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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마음으로 만드는 다큐멘터리

드디어 네 개의 글을 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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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마음으로 만드는 다큐멘터리

# 뒤늦은 사춘기

나는 1989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합격증을 받던 날,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있는 민주광장에서는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집회가 한창이었고“사회는 모르겠지만 등록금 인상은 왠지 부당한 것 같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극장은 멀리 해야만 할 것 같았기에 스무 살이 넘도록 개봉관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고, 가끔 동기들과 학교 근처 동시상영관에 떼로 몰려가곤 했다. 학교 앞 잡화점에서 할인권을 받아 <불의 나라>, <카프리의 깊은 밤> 같은 영화들을 보다 보면 어느새 어두워졌고 그 어둠이 좋아 막걸리 집에 들어가 술잔을 기울이며 시덥잖은 고민들을 주고받곤 했다. 그 뿐이었다. 당시의 내게 영화란 술자리나 족구처럼 친구들과 어울리는 매개일 뿐, 난 한 번도 씨네필인 적이 없었고 영화 또한 내게 진지한 물음을 던져주지 않았다.

그리고 긴 암흑의 시간이 왔다. 학교를 졸업하며 길을 잃었고 친구들과도 뿔뿔이 흩어졌다. 부당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살아가는 것만이 가치있는 삶이라고 여겼고 평생을 그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떻게 살아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누구는 방송국 입사를 준비하고 누구는 대학원에 갔지만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23살 겨울, 나는 뒤늦은 사춘기를 겪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음악을 좋아했고 소설을 좋아했고 그리고 영화를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것들을 나는 대학입시 이후로 미뤄두었지만…… 대학이라는 공간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기만 했던 그 세상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나는 오랫동안 헤맸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비틀거리다 실마리를 찾기 위해 내가 기댄 건 과거의 시간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출발선 삼아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어쨌든 살아가야하니까. 가슴 뛰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세월 저 편에 꼭꼭 묻어두었던 그 보퉁이라도 다시 풀어보면 안될까? 그 때부터 나는 영화 관련 강좌를 닥치는 대로 들었다. 열심히 영화를 보거나, 혹은 열심히 촬영을 한 후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누우면 새로이 시작될 다른 하루가 기대되곤 했었다. 그렇게 영화는 내게 축복으로 다가왔다. 어렵게 길을 찾아서 안심하고 보니 내 나이 25살이었다.

 

# 길찾기 혹은 길 만들기

영화제작 강좌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듣고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소모임을 만들어서 활동하는 동안 27살이 되었다. 성취없이 나이만 먹는 것같다는 생각에 조급해지기도 했다. 그 때 나를 아프게 했던 말이 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같아. 준비만 하는 사람과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 너는 평생 준비만 하고 있을 것같아.”

그 때 나는 돈을 모으고 있었다. 1995년 소니사에서 출시된 VX-1000이라는 카메라 덕분에 1인 제작자들이 부쩍 늘기는 했지만 편집장비는 여전히 비쌌다. 돈을 모아 편집장비만 마련하면 내가 다큐멘터리를 잘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딘가에 들어가서 신입이 되기에는 27살이라는 나이는 너무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영화를 하나 만들어야 어디라도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만 하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버렸고 뭔가 선택을 해야만 했다. 1997년 12월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토요일 오후, 나는 푸른영상 사무실을 찾아가서 조연출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단체생활이 시작되었다. 동갑이거나 나이 어린 선배들 틈에서 열등감과 싸우면서 내가 열심히 했던 일은 청소와 설거지였다. 선배들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냐고 물어왔지만 하늘같은 선배들이 만들어왔던 푸른영상의 명작 리스트에 내가 만든 영화를 추가시킬 것같지는 않았다. 선배 감독들의 조연출을 하며 선배감독이 오로지 작품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궂은 일을 도맡아하며 나는 뿌듯해했다. 그렇게 작품 하나가 만들어지면 내가 세상에 큰 도움이 되는 것같아서 기뻤다.

어느 날 선배가 말했다.

“너는 정말 타고난 조연출이구나. 푸른영상은 1인 제작 시스템이니 너도 네 영화를 만들어야지”

연출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푸른영상에는 늘 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가편집 시사회가 끝나고 나면 격렬한 토론이 일곤 했다. 먼저 작업을 시작한 선배들은 내게 늘 “작업은 너무 외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라는 말을 하곤 했었고 덧붙여서 다큐멘터리감독은 마음이 굳세어야 하는데 내가 눈물도 많고 마음이 여리다고 걱정하곤 했었다. 그리고 2000년, 드디어 나의 첫 영화를 만들었다.

 

#약한 마음으로 든 카메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극영화냐 다큐멘터리냐라는 고민은 별로 없었다. 내게 영화는 당연히 다큐멘터리였다. 실재하는 세계를 실재하는 인물을 찍음으로써 반영하고 그렇게 만든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나의 첫 번째 영화의 주인공들은 발달장애인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그 후 몇 편의 영화를 더 만들면서‘장애인 전문 다큐감독’이라는 이름표를 얻긴 했지만 처음부터 장애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건 아니다. 푸른영상에 작업 의뢰가 들어왔고 마침 그 때 입봉을 준비하고 있던 내가 그 일을 맡게 된 것 뿐이었다. 나는 푸른영상의 다른 선배들처럼 빈민, 국가보안법, 노동운동과 같은 큰 문제를 영화에 담고 싶었다. 그런데 의무감으로 시작한 작업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일상은 가끔씩 감동의 순간을 선물한다. 내 시간과 노력을 바쳐서 채집한 감동의 순간으로 나는 길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1시간이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내 영화가 관객들에게 내가 본 세상으로 가는 길이 되기를 바랬다. 내가 본 세상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나는 더 멀리 더 외진 곳으로 가고 싶었고 내 영화의 등장인물들의 좀더 내밀한 시간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니 바로 그렇게 내밀한 순간을 담고 싶어 하는 나의 영화적 욕망 때문에, 나는 찍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권력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촬영 초반부. 내 영화의 주인공인 발달 장애인들이 쾌활하게 웃을 때, 그들이 마음 아파하며 눈물 흘릴 때, 나는 무릎 위에 놓인 카메라를 들지 못한 채 몇 번이고 망설였다. 내 카메라가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면, 내 카메라 때문에 당신들의 웃음이 흩어진다면, 나 때문에 당신이 마음껏 울 수도 없다면, 다큐멘터리 감독은 될 수 있을지언정, 당신의 친구라고 할 수는 없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걱정하고 조심하며 긴 시간을 보내며 만든 영화를 내보였을 때 선배들은“꼭 너같은 영화를 만들었다”며 웃었다.

내 영화 속에서 나는 늘 불안한 나레이터이다. 화면 안의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만, 안정적이고 전지적인 정보를 가진 이야기의 전달자가 아니라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본인도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해가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 더 가까운 나레이터다. 또한 실패를 염두에 둔 기획자이다. 다큐멘터리는 늘 가설을 가진다. 늘 내가 가지는 가설은 51%의 믿음 안에서 세워진다. 첫 자리를 그렇게 조심스레 설정하고 나면 예민하고 섬세한 상태에서 작업 과정을 거친다. 다큐멘터리라는 것이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말은 그래서 내게 너무나 소중하다. 그렇게 전 과정을 거쳐 얻어낸 진실이라는 것 또한 확신에 차서 외칠 수 있는 견고한 것이 아니라 불안하고 흔들리며 끊임없이 의심하는 와중에 망설이며 얻어낸 진실일 뿐이다. 조연출로서 전 과정에 참여했던 <동강은 흐른다>가 그랬고 29살에 처음으로 만난 발달장애인들과의 교감을 다룬 <나는 행복하다>가 그랬다. 고향을 떠나는 것에 슬퍼하며 댐 건설에 반대할 것만 같았던 수몰 예정지의 주민들은 정작 만나보니 댐이라도 되어서 가난의 고리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고 있었고, 늘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었던 장애인센터 구성원들 사이에도 왕따와 폭력은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조사를 하고 사전 취재를 해도 카메라를 들고 바라본 현실은 머릿 속 현실보다 역동적이고 풍부했으며 그래서 가설이 실패하는 경험을 통해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은 한 뼘씩 넓어져왔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 때마다 나는 1mm정도 괜찮은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느껴왔다. 역동적인 세상과의 치열한 교감, 그것이 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어온 것이다.

 

#나는 왜 만드는가

서른 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인생경험을 나보다 먼저 한 선배여성들은 나보고‘철이 없다’고 했다. 가족 모임에서, 동네에서, 교회에서, 아이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감당해야하는 일들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영화에 담았더니 나와 비슷한‘문제적 여성’들이 나도 당신과 같은 마음이라고 손을 내밀어 화답해주었다. 처음 다큐멘터리를 시작했을 때 선배감독들은 나의 마음이 너무 약하다고, 다큐멘터리 감독은 마음이 굳세야한다고 조언하곤 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나는 약한 마음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남았다. 약한 마음이더라도 그 마음을 담아 카메라로 세상에 발언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사실은 내게 축복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내게 소재거리가 되고 나는 설득력 있는 발언을 하기 위해서라도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좀 더 혹독하고 좀 더 절실하게 겪을 필요가 있었다.

25살에 처음 만난 다큐멘터리, 그 때 다큐멘터리는 나에게 구원이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다큐멘터리는 내가 살아가는 힘이다. 나는 늘 마음이 약했으며 내 앞에 주어진 길들에 대해서 의심하고 회의했다. 많은 이들이 어떤 길을 선택해서 갈 때에도 내 안의 뭔가가 호응하지 않으면 나는 그 길에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뭐든 늦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안락한 삶을 보장해주지는 못했지만 삶을 확실히 풍부하게는 만들어주었다.

내 속에는 무수한 내가 있다. 나는 기혼의, 장애가 없는, 크리스천이자 페미니스트인 녹색당 당원이고, 세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최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장기치료를 받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는 나를 구성하는 이러한 무수히 많은 요소들이 녹아 있거나 얽혀 있다. 이 단순하지 않는 결들을 염두에 두고서 세계를 보다가 어떤 사람, 어떤 현상, 어떤 사건에 공명된다. 그렇게 나는 어떤 세계와 연결된다. 그것이 시작이다. 결국 다큐멘터리는 세계와 나의 연결성의 문제로부터 시작되는 거니까.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영화를 만드는 목적은 세계와 나의 연결성에 구체적인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다큐멘터리감독인 내가 만난 세계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 내가 그 세계와 접속하던 순간을 관객 당신에게도 만나게 하고 싶다는 희망, 그 열망과 희망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동력이 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는 만큼 만들고, 사는 만큼 발견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 주장에 관객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저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면 한 번쯤 귀를 기울여주자”라는 맘을 먹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나의 영화들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내 영화를 통해서 당신과 만나기를 원한다. 내 안에 있는 무늬와 당신 안에 있는 무늬가 같다면 나의 메시지를 당신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무늬를 품고 있는 당신과 만나기를 희망하며 나는 오늘도 카메라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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