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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계급으로서 부농의 일소와 전반적 집산화

경제학 교정: 사회주의 생산양식 (17) 총명한 유물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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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급으로서 부농의 일소와

전반적 집산화

 

소련에서 농민의 집단농장으로의 일대 전환은 1929년 하반기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 농업 집산화를 위한 경제적·정치적 전제 조건이 마련되었다. 집단농장에는 농민의 기본층인 중농이 유입되었다. 농민은 더는 개별적인 집단이 아닌, 마을 전체, 나아가 지역 전체의 집단농장으로 인입되었다. 소련 농촌의 전반적 집산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전반적 집산화의 전, 공산당과 소비에트 정부는 농촌에서의 자본주의 요소를 억제하고 압박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부농적 요소의 경제적 기반을 일소하거나 그들을 계급적으로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전반적 집산화를 위한 여건이 조성되고, 자본주의적 곡물 생산을 사회주의적인 생산으로 재구조화할 수 있는 집단농장 및 국영 농장의 광범위한 망이 농촌에 구축될 때까지 필요했다.

 

1926-7년에 부농은 약 천만 톤의 곡물을 생산하여 그중 203만 톤 이상을 농촌 외 지역에 판매했고, 국영 및 집단농장은 133만 톤을 생산하여 50만 톤을 조금 넘는 양을 판매했다. 상황은 1929년에 근본적으로 바뀌어 당시 국영 및 집단농장은 무려 650만 톤을 생산하고 그중 거의 210만 톤을 시장에 내놓았는데, 이는 부농의 곡물 생산량과 판매량을 앞지른 것이었다.

 

다수 농민 대중이 사회주의 깃발에 모인 것은 나라에서 계급 역관계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경향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했다. 이를 통해 공산당과 사회주의 정부는 농촌 자본주의 요소를 억제하고 압박하는 기존 정책에서 벗어나, 전반적 집산화를 기반으로 부농 계급을 일소하는 새로운 정책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전반적 집산화는, 이 과업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부농에 맞선 농민의 대중적 투쟁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노동계급은 농민 대중을 지도하고, 전국에 남아 있던 자본주의의 마지막 요새를 몰아쳐 부농을 정면 대결에서 격파하고, 모든 농민이 보는 앞에서 자본주의 세력의 약점을 농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전반적 집산화가 진행되면서 마을 주변 토지는 집단농장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 토지의 상당 부분이 원래는 부농 소유였으므로, 농민은 집단농장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부농으로부터 토지·가축·농기구를 몰수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토지 임대와 노동자 고용을 허용하는 법률을 폐지했다. 따라서 부농 계급의 소멸은 전반적 집산화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였다.

 

집산화는 집단농장 건설에 관한 레닌주의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여 수행되었다. 그 원칙은 [강제 조직화가 아니라] 농민의 집단농장으로의 자발적 인입, 전국 각 지역의 경제적·문화적 수준 차이 고려, 그리고 집단농장 건설의 주요 형태인 농업 아르텔을 배제하고 농업 코뮌을 선호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반적 집산화와 그에 기반한 부농 계급의 일소는 “심오한 혁명(a profound revolution)이었고, 사회의 낡은 질적 상태에서 새로운 질적 상태로의 도약이었으며, 그 결과는 1917년 10월 혁명의 그것과 비견될 만했다.”1

 

이는 기존의 부르주아 개인 농업 체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집단농장 체제를 구축한 혁명이었다. 이 혁명의 독특한 특징은 국가 주도로 위로부터 수행되었으면서도, 부농의 예속에 맞서 자유로운 집단농장 생활을 갈망하는 기백만 농민의 아래로부터의 전면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

 

이 혁명은 사회주의 건설의 근본 문제들을 여러 가지 해결했다:

 

첫째로, 이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착취 계급인 부농을 일소했다. 전반적 집산화를 기반으로 한 부농 계급의 일소는 착취 계급을 폐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누가 누구를 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도시만이 아니라 농촌에서도 나왔고, 그 답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이었다.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복원하려는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것이다.

 

둘째로, 이는 국가에서 가장 많은 직접적 생산자 계급인 농민을 자본주의의 산물인 개인 농업에서 사회적 소유의, 집단적인 사회주의 경제로 [조직화하는 데로] 전환한 것이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장 어려운 역사적 문제가 해결되었다.

 

셋째로, 이는 소비에트 권력에 농업이라는 사회주의적 기반을 제공했는데, 본래 농업은 국민경제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낙후된 분야였다. 농업은 공업과 마찬가지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라는 공통된 지반 위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이행기의 가장 심층의 모순의 하나였던 대규모 사회주의 공업과 소규모 개인 농업 간 모순이 해소되었고, 도시와 농촌 간 대립이 사라졌다.

 

농촌 생산력을 억압했던 낡은 자본주의적, 소부르주아적 생산관계는 새로운 사회주의 생산관계로 교체되었다. 덕분에 농업 생산력을 발전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번역: 한동백 | 집행위원

 

2026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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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K VKP(£), History of the C.P.S.U.(B): Short Course, English edition, 305.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