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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ational Kernel” of Natural Teleology: Dialectical Interaction as the Concrete-Universal’s Form of Development”, Dialektika, 5 (12), 2023: 1-20.
R. P. Arencibia | 쿠바 유물론 철학자
✮ 머리말
✮ 1. 자연의 소외
✮ 2. 구체적 보편 대 추상적 보편
✮ 3. 상호작용, 변증법 그리고 관념론의 자연 목적론의 참뜻
✮ 결론
<2>“총명한 관념론은 우둔한 유물론보다 총명한 유물론에 가깝다.”1
머리말
세계에 오직 개체들만 존재하며 보편적인 형태는 정신적 추상이라는 견해는 유물론의 강요된 전제처럼 보일 수 있다. 현대 유물론이 “영국 태생”인 유명론의 형태로 시작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2 플라톤의 “형상들의 세계”라는 개념은 헤겔의 “절대정신”이라는 횡설수설에 이르러 비로소 신비적 관념론의 궁극적인 예가 되지 않았을까? 따라서 “개별 객체의 존재론”3이라고 불리는 것이 일관성 있는 유물론에 유일하게 적합한 틀인 것처럼 보인다. 자연 내부의 객관적인 경향이나 합목적성(finality)에 관한 견해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오늘날 자연에 대한 신학적 설명은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추악한 신학적 범죄는 아닐지라도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지적인 설계의 결과, 관념적인 계획의 실행, 신의 사역의 “목적”, 섭리의 표징을 자연의 질서 속에서 찾는 것을 뜻할 것이다.4 그러므로 현대과학은 주로 자연을 의미와 의도성이 제거─목적이나 목적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된 맹목적인 메커니즘으로 이해한다. 달리 말하자면, 지배적인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보편적 형태로서의 객관성과 자연의 목적론적 성향에 대한 개념은 모두 철학사의 쓰레기통에서 평화롭게 안식할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에세이에서 나는 보편적 형상과 목적론에 대한 객관적 관념론─참으로 신비주의적인─의 접근 이면에 있는 실제 내용을 밝혀야만 유리가 일관된 유물론을 통해 자연과 그 속에서 우리의 지위를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이를 세 단계로 시도할 것이다. 첫째, 나는 소외된 본성의 혼란스럽고 형태가 없으며 수동적인 기반으로서의 물질 개념, 특히 그것이 (이러한 관점의 전형적인 사례인) 서구 마르크스주의에 미친 영향을 간략하게 언급할 것이다. 둘째, 나는 보편성에 관한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 접근 방식, 즉 개별 현상들 사이의 공통적 특성을 추상화하는 것(추상적 보편)과 역사적 총체성에서 모순되는 요소들의 구체적인 통일(구체적 보편)을 구별할 것이다. 그다음 구체적 보편성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가 어떻게 객관적 관념론의 형이상학적 목적론 근저에 있는 진정한 내용을 밝히는 열쇠로 되는지 보여줄 것이다.
1. 자연의 소외
객관적 관념론과 유물론적 경험주의는 둘 다 자연에 대한 소외된 개념을 공유한다. 즉, 자연 자체는 내부 발전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수동적 추상 영역으로 간주된다. “선험적인 구성에서 자연은 그 권리를 상실하고 개념의 자기 발전을 수동적으로 반영하게 되었다. 경험주의(19세기 경험주의, 즉 전투적 경험주의)의 영역 내에서 자연 이론은 현상학적 주장으로 분해되었고, 자연 자체는 별개의 사건으로 분해되었다.”5
자연에 관한 이러한 개념은 철학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초기 소크라테스 이전 유물론자들로부터 시작되어 수천 년 후<3> 현대과학의 뿌리를 내리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 정신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자연으로부터 자아를 궁극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필요했는데6, 이는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자연에서 의지와 의식을 박탈했을 때 달성되었다. 이는 인간 주체의 독점적인 특징이었으므로, 의인화된 자연의 힘이 우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개입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세상은 인간의 욕망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7 이 압도적인 무관심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스스로의 요구 사항을 이루려면 그 요구에 대해 애원하거나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자연 내부에서 그것의 객관적 비중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화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유물론적 원리이며 후자의 놀라운 성과의 뒤에 숨겨져 있는 비밀이다.8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다. 자연에 대한 환멸은 자연을 창조적 발전이 없는 고립된 물체의 수동적 영역으로 보는 관점을 불러왔다. 초기 현대과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특징9인 이 견해는 (인간적) 정신의 활동 형태에 의해 실현될 예비로 되는 것─수동적 물질로서의 자연에 대한 인간 중심적 개념과 관련이 가진다. 자연은 오로지 형태 없는 물질로 보인다; 보편적인 형태의 발전은 (객관적 관념론자들이 주장하는) 데미우르고스나 (주관적 관념론자들이 주장하는) 우리의 주관적인 활동에 의해 외부로부터 자연에 부과된다. 결과적으로 형태와 물질, 능동과 수동, 목적론과 인과성의 이원론이 서양 철학의 규칙으로 되어 왔다.
우리가 철학사를 통틀자면 능동적인 형상과 수동적인 질료를 내부적으로 통합하려는 관념론 주도의 사변적인 노력을 발견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관념론의 특성상 이러한 노력은 성공할 수 없었다. 플라톤 철학에서 형태는 독립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며, 그것은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자연에서 불완전하게 재현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형식과 물질의 결합만이 실재적(실체적)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일정 정도의 내재적인 성격을 획득한다.10 그러나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과정과 변화의 궁극적인 원천인 이 결합의 주체는 부동의 원동자(외재적 실체)이며, 그것은 이 결합의 창조자이다.
더욱이 객관적 관념론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서, 형상을 질료의 자기운동11으로 보는 헤겔적 체계에서도 형상-질료 이원론은 사라지지 않는다. 헤겔에 따르면, “무관심한 것으로 규정된 질료는 능동적인 것에 해당하는 형상에 반하는 수동적인 것이다. 이때 이 형상은 오직 자기와 관계하는 부정자로서, 본질적으로 자기 해소적이며, 자기를 스스로 밀쳐내면서 동시에 자기를 규정한다고 하는 자기 자체적인 모순이다.”12 헤겔의 데미우르고스, 즉 “세계정신(World Spirit)”은 자연과 사회13의 거울을 통해<4> 자신을 파악하기 위해 관념적인 형상을 질료적인 것으로 소외시켜야 하므로 그의 체계에서 형상 및 질료는 서로를 전제한다: “질료는 형상화되어야 하며, 형상은 그 자체로 질료화되어 구체화를 이루어야 한다; 형상은 질료에 자기 동일성 혹은 자기 존립을 마련해야 한다.”14 그러므로 그의 철학에서는 관념론자의 관점에서 능동적인 원리를 물질과 결합하려는 시도가 최상의 표현에 도달한다. 실제로 이 점에서 헤겔은 뉴턴보다 훨씬 더 유물론적15이었다.
그럼에도 이원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그 이유는 헤겔 철학에서 능동적인 원리인 형상은 질료적 실재가 아니라 개념적 영역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적론적 추론의 “근거”를 제공하는 헤겔16이 “내용”(즉, 형상과 질료의 통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 자체의 운동이 아니라 “이성”으로서 개념 스스로의 운동 산물이다: “목적론적 의미에서 근거가 됨은 개념의 속성이자 개념을 통해 이루어지는 매개의 속성이며, 이 매개가 이성이다.”17 그러므로 객관적 관념론에서 형상은 [스스로 운동하는] 관념의 활동으로 전략적으로 보존되는 반면, 질료는 단지 그러한 활동의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떠맡을 뿐이다. 여기서 형상 개념에 관한 객관적 관념론의 내재론적 시도(immanentist attempt)는 한계에 직면한다. 내재론은 유물론의 기본 원리이므로, 가장 객관적인 관념론이라 할지라도 관념론이 포기되지 않는 이상 자연에 그 활동성을 적절히 배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변증법적 유물론은 관념론적인 원리로서의 능동적인 형상과 결단력이나 자기 발전이 결여한 단순한 실체로서의 수동적인 질료라는 관념론의 이원성을 자기 체계에 도입(즉, 맹목적으로 받아들인)하였다. 마르크스주의적 전통 내부에서 이러한 접근 방식은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마술적인 (관념론적) 자연 개념으로의 한 차례 후퇴라고 하여 거부한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수많은 대표자의 전형이었다.18 능동적 원리인 형상이 의식의 산물─그러나 헤겔이 언급한 것과 같은 우주적 주체가 아니라 사회적 주체로서 이해되는 것─이라는 (관념론적) 믿음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인 청년 루카치19가 그 원리상 변증법을 (의식적인) 주체-객체 간 상호작용의 영역에 가두도록 이끌었다. 이로부터 출발하여 사실상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옹호자는 물질은 자기 활동의 내재적 원리를 소유하지 않으므로 변증법과 양립할 수 없으며20, 이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자연에 대한] 범신론적-신학적 입장, 즉 “마술적” 자연 개념으로의 퇴행을 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21하였다. 이 길을 따라 노년의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은 [유물론을] 선택하였다: “마주침, 우발성의 유물론, 요컨대 무작위적인 것으로서의(of the aleatory) 유물론─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에게 일반적으로 귀속되는 유물론을 포함하는 합리주의 전통의 다른 모든 유물론<5>,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 즉 관념론으로 위장된 형태로서의 유물론과도 반대되는 그것.”22
이에 따르면 자연의 필연성, 본질적인 질서, 그리고 [그것의 발전적인] 경향성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관념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거부하면서 후기 알튀세르는 에피쿠로스주의로 후퇴한다: “이러한 의미로서의 비-선재성(non-anteriority)은 에피쿠로스의 기본 테제 중 하나이며, 이로써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에 반대한다.”23 관념론적 형태로서의 “합리주의”로 추정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반대하는 견해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데, 왜냐하면 고대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관점에서 표현된 형상/질료에 관한 철학적 이원성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두 경우 모두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형상이 수동적 질료를 규정하는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는,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물질성은 그 자체의 생명이 없는 무규정적인(미분화된) 실체인 추상적 동일성으로만 묘사되며, 그것은 형상으로서 “실현”될 때에만 (다른 어떠한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된다. 헤겔도 이와 같은 견해를 가졌다: “질료는 절대적인 추상성이다. (질료는 보거나 느낄 수 없으며, 보거나 느끼는 것은 규정적 질료, 즉 질료와 형상의 통일체이다.)”24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헤겔에게서 형상 개념이 신성(divine nature)을 획득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객관적 관념론이 자연을 “미형의 질료”로 표현하는 것은 자연이 주는 재료들로 의식적인 계획/설계를 실현하는 활동인 인간 노동을 고도로 정교화하여 승화시킨 것에 기반한다. 이처럼 『티마이오스』에 등장하는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는 형상 없는 진흙 자체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의식적인 방식으로써 자신의 활동을 끌어내어 진흙을 항아리로 가공하는 인간적인 장인의 상에 기초해 있다.25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26와 헤겔의 세계정신27은 둘 다 관념적인 (신적인) 형상을 향한 운동 및 자연 고유 활동의 동력의 공급자로서 비슷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객관적 관념론(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주로 헤겔)은 보편적인 현상을 객관적이고 관념적인 실재로 보는 목적론적 개념을 통해 물질적 대상의 활동, 자연의 발전을 설명한다. 알튀세르는 말년에 이러한 개념에 대한 유일한 유물론적 대안을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이 제출한 바와 같은 유명론과 존재론적 개체주의(ontological individualism)에서 찾는다: “오로지 경우의 수—즉, 서로 완전히 구별되는 단일한 개체들—만이 존재한다는 테제는 유명론의 기본 테제이다. … 나는 [유명론; P. R. Arencibia]이 단순히 유물론의 예비(antechamber)가 아니라 유물론 자체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28 그러므로 객관적 관념론의 이원론에 대한 형이상학적29 유물론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알튀세르라는 인물에게서 명백하게 보이는 바와 같이<6>, 단순히 보편적인 형상[일반적인 형식]들, 필연성, 그리고 합목적성에 대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정하는 동시에 고립된 개인 사이의 맹목적(우연적) 인과성을 물질의 유일한 객관적 존재 양식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 지점에서 “일원론”은 모순의 극복─즉, 내부 대립의 진정한 내용을 더 높은 형태로 보존하는 것─을 통해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의 극(極) 중 하나를 제거함으로써만 달성된다. 이에 따르면, 형식, 필연성, 합목적성 같은 것은 결코 존재한 적조차 없었으므로 질료와 형상, 우연성과 필연성, 인과성과 합목적성 사이에는 그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알튀세르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자연 소외를 자기 사상의 궁극적인 귀결로서 취했으므로, 그의 사상은 변증법을 버린 채 경험주의와 유명론의 품에 안겼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고한 알튀세르는 가장 대표적인 서구 마르크스주의자이다. 그러나 유명론은 과연 관념론에 대한 유일한 유물론적 대안인가?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면 보편성의 범주를 조금더 주의 깊게 탐구해야 한다.
2. 구체적 보편 대 추상적 보편
우리는 철학사 전반에 걸쳐 제출된 보편성에 관한 두 가지 상반된 근본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개념은 보편성을 현상의 다양성을 하나의 체계, 즉 객관적 총체성의 형태로 통일하는 존재의 공통 법칙으로서 파악한다. 다양한 종류의 아르케(arche)에서 통일성의 원리를 발견한 거의 모든 소크라테스 이전의 유물론자들은 이 개념을 공유하였다. 원리적으로 이는 비록 관념론적인 방식으로서이지만, 플라톤의 형상 및 아리스토텔레스 형상-질료의 내재론적 관계성을 뒷받침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으로 이어져 구체적 보편에 대한 서로 충돌하는 관점─관념론자 대 유물론자─을 존재하게 하였다. 보편성의 본질에 관한 두 번째 근본 개념은 유(類), 종(種) 또는 속(屬)에서 공통 특성을 공유하는 현상의 추상적 동일성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오로지 개체만이 존재론적 지위를 지닌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는 중세의 유명론자들, 근대의 영국 경험주의, 그리고 분석철학 사조와 관련된 현대철학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적 상식으로서 널리 퍼져 있는 이 두 번째 해석은 스토아주의에 그 철학적 뿌리를 두고 있다. 스토아학파 존재론의 핵심적인 견해는 항상 특수자로서의 사물인 신체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30 결과적으로 보편적인 형상들은 플라톤이 주장한 바와 같은 분유를 이루는 객관 세계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개별 사물 내부에도 실존하지 않는다; 이 사상에서 그러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스토아학파는 보편성을 귀납적 일반화31를 통해 얻은 “편리한 표현”, “언어적 편의” 또는 “허구”32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언어를 보편의 유일한 전달자로 본 중세 유명론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 관점은 존 로크가 보편을 정신에 의해 관찰된 사물의 유사성에 기초한 이해의 창조물 또는 발명으로 정의─이로써 개별 사물 부류를 지칭하는 명칭에 의존하여 우리가 연상하는 추상적 보편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내는 식─하였을 때 영국 고전 경험주의에서 정점에 이르렀다.33 우리가 “추상적 보편”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자격은<7> 보편에 대한 이러한 해석─그 주요 특징이 추상화의 주관적 조작으로써 달성된 개체 간의 일반적 동일성인─을 지칭하기 위함에 근거한다. 이 정의는 로크의 관념론적 반대자인 버클리와 흄에 의해 변함없이 유지되었으며, 그것은 앵글로-색슨 철학의 전통에 너무나 깊게 스며들었으므로, 구체적인 것과 반대되는 추상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하며 구체적인 것을 특수한 것과 동의어로 간주하는 것은 현대 앵글로-색슨 철학 주창자들에게서 특징적인 것으로 된다.34
그러나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최초의 보편 개념은 그와 상당히 달랐다. 이 개념은 보편적인 것을 주관적 조작(추상)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 현상의 발전 근저에 실존하는 객관적인 질서 또는 “로고스(logos)”, 원리, “원질(arche)”이라고 파악한다. 자연의 장엄한 전개와 수다한 현상의 통일성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물질적 원리를 찾는 것이 소크라테스 이전 유물론의 주요 과제였다. 그것을 숨기고자 하는 관념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35,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또는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고대 유물론자들은 이 보편적 원리를 순수 사고의 영역이나 자연 밖에서 찾으려고 애쓰지 않았으며, 반대로 그것을 자연 내부에서, 물질 그 자체 속에서 찾고자 하였다.36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자(apeiron)는 점진적인 분화를 향한 내재적인 모순적(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모든 물질적 사물의 다양성이 생겨나게 하는 발생론적으로 미분화된 물질적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17 아낙시만드로스의 학설이 추측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현대 의학은 매우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대상, 즉 줄기 세포에서 그 “무한자”를 발견하였다. 상대적으로 미분화된 이러한 세포는 뇌, 근육 및 혈세포와 나란히 존재할 수 있는 실지 특수한 것으로서의 세포이다. 실제로는, 그것들은 뼈나 피부와 매우 다른 단일 세포이지만, (뇌, 뼈, 피부를 포함한) 우리 조직을 구성하는 다른 종류의 세포로 변형할 수 있는 보편적인 잠재력을 지녔다. 그러므로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배아줄기세포를 공통된 형질로서의 포괄적 추상(generic abstraction)으로 지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그것을 공통 조상으로서 함유(연계)한다. 여기서 보편성은 단순히 포괄적(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부자(父子)형의 발생론적 공동체(구체적 결합)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리옌코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도형 일반” 개념에 대한 헤겔의 『철학사 강의』의 잘 알려진 구절을 자주 인용한다:
“그래서 헤겔은 여기서 변증법적 사고(그의 용어로는 “사변적”)와 순수 형식적인 사고의 분기점을 발견하였다. … “마찬가지로 도형 중에서 삼각형과 사각형, 평행사변형 등과 같은 일정한 형태를 가지는 도형만이 진정한 도형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공통적인 것, 즉 보편적인 형상[혹은 “도형 일반”; E. V. Ilyenkov]은 공허한 사고의 산물이고 단순한 추상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삼각형은 가장 단순하게 규정될 수 있는 도형으로서 장차 사각형 등으로 나타나는 최초의 참된 보편적 도형이다. 그러므로 특수한 도형으로서 삼각형은 또다른 한편으로는 사각형, 오각형 등과 나란히 존재하지만, 진정으로 보편적인 도형[또는 “도형 일반”; E. V. Ilyenkov]이다─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주장의 요지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공허한 보편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혹은 그 자체로 종(種)도 아니다. 모든 보편적인 것은 더이상의 변화가 없을 때는 즉자적으로 최초의 종을 이루지만, 보다 발전할 때는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더 높은 단계에 속하게 된다는 점에서 사실상 실재한다.””38
<8>추상적 보편과 대립되는 이러한 구체적 보편의 발생론적 통일성은 [추상적]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 대립, 특히 모순으로써 성취된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자기 자손들과 더불어 계속 존속하는 공통 조상의 속성 중에서 그 자체와 대립하는 어떤 것을 낳을 수 있는 능력, 즉 (그 자신과 관련하여) 키 큰 후손과 (역시 그 자신과 관련하여) 키 작은 후손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해야 한다.”39 실제로, 공기(가벼움, 동적)가 흙(무거움, 정적)의 대립물인 것처럼 물(습함, 차가움)은 불(건조함, 뜨거움)을 직접적으로 부정한다; 그러나 탈레스가 모든 것(불을 포함하여)이 물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아낙시메네스는 모든 것(흙을 포함하여)이 공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40 추상적 동일성은 정적인 유사성이다; 구체적 보편성은 역동적인 대립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형태의 통일성은 모든 유기적(내재적, 필연적) 상호작용의 전개에 적용된다. 반대로, 고전적인 뉴턴의 개념에서 신체 간의 상호작용은 일반적으로 다소 우연적이고 우발적인(외재적) 사건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류의 (외재적) 상호작용의 전형적인 예는 당구대에 당구공이 충돌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외부 에이전트에 의해 작동된 당구공은 당구공으로서의 미래에 관한 어떠한 고려도 없이 1000분의 1초 동안 만나 각자의 작별 인사를 한다. 두 규정은 서로를 필연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기체와 같은 구체적인 총체성의 발달 과정은 또다른 매우 다른 류의 상호작용으로써 움직여진다. 만약 손이 팔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즉, 잘려 나가면), 작별을 고한 손은 머지않아 썩어 사라진다. 기관 간 상호작용은 항상 상호 보완적 관계로 발생한다. 폐는 심장이 할 수 없는 것─혈액을 공급하므로 심장은 폐를 필요로 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떠한 개인적인 관계나 연애 관계이든지 무관하게, 각각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똑같은 일련의 지식, 습관, 성향 등을 갖고 있는 절대적으로 동등한 두 개인은 서로 절대적으로 무관심할 것이며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죽도록 지겹게 여길 것이다. 이들에게는 단지 배가된 고독이 있을 뿐이다.”41 성적 결합에서 교미는 두 가지 상보적인 것의 대립─암수를 전제로 한다; 심지어 동성애자들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결핍)을 파트너에게서 찾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반대되는 전제의 연인 사이의 이러한 변증법적(내재적) 상호작용은 흔히 화학적 끌림이라고 알려진 “화학 반응”이다.
“이전에는 동일했던 두 개의 화학 입자가 하나의 분자로 “고정”되면 각 입자의 구조가 특정한 변화를 겪는다. 실지 분자에 결합한 두 입자 각각은 다른 입자에 자체적인 상보성을 지닌다: 매 순간 가장 바깥 껍질의 전자를 교환하며, 이러한 상호 교환은 두 입자를 하나로서의 전체로 결합한다. 각각 주어진 순간에 전자(또는 전자들)가 다른 입자 내에 있으므로 그 입자들 각각은 상대 입자를 향해 끌어당겨지는데, 바로 이 명백한 이유로 하여 옮겨진 그 전자는 결합된 특정한 입자에서 다른 쪽으로 옮겨간 전자이다. 끊임없이 발생하고 사멸하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서는 응집력과 상호작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겪는 것은 일정 정도의 우연한 외부 접촉이다.”42
여기서 보편은 전적으로 물질적인 관계, 즉 자연사적 과정에 내재한 상호작용의 객관적인 형태이다. 플라톤 학설에서, 그리고 전에 존재했던<9> 신비주의적인 피타고라스학파에서까지도 이 객관적 보편의 원리는 물질적인 것에서 관념적인 영역으로 바뀌어 전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플라톤이 보편을 정신적 작용의 결과로 생각했거나 개체의 속성들 사이의 유사성이나 범속한 평균으로 생각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플라톤에 의하면 “보편적인 형상은 하위의 종을 규정하는 모든 구체적인 차이를 배제하여 얻은 단순한 추상물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것이 포함하고 포괄하는 어떠한 부분보다 내용이 더 풍부하다고 생각되어야 한다.”43 실제 플라톤적 형상들은 관념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그것들은 진정으로 보편적이므로 구체적(현실적이고 풍부하며 복잡한 총체들)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물질과 구체, 또는 추상과 관념을 올바르게 일축한다. 개념(사고의 보편성)은 일련의 현상(종류, 집합, 집적체)에서 반복되는 어떠한 미지의 이유에 관한 추상적인 집합이 아니라 이론적 관계의 총체, 그것이 “관여하는” 특수한 사례보다 더 많은 “내용”을 가진 관념적 결정들(ideal determinations)의 구체적 총체이다. 이것이 바로 엥겔스가 “운동 형태 변화의 일반법칙은 그에 관한 어떤 단일한 “구체적인” 예보다 훨씬 더 구체적”44이라고 즐겨 말한 이유이다. 관념은 [단지] 개인 정신의 산물이 아니며, 개인 단위의 분석(심리학적 또는 생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므로 관념의 객관성을 주장한 플라톤의 견해 또한 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플라톤과 헤겔은 사회역사적으로 발전된 관념을 물질적 실재를 형성하며 그것에 앞서 실존하는 영원한 “절대” 원리로 여긴 데서 그릇되었다. 다시 말해, 객관적 관념론은 관념 형식을 인간이 만든 객관적인 표현─보편적인 물질적 발전 형태에 대응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대신, 그것을 자연의 구체적인 보편성의 원천으로 본다. 이러한 전도에서 “이념”, “개념”은 물질적 실재의 주요 원인이자 궁극적 목적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헤겔에 의하면 “자연은 시간적으로 먼저 온다. 그러나 절대적인 심급은 이념이다. 이 절대적인 심급은 마지막이자 진정한 시작점이며 알파요 오메가이다.”45 즉 “이념”─헤겔이 인간 지식을 신화화한 것─은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는, 유일하게 능동적이고 보편적인 원리, 자연의 “알파”, 자연의 “진정한 시작점”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목적인 “오메가”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정신은 자연의 거울, 즉 “타자”를 통해서만 자신을 인식할 수 있으므로 물질로부터 자신을 소외(물화)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관념론자가 자신의 교리를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의 철학이라고 허풍칠 때 그는 실제로 사유와 사유의 동일성을 말하고 있다.46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관념론은 인간 활동, 특히 탁월성에 따른 사회적 활동, 즉 노동의 승화일 뿐이며, 그것은 의도와 목적론으로써 자연에 “마술을 건다.” 노동은 자연법칙에 근거하면서 우리 의지의 인장을 자연에 각인시키는 목적 있는 활동이다. 노동은 의식적인 계획에 의거해 맹목적인 자연 과정에 직면한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제2의 자연─자연 자체로는(즉, 인간의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결코 나타날 수 없는 비자연적(문화적, 인공적) 대상의 복잡하고 환원 불가능한 체계를 생산한다.
그러나 관념론적 환상의 원천인 노동의 이러한 창조적(변증법적) 성격이 자연에 역사적, 모순적, 능동적 특성이 결여해 있음을 암시─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단언했듯이─하는가? 인간의 “실천”이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와 헤겔의 세계정신을 대체하여<10> 빈약한 물질 자체가 결핍한 능동적인 보편적 원리를 자연에 주입하는 역할을 하는가? 구체적 보편성 개념을 다루면서 이미 이 견해의 허위를 보았지만, 우리는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을 더 깊이 고려한 후에야 이러한 질문에 대한 더 완전한 답을 제공할 수 있다.
3. 상호작용, 변증법 그리고 관념론의 자연 목적론의 참뜻
자연을 변증법으로부터 소외시키려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시도는 자연의 본질적인 역사적 발전을 부정한다. 자연이 스스로를 체계적으로 조직한다는 사실은 그의 시대에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으므로 거만한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조차도 이를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총체성은 생성하는 총체성이 아니라 역사가 없는 구조이며 외재성이 그 법칙이기 때문에 그러한 체계는 실제로 변증법적이지 않다. 따라서 변증법을 자연으로 옮기는 체할 때 소멸하는 것은 변증법의 명료성이다.”47
문제를 가능한 한 예리하게 제기해 보도록 하겠다: 엥겔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은 역사적 실재48인가, 아니면 단지 수동적이고 본질적으로 정적인 영역인가? 구체적 보편에 대한 유물론적 해명을 통해 우리는 자연이 새로운 존재 형태를 생산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자연은 생성과 변화의 과정(즉, 시간적으로 확장된 상호작용)으로써 운동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역사적 발전에 관해 말할 자격이 있는가? 실제로 이 질문은 적절한 것이다. 역사는 단지 “이전”, “이후”, “동시적”이라는 일시적인 외적 연결 외에는 다른 어떠한 관계도 없이 각 구성 요소가 나란히 놓여 있는 임의의 연속적인 변화가 아니다;49 그것은 상대적인 진행, 즉 낮은 형태에서 그보다 높은 형태로의 전개로서, 단순한 단계에서 그보다 복잡한 단계로의 방향 있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유물론자들조차 구체적 보편을 변화의 원리뿐만이 아니라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생성하는 원리, 즉 발전과 진화의 원리로 파악했다.50 일반적으로 부족 공동체는 단지 과거 사회의 구성체일 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생산양식에 비해 덜 발전된 사회 구성체이기도 하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배아 발달, 생명체의 진화, 또는 전 우주의 진화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51 여기서 후자는 단지 은유적 표현에 불과한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참된 역사적 과정들인가?
왜 이 질문은 중요한가? 관념론의 목적론은 모든 방향 있는 과정에 의식적인 합목적성이 있음을 강변한다. 그래서 헤겔은 “목적은 기계론은 화학론을 거쳐 세 번째 것으로 등장했다; 이것이 그것들의 진리”52라고 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11> 우주적 정신을 거부하면서도 모든 역사적 과정이 의식적인 계획이나 ‘기획’에 의해 인도된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변증법적 발전은 인류사와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자연사물의 한 특징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53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실천”은 자연에 형상(“총체성”)을 침투시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처럼 불활성 질료를 움직이게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인간의 (사회적) 삶을 그런 (목적론적인) 방식으로 형성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 적어도 중요한 행동에는 어떠한 목적이 있다. 이는 개인뿐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류에게도 적용된다.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세계를 창조하는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활동인 노동은 의식적인 계획이나 설계가 물질적 실현, 즉 그 산물의 앞서 이루어지는 의식적이고 목적론적인 과정이다.54 그러므로 노동의 물질적 산물(결과)은 관념적이고 의식적인 목적, 그리고 활동에 방향을 제시하는 계획, 설계의 “타자-내-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바로 모든 유물론이 인간 외의 자연을 다룰 때는 원리적으로 부정되는 것이다. 실제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연에서는 (우리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을 도외시하는 한) 다만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힘이 상호작용하며 일반적인 법칙은 이러한 힘의 상호작용 가운데서 발현한다. 자연에서는 어디서나 즉 표면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외견상의 우연적 현상에서나 이러한 우연성 현상 내부에 있는 합법칙성을 확증하는 종국적인 결과에서나 의식적인 것으로 기대되는 목적이 없다.”55
엥겔스에게 목적론적 설명은 자연 현상의 풀리지 않는 의문에 관한 적절한 과학적 설명이 없음을 뜻할 뿐이다.56 그러나 이것이 엥겔스의 입장이라면 왜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의 입장이 범신론이나 물활론에 속한다고 비난하는가? 그것은 바로 엥겔스가 자연을 능동적 과정의 역사적 영역, 즉 환원될 수 없는 단순한 형태의 상호작용에서 그보다 높은─더 복잡하고 질서 있으며, 다면적인─형태의 존재를 창조하는 내재적 능력을 지닌 체계들의 체계라 여겼다는 데에 있다.57 객관적 관념론의 관점은 열등한 형태에서 그보다 우월한 형태로의 자발적인 전환(예를 들면, 무생물에서 생명체로)은 그 유명한 ex nihilo nihil fit(무로부터 그 어떠한 것도 나올 수 없다)를 기적적으로 거스르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마법사의 물에서 술이나 단물이 나오지는 않는 것처럼, 인간은 물론이고 세균을 파생시킬 수 있는 화학적 또는 물리적 상호작용에는 예수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것과 같은, 살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관념론의 관점에서] 이러한 발전은, 장인이 빚은 진흙으로써 항아리의 모형이 드러나듯이, 생명이 없는 물질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는 의식적인 설계로서의 개념 형태에 감춰져 있던 것이라고 추측함이 타당하다. 항아리의<12> 각 부분에는 목적이 있다─항아리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잠시 멈춰 생각해 보았는가? 손잡이는 항아리를 다루기 위해 있는 것이고, 받침대의 밑부분은 항아리를 세우기 위해 있는 것이며, 항아리 상단을 둘러싼 가장자리는 [다른] 병으로 향하는 액체 내용물을 보존하기 위해 존재한다. 당신은 진흙 웅덩이─금속 조각, 유리 덩어리, 플라스틱, 나무 등─를 관찰하면서 영원히 앉아서 기다릴 수 있으며, 그것은 결코 항아리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항아리만이 아니라 유기체 또한 무작위적(맹목적이며 경로가 유도되지 않은)인 부분들의 조합 산물이 아니다. 여기에도 의도적인 계획에 따라 우리 몸을 형성하는 지적인 존재의 개입이 필요한 듯이 보인다. 설계자의 개입 없이 이마의 땀이 눈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도록 설계된 우리의 눈썹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사실, 이러한 준의도적 기능을 제공하는 더 높은(단지 새로운 것이 아닌) 형태의 운동 및 조직의 자발적인 발현을 설명할 수 없는 그 무능력은 신비주의적 관념론이 이익을 얻게 하는 기계적 유물론의 아킬레스건이다.
“지적 설계론 지지자들은 자연계의 많은 특징, 특히 생물학적 구조가 자연주의적 원인들로 설명되기에는 너무 복잡하므로 그것들은 지적 설계자, 즉 신의 산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티븐 찰스 메이어(Stephen Charles Meyer)는 … DNA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나 “나노테크놀로지의 진보된 형태”와 같으며, 프로그래머가 그러한 복잡한 “프로그램”을 수행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 이러한 지적 설계론자들은 다윈과 진화론을 주요 타격 대상으로 설정하고, 수많은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서 지적 설계자나 신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입증하려 시도하며, 그렇게 하여 생물학적 발달에 관한 유물론적 해명으로서의 진화론이 틀렸음을 보여주려 한다.”58
고대에서 이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사이에서 뜨거운 논의 주제로 되었다.59 모든 것─살아 있는 유기체를 포함하여─을 원자의 자발적이고 우연한 결합의 결과라고 믿었던 에피쿠로스학파와는 정반대로, 스토아학파는 자연에 관해 섭리적이고 목적론적인 설명을 도입했다. 스토아학파에서 신의 마음은 신성한(완전히 이성적인) 계획에 따라, 온 세상에 스며들어 그것에 명령하는 활동적인 본체이다. “그들에게서 세계는 운동하는 물질의 계획되지 않은 우연으로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물질에 활력을 주고 조직함으로써 의도하고 성취하는 신성의 체계적인 계획의 결과이다.”60 스토아적 개념 내에서 이 보편적인 신적 이성은 모든 자연사물에 목적을 부여하는 섭리적 설계자의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신성한(완전히 이성적인) 설계가 스토아학파가 지닌 숙명론의 기초였다. 스토아학파는 “보편적 결정론의 구조에서 숙명(숙명론, 운명)─모든 것은 사전에 결정되어 있으며, 우발성, 운 그리고 우연적 사건의 가능성은 없다”61고 하였다.
스토아학파의 비타협적인 결정론과는 달리 엥겔스는 우연에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했다. 그는 자연 속에서 우연과 필연이 서로 상호 전환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필연은 항상 우연을 통해 표현된다.62 이러한 개념에서 자연법칙은 순수한 형태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경향, 즉 현실의 변환 과정의 불완전한 규칙으로서 발생한다. 우리가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규칙은 역사, 즉 우연한 것이 필연적인 것으로 변화되어 나가는 역사를 함유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나중에<13> 보편적인 것으로 되는 현상이 처음에는 규칙에 대한 개별적인 예외, 변칙, 특정하고 부분적인 것으로서 명백히 나타났다. 다른 방식으로는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발생할 수 없다.”63 다시 말해, 규칙적인 것과 불규칙적인 것,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은 끊임없이 상호 전화하는 상대적인 원리이다.
엥겔스의 개념은 자연에 대한 신적 설계를 부정하고 우연의 객관성을 인정하며 상호작용을 강조하므로 스토아학파보다는 에피쿠로스학파64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점에서도 중요한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 “[생명]과 정신은 세계의 기초가 아니라 특정 유형의 원자 복합체의 창발적 속성”65인 반면, 엥겔스의 경우 이는 전체로 간주되는 자연의 양도될 수 없는(필연적인) 속성이다.66 실제로, 18세기 형이상학적 유물론이 목적론을 거부하는 것 역시 사유하는 뇌의 출현과 같은 자연의 발전이 단계적으로, 인과적으로 결정되더라도 [형이상학적 유물론자들에게 그것은] 순수한 우발적 사건임을 뜻할 뿐이었다.67 그러므로 엥겔스는 무진한 순환에서 조금의 변화도 없는 “영원한 회귀(everlasting recurrence)”68라는 스토아학파의 개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정신이 자연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단순한(소모성) 사건이 아니라 내재적이고 필연적인 속성임을 승인할 때는 스토아학파의 편에 선다.69 이는 정신이 세계의 각 부분에 존재해야 한다는 뜻─범신론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자연이 필연적으로 시공간의 임의 지점에서 정신을 생성해야 한다는 뜻이다.70 그러나 이 “필연성”은 정확히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새로우며 전보다 복잡한 형태로서 물질 조직의 출현은 어떻게 우연이 아니라 “철의 필연성”으로서 출현하는가? 게다가 이것은 어떻게 하여 그 어떠한 지적인 인도자의 개입 없이 실현될 수 있었는가?
변증법적 사고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상호작용의 범주에서 찾는다─“상호작용이야말로 사물의 참된 목적인이다.”71 당구공과 잘린 손의 예에서 보았듯이, 상호작용은 다름이 아니라 구체적인 총체성의 내부 상호작용으로서만 이러한 (변증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구체적 보편에 관한 헤겔의 변증법적 개념에서 이러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72 그러나 상호작용의 변증법적 함의에 관한 헤겔의 통찰은 그의 관념론에 은폐되었다. 그에게 상호작용은 물질 자체의 활동일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로 개념, 판단 및 추론의 운동으로 간주된다.52
<14>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은 목적론의 신비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어떠한 주어진 발전 단계(어떤 상황이든)가 마치 “배아”처럼 객관적으로 규정되고 따라서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미래를 그 자체 내에 포함한다는 사실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제공되었다.”74 자연─즉, 지적인 개입이 없는─에서 이는 독특한 발전의 하위 체계로서, 전 단계의 상호작용 형태를 종속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의 출현으로써 수행된다. 새로우며 보다 높은 형태의 상호작용은 비록 그것이 언제라도 가장 낮은 수준의 실재를 [자기 발생의] 전제조건으로 가지더라도,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과정으로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널리 확산해 나간다. 예컨대 일리옌코프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생명의 세포인 시원 단백질체는 화학적 과정의 산물로서 어떠한 생물학적 과정과도 전혀 무관하게 출현할 뿐만이 아니라, 화학 체계상에서도 극도로 불안정한 산물이다. … 그러나 모든 생물체 내부에는 외부에서 유입되는 물질을 즉각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변형하는 유기체 자체와 같은, 조건의 필연적인 조합이 존재하지만, 살아있는 단백질 분자는 그것의 외부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화학적 환경이 생성한다.”75
구체적인 역사적 과정에서 새로우며 보다 높은 형태의 상호작용은 항상 그 전의 과정에 의해 생성된 특정한 전제조건에 기초하여 출현한다. 그러나 새로운 형태의 형성은 전제조건의 수동적 결과로 남아 있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자신의 실존 수단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조건의 적극적인 생산자로 된다. 이런 방식으로써, 물질 조직의 전보다 높은 형태는 자발적으로 그 전제조건 사이의 상호작용의 목표인 목적(end)으로 자신을 변형할 수 있다. 이 지점에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자연에 관한 목적론적 개념이 신비화하고 오도한 것의 실지 모습─구체적으로 보편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원인을 결과로, 결과를 원인으로 변환하는 변증법적 “뒤틀림”이 있다.
“환경은 외부에서 생명체에게 부과되는 구조가 아니라, 사실 생명체들의 창조물이다. 환경은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종의 생물학적 체계를 반영하는 과정이다. 환경 없이 유기체가 없듯이, 유기체 없이 환경도 없다. … 유기체는 자신의 양분을 규정할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기후를 형성한다. … 유기체는 자신의 지속적인 존립에 필요한 자원의 소비자이자 생산자이다. … 유기체가 만들어 내는 가장 강력한 환경 변화는 대기의 가스 구성이다. 80%의 질소, 18%의 산소, 미량의 이산화탄소로 구성된 지구 대기는 화학적으로 불안정하다. 만약 평형 상태(equilibrium)에 도달하게 된다면 산소와 질소는 사라지고 화성과 금성의 경우처럼 대기는 거의 모두 이산화탄소로 될 것이다. 광합성을 통해 산소를 생산하고, 퇴적암에 이산화탄소를 탄산염 형태로 고정해 이산화탄소를 고갈시키는 것은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오늘날의 육상 생물종은 산소가 풍부하고 이산화탄소가 부족한 대기에서 생존하고자 하는 강력한 선택압을 받고 있지만, 그 대사 문제는 20억 년 전에 걸친 진화로써 형성된 생명체 자체의 활동으로 인해 발생했던 것으로, 초기 대사 세포가 직면했던 문제와는 상당히 다르다.”76
<15>첫째로, 보다 높은 수준의 발전은 물질 운동 형태의 (이전) 수준 내 규칙에 대한 예외로 되는 변칙으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추가적인 과정은 이러한 형태의 상호작용이 잠재적으로 지배적이고, 또 잠재적으로 보편적인 것에서 실제로 지배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변형하는 과정으로 관찰된다.”74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은 어떻게 하여 단순히 우연하고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진정으로 보편적인 형태로 되는가?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은] 자신의 조건을 생산하고 재생산함으로써, 그 구성 요소의 논리적 기능을 자기 내로 통합하고 종속시킨다. 이러한 과정에서 변증법적으로 발현한 체계의 부분들은 그것의 “계기들”, 즉 그들에게 독특한 역할을 부여하는 구체적인 총체의 추상적인 측면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특수한 현상을 해명한다는 것은 그 현상의 발생, 발전 및 사멸의 법칙을 규정하는 총체성 하에서 그 현상의 특정한 지위나 기능을 정의하는 것을 뜻한다.
보다 높은 형태의 상호작용의 규정된 기능 논리는 해당 작용 양식을 이루는 구성 요소 각각의 논리로 축소될 수 없다. 사회는 인간으로 구성된다; 생물로서 그들은 세포로 구성되며, 세포는 분자로 구성되고, 이것들은 다시 원자로 구성된다. 그러나 세포나 분자, 아원자 입자를 고려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개개인을 각각 개별적으로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각 수준의 물질 조직 형태는 각 상위 형태에 통합되고 종속되는 고유한 (특정) 기능 논리를 지닌다. 우리는 뉴턴 역학의 도움으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해명할 수 있다: “망치가 벽의 벽돌을 치는 순간 부여된 운동량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그 사회역사적 사건을 그러한 묘사로 해명할 수 있는가? 물론 뉴턴 역학이 없거나 심지어 중력이 없다면 벽은 전혀 무너질 수 없지만, 여기서 이러한 자연법칙은 규정적인 사회역사적 과정의 아래에서 단지 종속적인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적 사건을 이해하려면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가 아니라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역사를 학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경생리학적 환원주의가 사고라는 현상을 해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언젠가 우리는 분명 사고를 실험적으로 뇌의 분자 및 화학적 운동으로 ‘환원’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고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해소할 수 있을까?”78 인간의 사고, 관념─물질적 상호작용의 보다 높은 형태는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파악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과정, 즉 사물의 형태가 주체의 활동이라는 형태로 변형되고(주체화), 반대로 주체의 활동 형태가 사물의 형태로 변형되는(객체화) 인간 활동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뇌는 관념이 발현하기 위한 전제일 뿐 관념의 원인은 아니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물질적(생리학적) 과정이 관념 그 자체가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고 현상은 전사(前史)로부터 안정적이고 고도로 발달한 유기체의 자연적 형성을 요구한다. 물론 이 “전사” 역시 개체, 즉 개체발생과 종─계통발생 모두의 순전히 자연적인(발달, 진화) 과정의 결과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적 형성은 사고의 출현을 위한 절대적인 sine qua non79(필수적이지만 구체는 아닌)이다. 이것은 발생의 가능성을 제공하나, 충분한(구체적인) 원인은 제공하지 않는다. 사고의 발생에서 필수로<16>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전제조건으로서의] 자연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즉 노동의 사회적으로 매개된 실천적(물질적) 상호작용의 결과이다.80 사고는 이러한 활동과 융합된 것처럼 보이거나, 더 엄밀하게는 처음에는 그러한 실천적인 활동일 뿐이며, 사고의 본래 형태는 실천적인 사유이다.81 그러나 이것이 흥미로운 부분인데, 노동 기관으로서 우리의 신체 기관은 변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지 않는다. 일단 신체 기관이 노동 활동의 기관으로 편제되면 뇌를 포함한 우리 신체 전체가 인간의 신체, 인간의 뇌로 되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82 여기에서도 조건이 산물로 전화한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신체에 작용을 가하기 위해 자기 신체를 필요로 하지만, 이 활동은 외부 신체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신체도 형태변화(변형)시킨다. 일상적인 모든 수동 작업을 위한 손을 자유로이 하는 직립 자세조차도 자연스러운(선천적, 종에 따라[순수 유전학적 요소에 따라] 결정되는) 형성이 아니라 출산 중 여성에게 추가적인 고통과 어려움이라는 (생물학적) 비용을 수반하는 문화적으로(비자연적인) 규정된 자세이다.83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는 사고를 만들어 내는 것은 뇌가 아닌데; 여기서 사고는 반대로 인간 두뇌를 생산한다.
요컨대, 어떤 구체적인 발전 과정에서든 새로운 형태 형성의 발생에 필요한 제 조건은 다시 그 결과가 된다. 보다 높은 발현 형태는 자신을, 자기 발전 기관으로서 기능하는 자체 논리에 통합된 조건들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차별화된 자기 조절 실체로서 “두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조건 지어지는 것에서 조건 짓는 것으로, 결과에서 원인으로, 특수에서 보편으로의 “이 변증법적 “전환”은 내부 상호작용의 특징적인 표시이며, 덕분에 실제 발전은 원(圓), 더 정확하게는 나선형의 형태를 취하며 새로운 전환마다 그 자체 운동이 점점 더 큰 규모로 확장된다.”84
결론
환원주의는 외재적으로(표면적으로) 서로 상호작용하는 부분들의 집합을 넘어서는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 변증법은 전체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종속된(조건적) 형태의 법칙, 목표, 목적으로 확립되는 역사적(방향적) 발전의 구체적 총체성을 파악한다. 결과와 원인, 인과성과 합목적성, 객체와 주체 사이의 이러한 quid pro quo[주고 받는 것]에 물질의 “영리함”에 관한 비밀이 있다.
구체적 보편성은 역사적 발전의 총체 내부 및 사이의 내부 상호작용 형태이다. 이러한 총체성의 보편적 성격은 개체들 사이 유사성이라는 추상적 동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성되는 과정의 실재적-발생론적 연결에 있다. 그러한 자연 과정의 ‘목표’는 그 자체로 구체적인 보편성을 실현하는 형태, 즉 자신의 발전 수단으로서 자신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재생산하는 변증법적 상호작용의 내재적이고 특징적인 법칙으로 제시된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 헤겔의 “세계정신”으로써 우주 형태의 활동 원리를 신격화하는 목적론적 개념으로 신비화된 실상이 이 지점에 놓여 있다. 더 나아가 여기에는 일관성 없는(예컨대, 서구 마르크스주의의)<17> “유물론”이 간과한 근본적인 사실도 있다. 그러나 실상을 신비롭게 표현하는 것이 실상을 단순히 무시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알튀세르, 슈미트, 사르트르와 같은 우둔한 “유물론자”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과 같은 고도로 총명한 관념론자에게서 더 많은 유물론을 발견한다.<끝>
번역: 한동백 | 집행위원
2024년 7월 9일
- V. I. Lenin, “Philosophical Notebooks”, Collected Works, Vol. 38,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6, 274.
- F. Engels, “Socialism: Utopian and Scientific”, Selected Works, Vol. 3,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6, 97-9.
- H. Laycock, “Theories of Matter”, Mass Terms: Some Philosophical Problems, ed. F. J. Pelletier, Dordrecht: Springer Netherlands, 1979, 91.
- B. Clark, J. B. Foster & R. York, “The critique of intelligent design: Epicurus, Marx, Darwin, and Freud and the materialist defense of science”, Theor Soc, 2007, 36; 6.
- B. G. Kuznetsov, “The Dialectics of Nature and Dialectics in Capital”, Soviet Studies in Philosophy, 10; 1, 52.
- F. M. Cornford, Before and after Socrat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6, 16-7.
- C. G. Jung, Man and his Symbols, New York: Anchor Press, 1988, 95.
- E. V. Ilyenkov, “Dialectical Logic”, The Ideal in Human Activity, Pacifica, CA: Marxist Internet Archive, 2009, 15.
- F. Engels, “Ludwig Feuerbach and the End of Classical German Philosophy”, Collected Works, Vol. 26,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90, 370.
- “『티마이오스』의 목적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서 전개된 목적론과 유효하게 비교될 수 있다. 이 비교로써 즉각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자연을 초월하는 목적적, 설계적 원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기체의 형성과 자연계의 구조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은 자연(즉, 유기체나 구조의 본성 또는 “형식”) 자체에 내재되어 있음을 승인한다. 목적에 조응하여 행동하는 것은 신성한 장인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이다. 그러한 내재적 목적론은 플라톤에게는 선택 사항이 아니었을 것이다.” (D. Zeyl & B. Sattler, “Plato’s Timaeus”,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19.)
- G. W. F. Hegel, The Science of Logic,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394-5. 형상-질료의 관계에 관한 헤겔의 견해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은 G. Lukács, Ontology of the Social Being, Vol. 1, London: Merlin Press, 1978, 92-3.을 참고하라.
- The Science of Logic, 393.
- 이는 플라톤과 스토아 학파를 겨냥한 에피쿠로스의 도발적인 질문─“왜 신은 세상을 창조하기로 선택한 것인가?”─에 대한 헤겔의 대답으로 된다.
- Ibid., 395.
-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가 인용한 헤겔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자석에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 그것에 인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낫다; [뉴턴의] 힘은 물질과 분리되어 술어로 제시되는 일종의 속성인 반면, [헤겔의] 영혼은 물질의 본성과 동일한 이 운동 그 자체이다.” (F. Engels, “Dialectics of Nature”, Collected Works, Vol. 25,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87, 558.)
- The Science of Logic, 388.
- Loc. cit.
- 이에 관해서는 P. R. Arencibia, “Marxismo y dialéctica de la naturaleza”, Marxism and Dialectics of Nature, Second Edition, Quito: Edithor, 2019.를 참고하라.
- G. Lukács,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Cambridge, MA; The MIT Press, 1971. 24.
- “사실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엥겔스의 철학적 유산에 대한 단호한 이중(二重)의 거부─『마르크스주의와 철학』,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각각 코르쉬와 루카치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후 엥겔스의 후기 저작에 대한 혐오감은 사르트르에서 콜레티, 알튀세르에서 마르쿠제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흐름에서 공통으로 나타났다.” (P. Anderson, Consideration on Western Marxism, London: Verso, 1989, 60.)
- “자연의 변증법이 그 자체로부터 작용한다는 관념은 … 필연적으로 ‘자연-주체(nature-Subject)’라는 범신론적-물활론적 개념으로 이어져야 하며, 따라서 자연스레 그것은 유물론적 입장을 폐기하게 된다.” (A. Schmidt, The Concept of Nature in Marx, London: NLB, 1971, 59.) 또한 L. Kolakowski, Main Currents of Marxism, Vol. 1,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406.을 참고하라.
- L. Althusser, Philosophy of the Encounter: Later Writings, 1978-87, London: Verso, 2006, 261-2.
- Ibid., 260.
- The Science of Logic, 392.
- F. M. Cornford, Plato's Cosmology,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Company, 1997, 37.; W. K. C. Guthrie, 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Vol. 5,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1978, 271-80.
-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발생과 성장의 다양성은 궁극적인 원동자의 실재에 근거하며, 각 사물이 자신의 형상, 즉 선(善)을 실현하는 것은 자체의 방식으로써 신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265.)
- “정신의 창조자─절대자, ‘세계정신’─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같은 방식으로써 자기의 외적인 현상을 점점 더 자신과 비슷하게 만들어 나간다.” (E. V. Ilyenkov, Intelligent Materialism: Essays on Hegel and Dialectics, ed. E. V. Pavlov, Leiden: Brill, 2018, 128.)
- Philosophy of the Encounter: Later Writings, 1978-87, 265.
- “이율배반은 논리학의 종합 범주 도식 중 정확히 절반을 폐기하고, 각 쌍을 이루는 한쪽의 범주를 타당하고 올바른 것으로 인식하면서, 다른 범주를 과학의 무기고에서 활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이 한 가지 방법으로만 제거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낡은 형이상학의 방식이었다. … 이는 헤겔이 나중에 이 사고방식을 형이상학적이라고 지적했던 이유이다. 사실 그것은 모든 정당한 사유 범우의 절반, 객관적 의미를 지닌 판단 도식의 절반을 무시함으로써 [자기 체계의] 내부 모순에 벗어나려는 칸트 이전 형이상학의 특징이었다.” (“Dialectical Logic”, The Ideal in Human Activity, 62.)
- D. N. Sedley, “The Stoic theory of universals”, The Southern Journal of Philosophy of the Social Sciences, Vol. 23, 1985, 87.; J. Sellars, “Stoic Ontology and Plato's Sophist”, Bulletin of the Insititute of Classical Studies, Vol. 54, 2011, 184.
- “The Stoic theory of universals”, The Southern Journal of Philosophy of the Social Sciences, Vol. 23, 89.
- A. A. Long & D. N. Sedley, The Hellenistic philosophers, Vol. 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181-2.
- J. Locke, Ensayo sobre el entendimiento humano, México: Fondo de Cultura Económica, 2005, 404-5.
- W. V. O. Quine, Word and Object, Cambridge: The MIT Press, 2013, 215.
- The Science of Logic, 124.
- P. Curd, “Presocratic Philosophy”,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19.
- Loc. cit.
- “Dialectical Logic”, The Ideal in Human Activity, 201.
- Ibid., 200.
- “Presocratic Philosophy”,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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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 V. Iliénkov, La dialéctica de lo abstracto y lo concreto en "El Capital" de Marx, Quito: Edithor, 2017,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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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lectics of Nature”, Collected Works, Vol. 25, 503.
- G. W. F. Hegel, Philosophy of Nature, Vol. 1, London: Humanities Press, 1970, 211.
- “Dialectical Logic”, The Ideal in Human Activity, 209.
- J. -P. Sartre, “Dialectics and Science”, Man and World, 9 (1), 71.
- “Dialectics of Nature”, Collected Works, Vol. 25, 556.
- “카드 한 벌을 계속해서 섞으면 카드 순서가 계속 바뀌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카드의 랜덤 시퀀스는 다른 카드와 매우 유사하며, 카드를 열거하는 것 외에는 그 카드 묶음의 연속적인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예컨대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진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연속적인 혼돈 상태만이 존재한다는 데에 있는데, 반대로 진화 과정에서는 새로운 조직 상태가 생겨나야만 한다.” (R. Lewontin & R. Levins, The Dialectical Biologist, Delhi: Aakar Books, 2009, 12.)
- “당시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에서 인간 배아는 초기 물고기와 유사한 생물체의 몸 안에서 자라나 나중에 완전한 형태의 남자와 여자로 분화했다고 여겨졌다. 그의 설명은 모든 생명체가 태양열에 의해 작용하는 습한 점액체를 그 기원으로 가졌다는 가설에서 출발해 진행되며, 이는 대립물들의 상호작용에 의한 우주 진화의 특정 단계에 불과하다.” (W. K. C. Guthrie, 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Vol. 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19.)
- “그러므로 팽창 우주론은 방향성이 있는 반면, 또한 본래의 고유한 사건으로 인한 물질의 우연한 축적이 중력과 전자기력에 의해 영구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역사적 내용도 지닌다.” (The Dialectical Biologist, 19.)
- The Science of Logic, 656.
- J. -P. Sartre, Critique of Dialectical Reason, Vol. 1, London: Verso, 2004, 182-3.
- “거미는 직포공이 하는 일과 유사한 일을 하며 꿀벌의 벌집은 많은 인간 건축가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툰 건축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과 처음부터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은, 그가 벌집을 납(蠟)으로 짓기 전에 그것을 벌써 자기의 머릿속에 짓는다는 사실이다. 노동과정의 시초에 벌써 노동자의 머릿속에 즉 관념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결과는 노동과정의 마지막에 이르러 나타난다. 노동자는 기존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동시에 기존 자연물에 자기의 의식적인 목적을 실현하는데, 그 목적은 법칙으로써 그의 행동방식과 성격을 규정하며 또 그는 자기의 의지를 그 목적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K. Marx, “Capital Volume I”, Collected Works, Vol. 35, London: Lawrence & Wishart, 2010, 188.)
- “Ludwig Feuerbach and the End of Classical German Philosophy”, Collected Works, Vol. 26, 387.
- “Dialectics of Nature”, Collected Works, Vol. 25, 323.
- “물질의 존재 양식, 고유한 속성으로 이해되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운동은 단순한 장소 변화부터 사유에 이르기까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와 과정을 포괄한다.” (Ibid., 362.)
- “The critique of intelligent design: Epicurus, Marx, Darwin, and Freud and the materialist defense of science”, Theor Soc, 516.
- The Hellenistic philosophers, Vol. 1, 57-65.
- A. A. Long, “Evolution vs. Intelligent Design in Classical Antiquity”, Townsend Center Newsletter, Nov. 2006.
- J. A. Cardona, Filosofía helenística: Estoicos, epicúreos, cínicos y escépticos, Madrid: Batiscafo, 2015, 59.
- “Dialectics of Nature”, Collected Works, Vol. 25, 498-501.
- “Dialectical Logic”, The Ideal in Human Activity, 213.
- “[에피쿠로스는] 세계의 목적론적 개념에 대한 강력한 유물론적 대안을 제공하는 창발적 조직의 우연성과 복잡성에 대한 강조를 결합했다.” (“The critique of intelligent design: Epicurus, Marx, Darwin, and Freud and the materialist defense of science”, Theor Soc, 525.)
- “Evolution vs. Intelligent Design in Classical Antiquity”, Townsend Center Newsletter.
- “우리는 물질이 그 모든 전화에서도 영원히 똑같이 남을 것이며, 그 속성의 아무것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지구 위에서 그 최고의 창조물, 사고하는 정신을 근절할 똑같은 철의 필연성으로 물질은 다른 곳에서 또다른 시간에 다시 그것을 산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다.” (“Dialectics of Nature”, Collected Works, Vol. 25, 335.)
- Ibid., 490.
- 이러한 사상은 전 우주가 계속해서 동일한 (이성적) 법칙에 따라 본질적인 구조를 매번 재구성하며 반복하면서 스스로를 재추동하는 파괴-창조의 순환 과정을 뜻한다. “현재 세계의 질서는 태양에 의해 촉발된 전체의 혼돈으로 끝날 것이지만, 혼돈이 가라앉으면 다시 재구성될 것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 우주는 우리 자신이 그 일부인 질서 있는 체계와 순수한 불의 상태, 즉 크리시포스의 흥미로운 표현에 따르면 ‘빛’의 상태 사이를 영원히 번갈아 가며 순환하는 과정이다.” (The Hellenistic philosophers, Vol. 1, 278.)
- 이 주제에 관해서는 일리옌코프의 우주론에 대한 엥겔스의 영향을 다룬 R. P. Arencibia, “Ilyenkov’s Dialectics of the Ideal and Engels’s Dialectics of Nature: On Ilyenkov’s Supposed Affinity with Western Marxism”, Historical Materialism, 29 (2), 2021, 15-9.를 참고하라.
- “Dialectics of Nature”, Collected Works, Vol. 25, 334-5.
- Ibid., 512.
- Ontology of the Social Being, Vol. 1, 93-4.
- The Science of Logic, 656.
- Intelligent Materialism: Essays on Hegel and Dialectics, 206.
- Ibid., 193.
- The Dialectical Biologist, 99-100.
- Intelligent Materialism: Essays on Hegel and Dialectics, 206.
- “Dialectics of Nature”, Collected Works, Vol. 25, 527.
- 〔역자 주〕 특정한 현상에 필요 불가결한 것을 뜻하는 라틴어 용어.
- 이 부분에 관해선 R. P. Arencibia, “El papel del trabajo en el desarrollo del pensamiento humano”, Hybris, 9 (2), 173-206.를 참고하라.
- L. S. Vygotsky, “Tool and Sign in the Development of the Child”, ed. R. W. Rieber, Collected Works, Vol. 6, New York: Plenum Publishers, 1999, 5.
- “Dialectics of Nature”, Collected Works, Vol. 25, 452-6.
- T. Grant & A. Woods, “Reason in Revolt”, Dialectical Philosophy and Modern Science, Vol. 2, New York: Algora Publishing, 2003, 60.
- La dialéctica de lo abstracto y lo concreto en "El Capital" de Marx,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