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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6/11/06

2) 폭풍이 지난 뒤에... - 구속당한 후부터 검찰청을 향하여

 구속을 당하면서 전 수원중부서 유치장 3번방(맞나?)에 있었습니다. 그때 맘 같아선 하기가 싫었던 기자회견까지 하며 불구속을 해서 남은 사간을 어떻게든 보내려고 하였는데 이제 갇혀지게 되어서 허탈했지요.

 

 그리면서 제 손에 아무 것도 없이 매일 쉼 없이 형광등이 밝혀진 부채꼴 시설에서 있게 되었지요. 뭐~ 다른 이들에게는 국가권력으로부터 빨리 탈출을 하려고 하겠지만, 저로선 어차피 수감을 각오하는 마음이라서 빠른 시일에 구치소로 넘어가기를 바랬지요. 그럼에도 구속영장이 금요일에 발부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주말을 유치장에서 보내게 되었지요.

 

 



 음... 먼저 유치장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말할께요. 일단 수원중부서가 비교적 최근에 지은 시설이어서 그다지 불쾌한 건 아니지만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였는지 - 특히 화장실! - 꽤째째함이 보였고, 그 당시가 여름 한 철이었음에도 에어컨이 항시 틀어져 있어서 쾌적함이 있었지만 한번 역시나 청소 안한 듯한 필터는... ( 물론 격무에 시달리는 경찰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자기들 건강까지라도 위해서라면 좀 청소하시죠.)

 

 그리고 역시나 양(?)이나 질에서 불만이 많은 급식과 나이가 적다고 하대하는 경찰관 태도는 문제가 많았지요. 그래도 제가 존대말을 하라고 하여서 뭐라고는 하지 않지만... '편안하게 대하려고 그랬다.'는 어떤 경찰관의 말에서 좀 씁쓸함이 들었어요. 그 후에도 모 교도소로 살면서 느낀 것처럼 말이지요.

 

 앞서 제가 구속전 까지 부모님에게 이러한 짓거리를 할꺼라는 걸 말하지는 않았다고 하였죠. 역시나 어머니에게로 연락이 갔었고 이후에 면회를 하려 왔었습니다.

 

 아~ 아크릴판과 철창살 사이로 어머니를 보니 참 할말이 없더라고요. 시살 농담이 셖어 있는 표현이지만 '난 두 번 쓰러졌으니 한 번 쓰러지게 하면 다신 못 일어난다'고 이따금 말한지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믿지 않는 저으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요.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20여년간의 저의 삶에서 묵묵히 이끌어오신 분 중에 하나이어서 여려가지로 미안함이 많기에 차마 마주보기가... 그랬어요.

 

 그래도 다행히 어머니는 살아있는 아니 울다 지친 상태에서 저 보려 왔었는데 그 때 저의 해명을 전달되었지만 그 당시 기억이지만 '니 마음대로 하라'라는 식의 답을 듣었지요. 제가 고집이 세기도 하여서 그당시에는 포기를 한 듯 싶었는데 이후에 '그 종교 좀 포기하라'라는 말을 듣었지요.

 

 왜냐하면 어디선가 듣으신 것 같지만 아직까지엔 '병역거부자 = 여호와의 증인' 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사회에 있다보니, 예전에 교회에 광적(?)으로 다니는 걸 보아선지 몰라도 하번엔 이런 말을 하시는 걸 득었지만 그 때에는 제가 기결수이어서 '엎지러진 물' 이라는 것이지요.

 

 그래도 의외로 잘 계시는 걸 보니 다행이었지만, 지금도 이런 저의 흔적 때문에 미안해집니다.

 

 또한 제가 유치장에서 있으면서 한가지 일꺼리를 해치우게 되었어요. 바로 '내가 왜 병역거부를 하는가' 라는 것이었어요.

 

 이 글을 보시면서 혹시 '무슨 소리이냐?' 아니면 '병역거부를 하면 자기의 양심(신념)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물어 보시겠지요. 내~ 그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말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사실 병역거부를 2년여 준비를 하면서 정작 '왜?'라는 물음에 답할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으로선 형사처벌을 피할 수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고, 이에 각오할 자신은 있었지요.(솔직히 그 때에도 각오의 정도는 좀 작았죠.)

 

 그럼에도 구속 전까지 아무리 고심을 겨처도 '왜?'라는 화두에 답하지 못하였던 내가 딱 유치장에 있다보니 그동안 뒤죽박죽하던 제 머리 속이 정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이냐고요?

 

 일단 일반인에게는 '유치장'이라는 공간이 어수선하고 정리가 안되는 곳이다고 봅니다. 그래서 구속이 될까라는 조바심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하지요. 그런데 저 같이 구금을 각오하고 쇠팔찌를 채워 당하니 아~ 제 맘이 싹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더구더나 구속을 하면서 읽을 꺼리나 금품이라도 준비를 해야 했었는데 미처 가져오지 못하다보니, 먹고 자고 잠시 면회하고 TV를 보는 이외에는 생각을 할 시간이 많게 되었고 결국 '왜?'라는 물음에 어느 정도 답을 할 수가 있게 되었어요.

 

 무엇이냐고 하면 졸렬하지만 ' 평화에 대한 실천을 고민하고 국가에 대한 명령에 불복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러한 물음을 하실 것이예요. 당신 평화주의자이냐고... 그러면 전 단언하게 아니다고 말할 것입니다. 솔직히 '평화주의' 라는 철학이 저에게 맞지 않는 것이 있고 아직까지 부담감이 들기도 해요.

 

 그럼에도 전 그 누구나 어떠한 시류에 휩쓸지 않는 자유로운 하나의 개인으로서 살아가고 싶었고, '병역의 의무'라는 것이 국가가 개인에 대한 강제명령이기에 최소한의 선택권으로서 요구하는 의미에서 결정을 하였다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행동이 폭력에 저항하는 하나의 평화로운 실천이기에 최소한 - 아니 큰 - 원칙 즉, 어떠한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게 물질적이나 구조적으로 폭력을 가하지는 않겠다는 건 분명히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 만큼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지요.

 

 또한 잡스럽지만 수면을 취하기 전에 인원점검을 하는데 번호를 잘 못 부른다고 '군대 안갔으니...'등의 어떤 의경의 말이 좀 그랬고, 컴퓨터에 부착한 스피커에서 '비'의 노래가 계속 맴돌게 들려주니 짜증이 난다는 또 다른 분의 말이 기억이 나네요.

 

 여하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기고 주말을 지나 드디어 8월 2일. 제가 그토록 원하던(?) 입소(?)를 하는 - 구치소로 가는 - 의미으로 포승줄이 둘려지고 수갑은 제 손목에 차여진 채 검찰청으로 가는 차에 몸을 맏기게 되면서 유치장과는 안녕을 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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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 없는 혼돈을 지나가며 - 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당할 때까지.

2005년 7월 28일.

 

앞서 저는 수 차례 연기 끝에 경찰조사를 받았고 저는 영장실질심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잠시 다산인권센터(이하, 다산)에 들리다가 결정의 때가 왔음을 알게 되었고요.

 

바로 영장실질심사가 오늘이었고, 그 전날 저와 다산 활동가들은 기자회견을 준비하였고, 저 개인적으로는 기자회견 때 말할 글을 쓰면서, 부모님에게 전할 글을 쓰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며 시간을 보내었고 그 때 새벽 1시 반까지 자리에 앉아 타이핑을 계속 하고 있었지요.

 

그 때 저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불구속 수사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지만 솔직히 제 안면을 사회에 내밀어야 한다는 것이 몹내 싫었습니다.

 

 



물론 이전부터 차츰 준비를 하고 있었고, 병역거부를 선언하면서 병무청에 이와 관한 통보를 하며 주위 사람들에 이러한 의사를 보여져 있어선지 그다지 두려운 것도 없었고 오히려 당당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부모님에게 이러한 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려줄 자신이 없다는 것이 저로선 큰 장벽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렇더라도 자심으로선 괴롭지만 어자피 이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주위의 의견에 있었고 저로선 동의를 하였지만, 이 한국사회에서 병역거부를 한다는 것이 범법을 하는 것이어서 차마 이러한 범법을 한다는 사실을 '가족'이라는 저의 기초 집단에게 보여질 자신은 솔직히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병역거부를 선언하면서 이러한 까닭과 함께 이 소극적인 성격 탓으로 언론노출을 하지 않았고 선언할 때 조용히 만찬을 하는 선에서 머물었는데 문제는 주위 사람들이 절 관심을 보여주지 않다는 다른 부작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병역거부 자체의 셩격상 대중성이 전혀 없는 각 개인의 시민불복종으로서의 운동이고 한국 사회에서 민감한 '병역'에 대한 사안을 건들었기에 이러한 무관심은 예상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제 개인으로서 분노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건 바로 모 단체에 있는 사람들의 냉소적인 반응이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다산에 있기 전에 그 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며 굳은 일을 맡았기에 생각의 차이를 있을지언정 구속을 당하는 것만큼 적어도 그에 대한 인간적인 보답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냉소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를 듣으니까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 그러한 무심함에서 벗어나면서, 어자피 알려질 것 대범하게 알리자는 의미에서 몇몇 이들이 제안을 하였던 기자회견을 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고, 주제를 앞서 말했듯이 불구속 수사를 요구하는 걸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무죄'가 아닌 '불구속'를 요구하는 것인가 라고 물어 보실 것입니다. 저도 병역거부에 대해서는 당연히 무죄이다는 건 변함이 없지만, 문제는 형사소송법상에서 구속의 사유가 엄연히 있음에도 병역거부에 대해서는 수사과정에 순순히 응하였는데도 무조건 구속을 강제하는 사실이어서 저로선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제기를 해야 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일말에는 재판기간 동안에 구금하면 재판부에서 실형을 줄 때 그 일수를 더하기에 절대 불이익이 아니다고 하지만, 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불구속을 요구하였습니다.

 

먼저 부모님(가족)과의 소원한 관계를 풀어야 하고, 재판에서 혼자서 재판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고 있어서 원활한 재판준비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경찰조사에서 순순히 응하였다는 것과 제 집과 법원과의 거리의 근접성 등을 내밀면서 도주의 우려가 없으니 불구속으로 수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잠시간의 수면을 한 후 집에 나섰고, 기적을 바라면서 다산으로 갔었고 28일 오전 10시 반. 주적주적 내리는 비가 내리면서 수원지법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느낌을 말로써 할 수 있지만, 저로서는 참 말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새련되게 보여져야 하건만 옷차림은 남루하지 언변은 이리저리 못하는지... 휴 그 땐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 후 사회에서의 마지막 음식을 삼겹살로서 섭취한 후 다시 다산으로 돌아가서 그 분을 기다리게 됩니다. 바로 나의 담당 형사이지요. 잠시후 저의 사건담당 형사님은 오늘도 한 건(?)을 해치우려 절 찾으시고 저는 그 분 따라 영장실질심사에 맞서기 위해 수원지법으로 다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영장실질심사를 하게 되었는데, 저로선 다행히 법무법인 다산 소속 변호사가 절 변호해주어서 작은(?) 도움을 얻으며 저의 행동이 비록 형사처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건 이해할 수 있고 감수하지만, 적어도 앞서 말하는 것들이 있어 불구속을 해줄 것을 -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할 것을 - 요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판사는 저에게 '다산'이라는 시민단체에서 어떻게 일을 하는지 또는 임금이 얼마냐는 등의 단지 '안정된 직업'인가에 대한 검증만을 하여서 기분이 언짢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정식재판이 아닌 약식이라 짥게 끝나고, 담당 형사는 절 대리면서 법원까지 같이 있어준 몇몇 분들과 헤여지고 드디어 수원중부경찰서로 가게 되었습니다. '영장 기각' 이라는 기적을 기다리며...

 

그 후 경찰서에 들어섰고 그 형사는 날 조사실에 두다가 유치장으로 들어 보내었고, 이 의미심장한 말로서 저의 운명이 정해 졌습니다. '5시까지 대려오지 않으면 구속한 걸로 알아라'라고...

 

내. 예상대로 구속이 되어진 것이지요. 물론 그 때 당시에는 쭈그리며 앉으면서 그 분(?)이 오시길 빌고 빌었건만 구속을 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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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살이 428일의 여정'에 대한 소개

먼저 안녕히 살아 계시는지 알고 싶네요.

 

저야 지금 가끔 다산에 들리는 것 이외에는 집안일을 하며, 남은 시간을 사람들을 만나는 일로 잘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긴장되는 삶을 지내다 보니 은근히 피곤해지면서 아직도 남아있는 징역때를 벗겨내고 있답니다.

 

또한 최근에는 저와 유사한 까닭으로 수감을 당한 병역거부자들을 면회를 하기도 하였는데, 제 눈으로는 겉으론 편안한 모습이건만 사방에서 일려오는 스트레스에 견뎌내야 하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표시인 듯 싶습니다.

 

전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고 있지만,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을 봐야 하니까 참 답답함이 듭니다. 물론 수감하면서 상상했던 것들도 있지만, 역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놓여져 있으니까 참 공허해 지네요. 물론 이후의 고민 - '운동을 계속해야 하는가' 와 '돈을 어덯게 벌어야 하는가' 등 - 에 대해서 차츰차츰 성찰해 가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러한 고민들을 하면서 참 중요한 일을 놓쳤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요. 바로 제가 구금을 당했던 시간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과제를 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더라고 제가 외부에 보내었던 편지들을 모으거나 교도소에서 적어 놓았던 글로서 정리를 할 수 있지만, 제가 보아도 단순한 암시나 요구만 적혀 있는 편지만으로는 좀 모자르다는 걸 느꼈고 글을 남기는 것도 아직도 남아있는 '집필 사전허가제'라는 악법으로 일기라도 쓰지 못했습니다.(안 했다고 하는 것이 가까운 듯...)

 

그래서 이 참에 기록을 하지 못하면, 점차 왕성해지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힘을 당할 수가 있어서 비록 오는 이가 없는 카페에 '회고'하는 글을 올리기로 마음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정확하지 않거나 잘못된 정보를 알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수정을 해야 한다면 이후이라도 꼭 시정을 하겠습니다. 또한 제 시간의 여건상 집필이 늦을 수 있을 것이지만 보다 완성도를 높기 위한 노력이다고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미약하지만 저의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니 기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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