 순간이 기억나는 이 특별한 한 해를 돌아보고 싶었는데,
글을 쓰고보니 저에게 필요한건 그보다는 그냥 넋두리였나보네요.
이런 영양가 없는 푸념을 해놓고 그래도 마음이 좀 편해지는 걸 보니까요... ㅎㅎㅎ
(아, 이얘기는 꼭 해야지.
저 이래놓고 다음날 또 나와도 면박주지 마세요~! ^^)
이건 아무리 잘 봐줘도 배부른 고민이다.
요즘 같이 취직 어려운 때 정규직 일자리를 앞에 놓고
군대 끌려가는 기분이라며 징징대고 있는 내가
어려움 모르고 자란 철 없는 애가 밥투정하는 걸로 밖에 안보일거다.
하긴 다음달부터 받는 월급이 얼만지도 모르고 있다가
엊그제서야 친구한테 '근데 우리 연봉이 얼마냐?' 고 물어봐서 알게 되었으니...
우리 집 쥔인 아빠한테, 아빠 우리 연봉이 OO원이래, 했더니
그날 저녁 아빠는
이라는 제목의
A4 두장짜리 계획서를 만들어오셨다. ㅡㅁㅡ;;;
근데 뭔 제목이 앞부분만 보면 무상의료 선전하는 문구같고(돈 걱정 없이 치료받는 세상~!)
뒷부분만 보면 펀드회사 광고같고... ㅎㅎㅎ
딸래미가 돈번다니까 완전 신나신 아빠가 귀여우셨다.
그냥 아빠는 내가 돈 걱정 없이 편하고 행복하게
남의 부러움을 받으며 살았으면 좋겠으신거다.
어디 가서 자랑도 하고 싶으시고.
한편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아빠의 작은 소망을 내가 상처낼까봐...
아빠하고 나하고,
엄마하고 나하고는
맨날 동상이몽이다.
이건 순전히 나 때문이다. 내가 맨날 거짓말하면서 뭐하고 다니는지 엄마 아빠가 우에 알간?
그냥 우리 딸이 친구가 많구나~! 하실거다. 맨날 이친구 저친구 심지어 가상의 친구까지 만나러 다니니.
ㅜ.ㅜ
그러니...
울 엄마는 색소 물대포가 참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하실 뿐이고~
나는 그 물대포 맞고 스머프 꼬라지가 돼서 잡혀갈 뿐이고~
속상하네.
남몰래 사모하고 있었는데...
젝일슨.
쥐새끼일당 다죽었어.
시험만 끝나봐라...
ㅡㅡ;
아, 이제 놀랍지도 않다.
경험상 D-day는 항상 이런식으로 다가온다.
예의없이.
미리 온다는 공지도 없이.
시험이 끝나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할 생각에
그날이 기다려져야하는데.
이번엔 그렇지가 않다.
D-day + a ......
그 이후 어떻게 살지
완전 내 선택에 달렸다.
그러면,
만나는 사람, 보는 것, 느끼는 것, 부딪히는 모든게 달라질거고
그 와중에 변화될 나 자신도
전혀 다른사람이 되어 가겠지.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방사형으로 난 두 길을 따라 각자 걸어간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듯이
'나' 라는 존재가 달라진다는 거.
생각만해도 소름이 돋는다.
너무 길게 보고 살면 인생이 허무하고,
너무 짧게 보고 살면 진전이 없다.
문제는 길게 보냐 짧게 보냐가 아니라,
옳은 길을 알아보는 안목을 갖는 거겠지.
그것을 보았을 때는,
산속에서, 어디로 이어질 지 모르는 오솔길을 발견한 아이처럼
두근두근 가슴뛰면서 행복하게 즐겁게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열정이랑 같이.
ps. 옳은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마음에 새기자.
진보넷 블로그를 들락거린지 어언.... 두달이 됐다.
그동안 블로그홈 메인 페이지에 있는 글들을 클릭해서 읽으면서
시간이 진짜 잘 간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진짜 내 앞에 닥친 현실로부터의 달콤한 도피를 즐기곤 했다.
그러면서 계속 떠오르는 질문.
이 사람들은 서로 다 아는 사이인가???
요 아이디가 저 블로그에 가면 댓글을 달고 있고,
그 블로그 쥔장은 다음날 들어간 어떤 블로그 쥔장이랑 친구고
그 블로그에서 트랙백 타고 갔더니만 엊그제 본 아이디가 반말로 댓글달아놓았고
그리고 그 밑으로 줄줄이 달린 댓글은
어제 본 아이디
그제 본 아이디
오늘 딴데서 본 아이디
언젠가 어디선가 본 아이디! 인 것이다.
여기 있는 블로거들을
아무도 모르는 사람은
나 뿐인거야?
나만 외로운거?
ㅡㅁㅡ
(나도 싸이월드 가면 일촌 많다구.... ㅋㅋ)
침묵하는 것도 죄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말을 배운 사람. 말 할 줄 아는 사람.
지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줄 알면서
여러가지(?) 복잡한(?) 이유들 때문에
그 말을 입밖으로 내지 '않기로' 한 사람.
누가 그러더라.
지식인이란, 자기 자신을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들에게 책임감이 있다면,
그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을
자기가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변명거리를 창조하는 데 쓸 것이 아니라
말하는 데 서툰 많은 옆사람들 대신에
그들이 하고 싶은 말까지 해주어야 한다.
그게 각자 밥값 하고 사는 길 아닐까 싶다.
(너무 조용한 어떤 분을 떠올리며...)
HAVANA
Year of Agriculture (1965)
Fidel:
I remember many things in this hour—how I met you in the house of María Antonia, and how you proposed that I come with you, and all the strain of the preparations.
One day they passed by to ask who would be advised in case of the death, and the real possibility of it struck all of us. Later we knew that it was true, that in a revolution one triumphs or dies (if it be a true one). Many comrades were left along the road to victory.
Today everything has a less dramatic tone, for we are more mature, but the event is repeating itself. I feel that I have fulfilled the part of my duty that bound me to the Cuban Revolution on its territory, and I take my farewell of you, my comrades and your people who are now my people.
I formally renounce my posts in the leadership of the Party, my post as Minister, my rank as Major, my status as a Cuban citizen. Nothing legal binds me to Cuba, only ties of another kind that cannot be broken, as can official appointments. Looking back over my past life, I believe that I have worked with sufficient faithfulness and dedication in order to consolidate the revolutionary triumph. My only deficiency of any import!!!ance is not to have trusted you more from those first moments in the Sierra Maestra and in not having understood soon enough your qualities of leader and revolutionary.
I have lived through magnificent days and at your side I felt the pride of belonging to our people in the luminous and sad days of the Caribbean Crisis. Rarely has any statesman shone more brilliantly than you did in those days. I feel pride, too, in having followed you without hesitation, identifying myself with your way of thinking and seeing and of judging dangers and motives.
Other regions of the world claim the support of my modest efforts. I can do what is forbidden to you because of your responsibility to Cuba, and the time has come for us to separate.
Let it be known that I do it with a mixture of joy and sorrow: I am leaving here the purest of my hopes as a builder and the most loved among my beloved creatures, and I leave a people who accepted me as a son; this rends a part of my spirit. On new battlefields I will carry with me the faith that you inculcated in me, the revolutionary spirit of my people, the feeling of having fulfilled the most sacred of duties: to fight against imperialism wherever it may be; this comforts and heals any wound to a great extent.
I say once more that I free Cuba of any responsibility save that which stems from its example: that if the final hour comes upon me under other skies, my last thought will be for this people and especially for you, that I am thankful to you for your teachings and your example, and that I will try to be faithful up to the final consequences of my acts; that I have at all times been identified with the foreign policy of our Revolution, and I continue to be so; that wherever I may end up I will feel the responsibility of being a Cuban revolutionary, and I will act as one; that I leave nothing material to my children and my wife, and this does not grieve me: I am glad that it be so; that I ask nothing for them, since the State will give them sufficient to live and will educate them.
I would have many things to say to you and to our people, but I feel that they are unnecessary; words cannot express what I would want them to, and it isn’t worthwhile wasting more sheets of paper with my scribbling.
To victory forever. Patria o Muerte!
I embrace you with all my revolutionary ferv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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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대체 뭐하는 곳일까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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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드시겠어요... 저도 무슨 일인지 살짝 궁금하네요^^앞에 어떤 글에서 몸도 "꼬물"(-_-)이라고 하셨는데.. 건강 상하지 않으시도록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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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응급실 인턴입니다. 쓰러지면 바로 처치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ㅎㅎㅎ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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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노동강도 속에서 불로깅은 무리겠네요ㅜㅜ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