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용차 투쟁을 보면서 아래 말이 더 깊게 다가온다.

 

문: “작년의 촛불집회처럼 전투경찰의 닭장차에 끌려가면서도 놀이처럼 생각하는 것이 권력에게 더 위협적이지 않을까요?”

답: “참으로 신세대다운 발상입니다. 그런데 전투경찰 다음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되는 법이에요. 공수부대는 쇠심 박힌 곤봉을 사용하는데, 한 대만 맞아도 그 자리에서 머리가 두 쪽이 나지요. 그러다가 총검술로 사람을 찌르고, 그것도 안 되면 일제사격을 시작하는 것이에요. 사실 테러와의 전쟁은 부시 이전에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와 남한의 전두환 쿠데타가 그 예행연습인 셈이거든요.

계급투쟁은 장난이 아닙니다. 재작년에 개봉된 『화려한 휴가』를 보고서 광주항쟁에 대해서 다 알았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되지요. 아무리 팩션이라고 해도 그런 삼류 멜로물일 줄은 몰랐어요. 칠레항쟁을 그린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나 『영혼의 집』과 비교하면 정말 낯뜨거울 따름이에요.
물론 광주항쟁이 시작될 때는 김밥이나 크림빵도 서로 나눠먹고 마치 봄소풍 같은 장면도 있었는데, 그러나 도청이 함락되는 마지막 날에는 아무도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엉뚱한 연애 얘기를 빼고서라도 이 대목을 왜곡한 것이 『화려한 휴가』의 가장 중대한 결함이에요. 도청에서 끝까지 항전한 사람은 주로 하층 노동자나 어린 고등학생이었지요. 유일한 지식인은 윤상원 열사 한 사람뿐이었는데, 광주항쟁의 주동자인 박관현 씨는 물론이고 윤한봉 선생조차 현장을 지키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광주항쟁 같은 사태가 서울에서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거든요. 알튀세르가 경고한 것처럼 국가는 장난감이 아니라 곤봉이에요. 전경에게 밟혀서 억울하고 백골단이 지하도까지 쫓아와서 반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아예 얼씬거리지도 말라는 것이에요. 한 대 맞았다고 울부짖으면서 대들다가는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거든요.
계급투쟁을 놀이와 혼동하는 것이 바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이고 포스트아나키즘적인 혁명관입니다. 물론 혁명관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에요. 그러나 닭장차에 주차위반 딱지를 붙이고 광화문 거리를 차단하는 컨테이너를 명박산성이라고 부르면서 현실의 모순을 극복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헤겔처럼 말해서 풍자와 야유를 통해서 운명을 초월할 수 있다는 낭만주의일 따름이거든요. 반면 변증법은 운명과의 대결을 의미하는데, 그러나 승리한다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으므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칠레항쟁도 광주항쟁도 모두 비극적인 것이에요.
그래서 활동가든 연구자든 비극적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비관하라는 말이 아니라 끝까지 열심히 싸우더라도 질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비극적 인생관이지요. 따라서 목적론은 아니더라도 목적은 존재하는데, 다만 이런 목적은 지배적 경향과 투쟁하는 경향, 좀 더 간단하게 말해서 반(反)경향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반경향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 윤소영. 2009. 『마르크스의 ‘자본’』. 공감. pp. 428-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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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8 16:52 2009/08/0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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