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β.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개념사(槪念史)로부터
첼파노프에 의해 공유된 추상적 개념의 정의는 [과거] 크리스티안 볼프가 확실하게 정식화하였다. 볼프에 따르면, 추상 개념은 사물들로부터 정신적으로 고립된, 그리고 어떤 독립적인 대상으로서 표현된, 사물의 성질들, 관계들 그리고 상태들을 그것의 내용으로 한다.1
단, 볼프가 본래의 출처는 아니다. 그는 단지 중세 스콜라 철학의 논리학 논문에서 나타난 견해를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사물들의 성질들과 관계들을 나타내는 모든 이름/개념(그들은 개념으로부터 이름을 구별하지 않았다)을 추상이라고 불렀고, 반면에 사물들의 이름은 구체라고 불렀다.2
이 용법은 본래 단순히 어원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라틴어에서 ‘구체(concretus)’는 단순히 ‘섞인’, ‘융합된’, ‘합성물’, 복합체를 뜻한다; 반면에 라틴어에서 ‘추상(abstractus)’은 ‘인출된’, ‘꺼내진’, ‘추출된’ (혹은 ‘고립된’), 또는 ‘떼어 놓인’을 뜻한다. 이것이 이 단어들의 원래의 어원적 뜻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이다. 그 외에는 그것들을 통해 표현되는 철학적 개념에 속하는 것이다.
중세의 실재론(實在論)과 유명론(唯名論)의 대립은 ‘추상’과 ‘구체’라는 단어의 직접적인 어원학적 뜻과 연관되지 않는다. 유명론자들과 실재론자들 모두 ‘구체’라는 용어를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직접적으로 관찰되는 ‘사물들’, 개별적 대상들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다. 반면에 ‘추상’이라는 용어는 그것들의 일반적 ‘형상들’을 가리키거나 표현하는 모든 개념과 이름에 적용된다. 그 차이는 유명론자들은 이름이 단지 개별적인 구체적 사물의 주관적 지칭이라고 믿고 있는 반면에, 실재론자들은 이러한 추상적인 이름들이 자체의 존재를 개별적인 사물들을 창조하는 신적 권능과 상응하는 신적 이성의 자궁이나 원형들 속에 가지고 있는 영원하며 불변하는 ‘형상들’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의 특징이며 특수하게는 실재론에서 명확히 표현되는, 감각적으로 지각된 사물들의 세계와 ‘육체’에 대한 경멸은 추상적인 것─육체, 감수성으로부터 떼어 내어진, 순수한 인식─은 구체적인 것보다 (윤리적 및 인식론적 차원 모두에서)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실을 규정한다.
여기에서 구체적인 것은 감각적으로 지각된 것, 개별적인 것, 육체적인 것, 세속적인 것, 일시적인 것(‘복합물’이며 따라서 해체되고, 소멸할 예정인 것)과 완전한 동의어이다. 추상적인 것은 영원한 것, 불멸하는 것, 불가분한 것, 신에 의해 도입된 것, 보편적인 것, 절대적인 것 등과 동의어이다. 개별적인 ‘둥근 형체’는 사라질 것이지만, ‘둥근 형체’ 일반은 영원히 형상으로서, 새로운 둥근 형체들을 창조하는 목적론적 완전현실태(entelechy)로서 존재한다. 구체적인 것은 일시적인, 정의하기 어려운,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추상적인 것은 불변토록 존재하며, 본질을, 즉 세계가 건축되는 보이지 않는 체계를 구성한다.
이것은 훗날 헤겔이 신랄하게 조롱한, 추상에 대한 골동품적인 면의 밑바닥에 있는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스콜라적인 개념이다.
16-17세기에 유물론 철학이 자연과학과 동맹을 형성하면서,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범주를 재해석한 결과로써 종교적 및 스콜라적 세계관의 기초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 용어들의 직접적인 뜻은 그대로였다: ‘구체’라는 용어는 스콜라적 교리 똑같이 개별적인, 감각적으로 지각된 사물들과 그들의 생생한 상들(images)인 반면, ‘추상’이라는 용어는 이 대상들의 일반적 형태들과 용어들, 명칭들, 숫자들에서 표현되는 이 대상들의 불변적으로 되풀이되는 속성들 및 법칙의 지배를 받는 관계들을 말할 때 사용된다. 그러나 이 범주들의 철학적-이론적 내용은 그 스콜라적 내용의 대립물이 되었다. 사람에게 감각적 경험 속에서 주어진 것인 구체적인 것은 오직 주목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실재로서 이해되기에 이르렀고, 추상은 단지 그 실재에 대한 주관적인 심리적 환영에 불과한 것, 실재의 빈약한 정신적 스키마(schema:체계)로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추상적인 것은 감각 경험적 자료를 단어들과 상징들로 표현한 것, 구체적인 것의 기호적 서술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나 자연과학과 유물론 철학의 첫 단계에서 특징적인,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관계에 관한 이러한 해석은 자연적-역사적 연구의 실제와 모순되는 상태에 빠졌다. 16-18세기의 자연과학과 유물론 철학은 더욱더 기계론적 입장을 향한 경향성을 가졌는데, 이것은 시간적 및 공간적 특징들과 추상적인 기하학적 형식들만이 대상들과 현상들의 객관적인 질들과 관계들로서 인식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그 외의 것은 단지 사람의 감각 기관들이 만들어낸 주관적인 환상으로 보였다.
다시 말해서, ‘구체적인’ 모든 것은 인간이 지닌 감각 기관들의 활동 결과물로서, 주관의 특정한 심리-물리학적 상태로서, 무색의 추상적인 기하학적 원본에 주관적으로 색깔을 입인 복사물로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인식의 중심적 과제도 또한 새롭게 조명되었다: 진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감각적으로 지각된 대상들의 상 위에서 감각에 의해 덧붙여진 모든 색깔을 제거하거나 씻어내야 했고, 추상적인 기하학적 뼈대, 도식을 드러내야 했다.
이리하여 구체적인 것은 주관적 환상으로, 즉 의식 외부의 대상은 어떤 완전히 추상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반면, [구체적인 것은] 단지 감각기관들의 특정한 상태로 해석되었다.
이로 하여 얻어진 구상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의식 외부에는 동일한, 영원한, 그리고 불변적인 추상적인 수학적 도식들에 따라 결합된 영속적이며 불변하는 기하학적 입자들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반면, 구체적인 것은 오직 주관 속에 추상적인 기하학적 조각물들의 감각 지각의 형태로만 있다. 그러므로 공식은 [다음과 같다]: 진리로 가는 유일한 올바른 방법은 오직 구체적인 것─불합리한 것, 거짓된 것, 주관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물체들을 구성하기 위한 영속적 및 불변적 도식의 표현으로서─으로 날아 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16-18세기의 철학에서 강력한 유명론적 편견을 규정한다. 어떤 개념도 수학적인 것을 제외한다면, 기억을 돕고 경험의 다양한 자료들을 질서 지우며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기 위한 역할 등을 하는 단지 인공적으로 창조된 기호, 명칭일 뿐인 것으로 파악된다.
그 시대의 주관적 관념론자들인 조지 버클리와 데이비드 흄은 직접적으로 개념들을 명칭들, 지시들, 관습적인 기호나 상징들로 환원시키며, 일련의 감각적 인상들의 어떤 공통성, 경험의 공통 요소를 제외한, 그 너머의 그 어떤 내용을 찾는 것도 그들이 보기에 어리석을 것이다. 이 경향은 특히 영국에서 확고히 뿌리내리게 되었고 여전히 신실증주의 개념들의 형태로서 스스로 연명해 나가고 있다.
이 접근방식의 약점은, 그것의 완전한 형태가 주관적 관념론자들에게 특징적이지만, 그 시대의 많은 유물론자에게도 특징적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눈에 띄는 것은 존 로크의 연구들이다. 홉스와 엘베시우스도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들의 연구에서 이 접근방식은 그들의 유물론적 입장들을 근본적으로 모호하게 하는 경향으로서 나타났다.
극단적으로 가면, 이 견해는 논리적 범주들이 심리학적 및 심지어는 언어적, 문법적인 범주로 해체되는 결과는 낳는다. 결과적으로 엘베시우스는 추상의 방법을 “우리의 기억 속에 수많은 양의 대상을 고정”3하는 수단으로서 그것을 정의한다. 그는 ‘단어들의 남용’을 가장 중요한 오류의 원인으로 간주한다.4 홉스도 비슷한 논증 방식을 따른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참된 논리적 추론을 말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빚지고 있다; 그러므로 또한 그들은 그들의 오류들을 같은 것[말]에 대한 오해에 빚지고 있다.”5
외적 세계의 이성적 인식이 자료에 대한 순전히 양적인, 수학적인 처리 과정으로 환원되었고,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감각적 상들의 질서 지우기와 언어적(verbal) 기록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에, 논리학의 공간은 자연스레, 한편으로는 수학에, 다른 한편으로는 용어들과 명제들의 결합과 분리에 대한 과학, 즉 사람들에 의해 창조된 용어들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한 과학에 침탈당했다.
이렇게 개념을 단어와 용어로, 그리고 사고를 우리가 스스로 창조한 단어들을 올바르게 사용할 능력으로 유명론적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유물론적 원리 자체를 약화시킨다. 이러한 견해의 고전적 대표자이자 창시자인 로크는 이미 실체의 개념이 단지 ‘경험 속의 일반적인 것’, ‘가능한 가장 보편적인 것’, 개별적 사물들로부터의 추상으로서 설명될 수도, 정당화될 수도 없음을 발견했다. 자연스레 버클리는 유물론과 바로 그 실체 개념에 맞서서 개념 형성에 대한 로크의 이론을 사용하여 이 틈으로 돌진했다. 그는 그것[실체]이 의미없는 명칭이라고 선언했다. 철학의 기본적 개념들에 대한 그의 분석을 계속하면서, 흄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개별적 대상들 및 현상들로부터, 즉 구체적인 것로부터 추상하는 것은 대상들 자체의 동일성보다는 사물들을 인식하는 주관의 심리-물리학적 구조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편이 더 좋으므로, 인과성과 같은 그러한 개념의 객관적 성격 또한 그것이 ‘경험 속의 일반적인 것’을 표현했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는 입증될 수도, 확인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개념을 단지 개별적 현상들 및 지각들로부터 추상한 것으로 환원하는 개념에 대한 편협한 경험 이론은 오직 이성적 인식의 피상적인 심리학적 측면들만을 반영했다. 외견상으로는, 사고는 정말로 개별적 사물들로부터 ‘동일한’ 것을 추상하는 것으로, 점점 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추상들로 상승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가장 중요한 지점인 보편적 개념들의 객관적 진리의 문제를 회피하는 정반대의 대립적인 철학적 개념에도 동일하게 봉사할 수 있다.
일관된 유물론자들은 개념에 대한 유명론적 견해의 약점, 관념론적 사변들과 오류들에 대한 그것의 취약성을 깨달았다. 스피노자는 ‘자연의 제1원리’를 표현하는 실체 개념이 “추상적 혹은 보편적으로 인식되거나, 그것이 실재에서도 그러한 것보다 이해에서 더 확장될 수 없음”6을 강조했다.
스피노자의 저작들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념이 있다—그것은 명칭들과 용어들로 서술된 감각적으로 주어진 복합물로부터 만든 단순한 “보편들”, 단순한 추상물들은 모호한 이미지적 인식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과학적인, ‘참된 관념들’은 그런 방식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물들의 차이들, 일치들, 및 대립들”의 성립은 이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무질서한 경험”의 양식이다. “더욱이 [지각 양식의; 편집자] 결과는 매우 불화실하며 무규정적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로써 자연 현상에서 우연한 속성을 발견하는 것을 빼고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며, 우연한 속성은 문제로 되는 사물의 본질이 먼저 인식되지 않은 한에서 결코 명확하게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7
첫째로, 보편적인 것들을 형성하는 “무질서한 경험”은 절대 완성될 수 없으므로, 어떤 새로운 사실이 그 추상적인 것을 폐기하도록 만들 수 있다. 둘째로, 그것은 그 주어진 보편적인 것이 단지 주관적 허구가 아니라 대상들의 진짜 보편적 형태를 실제로 표현한다는 보장이 없다.
“무질서한 경험”과 경험적 개념들로 그것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과는 반대로, 스피노자는 엄격하게 확정된 원리들과 ‘어떤 사물에 적합한 본질’을 표현하는 개념들에 기초한 더 고차적인 인식의 양식을 설정한다. 이것은 더 이상 감각적 소여의 복합체로부터 추상한 것들, ‘보편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어떻게 형성되고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 점에 대한 설명은 종종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이러한 관념들(원리들, 보편적 개념들)은 인류의 지식에 선험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직관이나 자기반성 행위로써 인출된다. 이러한 설명에서 스피노자의 입장은 라이프니츠나 칸트의 설명과 아주 같은 것이 되며 유물론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하지만 실상은 모두가 다소 다르며, 사실에 있어서 아주 다르다. 스피노자가 다루는 사고는 사람 개인의 사고가 전혀 아니다. 이 개념은 그의 이론에서 개별적 의식의 모델을 본따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전체로서 정신적-이론적 문화, 인류의 이론적 자기의식에 기원한다. 개별적 의식은 여기에서 오직 사물들의 본성과 일치하는 사고인 이러한 사고를 체현하는 한에서만 고려되고 있다. 어떤 한 개별적 지성은 필연적으로 이성의 관념들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어떤 자기 숙고도 그것이 아무리 철저할지라도 그 속에서는 그것들[이성의 이념들]을 발견할 수 없다.
그것들은 그것 자신의 완벽성을 목적으로 하는 이성의 지칠 줄 모르는 노동을 통해 오직 점진적으로만 인간 지성 속에서 성숙하고 확실해진다. 이러한 개념들은 이러한 종류의 노동으로써 발전되지 않는 지성에 대해 전혀 자기-확신적이지 않다. 그 개념들은 그러한 지성 속에서는 정말로 부재하다. 전체로서 취해진 합리적 지식만이, 그것이 발전하면서, 그러한 개념들을 도출한다. 스피노자는 물질적 노동의 도구들이 지닌 완전성의 비유를 통해 이러한 견해를 확고하게 주장한다.
“‘진리를 찾는 방법’이 고려되는 한, 문제는 물질적 도구들을 만드는 것과 같은 지반 위에 서 있다. … 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망치가 필요하고, 그리고 망치는 철이 만들어지지 않고서는 마련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또 다른 망치 및 다른 도구들의 필요가 있었고, 그리고 등등 무한히.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철을 만들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헛되이 노력할지도 모른다.8 … 하지만 인간은 처음에는 아주 간단한 제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제공된 도구들을 어렵고 불완전하게 이용하며, 그 후에, 이것들이 완료되면, 더 적은 노동과 훨씬 더 향상된 완벽성으로 더 어려운 다른 사물들을 작업하였다. … 따라서, 이러한 방식으로, 지성은, 자신의 타고난 힘으로, 스스로 지성의 도구들을 만들고, 그것에 의해 다른 지적인 작업을 수행할 힘을 획득하며, 이러한 작업들로부터 다시 새로운 도구를 얻거나 혹은 그것의 탐구를 더 밀고 갈 힘을 얻으며, 그리고 작업은 이렇게 그것이 지혜의 정점에 도달할 때까지 점차적으로 진행된다.9”
어떠한 식의 해석이든 막론하고, 이 주장은 직관의 더 고차적인 관념들이 직접적으로 지성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데카르트의 견해나, 이러한 관념들이 대리석의 무늬와 같은 것이라는 라이프니츠의 견해와 유사한 게 될 수 없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것들은 매우 특수한 의미—사람의 손이 본래 ‘본성적 도구’인 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본성적으로, 즉 본성으로부터 물려받은 지적 능력들인—에서 타고난 것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의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사람의 본성적 기관에서 그것을 연역함으로써, ‘지성적 도구들’의 선천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유물론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스피노자가 파악에 실패한 것은 ‘지성적 도구들’이 본래 본성의 산물들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 노동의 산물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것들이 본성의 산물들이라고 생각했고, 이 점에서, 그리고 오직 이 점만이, 그의 관점에서 약점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 약점은 심지어 포이어바흐도 공유한다. 이 약점은 전혀 관념론적 동요라고 간주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모든 낡은 유물론 고유의 단점일 뿐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합리주의는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합리주의로부터 철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그의 주장은 사람의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명확하게 유물론적 방식으로 해석된 실체로부터 해석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하나의 사유를 하나의 속성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확히 이것을 뜻한다: 실체의 본질은 단지 연장으로만 환원되어서는 안 되고; 사유도 연장이 속하는 바로 그 자연에 속한다—그것[사유]은 마치 연장과 물질성과 마찬가지로 자연(혹은 실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은 한 속성이다. 이것은 분리된 채 생각될 수 없다.
이것이 정확히 스콜라학파들, 기회원인론자들 및 유명론적 경험주의자들이 실체를 설명하기를 시도하는 방식인, ‘추상적 보편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적 입장의 원인이 된 관점이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구체적 존재로부터 추상적 보편으로 가는 방식을 수준 낮다고 평가한 이유이다. 이러한 방식은 실체의 문제를 푸는데 무용하며, 항상 스콜라적 및 종교적 해석을 위한 틈을 남긴다.
스피노자는 정당하게도 구체적 존재에서 텅 빈 보편으로 나아가는 방식, 구체적인 것을 텅 빈 추상물로 환원함으로써 설명하는 방식이 과학적 입장에서는 거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존재가 더 일반적이라고 생각될수록, 그것은 더욱 혼란스럽게 생각되고, 그것은 주어진 대상에 더욱 쉽게 귀속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것이 더욱 특수하다고 생각될수록, 그것은 더욱 명확히 이해되고, 자연의 섭리를 소홀히 대함으로써 그것의 합당한 대상 외의 다른 것에 귀속될 가능성이 줄어든다.”10
이 관점이 사물들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본질이 탐구 중에 놓여 있는 사물들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본질로부터 떠나 점점 더 일반적으로 되고 공허해진 추상물들로 규칙적으로 상승하는 데 있음을 주장하는 협소한 경험주의의 견해보다 훨씬 더 진리에 가까움을 깨닫기 위해서 다른 어떤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방식은 모호함에서 명확함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목표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성적 인식의 방식은 정확히 그 반대이다. 그것은 명확하게 수립된 일반적 원리들(그러나 전혀 추상적 보편이 아닌)로 시작하고 사물의 특수한 속성들을 그것의 보편적 원인(궁극적으로 실체로부터)으로부터 연역하는 추론을 통하여 어떤 사물에 대한 단계적인 정신적 재생산을 진행한다. 단순한 추상적 보편과는 구별되는 참된 관념은 그것에 따라 그 사물의 직접적으로 관찰 가능한 모든 속성들을 설명할 수 있는 필연성을 담지 해야 한다. 다른 어떤 속성도 추론할 수 없는 다소 우연적인 속성 중 하나를 반영한다.
스피노자는 그의 이 개념을 기하학의 예시—원의 본질에 관한 정의—를 인용함으로써 설명한다. 우리가 “원의 중심에서 원의 둘레까지 이은 모든 직선이 동일한” 도형으로서 원을 규정할 때, “누구나 그런 규정은 원의 본질을 조금도 설명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그것의 속성 중 하나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올바른 방식의 규정에 따르면, 원은 “한끝이 고정되어 있고 다른 끝이 움직이는 어떤 직선에 의해 그려지는 도형”이다. 이는 사물의 기원 형태와 “가장 근접한 원인”에 대한 이해를 가리키며, 따라서 그것의 정신적 재생산 형태를 포함하는 이 규정은 위에서 지적된 것을 포함하여 그것[원]의 모든 다른 속성들을 연역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11
따라서 우리는 ‘보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그 사물의 실제적, 현실적 원인, 그것의 구체적 본질을 표현하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 스피노자의 방법의 골자가 있는 것이다.
“ … 우리는 절대로, 우리가 실제적 사물들에 대한 탐구와 관련되어 있을 때는, 추상으로부터 어떠한 결론도 이끌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이해 속에 있는 것과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을 헛갈리지 않게 극도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12
진리로 나아가는 것은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의 환원’이나 구체를 보편 안에 포함함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적인 보편적 원인에서 특수한 성질들을 연역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스피노자는 두 가지 종류의 일반적 이념들을 구분한다: 공통 관념(notiones communes), 어떤 사물의 기원이 되는 진실로 보편적인 원인을 표현하는 개념들, 그리고 많은 개별적 사물의 단순 유사성이나 차이들을 표현하는 더 단순한 추상적 보편들, 일반적 보편 관념(notiones generalis universales). 전자는 실체를 포함하지만, 후자는, 예를 들어, 일반적 존재를 포함한다.
존재하는 것의 일반적 ‘보편’을 내세워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완전히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스콜라 철학자들의 우둔한 집착이기도 했다. 가장 좋지 않은 것은 추상들에서—‘보편으로부터’—삼단논법의 형식적 규칙에 따라 사물들의 속성들을 연역하는 것이다.
사물의 모든 특수한 속성들의 발생과정 전체를 공통 관념으로써 지성 속에서 표현된 실제 보편적 원인과 같은 것에서 이끌어 내어 연구하고 정신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연역’은 전적으로 자연, 즉 ‘실체’로부터 한 사물의 발생의 실재 과정을 지성 속에서 재현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연역은 삼단논법의 규칙에 따라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기준’, 일치의 기준, 즉 사유와 연장의 통일, 지성과 외적 세계의 통일에 따라 수행된다.
스피노자의 개념의 약점들을 여기에서 논의하는 것은, 그것들이 이미 익히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사유와 대상적 실천 활동 간의 연관, 이론과 실천과의 연관, 구체적 개념에 대한 진리의 유일한 객관적 준거로서 실천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 형식적 견지에서 스피노자의 견해는, 당연히도, 로크의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고 진리에 가까운 것이다.
로크의 이론은 그 어떤 본질적인 변경 없이도 단지 그의 명제들을 해석함으로써 쉽게 버클리나 흄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으로 된다. 스피노자의 입장은 원리적으로 그러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대 실증주의자들이 로크에게는 때때로 공손하게 머리를 숙일 가치가 있다고 하는 반면에, 이 이론[스피노자의 것]을 ‘순전한 형이상학’이라고 낙인찍는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다.
스피노자의 자연 개념과 구체적 보편 개념들의 형식적 구성(이것은 그의 용어인 공통 관념을 표현하는 데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보인다)은, 단순한 추상적 보편들과는 대립하기 때문에, 변증법에 대한 천재적인 선취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면, 그러한 개념의 전형적이고 원리적인 예시인, ‘실체’ 개념은 명백히 상호 배제하면서도 동시에 상호 전제하는 두 가지 정의의 통일을 보여준다.
실체의 발현 방식으로서 두 가지 속성과 양태인 사유와 연장은 추상적-일반자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으며 그것들은 또한 그러한 종류의 것과 어떠한 공통점도 가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사유의 부분에 대한 정의와 외적 세계(‘연장된 세계’)의 부분을 동시에 구성하는 그 어떤 추상적 특징도 있을 수 없다.
그러한 특징은 외적 세계와 사유의 정의보다 더욱 광범위한 보편일 것이다. 그러한 특징은 사유의 본성 및 연장의 본성과도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성 밖의 실재적인 그 어떤 것도 반영하지 못할 것이다. 스콜라 철학에서 특징적인 ‘신’ 개념은 정확히 그러한 특징들로 주조되었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연장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 모두가 그 모두에 공통적인 특징, 중간적 용어로서 관념과 사물 사이를 중재하는 일반적 요소인 “신 속에서 숙고”를 이룬다. 그리고 사유와 연장 간의 그러한 공통 요소─추상적 보편이라는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은 그것들의 근원적인 통일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신은 사유를 더한 자연, 대립물의 통일, 두 속성의 통일과 동일하다. 하지만 이 경우 전통적인 신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신이라고 불리는 것은 실제로 사유를 본질의 한 측면으로 하는, 전체로서 연장된 자연이다. 오직 전체로서 자연만이 사고를 그것의 속성,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속성으로 포함한다. 분리된, 연장된 세계의 제한된 영역은 이 속성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특정한 양태로서 돌멩이는 전혀 ‘사유’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실체’의 부분을 형성하며, 그것은 그것의 양태, 조각이다—그리고 그것[돌멩이]은, 이를테면, 인간 신체의 조각을 형성하는 적합한 구조의 일부를 형성한다면 사고할지도 모른다.13
그러나, 인간 지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유물론적 견해를 갖춘 이러한 스피노자의 변증법에 대한 천재적인 선취는 17세기 및 18세기의 형이상학적 사고의 일반적 조류 속에서 묻히고 잠겼다. 유명론에 치우친 로크적 추상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시대의 자연 및 사회과학에 더 적합한 것으로 판명 났다. 스피노자적 변증법의 합리적 핵심은 오직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독일고전철학에서 수면 위로 드러났으며, 오직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유물론적 기초 위에서 발전되었다.
인식에 대해 주관적 관념론적 관점에 기초해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원리들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한 임마누엘 칸트는 개념들을 모든 경우에서 변치 않게 두 가지 종류로, 즉 추상과 구체로 나누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각각의 개념은 그것이 다른 개념들과의 연결과 용법의 밖에서 고려된다면, 칸트가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이] 추상인지 아닌지 묻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칸트는 그의 『논리학』에서 “추상과 구체라는 표현은 그 개념들 그 자체를 지칭한다기보다는─모든 개념은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에─그것들의 용법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용법은 다시 상이한 등급들을 가질 수 있다; [그 등급들은] 어떤 한 개념을 더 추상적(혹은 구체적)으로 혹은 덜 추상적(혹은 구체적)으로 다루느냐, 즉 그 개념에 더 많은 정의들(혹은 더 적은 정의들)을 첨가하느냐 혹은 그 개념에서 더 많은 정의들(혹은 더 적은 정의들)을 제거하느냐에 따른다.”14고 썼다.
칸트에 따르면, 개념이 개별적인 어떤 것의 텅 빈 명칭, 이름이 아니라 정말로 개념이려면, 항상 일반적인 어떤 것, 사물의 포괄적 내지 특수적 명확성을 표현하며, 따라서 그것이 실체이건 분필이건, 흰색이건 미덕이건 간에 언제나 추상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그 어떤 개념이든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그것의 수많은 특징들을 통해서 ‘그 자체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한 특징/정의들이 하나의 개념에 더 많이 추가될수록, 칸트의 관점에서, 개념은 더 구체적인 게 되며, 즉 더 명확하고, 규정들로 더욱 풍부해진다. 개념이 더욱 구체적일수록, 그것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개별적인 사물들을 더 가득하게 특징짓는다. 어떤 개념이 ‘보다 상위종’에 포함됨에 의해, ‘논리적 추상’에 의해 정의된다면, 그것은 추상적으로 사용된 것; 즉 그 개념은 더 방대한 수의 개별적 사물들과 종들에 적용될 수 있지만, 그 구성에서 규정들의 수는 더 적어진다.
“추상 용법을 통해서 개념은 보다 상위 종에 접근하고, 구체 용법을 통해서는, 반대로, 개별적인 것에 접근한다. … 매우 추상적인 개념들로써 우리는 많은 사물을 대하지만 그것들에 관한 적은 앎만을 가진다; 매우 구체적인 개념들로써 우리는 보다 적은 사물을 대하지만 더 많은 앎을 가진다;—따라서 우리가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다.”15
그러므로 구체성의 한계는 감각적으로 관찰된 개별적 사물, 개별적 현상이다. 그러나, 개념은 이 한계에 절대 도달할 수 없다. 반면에 가장 상위의, 가장 추상적 개념도 그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그렇게 그 개념을 파괴하는 것 없이는, (궁극적인 정의를 만들어 냄으로써는) 파괴할 수 없는 상이한 규정들의 일정한 종합, 통일을 항상 그 자체의 구성에 포함한다. 이러한 이유로 최상위의 종개념일지라도 일정 정도의 구체성을 가진다.
여기에서 경험론적 경향, 로크적 전통이 드러난다. 그러나 칸트는 그것과 “한 개념의 정의들에 대한 종합”의 본성에 관한 지극히 합리주의적 견해를 결합하였다. 개념 내의 규정들의 이 종합 혹은 결합(즉, 개념의 구체성)은 단순히 감각적으로 주어진 현상들의 경험적 복합성에 기인할 수 없다. 이론의 중요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 종합은 다른 원리—규정들을 선험적으로, 감각경험과는 독립적으로 결합시키는 능력—에 기초해야 한다. 따라서 개념의 구체성(즉, 다양성의 통일, 보편적 및 필연적 의미를 가진 상이한 정의들의 통일)은 칸트에 의해 본래적 통일, 통각의 선험적 통일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되는 인간 의식의 본성으로부터 설명되고 연역된다. 이 후자는 정확히 개념의 구체성의 진정한 토대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개념의 구체성은 ‘물자체’, 감각적으로 주어진 구체성과는 그 어떤 확실한 연관도 가지고 있지 않다.
헤겔 역시, 추상성이 어떤 개념도 절대 그것의 규정들로서는 감각적으로 관찰된 실재를 그것의 총체성 속에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로 해석된다면, 모든 개념은 추상적이라고 생각했다. 헤겔은 이러한 의미에서 밀이나 중세 유명론보다는 로크에 훨씬 가까웠다. 그는 항상 개념들의 규정들이 어떤 일반적인 것의 표현을 포함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았다. 개념들이 항상 단어들 속에 체현되어 있고, 그리고 단어들은 항상 추상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항상 일반적인 어떤 것을 표현하며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것 및 고유한 것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추상적으로 사고하며, 그 사고는 그 개념들이 사용하는 규정들이 빈약할수록 더욱 추상적이다. 추상적 사고는 결코 미덕이 아니라, 오히려, 결함이다. 이것이 모든 요점—구체적으로 사고하는 것, 즉 추상들을 통해서 단지 상이한 사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것, 단순한 공통성이 아니라 사물들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본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헤겔에 의해 다양성 속의 통일, 서로 차이를 가지고 대립하는 규정들의 통일, 주어진 특정한 대상 내의 유기적 연관 및 대상의 추상적 규정들의 종합에 대한 정신적 표현으로서 설명되었다.
추상적인 것에 관해 말하자면, 헤겔은 그것을 (로크가 그렇게 했지만, 밀이나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은) 그것이 집이나 흰색, 사람이나 가치, 개나 미덕이든 간에 단어와 개념, 수많은 대상 서로 간의 단순한 동일성으로 해석했다.
‘집’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의미에서 ‘친절’이라는 개념과 전혀 다르지 않다. 둘 다 그 규정들 속에 전체 개별적 사물들, 현상들, 심적 상태들의 부류, 시리즈, 종, 목에 내재하는 공통적인 요소들을 나타내고 있다.
헤겔에 따르면, 만약 어떤 단어, 용어, 상징, 명칭이 단지 개별적 사물들, 현상들 및 의식의 이미지들에 불과한 것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아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추상적 관념 일반(notion) 내지는 표상(Vorstellung), 경험적 지식 및 의식의 감각적 단계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이 사이비 개념은 항상 그것의 뜻에 있어서 특정한 감각적으로 주어진 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념에 관해 말하자면, 개념들은 단지 일반적인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의 통일성 속에서 파악된 부분들의 풍부함을 내포하는 일반적인 것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진정한 개념은 추상적인 것만이 아니라(물론, 헤겔은 그것[진정한 개념 또한 추상적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구체적인데, 그것은 그것의 규정들(낡은 논리학이 특징들이라고 부르는)이 그것 내에서, 즉 문법 규칙에 따라 단순히 결합된 것일 뿐인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통일을 표현하는 단일한 복합체 내에서 결합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개념의 구체성은, 헤겔에 따르면, 규정들의 통일 속에, 개념의 맥락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인 그것들의 유의미한 응집력 속에 있다. 맥락을 벗어나서는, 개별적인 언어적 규정은 추상적이며 오직 추상적일 뿐이다. 과학적 이론 논의의 맥락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어떤 추상적 규정도 구체적인 것으로 전변한다.
고립되어 받아들여진 개개의 추상적 규정들의 진정한 뜻과 맥락은 같은 부류의 다른 규정들과 그것들의 연관들에 의해서, 추상적 규정들의 구체적 통일에 의해서 드러난다. 따라서 어떤 사안의 구체적 본질은 항상 추상적 ‘규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해당하는 대상의 모든 필수적 규정들을 그것들의 상호 연관 속에서 펼쳐냄으로써 표현된다.
헤겔에 따르면, 이것이 왜 개념이 고립된 단어, 용어, 혹은 상징으로서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가 된다. 개념은 오직 어떤 명제에서 전개되는 과정에, 각각의 규정들의 구체성을 표현하는 연역추론 속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오직 일체화된, 성숙한 단계에 이른 이론 속에 있다. 만약 한 개념이 이러한 연관으로부터 끌어내어진다면, 그것에서 남는 것은 단지 언어적 외피, 언어적 상징뿐이다. 개념의 맥락, 뜻은 그것 바깥에 존재한다—일련의 다른 규정들로부터 고립되어 받아들여진 단어는 오직 대상을 지시할 수만 있고 그것에 고작 이름을 부여할 수만 있을 뿐이므로, 오직 기호, 상징, 표식, 혹은 암시로서만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개개의 언어적 규정의 구체적 의미는 그것이 감각적으로 주어진 이미지나 사태의 본질 및 대상, 현상 혹은 사건의 본질을 표현하는 이론적 규정들의 충분히 발전된 체계이건 간에 항상 다른 무엇에 그 일부로서 포함된다.
만약 하나의 규정이 두뇌 속에 각각 따로, 즉 감각적으로 응시된 이미지와 별개로, 그 이미지나 다른 정의들의 체계와 연관성이 끊긴 채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으로 추론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추론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아무것도 칭찬할 만한 것이 없다.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비(非)연관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며, 사물의 개별적 속성을 그것과 다른 속성 간의 연관을 이해함 없이, 실재에 있어서 그 속성의 위치와 역할을 파악하는 것 없이 사고하는 것이다.
“누가 추상적으로 사고하는가”라고 헤겔은 묻는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라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다. 시정잡배는 모든 사람을 그 자신의 실용적 관점에서 그들을 오직 야바위 대상으로, 배타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추상적으로 (즉, 일면적으로, 비본질적 및 분절된 정의들로) 사고한다; 규율에 엄격한 군인은 병사를 오직 때려 패야 할 사람으로 본다는 점에서 추상적으로 사고한다; 거리에서 빈둥거리는 사람은 처형되는 사람을 그의 모든 다른 특징들은 무시하고, 그의 삶의 역사나 그의 범죄의 이유 등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오직 살인자로서만 본다는 점에서 추상적으로 사고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체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사람”은 현상들에 추상적 명칭들—살인자, 군인, 구매자—을 달아놓는 것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더더구나 “사람들을 이해하는 사람”은 이러한 일반적 추상적 명칭들을 현상, 사람, 사건, 대상의 본질에 대한 표현들로 전혀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사태의 본질을 드러내는 개념은 오직 체계를 통하여, 개개의 계기들, 측면들, 속성들, 특징들, 혹은 개별적 대상의 관계들을 표현하는 일련의 정의들을 통하여 전개되며, 이러한 개념의 각각의 측면들은 단지 어떤 형식적인 복합물로서 (“그리고”, “혹은”, “만약 … 하다면”, “이다” 등과 같은 단어들에 의해서) 문법적으로 결부된 것이 아니라 논리적 연관성에 의해 연결된 것이다.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헤겔적 관념론은 그가 추상적 규정들들을 종합하는 능력을 의식에 표현된 실제적이며, 객관적인, 감각적으로 지각된 그 어떤 사유와도 독립된 실재의 보편적 연관이 아니라 신이 내린 산물로서, 사유의 근본성질로서 간주한다는 점에서 존재한다. 구체적인 것은 그 최종적 분석 속에서 사고의 산물로 설명된다.
이것 또한 물론 관념론이지만, 칸트의 주관적 관념론보다 훨씬 더 ‘지적’이다.
점차 실증주의로 나아가던 19세기 후반 부르주아 철학은 스피노자나 헤겔은 물론이고 칸트와 로크의 견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 났다. 실례를 들자면, 밀은 추상과 구체성에 대한 그것의 관계에 관한 로크의 이론이 결정적으로 중세 스콜라 철학이 수립한 개념들의 ‘남용’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추상과 구체라는 단어들을, 그들 철학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그 기술적 언어 구성에 있어서는 당해낼 자가 없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덧붙여 놓은 뜻으로 사용해 왔고, 적어도 논리학에서 그들의 정의는, … 거의 바뀌지 않았으며, 그저 쓸모없는 것이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16
밀의 시각에서 로크 학파는, ‘추상적 명칭’이라는 표현을 모든 ‘일반적 명칭들’에까지, 즉 ‘추상 및 일반화의 결과인’ 모든 ‘개념’에까지 확장시키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요약해서, 밀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추상에 관해서 말하면, 나는 항상,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구체의 대립물을 뜻한다; 추상적 명칭에 관해서는, 속성의 명칭을 뜻하며; 구체적 명칭은 대상의 명칭을 뜻한다.”17
이러한 ‘용법’은 사고와 객관적 실제의 관계에 관한 밀의 주관적 관념론적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밀은 (개별적 명칭들을 제외하고) 모든 개념은 추상적이며, 그것들 모두는 수많은 개별 사물의 일반적 형태, 동일한 속성을 추상한 산물이라는 로크의 입장을 선호하지 않았다.
밀의 견해로는, 이러한 용법은 단어의 종류 전체에서 간단한 특칭(a brief specific designation), 즉 속성들 명칭의 종류 전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밀에 따르면 속성이나 성질이란 개별적 사물 간 일반적 성질, 질 또는 관계를 뜻하며, 이는 반드시 개별 사물과 분리되어 추상적으로, 특정한 대상으로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집’이나 ‘화염’, ‘사람’ 혹은 ‘의자’와 같은 개념들은 개별적 사물들의 공통 속성으로서 말고는 다른 방식으로는 생각될 수 없다. ‘집’, ‘불’, ‘흰색’, ‘동그라미’는 언제나 어떤 개별적 사물 및 다른 것에 그 특징으로서 관계한다. 누구도 개별적 화염들과 독립적인 어떤 것으로 ‘화염’을 인식할 수 없다. ‘흰색’도 마찬가지로 개별적 사물들 바깥에서, 그것들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인식될 수 없다. 이러한 모든 일반적 성질은 오직 개별적 대상들 내에서, 오직 개별적인 것 내에서 그리고 개별적인 것을 통해서만 일반적인 형태들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들을 추상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잘못 인식한다는 것이다.
추상적 이름들은, ‘속성들’의 이름과는 매우 다른 문제이다. 추상적 이름들─혹은 밀에 따르면 개념들과 같은 것─은, 특수한 대상들로서, 비록 그것들이 직접적인 관찰로 ‘흰색’, ‘나무’, ‘화염’, 혹은 ‘신사’로서 개별적 사물들의 일반적 속성들의 동일한 종류라고 보일지라도, 개별적 대상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인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그렇게 인식되는 일반적 속성들, 특징들 및 관계들을 표현한다.
그러한 개념들 가운데에 밀은 ‘흰색’, ‘용기’, ‘평등’, ‘유사성’, ‘네모짐’, ‘가시성’, ‘가치’, 등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일반적 명칭들이지만 이 명칭들의 대상들(혹은 형식 논리학에서 이러한 개념들의 내용이라고 언급되는)은 개별적 사물들의 일반적 속성들로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밀은 이 모든 속성들, 성질들 및 관계들이 (개별적) 사물들 자체의 일반적 속성들이라고 단지 잘못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러한 ‘대상들’은 모두 사물들 내에 있지 않고, 비록 그 속성들이 지각 행위에서 그 사물들과 함께 개별적 사물들의 일반적 속성들로서 나타나면서 사물들과 합쳐질지라도, 사물들 바깥에 그것들과 독립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만약 개별적 사물들 내에서가 아니라면, 그러한 대상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밀의 대답에 따른다면─그것은 우리의 정신 속에 있다. 게다가 이러한 것들은 “느낌들, 혹은 의식의 상태들”, 및 “이러한 느낌들을 경험하는 정신”, 내지는 “의식의 느낌들과 상태들 사이의 연속성과 공존, 유사성과 비유사성”18이다.
이러한 대상들은 모두 또한 추상적으로, 즉 그것들이 정확히 이들 사물의 속성들, 특징들, 및 관계들이 아니기 때문에 사물들로부터 구분되어 인식되어야 한다. [밀에 의한다면,] 그것들을 사물들로부터 구분시켜 인식하는 것은 그것들을 올바로 인식함을 뜻한다.
이러한 한계설정의 근본적인 결함은 몇몇 개념들은 정신 속에서의 관조로써 주어진 개별적 사물들(현상들)과 연관되어야만 하지만, 다른 개념들은 이 연관 바깥에서 그 어떤 개별적 현상들과도 매우 독립적으로 인식되는 특수한 대상들이라고 간주되어야 함을 규정한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밀에 따르면, 가치 일반, 즉 가치 자체는 두뇌 바깥에 그것의 그 어떤 존재 유형도 분석함 없이, 추상적인 것으로만 표현될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그것이 두뇌 바깥 대상들의 실재적 속성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거로서 파악될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오직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특정한 윤리적 태도인 인간의 주관적 태도의 일반적 원리로서, 임의적인 평가 혹은 측정 방법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두뇌 바깥의, 의식 외부의 사물들 자체의 성질로서 고려되지 않는다.
밀이 고전적으로 대표하는 이러한 종류의 논리학에 의한 것들에서, 정확히 가치가 왜 오직 개념으로서만, 오직 두뇌 바깥 사물들의 객관적 속성들과 독립적이며 그것들[사물들]과 대립하는 선험적인 윤리적 현상으로서만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직 자기의식, 추상적 사고 내에서만 존재한다. 이 점이 그것이 ‘추상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지의 이유이며, 그리고 그것은 [밀과 이와 유사한 주관적 관념론에서] 가치를 간주하는 올바른 방식이 될 것이다.
우리가 밀의 견해를 이토록 상세히 다룬 연유는 오직 그 견해가 논리학의 범주들로서 추상과 구체에 대한 해석에서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도 더 일관되고 명백하게 반(反)변증법적인 전통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 전통은 반-변증법적일 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반-철학적인 것으로서 표명되어 왔다. 밀은, 지난 수세기 동안 세계철학에서 발전되어 온 주장들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그에게는, 결코 헤겔이나 칸트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심지어 로크의 연구들조차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 절대적으로 엄격하고 그리고 오랜 기간을 거쳐 형성된 것들을 다룸에 있어서의 무쓸모한 궤변의 견해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에게 모든 것이 그렇게도 단순해 보이는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개별적 사물’로서 개별적 경험 속에서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구체적 개념은 개별적 대상의 이름으로서 활용될 언어적 상징이다. 개별적 사물의 직접적인 이름으로서 사용될 수 없는 그러한 상징이 ‘추상적인 것’이다. “그것이 붉은 점(red spot)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붉음(redness)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로 전자는 구체이고 후자는 추상이다. 이것이 추상에 대한 모든 것이다.
모든 신실증주의자는 동일한 특징을 갖고 있다. 유일한 차이점은, 추상과 구체(모든 철학적 범주도 마찬가지다)가 여기서 언어적 범주들로서 취급되고, 또 ‘추상적 대상들’을 표현하는 용어들이 허용될 수 있는가 혹은 허용될 수 없는가의 문제는 ‘언어적 형식’을 만들어 냄에서 그것들의 활용 효과 혹은 유효성의 문제로 환원된다. ‘추상적인 것’은 여기에서는 개별적 경험에서의 개별적 사물로서 주어지지 않고, 경험에서 주어지는 그런 유형의 대상들에 대한 이름으로는 정의될 수 없으며, 더욱이 주관적 관념론의 방식으로 해석된 개별적 대상들의 직접적 이름이 될 수 없는, 경험 속에서 주어진 그러한 대상들의 유형을 나타내는 용어들로 규정될 수 없다는 점이 일관되게 받아들여진다.
‘추상’과 ‘구체’의 용어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철학사의 전체적인 유산에 의해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써 논박된다; 우리는 이제 후자에서의 이 문제들에 대한 취급의 상세한 해설로 넘어갈 것이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5년 2월 8일
- Wörterbuch der phllosophischen Begriffe, Historisch-Quellenmässig bearbeitet von Dr. R. Eisler, 3. Auflage, Bd. 1, Ernst Siegfried Mittler und Sohn, Berlin, 1910, 5.를 참조하라.
- C. Prantl, Geschichte der Logik im Abendlande, Bd. 3, Akademie-Verlag, Berlin, 1957, 363.를 참조하라.
- C. A. Helvetius, De l'Esprit; or Essay on the Mind and Its Several Faculties, J. M. Richardson, et al., London, 1809, 10.
- Ibid., 8.
- T. Hobbes, Elements of Philosophy, the First Section Concerning Body, R. & W. Legbourn, London, 1656, 27.
- Benedict de Spinoza, Improvement of the Understanding, Ethics and Correspondence, translated from the Latin by R. Elves, M. Walter Dunne Publisher, Washington and London, 1901, 20.
- Ibid., 8-9.
- Ibid., 9.
- Ibid., 9-10.
- Ibid., 17.
- Ibid., 32-3.
- Ibid., 31.
- 이것은 정확히 디드로가 스피노자의 가르침의 기본 이념을 해석한 방식이었다: 돌멩이는 감각할 수 있는가?—가능하다. 당신이 해야 할 모든 것은 그것을 갈아서, 그 가루 위에 식물을 기르고, 그 식물을 머금음으로써, 돌멩이라는 물질을 지각능력 있는 육체라는 물질로 바꾸는 것이다.
- Immanuel Kant’s Logik, 2. Auflage, F. Meiner, Leipzig, 1876, 109.
- Loc. cit.
- J. S. Mill, A System of Logic Ratlocinatlve and Inductive, Longmans, Green and Co., London, 1900, 17-8.
- Ibid., 18.
- Ibid.,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