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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지식의 구성과 성불평등 : '가려진 것들'의 진실 한경희(연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I. 과학기술의 발달: 이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통상 과학기술의 발달은 '보다 나은 것(for the better)'으로의 진보로 이해된다. 이때 '보다 나은 것'의 과학적 근거는 객관성과 중립성,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예측가능성이라는 반석 위에 놓여 있다고 여겨져 왔다. 그 동안 수많은 정치가들과 학자들, 기업가들은 '역사상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진보된 결과물들'을 찬양하느라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낳은 환경파괴와 계급간, 민족간 불평등의 심화에 대한 비판이 약간의 걱정거리를 제공하고는 있지만- '이 보다 더 좋은 것'을 찾아 볼 의사도, 겨를도 없었다. 물론 이런 저런 걱정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적쟎이 존재한다. 환경론자, 생태론자, 페미니스트, 맑시스트들... 그렇지만 이들의 비판이나 대안제시는 흔히 '강단용(用) 비판'이나 '실행불가능한 유토피아적 망상'으로 치부되곤 했다. 왜냐하면 지금은 생명공학의 발달, 특히 유전자 복제 기술의 발달로 '신이 주신 생명의 완전한 복제'가 가능하며 '천형(죄의 대가로 받은 병, 예컨대 AIDS)'에 대한 종교적 해석을 비웃을 수 있고 기계의 간단한 조작으로 지구 반대편의 낯선 사람과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이른바 '과학기술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과학기술의 거대한 힘'에 대한 인정은 그 힘의 작동방식과 영향력에 내재해 있는 사회적 메카니즘의 왜곡 및 은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성불평등과 과학기술의 관계에 대한 치열한 논의들은 이 문제를 세밀하게 살펴 볼 수 있는 매우 적합한 주제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결국 '과학기술의 발달이 여성들의 개인적 경험과 집합적 차원의 여성들에게 어떤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있다. 많은 논의들이 여기에 긍정적으로 답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조금씩 다르다. 우선 기존의 논의들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여성들의 삶의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첫째, 가장 널리 알려진 성불평등의 일차적 원인은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에 근거하는데, 많은 논의들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물학적 차이의 완화가 가능해졌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여성의 월경, 출산, 양육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의 일을 부분적으로 기계화한다든지(세탁기나 전기밥솥, 전자레인지 등의 가정용 기계 사용), 혹은 생리 주기의 통제(피임과 낙태와 같은 출산통제 기술)를 통해 어느 정도 성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설득력있는 주장이 있다. 둘째, 과학은 그 자체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의 발전은 대개 성별의 차이와 관련없이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는 부정적인 평가와 긍정적인 평가가 동시에 존재한다. 예를 들면, "과학이 사회적 관계"임을 주장한 좌파 지식인들은 과학기술 발달의 내용과 영향을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 속에서 파악하기 때문에 '젠더(gender)'와 성차(性差)에 기반한 차별성보다는 '노동력 대체'의 과학기술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성차가 생물학적 원인보다는 사회화 과정의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에 과학기술 발달의 잠재적 능력을 의심하기보다는 사회화 과정의 개선에 주력한다. 이와 같이 과학기술과 성불평등의 관계에 대한 입장들은 각 논의의 정치적 신념과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해서는 안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과학기술과 성불평등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시도일 뿐만 아니라 전혀 사실적이지도 않다. 둘째, 성불평등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서로 다르게 제시하고 있는 주장들일지라도 그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많은 과학이론과 역사를 별 문제의식 없이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전자보다 후자다. 즉, 인과 관계의 수정은 몇 가지 반증사례나 정치적 주장에 따라 비교적 쉽게 일어날 수 있지만 '문제시되지 않는 가정'은 결코 '문제로' 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 시도되고 있는 과학사 및 기술사, 과학지식 사회학, 과학철학, 과학사회학의 학문분과들이 '보지 않아 볼 수 없었던', 혹은 '보아도 보이지 않았던' 가려진 역사와 과학기술의 사회적 메카니즘을 차츰 들추어내고 있다. 아직 초보단계라고는 하지만 이들이 이루어낸 몇 개의 뛰어난 '경험연구'들이 우리의 시각을 보다 넓고 깊은 곳으로 인도하고 있다. 이 글은 어느 한 편의 입장에 서서 특정한 주장을 지지하기보다는 '밝혀지고 있는 새로운 역사와 구체적 메카니즘의 고찰'을 통해 통찰적이고 투명한 '시선(視線)'을 재구성하는 데 주요한 목적을 두려고 한다. 지금의 시점에서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기 때문에… II. 새로 쓰는 시나리오: '여성'의 발명과 '여성'의 새로운 발견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성만이 유독 생물학적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자들은 기억하기도 힘든 '옛날 옛적'부터 지금까지 월경 때문에, 임신 때문에, 양육 때문에 좋은 시절을 다 보내야 했으며, '그것' 때문에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에는 적당한 정도로 공부해서 적당한 직업에 있다가 적당히 결혼해 왔다. 남자들은 말한다. "불평하지 마시오. 이유는 당신들의 '그것' 때문이고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며 어찌되었건 누군가는 맡아야 할 숭고한 일이지 않소? 우리도 쉬운 것만은 아니오. 당신들이 이런 '지독한 경쟁 사회'에 덜 빠진다는 것은 신의 축복일지도 모르오. 게다가 과학기술의 발전이 당신들의 일을 덜어주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오! 차츰 상황이 나아지고 있으니 참고 기다립시다. 당신들은 위대한 남성들의 어머니들이니!" 정말 오랫동안 유행하고 있는 시나리오가 아닌가? 셰익스피어의 그 유려한 작품들도 이렇게 사랑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여성'을 발명했고, 그들의 캐릭터와 행위와 삶을 지시해 왔다. 이 시나리오에 잘 적응한 배우는 '상(열녀, 현모양처, 수퍼우먼의 작위)'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배우는 늘 무대의 뒤편에서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잘 나가는' 배우들을 선망하거나 혹은 '남성' 분장을 하고 그들의 연기를 하면서도 언뜻언뜻 밀려오는 자신의 정체성 혼란에 괴로워하곤 했다. 물론 시나리오의 각색이 가능했겠지만 기본 구도는 늘 변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이 시나리오의 변경은 거의 불가능한 것인가? 과학기술의 발달이 여성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인가? 1. 생물학의 운명에서 탈출하기 역사가들은 말한다. 근대 사회에 들어와 여성은 비로소 '인간(시민권 획득)'의 지위로 상승했으며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근대 사회의 그 무엇인가가 여성을 해방의 낙원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일까?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근대에 들어와 여성은 '감성적 인간'의 지위를 획득했을 뿐이며 새로운 방식으로 제 2의 위치에 진입할 수 있는 '별로 새롭지 않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을 뿐이다. 대체로 16세기 이전까지 '여성의 열등함'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논박할 수 없는 '신이 부여한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소수의 여성들이 해부학의 근거(남성과 여성 성기의 상동성)를 들어 여성의 종속을 문제시하자 남성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새로운 과학적 근거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고대를 풍미했던 예조설(豫造設: 발생이 신성한 창조의 과정임을 주장, 따라서 여성은 단순한 임신과 출산의 장소로 여겨졌다)이나 극미동물설(animalculist: 남성의 정자에 들어있는 태아의 상태가 이미 모든 성장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은 여성의 자궁을 단순한 영양공급과 양육의 장소로 규정짓고 태아에 대한 어머니의 영향력을 무시했다. 그러나 17세기 말에 여성의 난소에 난자가 들어있다는 사실과 18세기 말에 두 개의 성 모델(two-sex model: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른 신체적 존재라는 주장)이라는 보다 사실적인 과학적 근거가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과학적 근거들은 늘 '여성의 수동성'이나 생물학적 운명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설명되었다. 따라서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태아의 발생에 대한 어머니의 영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생물학적 운명을 주장하면서 가장 강력한 설득력을 얻고 있는 가설이 사회생물학이다. 1975년 윌슨(Edward O. Wilson)에 의해 널리 알려진 사회생물학은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을 확장하여 인간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를 '진화적 적응(evolutionary adaptation)'으로 설명한다. 이 설명에 따르면, 남녀의 성별차이는 '성선택(sexual selection)'에 의해 이루어진다. '성선택'은 무수한 수컷중 치열한 경쟁을 통해 우월한 수컷만을 짝짓기에 선택하여 가장 우월한 개체를 자손에 남기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일반적으로 수컷은 공격적인 성향을, 암컷은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성향을 획득한다. 이런 식으로 공격 본능과 모성 본능이 분리되며, 이는 다시 성별 분업의 자연적 기초를 이루게 된다. 예컨대, 일부일처제적인 남녀의 결합(pair-bonding) 은 남녀의 상호협동과 양육의 보조를 통해 잠재적인 생식의 성공률을 높이고 생존과 재생산의 기회를 향상시킨다. 이 때 여성들에게는 빈번한 성교를 보장하는 보상과 동기가 제공된다. 사회생물학은 이런 방식으로 가족이라는 '사회 제도'를 진화적 선택으로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욕망이나 생리 주기는 주로 호르몬과 같은 생물학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사회생물학의 설명은 여성의 성적 욕망이 임신이 가능한 생리주기 때 가장 강하게 나타날 것이며 마찬가지로 이 때 가장 강한 오르가즘을 느낄 것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실제의 경험연구에 따르면, 호르몬과 욕망, 오르가즘의 관계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 짧은 꼬리 원숭이의 오르가즘을 연구한 결과, 호르몬 상태로 볼 때 결코 발정기에 있지 않았던 상당수의 암컷 원숭이들이 활발한 성적 관심과 행위를 보였고, 임신가능 주기에 있었던 암컷 원숭이의 57-86% 만이 발정기에 있었다. 인간의 경우에도 여성의 30% 정도만이 성교때 오르가즘을 느낀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재생산과 전혀 관련없는 '동성애'의 존재는 호르몬 결정론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인간 뿐 아니라 동물도 단지 '재생산'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성적 호감도 때문에 성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도날드 사이몬(Donald Symons)은 여성의 오르가즘이 남성에 따라 선택적이며 여성과 남성 생식기 사이의 상호관계, 그리고 상호 감정에 의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사례들을 살펴 볼 때, 사회생물학의 설명 모델이 완전히 틀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부분이 잘못된 근거에 기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여성'은 분명 남성의 경험에 기초한 '발명된 여성'임에 틀림없다. '자기총족적 예언'. 이 말은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한 현실의 예측이 결국 그러한 미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표현한다. 사회생물학이라는 '객관적' 과학은 우리에게 말한다. '여성은 이렇고, 남성은 저렇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물학 논쟁 이전에 더욱 중요한 '여성'의 발명이 있었다. 근대 과학의 근간인 '분류체계'가 그것이다. 1758년에 린네(Carolus Linnaeus)가 '유방이 있는(of the breast)' 존재로 포유류(Mammalia)를 정의하기 전까지 2000년 동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지 동물(Quadrupedia)'이 지금의 포유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었다. 그렇다면 왜 린네는 암수 보편의 특징을 강조하는 '젖을 빠는 존재(Sugentia)'나 '젖을 먹이는 존재(Lactanitia)'가 아니라 암컷만의 특징인 유방으로 포유류를 정의내렸을까? 쉬빙거(Schiebinger, 1993)는 그 이유가 18세기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와 크게 관련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즉, 18세기에 활발하게 일어났던 유모수유 반대운동(유아의 사망률을 낮추려는 국가적 과제와 가족과 어머니의 의무를 강조)과 여성의 사회진출과 참정권을 억제하고 그들을 어머니로서 강조하려는 정치적 전략이 '유방'을 강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린네가 같은 책([System naturae]10판)에서 인간을 Homo sapiens(현명한 존재)로 정의했음을 돌이켜 볼 때, 여성의 유방은 인간의 동물성을 특징지었던 반면, 남성의 이성은 인간을 동물로부터 분리시키는 기본 요소였음이 분명하다. 객관과 주관, 이성과 감성, 합리와 비합리, 과학과 비과학의 분류는 남성과 여성의 분류와 함께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 기초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발명된 여성'의 생물학적 운명에 연연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여성의 운명은 '자연'에 있다기 보다는 '자연'을 둘러싼 해석에 놓여져 왔던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과 여성의 삶의 관계는 '지식' 그 자체에 의해 개선되었다기 보다는 '지식'을 둘러싼 해석 투쟁에 훨씬 더 크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2. 사회적 운명에서 탈출하기 코완(Ruth Schwarz Cowan)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삶을 규정짓고 있는 경제적 사실들이 그들에 관한 해부학적 사실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결정론적이라고 단정한다. 첫째, 여성들이 남성과 동일한 일을 할 경우, 그들은 거의 언제나 남성보다 적은 보수를 받는다. 둘째, 집합적으로 판단할 때,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노동의 성별 분업). 셋째, 여성들은 거의 언제나 자신들이 노동에 일시적으로 참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여성들의 사회적 운명을 결정짓고 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이 운명은 변함이 없다. 근대 사회의 공고화, 특히 공/사 영역의 분리와 함께 여성은 사적 영역의 주요한 주체로, 남성은 공적 영역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쟁이나 경제 부흥기와 같은 특정 시기에 종종 여성들이 공적 영역(경제 분야의 주체)으로 진출하기도 했지만 그 짧은 시기가 지나면 여성들은 곧 자신들의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지위향상에 대한 많은 증거와 주장이 있었다. 첫째, 과학기술의 발달로 가사노동이 훨씬 경감되어 여성들의 사회활동과 여가활동이 증진되었다. 둘째,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한 출산통제로 인해 여성들의 라이프사이클 조정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여성의 실제 경험과 더 많은 증거들이 이와 상치되는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물론 현대의 여성들은 더 이상 냇가에서 얼음을 깨며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고 손수 옷을 만들거나 놋그릇을 닦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논바닥에서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고 일년이 멀다고 임신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여성들(전업주부인 경우)은 여전히 새벽 일찍 일어나 남편과 아이의 음식과 출근을 채근하고 최신의 자동기기들을 이용해 빨래와 청소(양과 회수가 훨씬 더 증가했다)와 설거지를 마친 후, 가끔은 라디오의 '음악'과 '남들 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다음 찬거리를 걱정한다. 아이 교육과 남편의 승진 문제를 걱정하면서 어떻게 하면 '남보다 나아질 것'인가를 고민하다 보면, 바쁜 저녁시간이 된다. 다시 음식준비와 설거지, 거기다가 경조사까지 고민하다 보면 여성들은 남들 보기에 '하잘것없는' 일을 하느라 하루와 한달, 그렇게 인생의 황금기를 채워 나가게 된다. 이제 '자기 삶'을 찾겠다고 뒤늦게 집밖을 나서보지만 어디에서도 받아주는 곳이 없다. 여유있는 사람들은 봉사활동을, 여유 없는 사람들은 불안정한 영업사원으로 '새출발' 할 수는 있다. 문제는 가사노동의 기계화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들은 여전히 '서로 분리된 각자의 공간'에서 비슷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양육도, 가사노동도.. 만약 직업전선에 나가려고 마음먹었다면, 남성들과 비슷한 일을 하기 위해 '훨씬 더 노력하고 훨씬 더 뛰어나야 한다는 점'을 각오해야만 한다. 가사노동과 양육, 직업중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해서도 안된다.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가사노동의 영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근본적으로 '여성'을 가정에 묶어두는 방식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자동화된 기계덕분에 여성들의 일이 전보다 더 쉬워졌으리라는 가정하에 남성들은 집안일에 참여하지 않는다. 예컨대, 보통 남성들이 해 왔던 '큰빨래(이불이나 담요)'는 세탁기나 세탁소에서, 제삿날 아침 밤깍는 일은 밤깍기 기계로 아이들이나 여성들이 손쉽게 하게 되었고, 집안 대청소는 청소기가, 무거운 장보기는 여성들의 자가용 운전으로 대체되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여성들의 일보다 남성들의 일이 더 줄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성별 노동분업은 어떠한가? 1973년까지 동일한 직종에 속한 여성들은 남성들이 받는 보수의 37.8%에서 63.6% 정도밖에 못받고 있다고 한다. 노동시장의 성별 유형화를 통계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1900년에서 1960년 사이에 남성이 노동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몇몇 직종들에서 여성 노동인구가 대거 도입되어 여성중심의 직종으로 되는 변화가 나타났지만(흥미로운 점은 그 역방향의 변화는 없었다고 한다) 전체적인 성별 유형화의 정도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과학기술의 발달은 여성노동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여성노동에 대한 과학기술의 효과는 대체로 '남성 노동력 대체'와 '저렴한 노동력 추구'와 관련되어 있다. 19세기 후반까지 시가(cigar)공업은 남성 숙련노동자들의 수제품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1869년에 남성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되자, 몇몇 제조업자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보헤미아 여성들의 이민을 서둘러 저임금의 노동력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이 때 숙련된 지식을 결여하고 있는 여성노동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단한 기계류를 도입하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사무자동화 기기의 도입을 들 수 있다. 값비싼 남성 비서들의 비용을 낮추기 위해 워드 프로세싱이 도입된 후, 사무노동은 여성들의 대표적인 일자리가 되었다. 이와 상반되는 사례로는 20세기의 여성의류 공업을 들 수 있다. 19세기 말 재봉틀이 최초로 중앙 동력원에 연결되는 기술혁신이 일어난 이후에는 재봉틀을 돌리는 과정에 기술도입으로 인한 변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예컨대 재단이나 다림질의 빠른 기술변화를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재봉은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일이었으며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일하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너무나 많았다. 즉, 기술도입의 인센티브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과학기술의 발달이 여성노동에 미치는 영향은 기술 자체의 논리나 효과보다는 이를 둘러싼 사회, 정치적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III. 소결: 그들의 '더 좋은' 출발을 위한 과학기술 위에서 우리는 여성의 생물학적 운명이나 사회적 운명이 변경불가능한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늘 변경가능한 '해석'을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과학적 담론 및 구조와 훨씬 더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항상 '더 좋은 것'을 향해 발전되어왔다는 판단은 '누구를 위해' 더 좋은 것인가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좋은 것'에 대한 사회적 해석이야말로 주관적 판단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판단에 특정한 사회적 집단이 늘 배제되어 왔다는 데 있다. 우리가 진실로 '더 좋은 것'을 추구한다면, 문제의 핵심을 '자연, 혹은 자연적인 것(the natural)'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과학기술 발달의 '잠재적 가능성'을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이며 그것의 '실현'은 우리들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전혀 다른 이유로 '더 좋은 과학기술'의 모색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인류의 반쪽을 불행한 운명에 내몰지 않으면서 함께 나누며 살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는 길이다. 성불평등과 관련된 정보쪽지 단행본 1. 이반폭스 켈러, {과학과 젠더} 1996, 동문선 2. 루스 허버드, {생명과학에 대한 여성학적 비판} 1994, 이대출판부 3. 루쓰 코완 {과학기술과 가사노동} 1997, 학지사 4. 가지않은길 편집부·조준상·이은정,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1997, 가지않은길 논문 및 기사 1. 박은진 (1998), '과학기술에서의 성평등-[APEC 성과 과학기술 특별작업반] 활동', {과학기술정책동향} 5월호, 108-118쪽, 과학기술정책관리연구소 2. 하정옥 (1997), '페미니즘 과학, 행복한 결합' {여성과 사회} 8호 , 한국여성연구회(편), 창작과 비평사 3. 홍성욱 (1998), '여성의 능력을 버릴 건가', 한겨례 21, 제189호, 81쪽 4. 김미경 (1996), '평등한 과학을 향한 페미니즘' {창작과비평} (96년 겨울호) 168-192쪽, 창작과비평사 5. 조영란 (1996), '서양 근대과학사에서의 여성', {과학사상} (96년 봄호), 111-120쪽 인터넷 GSD (Gender, Science and Development Programme)의 홈페이지 : http://www.ifias.ca/gsd/gsdinfo.html GSD는 1991년 3월에 14명의 전세계 관련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IFIAS (International Female Institute of Science )에서 시도한 사업으로서, 이 페이지에는 과학기술과 여성에 관련된 다방면의 논문자료가 상당히 올라와 있다. 물론 무료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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