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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계엄을 찬성하는 당신에게


그럼에도 계엄을 찬성하는 당신에게


김민규 | 집행위원

    1. 선관위의 선거 조작을 바로 잡기 위한 계엄령이라는 견해에 대한 반박
    2. 민주당의 방해로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불가능했다는 견해에 대한 반박
    3. 탄핵은 비극이기에 할 수 없다는 견해에 대한 반박
    4. 실체적 진실이 나오지 않았는데 범죄자 취급한다는 견해에 대한 반박
    5. 그렇다면 누가 계엄에 찬성하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최근 윤석열의 계엄 실패가 전 세계 신문 일 면에 오르고 있다. 그는 파탄이 나고 있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엄을 시행했으나, 자신들이 말하는 “중과부적”의 요소들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계엄은 한국 사회에 어마어마한 사회경제적 피해를 주었으며, 많은 군중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지금 한국에서 계엄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와 이로부터 파생한 수많은 쟁점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계엄 실패와 탄핵 정국이 전개되면서 계엄에 정치적 당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흐름이 일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도드라진 견해들은 여전히 군중의 지배적인 부위에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경향적으로는 재생산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견해를 정리하는 것이 이제 중요해졌다. 즉, “그럼에도 계엄을 찬성하는 분”들의 논리를 알아보고 그러한 견해가 과연 합당한 인식에 기초한 것인지 아닌지를 논해봐야 한다.

 

계엄을 옹호하는 자들의 입장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압축된다: 첫째, ‘종북 좌익’ 인사들에게 장악당한 선관위를 폭로하고 그들이 ‘자행’한 선거 조작을 밝혀내기 위한 정당한 계엄령이었다는 견해; 둘째, 민주당이 국회를 장악했으며 이에 따라 나타난 국회의 폭주를 막기 위한 정당한 계엄령이었다는 견해; 셋째, 탄핵은 우리 국가의 큰 비극이며, 이러한 행위를 다시는 반복해서 안 된다는 견해; 마지막으로 아직 경위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성을 가지고” 경위가 전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1. 선관위의 선거 조작을 바로 잡기 위한 계엄령이라는 견해에 대한 반박


 

이는 선거 조작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 다루지 않아도, 심지어 선거 조작이 있었음을 적극 수용하더라도 견해의 내부에 모순이 존재한다: “대규모 선거 조작은 실재했다. 이재명이 지시했고 그 배후에는 러시아, 중국, 그리고 북한이 있다. 선거 결과가 출구 조사와 놀랍도록 일치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내용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부정선거가 실재한다는 사실이 윤석열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사실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는 그들의 적이 놀라울 정도로 유능하며, 단지 그들의 놀라울 정도의 무능함을 확신시키는 계기밖에 되지 못한다. 2024년 4월 총선을 돌이켜 생각해 보자: 그 당시 국민의 힘은 행정 권력의 최고 수반과 국회에서 의석 103석을 보유한 상태였다. 국민의 30%가 지지를 주고 있었으며, 여러 시민단체와 지역 조직들을 갖춘 거대 정당이었다. 그들은 법적으로 보호된 투표 감시 권한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었으며, 여러 우익 시민단체에서 그 투표가 부정한지 아닌지에 대해 감시하였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가장 철저한 적 앞에서, 저런 대규모 작전에서, 물적 증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대통령이 과연 한국의 이 중차대한 위기를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가? 의회 민주주의 정치인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가 무엇인가? 자신이 대변하는 집단의 이해관계에 기초하여 정치적 숙고를 통해 형성된 올바른 방향으로 여론을 이끄는 것이 아닌가? 만약 여러분의 의견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윤석열은 그의 무능력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에 가장 중차대한 위기 상황에서 대응할 방법을 완전히 날려버린 대통령이 되었다. 여러분의 의견이 옳다면, 이번 계엄은 오히려 “종북 좌익”들이 자신들의 방식을 더 점검하고 치밀하게 조직하여 더 나은 능력자가 나오더라도 해결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사태였다. 이재명도, 김어준도, 조국도, 양경수 위원장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윤석열이 그 일을 만든 것이다. 이제 설령 그 증거가 나와도 대부분이 대통령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그 증거를 조작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상황을 만든 것은 다른 누구의 책임이 아닌 오직 윤석열의 무능력 때문이었다.

 

즉 첫 번째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여도 여러분은 탄핵에 찬성하고 계엄에 반대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계엄은 철저하게 무능함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사상의 자유가 있는 이 대한민국에서 여러분이 어떠한 의견을 가지는가에 대해 나는 그러한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 이전에 실질적으로 여러분의 의견을 바꿀만한 물질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행정부의 수장이 심각하게 무능한 사람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공통의 전제를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이에 기초한다면 윤석열은 탄핵당하여야 한다.

 

그는 불법적인 계엄을 저질렀다선악이란 어떤 집단의 사회적 이해관계를 확대재생산 할 수 있는 그 집단이 인식한 경험적 가치이며, 유능하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선을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선악 기준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다른 집단의 가치를 잘 실현하는 사람이 당신들의 지도자가 될 수 없듯, 당신들의 가치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사람 역시 당신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부적격하다. 여러분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그 의도가 아무리 바르다고 할지라도 그의 무능함과 불철저함 때문에 그 계엄은 불법적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탄핵당하여야만 한다.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입장은 둘 중 하나로 귀결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절차 따위는 의미가 없다는 반사회적 세력이거나 반대로 사실 그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옹호하는,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자유대한민국”의 위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조차 단순한 허울일 뿐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단순한 파시스트 한 사람에 불과하다.

 


2. 민주당의 방해로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불가능했다는 견해에 대한 반박


 

이제 두 번째 의견민주당이 국회를 장악했고 윤석열의 정당한 국정 운영을 막았으며, 이에 따라 발생한 “어쩔 수 없는” 소위 경고성 계엄이었다는 견해에 대해 다루어 보자. 나는 마찬가지로 여러 사항에 대한 진부한 사실 확인과 토론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와 관련된 여타의 기관에서 훨씬 잘 수행할 것이며, 실제로 그러하고 있다. 또한 위에서 설명했듯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식 문제는 단순히 당파적 신념과 무관한 ‘사실관계’의 확인 문제가 아니라 당파적 신념에 기초한 사실관계의 문제이며, 나는 현재 여러분의 신념을 어찌할 도리가 없으므로 여러분의 믿는 사실관계에 기초하여 여러분들의 논리를 분석하겠다: “민주당은 국회를 장악했고,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서 윤석열의 국정 운영을 훼방 놓았으며 시시때때로 탄핵안을 발부하여 행정부를 마비시켰다.” 그런데 과연 이게 근본적으로 잘못된 일인가?

 

우리는 흔히 민중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민중 일반의 공통의 이익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의 공통 이익이 존재하고 그 방향성이 명확하다면(즉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면) 그것은 법으로 정해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에 공통의 이익이라면 이걸 어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법이 필요한 경우는 반대로 어떤 사안이 공통의 이익이 아닐 때, 혹은 그 사안이 명확하지 않아 이성이 그것을 명확하게 하여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때일 것이다. 가장 간단하고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보도록 하자: 우리는 범죄를 불법화하는 것을 공리로 취급한다그러나 이러한 가장 명료한 범죄에 대한 범죄화 역시 누군가의 이익에 반하는 것을 손쉽게 떠올릴 수 있다. 바로 그 행위를 하는 범죄자가 그렇다. 여러분들은 너무 극단적인 예시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환경 문제에 관한 법안을 떠올려 보자: 오염물질을 취급하는 기업가들에게는 환경법이 약한 것이 상대적으로 이익이지만 반대로 생태 문제를 다루는 비영리조직 전체에게는 환경법이 강한 것이 상대적으로 이익이다. 자동차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대중교통이 잘 활성화된 것이 좋지만 반대로 자동차를 파는 자본 부문에는 대중교통이 없는 것이 이익이다. 이처럼 국민 내부에 여러 이해관계의 대립이 존재하고 이런 이해관계에서 한쪽이 명확한 경우는 좀처럼 없다. 왜냐하면 명과 암이 명확한 문제는 문제로 취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단순한 실천의 문제요, 나의 정신 상태의 문제이다. 우리 삶에 마주하는, 이성을 요구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 진짜 문제는 명과 암이 명백하지 않아 외양상 명과 명의 대립, 암과 암의 대립으로 보이는 문제이다.

 

국가는 이러한 각각의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그른지를 정하고 이를 한 집단에 강요할 수 있는 한 집단 내의 가장 강력한 집단이며, 가장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집단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국가가 불법화한 것을 합법적인 경로로 수행할 공공연한 ‘자유’를 가질 수 없다. 우리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수많은 사적 조직은 국가의 법에 합치하지 않으면 불법적이다. 이것이 바로 독재의 본질 아닌가? 즉 우리는 입법 독재, 행정 독재, 사법 독재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 당연하다. 왜냐하면 규정된 국가의 본질은 어느 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의 독재이며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는 그 독재를 표현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은 국가의 본질이 독재적이다는 것뿐이며, 실제로는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이러한 독재를 실현하며, 거기서 사람들이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는가는 해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말한 것이 바로 우리 헌법이다. 우리는 헌법에 따라 다수결로 선정한 대의원과 대의기관을 통해 무엇이 올바른지 정하며(입법부), 그것을 실행할 기관과 그 수장을 선정할 방법을 규정하며(행정부), 또 국가 내의 모든 행위가 대의기관이 만든 행동 지침과 헌법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규정(사법부)하며, 우리 국가가 목표로 하는 ‘가치들’을 설명한다. 그것이 헌법의 역할이다.

 

나는 윤석열의 거부권 행사나 의회 동의 없는 인사가 법적으로 의미 있는 탄핵 사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헌법과 법이 규정한 절차에 따른 행정부의 자유로운 권한 행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반대로 민주당의 조치 역시 정당하다. 왜냐하면 이 또한 헌법과 법이 규정한 절차에 따른 입법부의 자유로운 권한 행사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당이 나라를 망치고 있으므로 윤석열이 정당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그렇다면 반대로 윤석열이 나라를 망치기 때문에 민주당이 정당하다고 외친다; 심지어 이쪽은 수도 다수이다. 수는 주장의 진리성을 입증하는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문제가 그렇듯 우리는 정답이 명확한 문제의 영역에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문제의 영역에서 대립하며, 그렇기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대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 대립하는 두 의견에 중 어떠한 것을 시행할 것인지 고르는 방법이다. 그러한 방법을 고르는 국가적 방법이 ‘합법적 방법’이며 ‘헌법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법치주의’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성, 법과 질서를 외친다고 생각한다.

 

즉 윤석열의 탄핵당하여야 하는 이유는 민주당이 주장하듯, 또 위에서 언급했듯 그가 단지 ‘기술적으로’ 무능해서가 아니다. 그의 탄핵 사유는 그가 자신의 권한을 뛰어넘은, 즉 반헌법적인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 국가란 헌법적 가치를 재생산하고 확장하는 관념 기계이며, 이러한 헌법적 가치에 반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반국가적이다. 각 개인은 헌법적 가치에 위반해서 행동할 수 있지만, 대통령은 헌법적 가치를 위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나왔기에 유령이 되지 않는 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듯, 대통령 역시 헌법으로부터 나왔기에 대통령이 아닌 존재가 되지 않는 한 헌법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이러한 계엄령을 통해 헌법적 과정을 일부 훼손했고, 그렇기에 그는 자기 자신에게 권한을 주는 원천을 스스로 짓밟았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결국 둘 중 하나를 자신의 논리적 결과로 인정해야 한다: 하나는 윤석열은 절차적으로 대한민국의 헌법에 위반된 행위를 하였고 그가 대통령이기에 그 절차적 요건에 맞춰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거나 탄핵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윤석열은 헌법을 초월한 존재로서 단지 대통령직은 대한민국을 이용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며, 이번 내란 행위를 통해 헌법과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자신만의 사유화된 국가를 세우려고 하였고, 스스로 그 행위에 동조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3. 탄핵은 비극이기에 할 수 없다는 견해에 대한 반박


 

세 번째 논리는 주로 국민의 힘 의원들이 주로 쓰는 논리로써 탄핵은 우리 당과 국가의 큰 비극으로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러한 탄핵을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옳다탄핵이 일어난 상황은 소속 정당을 떠나 우리 국가의 큰 비극일 것이다. 그러나 예시를 바꿔보자: 이전에 끔찍한 연쇄 살인마가 있다고 하자. 우리가 그를 결국 잡았고, 그를 처형했다고 해 보자. 그리고 다시 연쇄 살인마가 나타났다. 우리가 다시 그를 잡았고, 그를 처형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전의 일을 보지 못했냐. 전번의 사건은 비극이었다. 그러니 처형을 하는 건 비극을 창출할 뿐이다. 고로 처벌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맞다그것은 비극이었다. 그런데 이 사태가 비극인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살인마가 생겼고 그걸 죽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우리 사회의 비극인가? 아니면 반대로 처형 그 자체가 비극인가? 즉 이 비극의 본질은 그러한 비극을 만든 원인 그 자체인가? 아니면 비극의 결말인가?

 

이 논리는 원인과 결과의 경중을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 살인자에 대한 체포와 처형은 그러한 비극을 결말짓는 최소한의 장치이지 비극 그 자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탄핵 역시 그 결말인 탄핵이 그 비극의 본질이 아니라 윤석열의 당선과 그 패악질이 그 비극의 본질이 아닌가? 따라서 이 논리에 따라, 진정한 비극은 대통령을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대통령들을 국민에게 소개하고 만든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이 해야 할 것은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사 실패를 국민께 사죄하고 대통령이 될 인재를 잘 찾아서 더 이상 탄핵당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은 야당 5당이 탄핵 중독에 걸렸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 살인자가 많다고 해서 살인자를 무죄로 놓아주지 않듯, 대통령 직위에 걸맞지 않은 사람들이 올라오면 그 횟수와 상관없이 대통령직에서 쫓아내야 한다. 오히려 진정으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남을 쫓아내려는 태도가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직위를 평범하게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계속 올리는 인사 능력이 아닐까 한다.

 


4. 실체적 진실이 나오지 않았는데 범죄자 취급한다는 견해에 대한 반박


 

마지막 논리는 위의 논리들보다는 직접적으로 윤석열을 옹호하지는 않지만 소위 “중립”을 지킴으로써 윤석열을 암묵적으로 옹호한다. 그들의 주장은 아직 윤석열의 쿠데타의 “실체적 진실”이 “온전히”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을 가진 우리들은 이것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하며, 고로 비이성적인 범인몰이는 그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다우리는 모두 헌법에서 보장된 무죄 추정의 원칙으로써 법률에 의해 국가로부터 보호받는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자. 그를 무죄로 추정하는 것과 그가 무죄인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그리고 심지어 무죄로 추정되지만, 범죄 혐의가 있는 용의자가 가장 위험한 무기를 들고 있다면, 타인의 안전을 위해 그를 최소한 그 무기에서 격리하는 조치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 우리가 살인하는 장면을 보았고, 그 살인자가 무기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어느 정도 제압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가 왜 살인하였고, 어떤 경로로 무기를 입수했고, 그의 조력자가 누구였는지를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당장 무기를 빼앗는 일이다. 박근혜 탄핵 심판에서 헌법재판소가 말했듯, 탄핵 심판은 그러한 사건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의 임기 내에 사건과 태도로 인해 “대통령의 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거나 대통령이 국민의 신임을 배신하여 국정을 담당할 자격을 상실한 경우”를 고려해서 탄핵을 선고하는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윤석열은 더 이상 직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통령이 언제 계엄을 일으키고, 반헌법적인 행위를 할지 알 수 없는 지금, 과연 국회가 대통령을 신임하고 같이 민생을 돌볼 수 있는가? 설령 그가 앞으로 최소한의 행동으로 정상적인 행정업무를 한다고 하더라도 국회와 그를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들과 국회의 협조가 없다면, 대통령의 행정업무가 가능한가? 만약 그러한 행위가 불가능하다면, 결국 대통령은 다시금 이전의 계엄 이유와 같은 이유로 계엄을 선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악순환은 대한민국의 소멸과 윤석열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독재 국가 형성 혹은 윤석열의 탄핵 이외엔 끝나지 않을 것이다.

 


5. 그렇다면 누가 계엄에 찬성하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위처럼 윤석열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옹호들은 그 논리적 근거가 내적으로도 빈약하다. 그렇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이, 또 ‘좋은 대학’과 ‘좋은 직업’을 가진 우리나라의 소위 “지성”이라는 사람들이 윤석열을 이러한 논리로 변호하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교육 수준과는 별개로 그들을 구성하는 내재적인 요인들이 그러한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옹호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신이 존재한다는 것, 최소한 아브라함 계통 종교의 야훼가 존재한다는 견해는 점차 비논리적이고 괴이한 일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신학자는 필연적으로 그것이 진리성과 무관하게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참된 사실인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라도 그는 정체성 중 하나인 신학자에게서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고로 신학자는 자신의 이성 능력을 포기해서라도 자신의 반동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주장을 하여야만 한다. 즉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서 이성 능력을 포기하는 것이며, 이는 그의 이성 능력이 초보적인 수준의 진리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낮아지게 하므로 재차 그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이 악순환에 빠지게 한다. 즉 이러한 고리로써 좋지 않은 방향의 관성과 자기 입장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이 외적 사실관계와 별개로 자신의 내부 논리에서조차 모순되는 이러한 논지들을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의 처지와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문제가 전적으로 그들의 지적 능력에서만 기원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지적 능력을 함양하는 데로 나아가면서, 더욱 철저한 논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의 입장이 그들의 지적 능력에서만 기원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이 능력이 더 핵심적인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논리를 정교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즉 이성적 영역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러한 입장을 가지게 한 모든 구체적인 맥락들을 파악하고 그러한 구체적인 맥락들을 각자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직접적으로 타격해야 한다. 즉 우리는 이성의 영역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그들을 때려눕혀야 한다. 손자가 말하길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서 위태롭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 고로 우리가 설득이 아닌 설득 이외의 그 문제의 특수성을 반영한 더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 이 끔찍한 상황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적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맥락들이 그들을 이러한 반이성적이며, 반헌법적인 주장으로 이끄는가? 또 이러한 맥락들을 우리의 능력 아래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이 하나의 슬로건, 윤석열 탄핵 반대와 부정선거 엄밀 조사라는 주장으로 하나로 묶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각각의 상이한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우리의 대응 방향 역시 달라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반동적 조류들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 집단은 윤석열과 그의 운명공동체들, 예를 들어 국민의 힘 수뇌부나 정부 고위 인사들이다. 그들은 명태균 게이트나 대통령실 관저 이전과 같이 실질적인 이익 관계를 윤석열과 공유하였고, 윤석열의 파면은 그들의 불법적인 이권 관계를 노출할 위험을 크게 증가시켰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이성적인 주장을 신앙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류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타격책은 그들의 정치적 권력을 철저하게 박탈하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집단은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재생산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 입장이 전적으로 그들의 경제적 관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주로 몇몇 단위에서 부조를 받는데, 크게는 관변 단체로 대변되는 우익 단체들과 교회로 대표되는 종교 종교단체들이다. 국가나 전국경제인연합회(한국경제인연합회) 같은 기업가들의 금전적 지원을 받은 우익 단체와 교회는 이러한 빈민들에게 물질적인 보상을 통해 인간관계를 맺고, 조직들의 약속된 회합을 통해 인간관계를 가진다. 이후 조직 모임에서 극우적인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며, 금전을 매개로 이러한 빈민들을 고용하여 특정 시위를 조직한다. 이들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돌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그들의 경제적 열악함을 제거함으로써 그러한 부조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며, 오직 이러한 방법만이 그들을 극우 시위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다.

 

세 번째 집단은 그들의 허위 이데올로기에 의해 추동되는 자들이다. 반노동자·반여성·반소수자 등 그들이 혐오하는 것은 다양하지만 그들 모두가 총체적인 진보 이데올로기에 반한다는 지점은 모두 동일하다. 중요한 지점은 이들은 설득의 주요한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또 이러한 설득은 오직 논리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설득은 오직 공통의 전제가 공유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동적 세계관을 공유하기 사람들과는 필수적인 공통의 전제가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를 전제하지 않고 논쟁하는 사람과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논쟁할 수 없는 것이다. 여성·노동자·기타 소수자를 노예로 취급하거나 그 초보적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여성·노동자·기타 소수자를 정치적 주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에 공통의 전제는 매우 희박하거나 없을 수밖에 없으며 고로 그들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공통의 전제에 기반한 설득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들 내부 논리에서 그것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끄집어내거나, 그러한 공통의 전제를 만드는 다양하고 과학적인 방법을 찾아야만 하며, 그 이전까지는 그들은 포용의 대상이 아닌 배제하고 억압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네 번째 집단은 윤석열에게 직접적인 이익은 얻지 않지만, 이러한 극우적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정치-경제적 이익을 얻는 자들이다. 정부 기관, 전경련, 대형 교회로 대표되는 이들은 노동자·농민·여성·기타 소수자들의 인권, 더 나아가 보편적 인권이 더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그들의 요구조건을 민중들에게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강요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강요를 통해 자신들의 객관적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이 문제에서 고개를 돌린다면, 다음 대상은 당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특정한 인권의 파괴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의 파괴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보편적 인권에 반하는 파쇼적 기치에서 객관적인 이익을 받으며 이 기치 아래에 뭉친 자들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인권의 증진이라는 단일 목적 아래에 우리는 연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연합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광범위하고 구체적인 반파쇼 통일전선을 구축해야만 한다. 이러한 연합 속에서만 우리는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힘을 쟁취할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을 것이다분명 많이 깨지고, 아플 것이며, 고단하고 지루한 과정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법칙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실천을 통해 구체화할수록 그러한 일은 점점 더 쉬워질 것이며, 할 수 있는 범위도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사고가 구체적이고 객관적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이며 그저 첫걸음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계기를 뛰어넘어서 그것이 실제 구조를 파악하며, 그것의 재생산 운동을 파악해야 한다. 이를 통해 그것에 개입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을 실제 경험과 비교해야 하며 이를 통해 부단히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러한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경험들이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은 점점 더 진부하고 지루한 일로 변해야만 한다. 오직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런 내란 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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