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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맘먹고, 워낭소리

이 영화는 화제작이다. 100만 관객을 눈앞에 둔 지금, 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무실 동료들과 하루길을 달려 부산에 도착했고

아슬아슬하게 상영시간에 맞춰서 영화를 보았다.

입구에서 손수건을 나눠주었고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날 나는 생각햇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다면 나는 아마도 절망할 것같다고.

 

해가 바뀌어 1월 15일 개봉을 했고 며칠 후 나는 극장에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보았다.

독립영화로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글을 쓰기 위해

더 솔직히 말하자면 좋은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첫번째 관람 때보다 더많은 좋은 점을 발견했고 눈물 흘리며 영화를 본 후에

난 같이본 분에게 감상과 함께 사람들이 많이 볼 것같냐고 물었다.

그분은...그렇진 않을 것같다고 대답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이 영화가 안쓰러워서 '그래도 열심히 만들었는데...'

라는 생각으로 나는 이런 글을 썼다.

 

소와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교감

시간은 흘러흘러 이 영화는 폭발적인 흥행을 보여줬고

옘비와 강한섭과 유인촌까지 함께 보고서 칭찬했다고 한다.

이쯤되면 더이상 안쓰러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얘기를 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 가을, 나는 <워낭소리>를 보고 불쾌해했다.

그리고 나는 내 반응을 낯설어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내가 너무 오랫동안 현장을 떠나 있어서

외출도 거의 없이 집에서 아기하고만 지내느라

현실감각이 떨어져버린 건가 하는 생각에 당혹스러웠다.

'씨네21'과 '피디저널'의 기사를 스크랩해둔 이유는

내 느낌에 대한 실마리를 약간은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이른 기사인 <씨네21> 684호 (12.23~12.30) 중

'낭패의 연속, 그러나 숭고한 성극'에 나오는

이충렬감독의 인터뷰는 웬일인지 온라인에서는 안뜬다.

인터뷰 기사 한 줄이 가슴에 턱 걸렸다.그래서 책을 보고 옮긴다.

 

"할머니가 카메라를 좀 아시더라"

15년간 방송다큐멘터리 만든 이충렬감독 인터뷰

 

...........................

 

질문:애초 방송용으로 찍었다.

 

답변:방송다큐는 제작비를 건지려면 협찬을 받아야 한다.

국내 방송사에서는 많이 주면 3천만원이다.

하지만 다큐 1편의 제작비는 촬영만 해도 7천만원 이상이다.

방송사에 팔아도 협찬을 못 구하면 마이너스다.

제작자들이 꺼려할 수밖에 없다.

애초 <워낭소리> 제작자도 좀 알아보더니 결국 이민 간다고 하더라.

 

그래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3천만원 받고 방송사에 넘기는 건

너무 아깝지 않냐고 하더라. 모니터를 하면서 자신감을 조금씩 얻었고

그 뒤에 스튜디오 느림보의 고영재 프로듀서를 만났다.



작년 10월 부산에서 생각했다.

자본의 탐식성은 이제 독립영화의 영역까지 침투하는구나.

 

독립영화란 무엇인가? 나의 선배들은 항상 말해왔다.

"

독립영화는 가장 신랄한 저항을 하기 위한 영화이다.

이 말은 독립영화가 사회변혁의 도구로 쓰여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를 하더라도 세상을 정확히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소수의 위치에 자신을 놓아야 한다.

소수의 자리를 갖되 그 소수들과의 끝없는 연대를 통해 목소리를 내는 것.

결국 영화가 아니라 그런 영화를 만드는 나, 우리 스스로가 희망이 되어야 한다.

...............   "

 

<워낭소리>의 선 자리는 딱 방송다큐다.

첫째, 소재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둘째, 그렇기 때문에 대상에의 착취가 거침없다.

세째, 현실의 사금파리들을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도록 봉합하는 데 천재적이다.

내가 '주간기독교'에서 언급한 건 두번째 자리이고

씨네21 정한석기자의 글은 세번째 자리에 대해서 쓰고 있다. 

물론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인 나 또한 대상을 착취하고

이미지와 사운드를 편집한다.

착취 문제는 너무 괴로워서 최근 몇 년동안 전직을 고려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워낭소리>의 선 자리는 정도의 차이를 넘어선 것같다.

 

나는 궁금하다.

노부부를 사진관으로 모셔서 영정사진을 찍게할 때

죽은 소를 묻기 위해 포크레인을 부를 때

(이 두 부분은 감독이 만든 상황이다.

씨네21. 684호 이영진기자의 글 인용

"연출된 장면이 얼마나 되느냐?"

이충렬감독은 기록 이상의 연출을 부인하지 않는다.

수십번 진행한 할머니의 인터뷰를 극적 구성에 맞게 재배치했고

좋은 그림 위해 밭 가는 장면을 한 번 더 부탁드린 적 있으며,

영정사진 찍는 것이 소원이라는 할머니의 말을 쫓아 사진관으로 두분을 모셨고

죽은 소를 방치할 수 없어 포클레인을 직접 불렀다고.)

할아버지가 지게를 지다가 넘어질 때

늙은 소가 젊은 소에게 공격당할 때,

할아버지가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일을 할 때

소가 숨을 거둘 때.....그 때 감독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 대부분의 장면에서 그는 카메라맨과 조명기사를 대동하고 현장에 갔을 것이며

자기가 바라는 앵글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을 것이다.

그토록 차가운 카메라...

HD카메라를 대여하고 카메라맨을 고용하는 데 거액의 돈을 들였겠으나

그건 자기 돈이 아니었다.

이민갔다는 제작자의 돈이었고 또 새로이 만난 제작자의 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상물은 애초에 방송사 납품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워낭소리>를 독립영화라고 부르거나 말거나 그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문제는 지금이다.  이 영화를 본 옘비는

 

"이번을 계기로 (독립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질 것 같다"며

"역시 작품이 좋으면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평가했다.

 

촬영기간이 3년 정도 걸렸다는 이 감독의 말에 이 대통령은 다시 "3년 했는데, 그렇게 돈이 적게 들었냐"고 묻기도 했다.
이 감독이 "많이 아끼면서 했다"고 언급하자 이 대통령은 "노력이 많이 들어 갔겠다"고 했다.
유인촌 감독이 웃으며 이 감독을 향해 "대통령께 어렵다고 말씀드리라"고 제안하자 이 감독은 머쓱한 듯 "배가 많이 고프다"는 반응을 보였다.

 

<워낭소리>는 독립영화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독립영화라는 이름이 자꾸 언급되어지는 건

이충렬감독이 방송사에 납품하는 게 아까워서 찾아간 사람이 고영재씨였고

그 분이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총장이라는 것 때문인 것같다.

이충렬감독은 만나본 적이 없지만 그 분을 만나본 많은 이들이

참 겸손하고 착한 분이라고 한다.

영화 또한 착한 마음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감독의 선 자리에 대해서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에서 접할 수 있는 기사들을 보다 턱턱 걸리는 말들 때문에

나의 가슴은 차갑게 얼어붙는다. 

오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냉정하게 말해보자.

방송사 외주제작 피디로 활약하다

"3천만원 받고 방송사에 넘기는 건 너무 아까워서"(씨네21 684호)

독립영화 제작사를 찾아갔던 이충렬감독이

흥행 성공 이후에도 여전히

“방송에서 인정받고 싶지 영화 쪽에서 인정받고 싶은 건 아닌”(PD저널) 이충렬감독이

독립영화인의 대표처럼 회자되는 건 좀 이상하다.

 

3년 제작비 1억은 적은 돈도 아니고

(충무로 상업영화에 비하면 마케팅비에도 못 미치는 돈이겠지만)

그는 상주하면서 찍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림이 될만한 상황이 예정되면 방문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얻은 현실의 사금파리들을 사운드와 이미지의 놀라운 봉합으로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이충렬감독의 능력 만큼이나 이 영화에 기여한 것은 돈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리고 평생을 가도 나는 그런 방식으로

그만한 돈을 들여가며 영화찍을 일은 없을 것같다.

 

"역시 작품이 좋으면 사람들이 많이 온다"

는 옘비의 말은 그래서 공포스럽다.

<워낭소리>는 독립영화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그 때깔과 그 사운드는....방송시스템과 자본이 만들어낸 것인데.

그들은 이충렬감독을 독립영화의 대표주자로 인식하고

현재의 자신들의 정책을 만족스러워할 것이다.

강한섭 영진위 위원장은 '독립영화'라는 용어 자체를 부정한다는 소문이 들리고

독립영화 배급지원제도는 막을 내린 상황에서

'다양성 영화 마케팅 지원 사업'의 마지막 수혜작이었던 <워낭소리>의 흥행돌풍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며칠 전 평소 존경하던 영화평론가 한 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워낭소리>를 전술적으로 지지한다.

그것이 성공했을 때 독립다큐의 활로가 넓어질 것이다."

그 분은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콤럼바인> 이후

독립다큐멘터리를 구매하는 배급사가 1개에서 몇 십개로 늘어났다고 알려주셨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다시 생각해본다.

상업영화가 장르적 법칙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이윤을 창출해야만 하는, 산업으로서의 영화의 본질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방송용으로 찍은 다큐멘터리라는 의미는

기본 시청률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방송사, 그곳으로부터의 컨택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제작비 회수라는 것을 대전제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크레인도 쓸 수 있었을 것이고 hd카메라도, 전문방송인력도 쓸 수 있었다.

 

독립다큐멘터리라고 해서 그런 시스템으로 만들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지금 만들고 있고 나의 선배들이, 그리고 동료들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만들어오고있는 1인제작시스템 다큐멘터리들은

틀 기회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워낭소리>가 백 몇개 상영관으로 확대개봉함으로써

디지털상영시설을 갖춘 상영관의 면모가 드러났다고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데이터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줄 것인가?

<워낭소리>가 넓힌 길에는 <워낭소리>같은 다큐멘터리들이 걸어갈 것이다.

제작비 회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억대의 제작비를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들.

외주제작사들은 이제 방송국 뿐만 아니라 극장 개봉도 염두에 둘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영화를 만들까?

 

나는 흥행을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이건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연히 더 많은 이들에게 나의 영화를 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가장 일차적인 것은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인가 아닌가이다.

주류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

주류카메라가 비추지 않은 곳을 비추는 카메라.

그들이 나이고 그 자리가 내가 서고 싶은 자리이다.

나는 그것이 독립영화적인 제작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인가.

세상의 심장을 뛰게 만들, 맑은 피를 흐르게 만들 이야기가 무엇인가

 

<워낭소리>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이다.

옘비나 강한섭이나 유인촌까지도.

외연의 확장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시기 우리가 서야할 자리에 대한 영화들 말고

방송에서도 틀 수 있는 영화를 독립영화라는 이름으로 배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정말 그것이 궁금하다.

옘비와 함께 극장에 있었을 한독협 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이렇게라도 해서 길이 넓혀지면 독립영화의 활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샘터분식>을 보던 매삼화 자리에서, 한독협 신년회에서

나는 고장난 녹음기처럼 <워낭소리> 이야기를 반복했다.

누군가는 그건 너무 편협한 생각이라고 이야기했고

또 누군가는 <워낭소리>의 경험이

방송에 매어있으면서 독립영화의 흠모하는 많은 이들을 만나게 해줄 거라고 얘기했다.

 

그래....좋은 일이다.

 

나는 정말 그러기를 바란다.

이 영화를 배급한 스튜디오 느림보의 고영재 대표는

미디액트 제작지원실장으로 있을 때부터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도 약간 마음이 아프다.

이 글을 쓸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였다.

마리오감독님이나 태감독님처럼 지금 서야할 자리에 서서

묵묵히 해오던 대로 우리들의 영화를 만들면 되는 것이

더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을 했으나...

그러나...

<워낭소리>를 독립영화로 호명하는 것에 대해서

그 의미만큼이나 우려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 싶어서 용기를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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