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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1/23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살고자하는 마음
  2. 2009/07/28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살고자하는 마음
  3. 2009/07/12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살고자하는 마음
  4. 2009/07/01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살고자하는 마음
  5. 2009/06/21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살고자하는 마음
  6. 2009/05/29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살고자하는 마음
  7. 2009/04/13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살고자하는 마음
  8. 2009/03/30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살고자하는 마음
  9. 2009/03/16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살고자하는 마음
  10. 2009/03/09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살고자하는 마음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이 말씀은 2천년 전에 역사상 실제로 있었던 일이요 앞으로 마지막 때에 동일하게 있을 그 일에 대한 비밀이 담겨있다. 그런데 그 일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이 땅에 인자로 오셨던 나사렛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른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되 그렇지 못했던 성전의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동일한 일이 은혜시대가 끝나고 환난 때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도 그대로 이루어지리니 누구든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말씀을 잘 깨달으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생명에 거할 수 있다.

 

구약의 예언대로 이 땅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는 아버지를 믿는 유대인들 가운데 가난한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으셨으나 성전을 지키고 있던 자들에게는 전혀 환영 받지 못하셨다. 하지만 메시아를 사랑한 소수의 백성이든 사랑하지 않은 다수의 백성이든 그리스도를 따른 제자들이든 성전에서 제사를 인도하며 설교하던 목자들이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바로 의롭고 거룩한 자에게는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을 주고 불의하고 죄악된 자에게는 악한 자의 부활을 주기 위해 메시아가 심판 주로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과 계명과 법도와 함께 선지자를 통해 받은 예언도 있었으나 이미 광야생활을 할 때부터 장로들과 레위자손의 말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메시아에 대한 유전과 전통의 가르침도 있었다. 하지만 성전의 목자들은 모세오경을 주로 가르치며 예언도 전했으나 자신의 혀가 만들어내는 유전과 교훈을 더욱더 강조해서 가르쳤다. 이처럼 목자들은 모세율법과 예언보다 자기들의 유전과 가르침을 더 전했으며 그로 인해 백성들은 그것을 더 많이 들어오고 있었으되 참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은 목자들이 전하는 설교가 옳은지 그른지 구약을 펴 비교하지 않고 ‘목자들의 말이니 당연히 맞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성전목자들이 가르치는 유전과 전통의 권위는 당연히 기록된 토라와 예언보다 더 위에 있었고 백성들은 날 때부터 토라를 미간과 손목에 매고 늘 외우면서도 스스로 세뇌를 당했던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전부터 들어오던 메시아에 대한 유전과 전통의 가르침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이것이었다. “거짓메시아가 오면 그는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로도다. 그러므로 그가 오면 이 성전을 무너뜨리므로 너희들이 여호와로부터 흩어질 것이로되 너희들은 그 자를 오히려 기뻐하겠노라. 그러나 반대로 성전을 지키는 자들은 오히려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겠도다. 그것은 성전을 지키는 자들이 그 성전으로 인하여 백성들을 오직 여호와께로 묶으려 함이로도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예루살렘성전을 무너뜨리신 후에 그들을 자기에게로 오게 하여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임을 가르치시므로 백성들도 오직 인자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알리셨다. 또한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므로 거룩한 것이 아니요 날마다 그 거룩의 길을 걸어야 함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목자들은 크고 화려한 그 성전의 자리에 앉아 자신이 얻는 썩어질 육의 부요와 영광에 마음이 있었으니 성전의 가르침은 ‘육 일 동안은 세상에 나가 열심히 살되 거룩한 날은 오직 거룩하게 지켜야 함이로도다.’라며 오히려 백성들을 세상으로 흩어지게 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입을 벌린 독사처럼 자기의 유익을 위해 백성들의 영혼을 육과 세상으로 이끌되 말씀을 이용하는 그들을 독사새끼들로 보셨고 성전목자들은 메시아를 매우 미워했다.

 

또한 당시 성전목자들은 이 마지막 때에 많은 수의 영혼들을 이끌고 있는 목자들처럼 지 애비와 애미 때부터 육의 풍성함과 세상의 명예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들이 만일 성전에서 나와 메시아를 믿고 따르려면 자기의 손에 있던 부와 명예를 다 내려놓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으니 자신에게 육의 풍성함과 영광을 가져다 주고 있는 그 예루살렘성전을 무너뜨리고 있는 메시아를 환영할 수 없었다. 또한 거룩의 일을 하는 그들이 정작 거룩에 마음이 없었으니 마지막에 십자가를 통해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분명히 보고도 지금까지 참된 메시아를 거부하며 신명기18장의 유전을 들먹이며 예수를 죽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되 666을 넣어줄 가짜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환난 때에 썩어질 것과 헛된 곳에 마음을 둔 목자들도 마지막 때가 되면 택함 받은 일곱교회를 미워하며 이단으로 정죄하되 전통을 이용한다.

 

유대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르치며 들어오던 두 번째 유전과 전통은 이것이었다. “처음에 오는 자는 거짓된 자요 나중에 오는 자가 진짜이니 처음에 오는 자는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요 성전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로되 둘째로 오는 진짜 메시아는 너희들과 함께 모든 이스라엘백성들의 그 민족을 되찾아 해방과 평화를 주겠노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은 유대를 침략한 로마와 싸워 해방을 얻는 것이 아니요 자신의 마음 안에 거하는 선악과 싸워 죄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니 오히려 그들에게 이웃민족을 불쌍히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천년왕국의 안식은 은혜시대와 환난시대가 끝나고 인자의 재림 후에 이루어지고 영원한 안식은 그 천국의 끝에 영원한 셋째하늘로 올라갔을 때 시작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백성들은 그 가르침이 아버지의 사랑과 공의임을 깨닫고 거룩한 성전의 복음을 이루고자 메시아를 사랑하며 따라다녔다. 그러나 성전목자들과 다수의 백성들은 자기의 원함을 이루어주지 않는 그리스도를 두 번째 유전과 전통에 따라 가짜로 여겨 십자가에 못박고 지금까지도 자신의 거룩에 애쓰지 않고 이웃에 거하는 나라들과 싸우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엇을 위해 그 오랜 싸움을 하고 있으며 또한 언제까지 그렇게 칼과 총을 들고 전쟁을 연습할지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적그리스도와 함께 3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의 완전한 해방을 얻고 전쟁의 끝에 평화를 맺을지라도 나중에 가짜메시아에게 버림받는다. 하지만 그 버림받음을 통해 가난한 백성들은 오히려 깨달음을 얻어 2천년 전에 오신 나사렛예수를 메시아로 믿게 된다. 또한 그들이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토라와 예언을 보니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의 마음에서 거룩의 믿음이 회복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약속한 신약도 믿는다. 그러므로 가짜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하나로 묶고 666을 들고나왔을 때 그들이 이방민족의 일곱 교회와 하나가 되어 함께 싸우되 목 베임으로써 그 원수와 세상에게 넉넉히 승리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독사새끼들 가운데 바울처럼 뒤늦게 성전에서 돌이킨 소수가 다시금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며 또한 열방의 전통에 거하는 영혼들 가운데서도 오직 소수가 돌이키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던 군중들과 병든 자들과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과 가룟유다는 모두다 유대인들이기에 죄에서 자유케 하는 권위나 죽은 자를 살리거나 병 고치는 능력이 오직 여호와께 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나사렛예수라는 그 인자가 아브라함이 받은 그 복음과 부활의 언약에 이르게 하는 바로 그 메시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즉 교회시대로 말하면 이방인의 믿는 자들은 이미 보고 들어서 진리와 생명은 그리스도임을 믿고 있지만 문제는 자신의 목자들에게 듣고 있는 그 말씀들이 2천년 전에 십자가를 지신 바로 그 그리스도께로 나온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냐 아니면 사람의 유전과 전통의 가르침에 속한 비 진리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가난한 백성들은 유전과 전통의 가르침에 의해 거짓메시아인 인자를 어떻게 구별했으며 그리하여 사망으로 이끄는 성전에서 돌이켜 나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었는가?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에는 어떻게 유전과 전통의 수많은 비 진리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참된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때나 교회시대나 마지막 때나 참으로 쉽고 간단하고 정확하고 이성적이고 인격적이니 자신의 속마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또한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을 들을 때 과연 무엇을 믿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에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기에 육적이고 세상적인 복과 형통처럼 보이는 말씀들이 있다. 또한 말씀을 전할 때 자기의 생각을 넣어 사람들을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에게로 이끄는 목자들도 있고 거룩에 마음 없는 율법의 행위로 인도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므로 전통은 사람의 유전과 교훈을 전하며 들어왔으나 성경에는 고난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죄와 세상을 이기고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는 십자가복음도 밝히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기에 다수가 전자의 말을 달콤하게 여기며 따르고 있으니 후자보다는 전자의 말에 더 권위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공적인 복음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원수가 주는 그 육과 세상의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사람들에게 썩어질 육을 채우시거나 사망으로 들어갈 이 세상의 높은 곳에 앉히시거나 사람의 생각과 의와 선으로 이끌게 하시거나 거룩에 마음이 없는 행위와 열심으로 이끄시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십자가의 물과 피를 통해 그들의 몸이 성전이 되게 하시어 아버지와 하나되므로 평화를 이루게 하심이었다.

 

하지만 믿는 자들 가운데 다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십자가를 볼 때 자신의 안에 거하는 죄와 또한 이 세상을 이긴 후 거룩한 몸을 입고 부활에 이르는 믿음보다는 자신이 전통에서 들어온 것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니 멸망으로 들어가는 이 세상에서 돌이키지 못한다. 또한 자기생각과 지식으로 푸는 말씀을 끝까지 진리로 붙들리니 마지막 때에도 전자는 후자를 미워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끝까지 자기의 생각과 세상을 따르는 목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영혼들은 세상에게 버림을 받고도 끝까지 바빌론에 남는다. 그러나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펴 비교한 후 거기서 나온 영혼들은 광야에서 거룩의 믿음을 회복하리니 어떤 이는 휴거로 어떤 이는 목베임으로 어떤 이는 666을 받지 않고 다른 지체들과 함께 도망을 다니다 살아서 천국에 들어가 생명을 얻는다.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사람은 눈이 감기면 음란한 것들을 못 보지만 거룩하신 말씀도 못 본다. 입이 닫히면 거짓말과 욕과 비판을 못하지만 복음도 못 전한다. 귀가 막히면 세상의 헛된 말들을 못 듣지만 말씀도 못 듣는다. 다리와 팔과 몸이 구부러지면 세상에 들어가 썩을 것을 거두지 못하지만 감사의 찬양과 시를 부를 때 성소를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고 똑바로 서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중에는 모태에서 나와 1년 안에 혹은 태어나면서 불치병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처음엔 온전하다 나중에 성장하며 얻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다음과 같이 각기 다른 원인이 있다.

 

우선 태어날 때 혹은 태어나 1년 안에 얻은 연약함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 아버지의 그 영광을 위함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몸의 한 부분이 상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 이유는 첫째 아버지께서 그것을 허용하시므로 그들이 그 몸을 가지고 죄를 범하지 아니하게 하심이요 둘째 그들에게 자신의 연약한 몸이 낫고자 하는 소원과 더불어 그 썩어질 육신을 벗은 후에 얻게 될 그 거룩한 육체의 소망을 품게 하심이다.

 

그런데 이렇게 택함 받은 자들 중에 아버지의 그 마음과 선하신 뜻을 이해하며 감사하는 영혼이 있으니 그는 아버지의 그 영광만을 소망하기에 세상의 영광을 얻고자 온전하지 못한 몸을 가지고 불의와 죄악이 가득한 세상으로 들어가거나 자기의 욕심을 위해 그 몸을 죄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려서부터 오직 아버지와 아들을 믿고 의지하며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그 때를 기다리며 견뎌내니 함께하는 그의 가족들도 고난이 아니요 오히려 소망 중에 기뻐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때가 되었을 때 그가 온전한 몸을 가지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가도록 그의 연약한 몸을 치료해주신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가족이 그 거룩하고 신령한 공동체 안에서 영과 혼과 육의 거룩을 이룬 후 그 거룩한 육체를 얻어 아버지께로 영광을 돌려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이 택하심의 은혜를 받았어도 아버지께서 베푸신 은혜를 거부하고 감사치 않는 자가 있으니 그 영혼은 우선 영원한 셋째하늘에 계신 영혼의 아버지를 원망하고 또한 자신을 그렇게 낳았다며 육신의 부모도 원망하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특별한 은혜를 받지 못한 일반의 사람들을 시기하며 질투한다. 그러나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을지라도 원수와 같은 마음을 품는 영혼들은 아버지의 그 선하신 뜻과 반대로 나가게 되어있으니 그들은 헛된 영광을 얻고자 오히려 온전치 못한 그 육신을 이끌고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불평과 원망과 시기질투로 자신을 감싼 후 아버지의 은혜를 내팽개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과 바꾼 자들의 가정은 당연히 지옥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그 영광에도 이르지 못한다.

 

반면 하나님의 그 영광과 상관없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 그렇게 된 경우는 그의 죄로 인한 것이니 예를 들어 한 영혼이 앞을 못 본다. 그것은 그가 눈으로 범죄를 하였기에 아버지께서 허용하신 것이되 거기에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있다. 즉 전에는 온전했으나 자신이 범한 죄로 인해 상한 자기 몸의 한 부분을 보면서 이제는 그가 그 죄에서 돌이키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 죄를 돌이키므로 회복된 자도 택함 받은 자들과 함께 거룩을 이루어가되 자기의 몸이 상한 것을 날마다 보면서도 돌이키지 못하는 자는 오히려 그 죄를 붙들고 멸망 받을 이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당시 입이 닫힌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앞으로 이끌려 나온 그 영혼은 두 번째의 경우였다. 그러므로 그 영혼은 성인이 되었을 때부터 계속해 그 입술에서 범죄한 것이 세 가지였으니 첫째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설교를 들으면서 오히려 말씀을 늘 비판했고 둘째 자기가 원치 않는 말씀과 찔리는 말씀을 변경하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늘 방해했고 셋째 아버지와 아들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의 그 입술에서 신령한 말들이 나온 것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범죄한 영혼에게도 선하신 뜻을 베푸신다 하셨으니 그가 입으로 범죄하였기에 결국 아버지께서 그것을 허용하셨다. 그러므로 흑암의 세력은 그의 죄를 통해 그의 입을 합법적으로 붙들었으니 그는 48세가 되기까지 오랜 세월을 더러운 입을 열지 못하고 살다 그리스도를 붙들기 위하여 꼬투리를 모으고 있던 그 바리새인들에게 이용을 당하게 된다. 즉 바리새인들은 입이 닫힌 그 영혼을 그리스도께 데려가므로 그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는지 또한 무슨 말을 하는지를 관찰하며 기록하고자 했으니 그를 찾아가 거짓말로 꼬였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꼬임에 빠진 그 영혼을 그리스도께 데려와 그리스도의 앞에 세웠고 서기관들은 그리스도의 입과 행동을 지켜보며 기록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과연 무엇을 위해 사람들의 앞에 서서 입을 열어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지 그들의 속마음을 잘 알고 계셨다. 또한 범죄하여 몸의 한 부분이 상한 그 영혼을 찾아가 거룩을 요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악한 뜻을 이루고자 거짓말로 회유한 사실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큰 건물 안에서 영광을 취하며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있는 목자들도 생명의 기회를 얻도록 즉 돌이키도록 그곳에 모여있는 독사새끼들에게 이러한 경고를 하셨다.

 

“한 백성이 범죄하였기에 그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돌이킬 기회를 허용하시어 그의 육을 다물게 하셨도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것을 보면서도 지금은 원수에게 붙들려 그 입을 열고 닫고 하는 도다. 그러나 그 육이 사망한 후에는 아버지께서 너희 영혼이 그 입을 영원토록 닫게 하시겠노라.” 그러나 성전의 목자들은 자기의 뜻과 계획이 여호와의 뜻이라고 생각했으니 썩어질 육의 욕심과 영광스런 그 자리에서 돌이키기는커녕 오히려 입을 열어 그리스도를 가짜라고 했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입이 닫혀있던 그 영혼에게는 그가 범한 죄들을 돌이키므로 온전한 몸으로 회복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가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죄를 아느뇨? 네가 만일 깨끗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너의 죄를 씻으라. 그리하면 너의 입도 회복이 되겠노라.” 이 말씀을 듣자 그 영혼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죄로 상한 자신의 몸의 한 부분을 보며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선하신 뜻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그 세 가지 죄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다 회개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회개가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한 것임을 보시고 그의 입을 붙들고 있던 그 어둠의 세력을 불러내셨으니 그의 입은 원래대로 다시 열렸다.

 

이와 같이 사람은 죄악으로 인하여 어둠의 세력들이 그 영혼에게 들어가 누구에게는 입을 누구는 눈을 누구는 귀를 누구는 몸의 한 부분을 붙들어 그를 참으로 비천하게 만들되 그리스도께서 그 치유의 기적들을 보여주신 것은 그들이 온전케 되어 사는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요 그들의 안에 거하며 영원한 사망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그 더러운 것을 깨우친 후 회개를 통해 영혼의 깨끗함을 입고 또한 영혼의 깨끗함을 인하여 몸도 온전케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 하심이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동일하니 어디가 아프거나 붙들리거나 불치병에 걸리면 자신을 돌이키지는 않고 오직 병원과 은사자들을 찾아 다니며 그저 질병만 낫기 원한다.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가슴에 금띠를 띠고

어떤 나라의 백성들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백성들 가운데 몇몇 선한 자들은 반짝거리는 금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백성들은 각자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자신의 집안 깊숙한 곳에다 고이 간직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왕은 참으로 욕심이 많고 악한 자였다. 그러므로 돌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들을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돌들을 길거리에다 많이 뿌려놓았다. 하지만 선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금은 탐났다. 그러므로 두 개의 검은 자루를 가지고 돌아다니며 그들의 집에 들어가 금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자기가 빼앗은 금들을 자기가 거하는 곳에다 깊이 숨겨놓고는 기뻐했다. 이에 그 선한 백성들은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찾지 못하니 억울하여 이곳 저곳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악한 왕은 금을 빼앗기고 우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불공평하고 불의하게 대우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위쪽에는 의로운 나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선한 왕이 선한 백성들이 당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므로 그 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그 악한 나라의 왕을 쳐들어가 싸움에서 이겼다. 그러나 그 악한 나라의 왕은 자신이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악한 왕은 자기의 모든 군대를 동원해 그 선한 나라의 왕과 마지막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그 선한 나라의 왕은 금을 소중히 여기는 백성들을 이끌고 나가서 그 마지막 전쟁을 이겼다. 이에 그 승리한 왕의 종들은 그 패한 나라의 왕궁에 들어가 그 악한 왕이 빼앗았던 금들을 다 찾았다. 그리고 그것을 띠로 만들어 전쟁에서 승리한 자기의 왕에게 바쳤다. 그리고 그 선한 왕은 싸움에서 승리한 기념물로서 그 소중한 금띠를 자기의 허리에 둘렀다. 그러자 그 무엇보다 금을 소중하게 여겼던 백성들은 그 선한 왕의 모습을 보고는 기뻐하며 좋아했다. 그리고 그 선한 왕은 그 소중한 것을 자신과 함께 싸움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나누어주며 그들의 허리에 묶어주었다.

 

이와 같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와 싸워 이기게 되면 그 이긴 나라가 진 나라의 가장 소중한 것을 왕께 드린다. 그러면 싸움에서 승리한 왕은 수고한 대가로서 그것을 취한다. 마찬가지로 전쟁에 능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원수가 이끄는 이 세상을 이기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신 후에 아버지께로 받은 금을 자신의 허리에 묶으셨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그와 같이 세상을 이기는 자들도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그것을 얻어 허리에 묶게 된다.

 

그러므로 원수는 아버지와 아들께로 의롭고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자신의 마음에 욕심과 교만을 품고 셋째 하늘에서 죄를 창조했다. 그리고 그 선악의 말과 행위로서 자신과 다른 종들을 더럽혀갔다. 그러나 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으니 아버지께서는 범죄하고도 끝까지 돌이키지 않은 그를 셋째 하늘에서 쫓아내셨다. 그리고 이 첫째 하늘의 모든 것들은 마지막에 유황불 못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신 아버지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마지막에 그 형벌로 들어가게 될 원수는 이미 사망으로 들어간 자이다.

 

그런데 원수는 이 첫째 하늘로 쫓겨난 후 태초에 의롭고 선하게 창조된 그 둘째 사람을 미혹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도 자신의 마음에 욕심과 교만을 품었으니 원수처럼 타락했다. 그리고 원수는 사람이 타락하는 그 순간에 사람의 마음에다 뿌리가 있는 나무로서 그 선악의 죄를 심었다. 그리하여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자기의 욕심과 교만에 이끌리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위로 불의와 죄를 범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사람도 만일 그의 인생가운데 회개치 아니하면 원수를 심판하신 것처럼 심판하신다. 그리하여 거룩해지라는 그 말씀에 끝까지 불순종하고 회개치 않은 자가 이미 사망으로 들어간 그 원수를 따라 유황불 못의 형벌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시며 욕심과 교만을 품지 않으셨으니 범죄치 않으셨다. 또한 불의하고 죄악된 이 세상도 이기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신 후에는 아버지께로 금을 받아 자신의 허리에 두르셨다. 하지만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금이 아니라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싸움에서 승리하신 후 자신의 허리에 금띠를 묶으신 게 아니었다. 오직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금과 같이 빛나는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을 입으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부활하신 그 모습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있다. 그러므로 자신과 같이 세상과 죄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도 금띠를 띠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은혜를 얻은 후 그 금띠를 원하는 자는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생각과 세상에서 돌이켜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을 이루어간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가 마지막에는 아버지께서 주신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 얻은 피로 산 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그 죽음은 사망권세를 가진 원수와 그가 이끄는 이 세상을 이기는 죽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그와 같이 이긴 자들도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그것을 얻어 허리에 묶는다. 그리하여 태양보다 더 밝은 황금 같은 빛으로 셋째 하늘을 영원히 비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오직 자기만을 위한 욕심과 교만을 품은 자들은 그 소망의 금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돌을 소중히 여긴다. 또한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하지만 마음은 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돌과 헛된 영광을 원수에게 얻는다. 그러나 그것은 불의와 죄 없이는 쌓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그 뜻을 거부하고 사망권세와 이 세상에 묶여있던 그가 마지막에 원수와 함께 그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당시 감람산 맞은편 언덕에 긴 타원모양의 거대한 성벽 안쪽이 예루살렘성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통곡의 벽안에 세워진 직사각형모양의 높은 성전 안에 돈 바꾸는 자들과 제사짐승을 사고파는 넓은 공간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독사새끼들이 문안 받기 좋아하는 시장이다. 그리고 그 안에 다시 사람 키보다 조금 더 높은 담을 쳤으니 그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고 그 좌우로 두 개의 긴 공간이 있으며 마지막 부분에 뜰이 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성소까지 대제사장은 지성소까지 들어가되 백성들은 뜰과 좌우의 공간 즉 회당까지 들어와 거할 수 있다. 그런데 성전목자들 가운데 한 명이 성소에서 나와 말씀을 봉독하고 그 뜻을 말해주는 시간을 정하며 또한 사람들을 회당의 한 장소에 모아 바리새인의 설교를 듣도록 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또한 회당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하므로 모든 것이 오로지 같음이 없고 분쟁이 없도록 했으니 그가 바로 회당장이다.

 

그리스도의 당시에 회당장은 모두 세 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영혼의 이름은 야이로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성인의 나이인 12살에 이른 사랑하는 외동딸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딸이 이제는 육신의 시간이 다 되었기에 그가 자신의 뜻대로 자기의 육체를 이용하지 못하고 그저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야이로의 딸은 죄가 쌓여 얻게 되는 그 어떤 질병으로 인함이 아니요 혹은 자신의 육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해서 얻는 질병으로 인함도 아니요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태어나며 얻은 질병으로 인함도 아닌 오직 그의 육의 수명이 다하여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자신에게 다가온 그 죽음의 문턱에서 그리스도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 여자의 영혼은 아직은 죽음이라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리스도께 방문을 요청하고 싶었다. 유대인으로서 만물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았으며 그리하여 자신이 거룩을 이룰 수 있도록 육신의 시간을 허락해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그리스도께 구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아비를 통해서 부탁했다. 그것은 유대인여자인 자신이 부끄러울까 했기 때문이요 또한 스스로 깨닫기에는 이미 자신의 때가 거의 다 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자기의 아비에게 요청을 했으나 결국 그의 영혼이 12년 동안 거했던 그 육을 떠났다. 하지만 죽지 않고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자기 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자기의 목숨까지 바쳐 자식을 구하려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으니 회당장의 자리는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앉아있던 자리보다 딸을 더 소중하게 여겼으니 그 여자의 영혼이 육에서 나온 후 인간의 시간으로 약 15분 후에 집을 나와 발걸음을 재촉해 그리스도를 찾아가게 된다.

 

야이로는 그리스도를 만나자 유대인으로서 가장 정중하고 간절한 부탁의 표현을 했다. 그러므로 그는 먼저 그리스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머리를 그리스도의 발 위에 얹었다. 하지만 그가 날마다 간구한 것은 영의 생명이 아닌 썩어질 육의 생명이었으니 그리스도께 자기 딸의 육의 생명을 구했다. 그러므로 독사새끼들에게는 항상 엄중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알릴 바를 알리시고자 ‘육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되 네 영혼이 어디로 갈까를 생각하고 구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야이로는 썩어질 육에서 영원한 영으로 헛되고 헛된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로 자신의 마음을 돌이켰다. 그리고 그 증거로써 자신과 딸의 썩어질 육의 생명이 아닌 영원한 영혼의 생명을 간구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회개한 마음이 진실함을 들여다보시고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따라 즉 그 여자의 육체가 거룩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을 한 번 더 허락하시고자 야이로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이미 피리를 부는 자들이 와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풍습을 보고 따라서 피리를 부는 것은 그 육체에서 떠난 그의 영혼이 그와 가까웠던 영혼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그 영혼과 또한 그 함께 하였던 자들에게 그 악한 영들을 계속 붙들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어리석게 믿는 자들과 이방인들은 영적인 세계의 깨달음이 없으니 썩은 몸을 장사하러 가거나 굴에 넣을 때 피리소리를 내는 것은 죽은 자와 함께했던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세상의 문화를 따르는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또한 슬픈 소식을 듣고 모인 야이로의 몇몇 친척들과 또한 자신을 따르는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이 여자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신 후 제자 셋과 부모만 데리고 그 여자의 몸이 놓여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전에 야곱이 그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돌을 베고 잔 것을 기억하므로 영혼이 떠난 몸이 쉰다는 의미로써 만든 풍습이 있었으니 죽은 자가 어린 생명이면 그의 부모가 단단한 돌을 들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누운 자가 성인이라면 그의 가장 가까운 두 사람 혹은 네 사람이 그 길쭉한 돌을 들고 들어가되 그 돌을 들어줄 자가 없으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혼이 떠난 그 여자의 몸도 유대인의 그 관습에 따라 편편한 돌 위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과 때가 있으며 또한 그에 따라 그 여자의 영혼은 육신의 죽음을 원치 않았고 또한 그의 부모도 마음을 돌이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돌 위에 누워있는 그 몸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그 육에게 명하신 것이 아니요 그 육을 움직일 수 있는 그 여자의 영혼에게 말씀하신 것이니 하나님의 일곱 영은 주인의 명령에 순종해 다시금 그 여자의 영혼을 이끌어 그의 몸으로 인도했다. 그러므로 그 여자의 영혼은 자기의 육체에서 나간 후 사람의 시간으로 90분 후에 다시 돌아왔다.

 

이제 그 여자의 영혼은 자기의 육체로 돌아온 후 아버지의 뜻에 이르기 위하여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선악의 죄와 싸우며 온 힘과 온 마음을 다했다. 자신에게 육의 생명을 한 번 더 허락하신 아버지의 그 뜻과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요 그에게 살고자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그것을 깨우쳐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마지막에 결국 영과 혼과 육의 거룩함을 이룬 후 다시 육을 떠났을 때 유대인으로서 그토록 원하던 거룩하고 영원한 육체의 생명을 얻어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었다. 한편 그 여자의 아비는 당연히 독사의 자식들에게 성전의 좋은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으니 야이로는 스스로 그 배설물을 버리므로 자신의 첫 마음을 지켰다.

 

한편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남의 은혜를 얻은 후 첫사랑을 붙들고 깨어있는 영혼들은 달리다굼이란 말을 통해 기억할 것이 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의 능력이 교회시대와 또한 마지막 환난 때에도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거룩하고 신령한 교회에 임하실 것이요 아버지께서는 그 이방영혼의 마음과 믿음을 보시고 그 약속에 따라 자신의 뜻과 때에 맞추시어 이 땅에서 썩어질 그의 몸을 일으키신다. 그리하여 죽었다가 살아난 그 이방인도 달리다굼이라는 말을 들었던 그 여자의 영혼처럼 자신의 온 마음과 힘을 다해 거룩을 이루어가리니 아버지께서는 광야로 나온 모든 믿는 자들이 그 능력을 보고 다 함께 일어나 오직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가기를 간절히 소원하신다.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사람은 자신과 깨끗한 첫사랑을 나눈 사람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그 사랑을 자신의 마음에서 잊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 다가와 자신을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의 마음에서 그것을 잊은 사람은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 다가와서 그 아름다움을 줄 때 그것을 곧 취한다. 또한 아름답게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눈앞을 지나갈 때 그를 본 후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자기발로 그 사람을 따라가 그와 하나되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거듭남의 은혜를 얻은 영혼과 그리스도와 이 세상의 관계를 뜻하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받은 그 첫사랑을 잊은 자는 자신의 마음을 이미 세상에 빼앗겼으며 썩어질 육을 얻고자 점점 세상으로 들어가는 자는 자기의 마음에서 첫사랑을 잊어가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마음의 증거로서 그의 손에 이런 저런 육과 세상의 것들을 쥐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셨을 때 그리스도의 신령한 신부가 되는 것은 포기한 영혼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 첫사랑을 잊지 않은 자들이 있으니 그 마음의 증거로서 그의 손에는 세상의 것들이 하나도 없으며 행여 있거나 없어도 그것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 첫사랑을 회복하고 있는 자는 이 음란하고 불의하고 죄악된 세상에서 마음을 돌이켜 오직 아버지의 그 뜻과 셋째 하늘에 마음을 둔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취했던 헛된 것들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이 마지막 때에 바로 이러한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셨을 때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며 형제자매가 되기 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선악의 죄와 싸우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피 흘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마음이 정직한 자를 의로우심과 선하심으로 인도하신다. 그리하여 깨끗한 마음과 정직한 손을 가지고 거룩을 이룬 그들이 마지막에 들림을 받거나 산 제사를 드린 후 거룩한 육체의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멀리서 둘째 하늘의 낙원을 이끌고 내려오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기다리는 영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기 원하신다. 그래야 그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되 그리스도의 성품을 잘 깨닫고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거룩하신 영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모습들은 오직 첫사랑을 잊지 않고 깨어있는 영혼들과 거룩에 애쓰는 영혼들만이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자비가 풍성하시니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거나 갈급한 자에게도 그 깨달음을 허락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먼저 발에 끌리는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옷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으니 누가 그 옷을 입는지를 알면 그 의미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첫째 한 나라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왕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는다. 그리고 왕이 하는 일은 다스림이요 또한 자기의 말에 순종하며 자기의 일에 충성한 자를 자신의 가까이에 두고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다스리게 한다. 마찬가지로 만물을 창조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따르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마음과 영혼을 다스리시니 그리스도를 따르며 거룩을 이루어가는 그는 마음에 늘 평화와 기쁨을 누린다. 그러므로 거듭난 한 영혼이 마음에 늘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며 말씀에 순종하므로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는 그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과 고난과 고통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셨을 때는 원수가 더럽힌 이 첫째 하늘의 모든 것을 태초의 낙원과 같이 선하게 회복시키신 후 천년왕국의 왕으로서 이 땅을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되 자신을 위해 충성한 자들과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마음에 늘 평화와 기쁨을 누렸던 그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 천년왕국의 영광과 권세에 참여하는 것은 그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발에 끌리는 옷은 둘째로는 많은 자녀들 가운데 장자의 권위를 가진 자가 입고 셋째로는 혼인예식을 위하여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이 입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구약과 신약의 많은 자녀들 가운데서 맏아들로서 다른 형제자매들을 자신의 고난 받은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두 번째 의미요 그가 신랑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몸에 영과 혼과 육이 정결한 신부들을 자신의 지체로서 맞이하는 모습이 세 번째 의미이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당시 그리스도의 앞에 나온 그 여자의 성품은 조용했으며 앞에 있기보다는 뒤에서 숨어있기를 더 좋아하였으되 내색은 많은 처녀였다. 또한 거룩을 이루는데 자신의 육신을 걸림돌로 여기며 오직 자신의 집안에 거하면서 늘 자신의 깨끗함을 소원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과 믿음이 거룩을 원하였어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버지의 뜻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집안에만 거하며 거룩에 이르고자 애쓰되 오히려 그 육신에서 나오는 날을 날마다 소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아버지의 뜻에 이르고자 홀로 거룩에 애썼지만 홀로 애쓴 그것이 오히려 그를 죄악에 거하게 했으니 즉 그는 늘 사람들을 만나기 원치 아니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그와 함께 할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자신을 그 상황에서 구원해 줄 남자가 없음을 깨닫고 죄의 짐을 지고 또한 육의 질병을 가지고 사망을 바라보며 하루하루의 삶을 견디고 있었으니 혈루증은 사람의 피가 생성하지 아니하며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하얀 피가 썩어져 가므로 육신이 날마다 힘을 잃어가면서 사망으로 들어가는 병이었다.

 

이방인들은 가족들 가운데 한 명이 큰 병에 걸리면 그를 살리기 위해 병원과 의사를 찾아 다니며 자신의 모든 물질을 다 쓴다. 하지만 그것을 아깝게 여기지 아니함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 그것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질병이 죄에서 시작되며 또한 그것을 성전에 거하는 목자들이 말씀으로 고칠 수 있음을 잘 알았기에 그 여자의 가족과 친지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어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소유들도 아낌없이 제사장들과 대제사장에게 넘긴 후에 그 여자의 깨끗함을 원했다. 그러나 독사자식들이 말씀과 제사로 깨끗함을 베풀지 못함은 그들도 그 죄악과 함께 거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 자신도 또한 그 여자와 그의 가족들도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그 여자는 드디어 여호와의 생명을 주는 그 남자의 소식을 들었으니 그때 그의 나이가 27살이었다. 그러므로 스스로는 거룩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과 또한 종교지도자들을 통해서는 육신의 깨끗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던 그 여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음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안에 거하던 죄는 네가 만일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며 생각과 몸을 붙들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살고자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자신을 붙드는 그 생각과 오래된 그 질긴 성품을 이기고 오히려 그 죄의 짐과 악한 질병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자신이 염려한대로 그곳에는 이미 온 마을사람들이 나와서 그리스도의 주위를 둘러싸고 따라가고 있었으니 그 수효는 472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지 아니하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따라가며 조금씩 조금씩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또한 그의 마음은 인자의 옷자락만이라도 잡으면 자신이 그 육신의 질병에서 깨끗함을 얻을 것이요 영혼에 거듭남의 은혜를 얻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바로 뒤에 다다랐을 때 그 거룩의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하얀 옷자락을 붙잡았던 것이다.

 

그 여인이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잡았을 때 일어났던 역사는 이러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혼이 처음부터 영과 육의 나음을 얻기 원했던 마음을 읽으셨으며 또한 그가 메시아의 믿음을 가지고 옷자락을 붙들었다는 것도 아셨다. 그러므로 자신을 섬기던 종들에게 육신의 치유와 영의 거듭남을 명하셨으니 하나님의 일곱 영이 그 여인과 함께하는 종들에게 시켜 그의 육신도 나음을 얻고 또한 그의 안에 거룩하신 영께서 임하시어 영도 인치실 수 있도록 종들이 그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여인의 속과 겉을 깨끗하게 닦았다. 그리하여 마가는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을 깨닫고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셨다는 그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결국 그 여인의 거룩에 대한 마음과 믿음의 소원대로 이루어졌으니 그의 영도 또한 그의 육체도 깨끗하게 씻김을 얻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진 유대인들이 그토록 소원하던 그 중생의 씻음도 임했다. 또한 그 영의 해방으로 인해 한 순간에 그의 육안에 하얀 피가 필요한 만큼 생겨났으니 힘을 잃었던 육신에도 곧 힘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여인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것과 또한 육신의 질병에서 구원받았음을 깨닫고 감격하며 감사했다.

 

그런데 다른 병자들과 그 여인은 차이점이 있었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질병을 가진 자들이 나왔을 때 그들을 고쳐주시기 전에 항상 모든 죄를 아버지께 회개해야 함을 깨우쳐주셨다. 모든 질병은 욕심과 교만과 선악의 죄로부터 시작이 되기 때문이요 먼저 죄가 용서받아야 육신도 온전케 되기 때문이다. 한편 불치병을 가지고 태어난 자와 태어난 지 1년 안에 병을 얻은 자들이 나왔을 때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아버지의 뜻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후에 치유를 허락하셨다. 하지만 그 여인의 경우는 회개를 하지 않아도 영혼과 육체에 은혜를 허락하셨다. 그 이유는 그 여인은 다른 영혼들과 달리 이미 자신의 죄를 늘 자백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가 이제는 거룩의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자신에게 나왔다는 것을 이미 그리스도께서 아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 여인은 영이 거듭나는 은혜를 얻은 후 늘 기도로써 자신의 혼의 거듭남을 이루어나갔다.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통해 자신이 들은 말씀들에 늘 순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신랑에게 받은 그 첫사랑의 은혜를 자신의 의와 썩어질 육의 욕심과 헛된 세상에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므로 자신의 안에서 나오는 그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이 자신의 썩어질 육신을 떠났을 때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정결한 신부의 몸을 입고 부활하여 유대인들 가운데 아버지의 딸이 되었으니 마태는 그것을 깨닫고 여자여 안심하라는 말씀대신 딸아 안심하라고 기록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포도주를 자신의 피로 상징하셨으며 그 상징은 생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유대인은 그 약속된 생명을 얻으려면 여호와의 법도와 계명과 율법에 순종하므로 거룩을 이루어야 하기에 포도주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이루어주시는 여호와를 믿고 자신의 마음을 드린 영혼들은 아담 이후로 노아시대든 율법시대든 그 상징의 의미를 알고 순한 짐승의 살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거룩에 애썼다. 물론 자신의 마음과 믿음을 썩어질 육과 헛된 세상에 빼앗긴 자들도 성전에 들어와 동일한 것을 먹고 마시며 동일한 행위를 보였지만 자신이 하는 행위가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성전에 모일 때 늘 포도주가 필요하니 대대로 다음과 같이 포도주를 빚었다.

 

그들은 좋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 우선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는다. 또한 포도원을 해치는 짐승이나 열매를 가져가는 자들을 막고자 망대를 세운다. 동시에 포도주를 담는 그릇을 만들되 새거나 다른 것이 들어가지 않도록 나무로 빈틈없이 만든다. 그러므로 포도주를 담는 그릇을 만드는 일은 포도나무를 가꾸는 일만큼 힘든 일이다. 이제 때가 되면 포도를 따서 틀에 넣고 짠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놓았던 그 나무통에 담고 뚜껑을 닫아 햇빛이 들어가지 않는 서늘한 곳에 보관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 포도주를 담았던 그릇에는 또다시 포도주를 담지 아니한다. 그 이유는 그 통이 이제는 더 이상 포도주를 붙들 수 없기에 이곳 저곳에서 포도주가 흘러나와 다 버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포도주를 한번 포도주를 담았던 그릇에 보관하면 썩은 향기가 나니 그런 포도주를 누가 마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그릇을 만드는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반드시 새 포도주는 새 그릇에 담아서 숙성을 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유대인들이 포도주를 담그는 과정을 통해 요한의 제자들도 또한 자신의 제자들도 또한 교회시대에 아버지께서 택하신 7교회들도 깨닫기 원하셨던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바로 신랑인 자신과 거룩하고 신령한 신부의 관계이되 포도주의 비유에서는 특히 교회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떠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선 새로운 포도주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새롭게 거듭난 생명의 영혼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영혼이 거듭남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주신 그 영원한 생명의 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포도주를 담는 새로운 그릇이라는 것은 영이 거듭나는 은혜를 받은 자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통해 혼의 거룩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과 마음을 지키고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처음에 받은 그 사랑과 은혜를 잊지 아니하는 자들은 자기의 마음과 믿음을 세상에 빼앗기지 아니한다. 오히려 자신이 처음에 품었던 그 믿음과 마음을 오직 거룩에 두고 자신의 신랑만을 따르고 있으니 그들이 바로 새 그릇이다.

 

반면 낡은 그릇이라는 것은 피가 있는 영혼들 중에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에 이른다는 그 믿음과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거룩에 마음과 믿음이 없기에 이 세상과 사람으로 인해 시험에 든 영혼들과 또한 거룩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포함된다. 하지만 그들도 마음과 믿음을 거룩에 둔 자들과 동일한 행위를 보인다. 그러나 거룩의 모양은 동일해도 그들의 믿음은 썩어질 육과 헛된 이 세상에 대한 것이니 그들의 마음은 다른 남편에게 빠져있다.

 

또한 사람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새로운 나무 그릇을 만들어 그 안에 새 포도주를 넣어 보관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피를 얻은 한 영혼이 아들을 통해 얻은 그 생명의 약속을 이루기 원한다면 그는 새로운 그릇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자신의 마음이 낡은 그릇 안에 있다면 마음을 돌이켜 새로운 그릇으로 옮기는 것이 옳다. 그래야 자신도 믿음과 마음을 거룩에 두고 애쓰는 자들과 함께하며 그리스도의 안에서 거룩하고 신령하게 숙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낡은 그릇에 새로운 포도주를 담는 자는 우선 그 포도주에서 썩은 향을 낸다. 그러다 결국 그 썩은 틈으로 흘러나가 땅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거듭난 영혼이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과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자들과 함께하면 자신도 그들처럼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거룩함과 신령함을 이루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환난이 임박한 이 마지막 때에 많은 자들이 이 길이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라며 또한 그들에게 생명을 준다며 많은 일들을 하되 그들은 그 죄로 인하여 오히려 불의하고 죄악된 향기를 안과 밖으로 내뿜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믿는다 하며 죄와 함께하는 영혼은 받지 못하심을 마음이 없는 행위에 빠져 거룩의 모양만을 보이는 자들과 은혜의 방종에 빠진 자들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거룩을 원치 않는 자들은 여러 가지 행위들을 하다가도 마지막 때에는 오히려 세상으로 도망치게 되어있다.

 

이처럼 피를 얻은 한 영혼이 이 땅에서 십자가를 통한 거룩의 능력을 믿는 공동체나 혹은 그렇지 못한 공동체와 함께하되 그 결과는 생명을 얻어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느냐 혹은 이 세상과 함께 사망으로 들어가느냐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러한 새 그릇을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찾나 걱정하지 않아도 됨은 그 생명과 사망의 기준이 자신의 마음과 믿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을 포기한 자는 낡은 그릇 안에서 율법의 영에 인도를 받을 것이요 자기의 생각을 따르는 자는 단단한 그릇에 남아 자기의 의를 세우는 목자를 따라 어두운 곳으로 들어갈 것이요 육과 세상의 복을 원하는 거짓된 자는 거짓선지자가 유황불 못으로 인도해줄 것이다. 마찬가지 원리로 거룩을 원하는 자는 어두운 세상에 거할지라도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거룩하신 영께서 새 그릇 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니 독수리날개에 업혀 광야로 나온 자들은 십자가아래에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다 들림을 받고 대환난에서 산 제사를 드리고 그 기쁘신 뜻에 이르게 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사람들은 컴퓨터를 사용하다 고장 나서 고칠 수 없게 되면 새로운 것을 산다. 이때 어떤 사람은 못쓰게 된 컴퓨터를 미련 없이 통째로 버리지만 어떤 사람은 쓸만한 부품들을 떼어내서 보관하고 어떤 사람은 전체를 당분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혹시 고쳐질까 또한 나중에 필요할 때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도 회복되지 못하거나 쓸모 없는 것들은 미련 없이 내다버린다. 또한 새 컴퓨터에서 부품을 뜯어내어 헌 컴퓨터에 붙여 사용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마찬가지로 새 옷의 한 부분이 필요할 때 헌 옷에서 좋은 부분을 뜯어서 붙이지만 헌 옷을 위해 새 옷에서 필요한 만큼을 뜯어서 붙이는 사람도 없다.

 

이 비유에서 새 옷이라는 것은 한 영혼이 거룩에 이르렀기에 새 옷을 입을 것을 예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신령한 공동체에 거하는 영혼들은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혹은 통해 거룩하고 신령한 육체를 입는다. 반면 헌 옷이라는 것은 그가 거룩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세상에서 죄가 가득 찬 그 옷을 입고 있음을 예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안에 거하는 선악을 따라 말하며 행하고도 자기의 생각에서 돌이켜 거룩에 애쓰지 않은 영혼은 한 몸에 거할 수 있는 옷을 입지 못하니 그것은 그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법적인 심판대에서 유황불 못이나 어두운 곳이나 온전케 되는 곳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헌 것에 대한 미련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비록 헌 것이요 고장이 났어도 혹시나 고쳐질까 기대하면서 쓸만한 것들은 끝까지 이용해보려고 하되 도저히 쓰지 못하게 될 것들은 결국 버린다. 하물며 아버지께서는 영이 가난한 자와 자신의 안에 거하는 그 죄를 애통하는 자에게는 진리를 베푸시어 거룩으로 이끄시되 꺼져가는 등불도 끄시지 아니하신다. 또한 자신의 살과 피를 아끼지 않은 아들께서도 한 영혼을 한 순간에 끊어내지 않으시고 한 번 두 번 세 번의 기회를 주신다. 그러므로 한 몸에 있어야 할 자가 있고 있어야 되지 않을 자가 있으니 그 기준은 이것이다.

 

어떤 나라에 목욕탕이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목욕탕의 주인은 마음이 선하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공짜로 목욕탕을 이용하라고 허락했다. 이 소식을 듣고도 어떤 자는 목욕탕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으니 온 몸이 근질거려도 깨끗이 씻기보다는 오직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등과 몸의 이곳 저곳을 긁고 있던 사람들 중에 오직 깨끗하게 씻기를 원하는 사람들만 목욕탕으로 향했다. 이에 목욕탕 주인은 세상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여러분이 깨끗하게 목욕을 마치도록 깨끗한 물을 충분히 준비해두었으며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속옷과 정장을 선물로 주겠습니다. 그러나 목욕을 원치 않는 사람들은 이 목욕탕에서 스스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주인의 말이 끝나자 어떤 사람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 몸을 불린 후에 마음을 다해 땀 흘리며 때를 밀었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가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옷을 벗기는 했지만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오히려 삼삼오오 둘러앉아 술 담배를 하며 진실한 목욕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주인은 목욕탕을 더럽히는 그들에게 나가라고 하지 않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래도 그들이 목욕하러 들어가지 않자 주인은 이곳은 재미있게 노는 곳이 아니라 목욕하는 곳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만 있다 하겠다고 말한 후 이것은 목욕비라며 주인에게 돈을 내고 등과 몸을 긁어댔다. 그러나 주인은 더러운 돈을 받지 않고 다시 한참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계속 놀기만 했다. 이에 주인은 이번에도 나가라고 하지 않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 동일한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등과 몸을 긁으며 사람들을 목욕탕에 많이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이에 주인은 또다시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이제 목욕탕밖에 나가서 놀다 묻힌 더러움까지 목욕탕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하지만 주인은 그래도 나가라고 하지 않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 이제는 마지막으로 동일한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목욕은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목욕비도 많이 내고 사람들도 많이 데려왔으니 우리에게도 저 선물을 달라며 등과 몸을 긁어댔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주인이 그들에게 나가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왜 우리를 내쫓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선악으로 인하여 다 죄인이기에 거룩에 애쓰는 자다. 그리스도의 피로 영이 거듭난 후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에 거하는 자들은 더욱더 그러하니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요 거듭난 영혼들이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할 온전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영혼이 아무리 불의한 죄인이라 하여도 그가 거룩에 이르고자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새 옷을 그에게 배불리 먹여주신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거룩하신 신랑이 한밤중에 돌아왔을 때 신령하고 신실한 영혼들을 맞이하시는 것이니 십자가를 의지해 거룩에 이른 그들이 그 신령하고 거룩한 옷을 입고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죄가 자신의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오늘이요 내일은 내일이라 하면서 거룩에 힘을 쓰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깨끗한 영혼이 더러운 자와 함께 할 수 없으며 의로운 영혼이 불의한 자를 따를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깨끗한 자도 함께 더러워지고 의로운 자도 함께 불의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또한 거룩한 공동체에 한 영혼이라도 더러운 영혼이 있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도 기쁨에서 슬픔으로 변하신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고 거룩에 애쓰지 않는 자들은 그 공동체에서 내쫓는 것이 옳으니 그런 자가 바로 옛 옷을 입은 자들이다.

 

결국 거룩하신 영께서는 그가 목자든 양이든 속에 죄가 있음에도 자기의 생각을 따르는 교만한 자와 자기의 의를 나타내는 자와 세상에 빼앗긴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자와 자기 스스로 거룩을 이루려고 하는 자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거룩하고 신령한 공동체로 이끌지 않으신다. 아버지께서는 오히려 종들에게 가리도록 명하시니 강한 자들은 그것이 이 세상에 있음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반대로 그가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신실한 영혼 깨어있는 영혼은 그가 어디에 거할지라도 찾아내시어 거룩하신 영을 통해 광야로 불러내시고 장막에 들어가게 하신다. 하지만 그가 누구라도 그 안에서 다시금 강해질 때에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도록 놓아주신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어떤 남자가 악한 병에 걸려서 고통가운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참으로 불쌍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목숨까지 바쳐 병든 사람들을 섬기겠노라 하늘과 또한 자신과 약속한 후 병 고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큰 병원에 들어가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부르더니 자신도 했다며 손을 들고 다섯 가지를 약속하라고 시켰다. 첫째 저는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모든 환자의 요구에 응하여 공평하게 치료할 것입니다. 둘째 저는 환자를 대할 때 물질적인 보상을 바라거나 환자의 소유를 탐내지 않겠습니다. 셋째 저는 술 마시거나 놀기 위해 진료실을 비우지 않겠습니다. 넷째 저는 여성환자를 방문할 경우 다른 사람과 함께 방문하고 은밀한 곳을 진료할 때는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그것을 대하듯 하겠습니다. 다섯째 저는 가난한 사람에게도 최선의 치료를 베풀겠습니다. 그는 약속을 마치자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마음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다. 그 다섯 가지의 약속들이 자신의 첫 마음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보다 먼저 공부를 마치고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는 자기윗사람이 천하고 낮은 사람에겐 무관심하고 귀하고 높은 사람에겐 좋은 자리를 내주는 것을 보자 순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지나쳤다. 다음날 다른 윗사람이 어떤 환자에게 돈이 들어있는 하얀 봉투를 받고 뒤돌아서며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고 순간 내가 잘못 보았겠지 하면서 지나쳤다. 다음날 어떤 윗사람이 술 마시며 노는데 정신이 팔려있는 것을 보고 순간 이것은 아닌데 라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또 다른 윗사람이 여성환자를 찾아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추행하며 성을 맺는 것을 보고 순간 신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다음날 돈을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병원입구에서부터 환자를 내보내는 윗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행하는 것은 그 다섯 명만이 아니요 자기의 바로 윗사람으로부터 시작해 그 병원에서 가장 높은 자까지 다 그랬으니 그는 내가 이 병원을 바꾸기는커녕 나도 저들과 같이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병만 낫기 원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그 큰 병원을 미련 없이 나와 작은 시골로 가 거기서 첫 마음을 지키는 병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하늘과 자신과 맺은 그 첫 마음을 지켰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큰 병원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잡혀 돌파리 의사라며 그 나라의 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의 당시에 요단강 주변의 광야에 거하며 거룩에 애쓰던 요한과 성전에 거하며 제사를 인도하며 율법을 가르치던 종교지도자들의 관계가 이러했으니 요한도 처음에는 자기의 아비를 따라 성전전통을 보면서 자라났다. 그러므로 요한은 유대인이기에 7세까지 어미에게 말씀을 듣고 12세까지 아비에게 말씀을 배운 후 4년 동안 랍비들에게 모세의 신령한 율법이 아니요 사람의 유전과 교훈으로 바꾼 의문의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하여 죄와 세상에 빠져 죽어가는 영혼들을 건져내 여호와께 인도하지는 않고 오히려 그들이 나왔던 세상으로 몰아내므로 자신의 썩어질 육의 욕심을 채우며 헛된 명예를 높이는 그 성전의 더러운 전통과 행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가 엘리사벳의 태에 있을 때 그리스도를 위해 택하셨으니 성인이 되고 4년 후인 16세에 자기가 자라온 성전을 떠나 광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거룩하신 영께 계시를 받으며 홀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할 때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진 일곱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으며 그 광야의 일에 동참했다. 그러므로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에 사람들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세례를 받았으며 또한 메시아가 온다는 그 소식을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도 들었다.

 

결국 광야에서 거룩에 애쓰며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던 요한의 제자들과 성전에서 불의와 죄를 품고 목회하던 바리새인들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우선 자신들이 거룩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식을 하며 또한 말씀을 읽고 또한 말씀을 전하며 다녔으되 요한의 제자들도 그것을 똑같이 행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사람들을 많이 모아 자신의 육의 부요와 영광을 높이기 위함이되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을 거룩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또한 누구는 그 거룩한 일을 하므로 거룩해진다고 했으되 누구는 거룩한 자가 그 거룩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일한 행위를 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늘 꾸짖는 관계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당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으며 또한 금식해야 할 조건이 없었기에 금식을 명하지 않으셨다. 한편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비한 인자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거룩하신 메시아임을 요한을 통해 배웠다. 그러므로 거룩에 이르고자 늘 금식하던 요한의 제자들의 눈으로는 거룩을 위해 금식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상하게 보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그 질문을 했던 것이다.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과 요한의 제자들과 또한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선악의 죄를 애통하며 요한과 함께 광야에 거하는 공동체에게 오직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세 가지의 비유를 통해 알려주기 원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 비유들을 통해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를 위하여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지 또한 있어야 되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첫 번째 비유의 그 의미는 우리민족의 문화와 정서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한 부부가 함께 한 자리에서 기쁘고 즐겁게 음식을 먹고 마신다. 그러다 남자가 자신과 또한 아내가 먹을 것을 위해 먼 곳으로 떠났다. 그러면 그 아내는 집에서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또한 그 육의 먹을 것도 자기 혼자 배불리 먹지 아니하고 오직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먹으면서 기다린다. 그러나 남편이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음식을 놓는 그 상이 넘치도록 차려 베푼다. 그리하여 먼 길에서 돌아온 남편도 또한 그의 아내도 기쁘고 즐겁게 배가 부르도록 함께 먹는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생명을 얻고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자기의 신랑과 함께 배불리 먹었다. 그러나 교회시대와 또한 마지막 때인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둘째하늘과 셋째하늘에 두루 다니시되 오직 교회를 아직까지 이 첫째하늘에 두셨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각에서 돌이켜 거룩하고 신령한 자들과 함께하는 자들은 신랑이 다시 오시는 그날을 소망하며 세상에서는 오직 필요한 만큼만을 취하니 더 이상은 취하지 아니한다. 육과 세상을 취하느라 거룩에 애쓰지 못하기 때문이요 욕심으로 더럽혀지면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랑이 다시 오셨을 때에는 거룩의 믿음을 가지고 자신이 피를 통해 받은 그 거룩함과 신령함을 이루며 또한 유지한 영혼들이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을 얻어 신랑과 함께 모든 영광을 취하니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천년왕국에서는 왕과 제사장으로써 신랑과 함께 빛으로 다스린다. 또한 늘 성소에 모여 아버지께로 영광을 올려드리며 신랑과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다 천국의 끝에는 불의하고 악한 모든 것이 유황불 못으로 들어가되 그들은 아들을 따라 아버지께서 계신 거룩한 셋째하늘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신랑과 함께 영원히 영광을 누리며 다스리되 시온산의 성소에 한 몸으로 모일 때마다 기쁨과 즐거움이 늘 충만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택하신 영혼에게 계시를 주실 때 그 말씀의 비밀을 음성으로도 알리시며 보여도 주시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영혼과 갈급한 영혼들에게 값없이 주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요한은 자신이 받은 계시를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음성을 들었으며 그 후에 거룩하신 영께서 그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일곱 금 촛대였다.

 

일곱 금 촛대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매 교회시대마다 붙들고 계신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하신 영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붙들고 계신 교회들에게 오직 아버지의 그 뜻과 계획만을 전하신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께로 붙들려 그들이 어느 시대에 어느 민족에 거하든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이루어간다. 또한 다른 영혼들도 거룩을 이루도록 힘쓰니 목숨을 내어놓고 회개와 천국의 복음만을 전한다. 그러다 마지막에 복음을 다 전한 후에는 자신이 받은 그 인자의 살과 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마지막 교회시대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교회시대와 마찬가지로 이방의 민족들 가운데 일곱 교회를 붙들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듭남의 은혜를 얻은 후 아버지의 뜻을 깨달았으니 그 어떤 행위로 돌아서거나 율법에 빠지지 아니하고 마음에 늘 첫사랑을 간직한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자신과 공동체의 거룩에 애를 쓴다. 또한 은혜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마지막 때에는 환난의 복음을 전하고 나서 목 베임으로 제사를 드린 모든 자들이 바로 그 144000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 붙들린 자들의 피 흘림은 초대교회만이 아니요 일곱 교회시대마다 있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간 그들의 피 흘림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며 또한 아버지의 그 뜻과 의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로는 그 의로운 피를 통하여 온전한 구원의 복음이 계속 선포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시대에 진리를 전하는 자들은 오직 그들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의 뜻을 이룬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시어 거룩하고 영광스런 육체를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자신이 준비한 모든 영광과 권세를 주시고 자신의 보좌 가장 가까이에 두셨으니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 흘린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부터 마지막 시대까지 피를 흘리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택한 것이 아니요 오직 아버지께서 택하셨으니 그들이 그 길로 간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에게 일곱 금 촛대를 보여주신 것처럼 이 세상에 자신의 처음 나타나심을 준비한 그리스도전의 선지자들에게도 일곱 등잔을 보여주셨다. 그 동일한 의미가 무엇인지 한 가지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이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기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할지 그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어둠으로 가득한 넓은 마을의 중간에서 일곱 개의 초를 꽂은 촛대를 꼭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아버지는 오직 한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불을 주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자기가 들고 있던 그 일곱 개의 초에다 하나씩 하나씩 불을 붙였다. 그러므로 그 촛대의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으며 그 아버지는 그 불빛을 계속 지켜보았다. 하지만 어둠을 좋아하는 한 악한 자가 그 촛불을 끄려고 멀리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아들의 옆에 있던 친구는 두꺼운 천으로 그 바람을 모두다 막았다. 그러므로 그 촛불은 흔들리거나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촛농이 한 방울씩 흘러 내릴 때마다 어둠을 더 이겼으니 그 어두운 마을에서 그 촛대의 주위는 더욱더 밝아졌다. 이러한 모습을 보자 그 마을에서 어둠이 아닌 밝은 빛에 거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 촛불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빛으로 인하여 자신의 모습을 밝히 보고는 자기의 옷에 묻은 더러운 모든 것들을 다 털어냈다. 이에 자기의 아들에게 불을 주고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그 아버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했으며 또한 그들을 사랑하여 자신의 가까이에 두었다.

 

이와 같이 촛불에는 첫째 어둠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각 시대마다 일곱 교회를 붙들고 계시고 거룩하신 영께서는 그 일곱 교회를 보호하고 인도하므로 그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고 계신다. 그런데 빛과 어둠이 싸우면 반드시 예외 없이 빛이 이기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하신 영과 함께 그 교회사이사이의 어둠의 세력들을 다 물리친다. 그리하여 빛이 있는 교회에서는 그 흑암의 세력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나므로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선악의 죄의 뿌리도 결국에는 뽑혀지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촛불의 빛은 오직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녹여진 그 촛농으로 인하여 밝아지며 또한 유지된다. 마찬가지로 각 교회시대의 불꽃 하나하나는 오직 그들의 피 흘림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로 붙들린 자들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 후 피를 흘릴 때마다 그 촛불이 밝게 켜진다. 그리고 촛불이 켜지므로 이 세상의 어둠가운데서 그 불빛이 그 어둠들을 이기며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은 자신의 거룩을 이룬다. 또한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기 원하는 자들도 그 거룩한 빛을 보고 하나 둘씩 모여드니 그들도 함께하며 거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셋째 하늘의 지성소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그 뜻에 순종해 이렇게 자신과 다른 영혼들의 거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곱 촛불을 늘 지켜보시며 거룩한 육체의 상급을 준비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그 거룩하고 영광스런 육체를 입고 부활의 생명을 얻은 것은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그 뜻을 위하여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