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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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에게 중요한 것과 그것을 얻는 길
- 살고자하는 마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신령한 율법을 이루셨으나 의문의 율법은 폐하셨으니 만일 그 두 가지의 율법이 동일한 것이면 모순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버지의 말씀에는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교만한 자는 깨달음을 구하기보다 자신이 옳음을 나타내고자 거룩한 말씀을 이용한다. 또한 사람은 행위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나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으니 행위와 행함은 다른 것이어야만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위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이니 사람의 기준으로 선하고 옳게 보이는 것도 행위일 뿐이다. 반면 믿음의 행함은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니 예를 들어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돌이켜 방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미리 전하셨다. 이때 믿고 들어간 자는 의로 여기심을 받았으나 안 믿는 자들과 믿는다며 안 들어간 자들은 세상과 함께 사망으로 내려갔다. 마찬가지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멸망 당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 이와 같았으되 소돔과 고모라는 마지막 때의 예표이니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비로 세상이 멸망을 당하기 전에 심판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자들을 위해 마지막 때에 예비하신 방주가 바로 광야의 예비처이다.
비판치 말라는 것도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말씀들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옳고 그른 것을 말씀을 기준으로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고 거룩하신 영을 통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바울도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씀을 늘 거룩하고 신령한 교회에 전했다. 그러나 판단을 명하신 그리스도께서 비판하지 말라고도 하셨으니 모순이 되지 않으려면 판단과 비판이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판단과 비판의 각기 다른 정의를 깨달으면 비판은 멈추되 판단은 계속하므로 자신과 공동체의 거룩을 유지할 수 있다.
우선 판단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한 몸으로 모이는 상황에서 깨달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거룩하고 정결한 공동체와 함께하는 한 지체가 간음을 범했을 때 그 영혼을 앞에 두고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있을 때 오직 말씀을 편다. 그리고 간음한 그 영혼에게 이르길 그가 아버지께로 범죄한 것이요 또한 거룩한 지체로서도 범죄하였으니 돌이키라는 말씀을 명한다. 이처럼 오로지 말씀으로 행하는 그것은 판단이 되는 것이다.
이때 말씀으로 판단을 받은 자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을 이루기 위해 돌이킬 때에는 모든 지체들이 그를 따뜻하게 받아준다. 그리하여 돌이킨 자는 다른 자들과 함께 그 생명의 길을 계속해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판단을 받고도 돌이키지 아니할 때에는 두 번 세 번 다시 말씀으로 그에게 명한다. 하지만 말씀으로 판단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는 자는 한 몸에서 그를 내어 쫓는 것이 옳음은 적은 누룩이라도 온 덩어리에 퍼지기 때문이다.
반면 비판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니 공동체의 한 지체가 똑같은 간음의 죄를 범했다. 이때 말씀으로도 그를 명하여 돌이키라고 똑같이 말하되 범죄한 것에 대하여 그 영혼에게 어떠한 이유나 어떠한 말이나 어떠한 행위를 통해 그의 범죄한 모습을 가릴 수 있도록 말한다면 그것은 비판이다. 또한 그에게 말하길 범죄하게 된 이유를 대라고 하는 것도 역시 비판이되 간음한 자가 간음한 자에게 말씀이 이러하니 돌이키라고 하는 것은 세상말로 내로남불이니 곧 바리새인의 비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제자들에게 계시를 주실 때도 역시 비판치 말라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동체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그런 비판적인 말들은 조금도 들을 필요가 없다. 사람은 사람의 말과 생각과 의와 주장을 듣고 의와 생명에 이르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말씀에 순종하므로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과 타협하기보다 사람과 타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언제든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맞추는 자는 어떻게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냐고 생각하되 판단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요 말씀이다. 또한 말씀으로 판단을 받은 그 영혼을 그의 안에서 살피시는 분이 계시니 그 영혼의 마음의 판단은 오직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내리실 것이요 그리하여 한 몸에 거하는 자들은 오로지 비판이 아닌 판단만을 하는 것이 옳다. 그래야 자신도 원수의 선악에 의해 간음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그것을 보며 교훈을 삼을 것이요 또한 그 죄가 거룩한 공동체에서 더 이상 썩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하는 마음이 없거나 포기한 영혼들은 자기의 의와 생각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며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과 타협하는 데서도 돌이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그런 자들에게는 말씀의 깨달음을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히려 자기의 의와 깨닫지 못하는 말씀들을 합해 믿는 자들끼리 서로 거부하며 비판하며 싸운다.
예를 들어 어떤 자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니 자신은 판단하지 않겠다느니 완전한 사람이 없다느니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들을 하며 범죄한 그 영혼에게 명하여 돌이키라는 말조차 전하지 못한다. 게다가 어떨 때는 가장 의롭게 보이는 말로 즉 모든 심판은 하나님이 행하시니 우리는 무조건 용서와 사랑을 베풀고 그저 기도하자며 말씀의 판단을 말씀의 비판으로 바꾸므로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의로운 자리에 앉는다.
반대로 어떤 자는 판단의 정의를 모르니 판단하거나 끊어내라는 그 말씀들을 가지고 범죄한 영혼들을 판단하되 아직까지 그 죄를 끊어내지 못한 자신의 생각과 의와 감정과 경험으로 판단한다. 특히 자신의 생각과 관점이 다른 자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강하게 판단하되 늘 거룩하신 말씀들을 찾아 이용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심판보좌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는 그 행위를 육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멈추지 아니한다.
그런데 이렇게 판단의 의미를 모르고 말씀으로 판단하기를 즐기는 자들이 만일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사람의 피를 흘리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역사가운데서 구약의 제사장으로부터 수많은 자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며 칼로 찌르거나 불로 태워 다른 믿는 자들의 피를 흘리고 자신도 그 사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그것이 참으로 간편해졌으니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자손들은 키보드와 마우스로 이 순간에도 그 피 흘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며 오직 홀로 한 분 신으로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아버지의 품에 함께 계셨으니 완전한 하나님이셨다. 동시에 에덴에서 둘째사람의 육과 마음을 지으시고 그 깨끗한 마음 안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자신의 십자가로 거룩케 하여 아버지의 거룩한 자녀가 되는 그 부활의 생명을 주시고자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완전한 사람이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그 기쁘신 뜻을 이루는 십자가의 길이 그리스도께 참으로 고난스러운 것이었음은 아버지의 품에서 낳으신 아들이시라도 연약한 육을 입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길을 자기 혼자서 걷거나 혹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걷지 않으시고 오직 창세전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해 그 십자가의 길을 정하신 아버지의 계획에 따르며 자신의 안에 계신 거룩하신 영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그 순종의 길을 끝까지 걸어 결국에는 부활로 온전하게 되셨다.
그런데 초대교회 시대와 모든 일곱 교회시대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 고난의 길을 걸은 자들이 있었다. 또한 이 마지막 때에도 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의 길을 걸으신 그리스도를 인도하셨던 거룩하신 영께서는 지금도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들을 인도하시며 도우신다.
하지만 그들이 비록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며 아버지의 그 기쁘신 뜻에 이르고자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처럼 연약한 육을 입고 있다. 그러므로 그 연약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오늘 영육간의 일들을 염려하며 그 십자가의 길에서 내일 있을 일들도 염려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담긴 세 면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모든 염려를 이기고 끝까지 그 마지막으로 나갈 수 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세 개의 십자가에서 가운데에 달리셨으니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이 세상을 위한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그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셋째하늘의 온전케 된 의로운 백성이나 혹은 자신의 거룩한 자녀들로 삼으신다.
한편 오른편의 강도가 달렸던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들을 위한 십자가이니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후 십자가의 첫사랑을 잊지 않고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에 이르고자 하는 자들도 오로지 그 십자가의 희생만을 생각하며 나아가야 한다.
반면 왼편의 십자가는 오로지 이 세상의 십자가이니 그 십자가를 지는 자는 사망에 이를 것이요 오직 원수와 함께 영원한 고통가운데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가 그 세상의 십자가를 지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가 사람의 눈에는 매우 영광스럽게 보이니 많은 자들이 그 길로 가며 또한 사람은 누구나 오른쪽이나 왼쪽의 십자가를 지게 되어 있으나 많은 자들이 그것을 진다.
하지만 거룩하신 영께서는 거룩에 이르기 원하는 영혼들을 인도하시며 도우시는 보혜사이시니 고난과 영광으로 향하는 그 길을 걷는 자들이 늘 그리스도의 오른편에 있기를 원하신다. 또한 마지막에 그 십자가의 희생만을 생각하며 나가기를 원하시되 아버지께서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하셨으니 오늘의 염려를 하지 말고 내일의 은혜를 구하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는 것이 오늘의 걱정을 이기며 내일의 은혜 즉 그 기쁘신 뜻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육의 연약함과 믿음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오늘의 염려를 이기지 못하며 내일 있을 일들을 자신이 계획하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람은 그 길에서 내일 있을 일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일 일을 계획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의 일을 사람인 자신이 계획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요 잘못된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사람은 오로지 아버지의 은혜만을 구하되 오늘의 은혜를 구하지 말고 내일의 그 은혜를 구하는 것이 옳다.
또한 어린아이는 오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로 갈까를 고민하지 아니함은 이미 계획을 세워놓은 그의 부모로 인함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오히려 ‘내가 내일 무엇이 되겠노라. 미래에 무엇을 하겠노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자들은 매일 매일 그날의 은혜를 구하되 아버지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거룩하신 영께로 이끌리는 자들은 내일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그 꿈을 위하여 거룩에 애쓰며 오로지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그 은혜만을 구한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누구든지 오른쪽의 십자가를 지고 그 꿈을 품은 자들에게는 늘 은혜를 베푸시니 그 고난의 길이 오히려 즐겁고 형통하게 된다. 또한 자기의 마음도 원하되 연약한 육도 그것을 자원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음도 육도 자신이 원하는 그 고난의 길을 즐겁고 형통하게 걸은 자들이 자신의 안에 있는 원수의 죄와 이 세상을 이기므로 오늘 이 땅에서 그의 몸이 성전이 되어 마음의 천국을 이루고 내일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들 가운데 첫사랑은 잊지 않고 있으나 참으로 육의 연약함을 이기지 못하며 또한 믿음이 없다 하는 자들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의 능력과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 믿음을 키우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되 오직 한 몸으로 나아가고자 애씀이 옳음은 거룩하고 약한 다른 지체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그 고난과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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