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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3/02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살고자하는 마음
  2. 2009/02/24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살고자하는 마음
  3. 2009/02/16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살고자하는 마음
  4. 2009/02/09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살고자하는 마음
  5. 2009/02/02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살고자하는 마음
  6. 2009/01/26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살고자하는 마음
  7. 2009/01/19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살고자하는 마음
  8. 2009/01/12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살고자하는 마음
  9. 2009/01/08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살고자하는 마음
  10. 2008/12/31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살고자하는 마음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잘못된 길을 걸으며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어린 자식이 결국 아비에게 살이 찢어지는 매를 맞을 때 철없는 자식은 아비의 마음을 모르니 때릴 때 고개를 숙이는 아비를 보고는 ‘왜 내가 맞는데 아빠가 울어요.’라고 울면서 말한다. 하지만 그 아이가 나중에 커서 자식을 낳으면 자식을 때리는 부모의 마음은 매를 맞을 때의 아픔보다 2배 5배 10배 더 아프기에 부모 눈에서 눈물이 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셋째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사망으로 이끄는 죄와 멸망의 세상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영혼의 육체에 사랑의 매를 때리시고 당신은 사람의 몸이 느끼는 그 아픔과 해산할 때의 고통보다 1000배의 아픔과 고통을 겪으시면서 기다리신다. 그러나 자식을 길러본 사람은 육신의 부모자식간에 그런 애틋한 마음을 아버지께서 주셨음을 알아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함은 둘째사람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 거룩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되 태초에 아버지의 품에 함께 계셨던 독생자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시기에 이 말씀을 통해 거듭난 영혼들 가운데 한 영혼이라도 더 자신의 속에 죄가 거하고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생각과 의와 이 헛된 세상으로부터 십자가아래로 나아와 그리스도를 따르며 거룩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의 당시 로마의 편에 섰던 세리는 자기민족 사람들의 집이나 그들의 사업에 가서 세금을 걷되 힘이 있으니 세금을 떼어갈 때마다 자신을 위해 항상 귀한 것 한 가지씩을 가져갔다. 한편 세금을 내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기의 밑에 있는 사람들을 시켜서 그들이 하는 일을 고난에 빠뜨려 핍박했다. 그들은 이렇게 법이 정한 만큼만을 받지 않고 더 많이 받아서 챙겼으며 또한 세금거두는 그 일을 한 대가를 로마로부터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매국노나 죄인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나라를 구하고자 올바른 결정을 했으며 의로운 일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태는 그의 애비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기에 어렸을 때부터 세상의 모든 것들을 원하는 대로 취했으며 애비의 힘으로 학벌도 있었기에 두루 다니며 세금을 얻어 자기의 육적인 욕심을 채우면서 죄와 세상에 빠져 살다 한 소문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돈 벌레에다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던 마태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께로 오직 죄의 용서함을 구하고자 자신의 거하는 처소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갔다. 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또한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다른 높은 세리들도 불렀으니 그들도 자신처럼 스스로를 죄인으로 깨닫고 있을 것임을 예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뒤를 밟으며 말과 행위를 기록하던 14명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그 자리에 함께 했으니 그들은 자기들이 그곳에 온 목적을 이루고자 어떠한 말을 던져서 그리스도를 곤란에 빠뜨릴까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들은 우선 자신들이 죄인이나 세리와는 상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또한 자신들은 백성들의 영혼을 인도하며 육의 욕심과 영광을 취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을 거룩한 주의 종으로 여겼으니 지금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있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율법을 어긴 죄인들이었다. 즉 그리스도를 더러운 자라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또한 그 기록도 남기기 위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뿐만 아니라 마태의 초청을 받아 그 자리에 온 자들과 또한 자신을 해하려고 그곳에 함께하고 있는 그 큰 건물의 목자들도 공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말씀을 전하기 원하셨다. 그러므로 의사는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필요하되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모든 병자들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병에 걸려있음을 모르는 사람과 알면서도 병에 걸리지 않았다며 끝까지 부인하는 사람과 이 정도쯤이야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과 의사도 자신의 중한 병은 고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내 병은 내가 안다며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며 포기하는 사람과 세상일로 바쁘다는 어리석은 사람은 의사가 불필요하다. 그러므로 그 수많은 병든 사람들 가운데서 오직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더러운 죽음의 병에서 낫기를 원하는 사람만 찾아가 고개를 숙인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의원인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썩어질 육의 욕심과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으로 인하여 죄들을 범했으며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짓고 있으며 또한 내일도 동일하게 짓다 결국 그 죄에 묶여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고 있는 자들 가운데 자신을 의롭고 깨끗하게 여기는 자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셨다. 행여 그리스도께서 그런 자들은 부르신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과 인격이 스스로 영적인 의원을 거부하며 오히려 자신의 안에 거하는 그 선악을 더 깊이 숨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발을 대고 걸어 다니는 모든 영적인 병자들 중에 오직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죄 사함 받기 원하는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려고 오신 것이되 원수는 악한 서기관들을 통해 마태복음에서는 회개시킨다는 말씀을 뺐으니 누가의 기록이 맞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므로 마태의 초대를 받은 자들과 또한 인자를 따라다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이제는 그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전자의 영혼들은 돌이킬 것들을 족히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앉은 그 자리와 가진 그 소유권들이 더욱 좋았으니 돌이켜 그리스도를 좇는 자가 없었고 후자의 영혼들은 그들의 교만한 목회자라는 자리가 그들을 돌이키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살고자하는 마음을 품고 있던 마태만 그 말씀에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자리에 내려놓고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좇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다른 세리들과 성전의 목자들도 부르셨으나 그들은 육의 욕심과 교만에서 나오는 그 죄와 불로 멸망을 당하는 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자신의 영생보다 더욱더 사랑하므로 자신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했기에 영적인 의원을 거부하되 입술로는 여호와를 믿는다며 제사를 드렸으니 그들은 불순종으로 사막에서 엎드러진 그 다수의 후손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둘째사람을 공평하게 택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목자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 가지 빛을 더 알리셨다. 그러므로 그 말씀의 뜻은 이것이다.

 

“너희는 그 성전의 회당에 와서 양을 잡고 소를 잡고 비둘기를 잡고 온갖 짐승들을 잡아 피를 흘리는 도다. 하지만 예배를 드린 후에 그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자기의 그 죄악된 삶을 사는 도다. 그러나 이렇게 거룩의 모양을 보이는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너의 마음에 있는 그 죄악 한 가지를 이기고 거룩하게 되는 그런 자를 아버지께서는 더 원하시는 도다.”

 

그러나 누가 이렇게 건강하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으리요?그러므로 자기의 생각에서 돌이키고 이 세상에서 나와 영적인 의원을 따르는 자만이 인자께 거룩의 능력을 얻어 자신의 안에 거하는 그 죄와 이 세상을 이기며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며 영적인 병에서 고침 받은 자가 이 땅에 있을 동안에 의와 거룩의 열매를 아버지께 보여드림이요 영광의 복음의 비밀을 위해 입을 벌리며 거룩의 사명을 자신과 이웃에게 다했기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섰을 때 그리스도와 같은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병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생겨나는 병이다. 그러므로 그가 만일 자신의 마음에 음란을 품고 또한 욕심을 품는다. 또한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에 완고함을 가득히 채운다. 하지만 사람이 이성 있는 인격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악한 원수에게로 마음을 빼앗긴 결과는 자기의 육체에 나타나니 죽은 피가 나가지 못하고 그의 육체 안에 군데군데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어 육에 한 번 충격이 올 때에 어떤 자는 몸의 한 부분을 붙들리고 어떤 자는 여러 부분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으로 나타난 그것이 곧 소수에게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로 이끄시고자 베푸시는 사랑의 기회이되 다수에게는 곧 맞이할 사망의 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죄는 원수와 마음을 합한 자의 안으로 들어가 이제는 그의 마음에서 밖에 있는 육신으로 나오는 것이니 사람이 그 병에서 깨끗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과연 무엇을 행하여야 하리요? 그가 나음을 원할 때에는 단지 그 마음을 돌이키고 그가 아버지께로 붙들리면 그 병에서 쉽게 해방이 된다. 그러나 마음이 완악하며 죄를 사랑하는 자들은 끝까지 돌이키지 못하리니 아들의 은혜를 거부한 자들은 그 육의 질병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밖에서 들어온 그 죄를 안고 그대로 사망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이렇게 욕심과 음란이 가득한 마음에서 나온 병을 가지고 사망으로 내려가던 한 완고한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나왔으니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전하시는 회개 천국의 복음은 썩어질 육의 욕심과 이 세상의 헛된 영광에 빼앗긴 그 목자들의 마음을 깊이 찔러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욕심과 자기의 높아짐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깊었으니 찔림을 받고도 돌이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성전목자들은 육과 세상에서 자기의 마음을 돌이키고 자기가 앉은 그 자리에서 내려와 그리스도를 따르기 보다는 오히려 인자를 잡아죽이길 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꼬투리를 잡아 합당한 증거를 모으고자 늘 뒤에서 인자의 말과 행위를 하나하나 듣고 보며 꼼꼼히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가시떨기의 밭을 가진 목자들을 따르며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과 그 종교지도자들의 관계는 이와 같았다.

 

사람은 처음에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아버지께로 선하게 창조되었으니 불의하고 죄악을 행치 않고 오히려 의롭고 거룩한 말과 행위를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일이 만일 자기에게 유익을 주면 불의하고 더러운 일과 말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모임에서든 위에 있는 자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옳지 않은 일을 시키면 밑에 있는 자는 그것이 잘못임을 알아도 행하니 그것은 자기에게도 유익을 주기 때문이요 그래야 현재의 자리를 지키며 더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윗사람이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말하며 행하는 자들도 있으니 그들의 마음은 더욱더 악하다.

 

당시 전통의 목자들을 따르는 백성들 가운데 이러한 자들이 넷이 있었으니 그들은 오로지 인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원했다. 즉 저 자가 만일 이 병든 자를 고치면 저 자는 진짜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요 오로지 신이라고 여길까 시험코자 했다. 고로 그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죄에 붙들려 침상에 누워 곧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가서 이런 말로 권했다. “네가 만일 그에게 가서 잘못되어도 지금보다 더 악화될 수는 없노라. 또한 우리도 그를 믿고 싶으니 네가 온전하게 되면 우리도 그를 믿겠노라. 그러니 이대로 가만히 누워있기보다는 한번 가보자.” 이에 병든 자도 자신이 더 악해질 수 없음을 알기에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자는 사망에 이른 자인데 네가 살릴 수 있으면 한 번 살려보라.’는 뜻으로 지붕을 뜯고 달아 내렸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를 심히 질투하고 시기하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꼬투리를 잡아 증거를 모으고자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곳마다 항상 14명의 서기관을 보내어 인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를 그대로 기록하여 자기들에게 알리도록 명했다. 나중에 그리스도를 잡았을 때 그것을 보고 그것들 가운데 몇 개를 뽑아 신령한 율법이 아닌 의문의 율법으로 인자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날 그곳에는 늘 인자만을 맡아 뒤에서 좇아 다니며 듣고 기록하는 서기관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물론 바리새인들도 함께 있었으나 백성들의 앞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자신들을 백성들이 보고 깨달을까 두려워 서기관들의 사이사이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가림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유익을 위해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뒤에 숨어 사람들을 조종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니 먼저 병든 자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의 마음에 더러움이 이제는 더 이상 마음에 거하지 아니하고 네 육으로 나왔으니 네가 이 병을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였도다. 그러므로 그 더러운 마음을 너의 마음에서 끄집어내어 네 마음도 또한 네 육도 깨끗함을 얻으라.”

 

한편 그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이 인자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인자를 시험코자 하느뇨? 아버지께서도 너희들을 시험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돌이키길 원하시는 도다. 하물며 사람이 아버지를 시험치 말라 율법에도 나와있은즉 그러나 너희의 마음에 의심이 가득 차 인자를 시험코자 하느뇨? 너희들도 이와 같이 함께 누워 있겠느뇨? 너의 의심을 버리고 아버지를 믿으면 인자를 믿으라. 인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왔으며 아버지의 일을 이 땅에서 행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이 영혼이 이제는 자신의 마음에 그 죄악을 내려놓았으니 인자가 이 자를 용서하였으며 이제는 일어나 나아가거라 하였노라.”

 

그런데 그때까지 큰 건물의 안에서 가르치는 목자들은 사람이 걷고 보고 듣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기적은 보았으되 죄 사함을 얻었다 함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또한 늘 성전의 제사를 인도하되 서원한 자가 드리는 참된 제사의 의미를 모르니 오직 짐승의 피를 뿌리는 성전제사로만 죄의 사함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참으로 분명한 꼬투리를 잡았다고 확신하며 인자의 참람됨을 기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주의 종이요 여호와를 아노라 믿노라 하되 오히려 메시아를 잡고자 계획을 세우고 있는 그들도 불쌍히 여기시어 사람이 어느 곳에 서있을지라도 그가 마음을 돌이킬 때에는 용서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보다 말씀에 더 가까이 있으면서도 자신이 걷던 그 굽은 길에서 돌이켜 왕의 대로로 행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안에 있는 죄가 육의 욕심과 헛된 영광을 놓지 못하는 그들의 생각과 의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에게 계시를 주시며 성전목자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실 때 그들을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개들이라고 알려주셨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셨을 때에는 성전의 목자들이 개들의 후손임을 아셨기에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칭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시험하며 꼬투리를 잡으려는 그들의 마음을 읽으시고 너의 병에서 나았다고 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너의 죄가 용서함을 얻었다고 하셨다. 즉 죄 사함은 아버지의 권위요 그 권위가 인자에게 있음을 나타내므로 병든 자도 믿고 돌이키며 또한 그를 데리고 함께 온 자들과 또한 목자들도 믿고 돌이키기를 구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리석어 지금까지도 병든 자를 데리고 온 자들이 믿음이 있었도다 라고 말하고 있으니 아버지께서는 말씀의 깨달음을 오직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죄와 세상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혼들에게만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 병든 자는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인자가 죄를 사하심을 믿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악을 다 내려놓았다.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죄에서 용서받았음을 믿거든 일어나 걸으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입을 벌리고 싶어도 감히 벌리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자신이 마음의 중심으로 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보고 읽으심이요 또한 죄인을 심판하여 유황불 못에 넣으시는 그 두려우신 하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자신의 앞에 서계심을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일 이후로 그는 늘 바리새인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그 유대인들과 함께 살지 못하였으니 광야에 나가 그도 그곳에서 애통하며 남은 인생을 보내는 그 복을 얻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한 나라의 왕이 자기의 뜻을 이룬 백성들을 위하여 큰 상급을 준비해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든 백성들이 내가 준비한 이어달리기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도다. 누구든지 이어달리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나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이 경주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다른 그 무엇을 통해서도 나의 뜻을 이룰 수 없으니 그는 상급을 얻지 못하겠노라.” 왕의 말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이어달리기를 하려고 출발점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달리기를 해야 하는 그 길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보였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출발점에다 사람들을 많이 모으자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을 옳게 여긴 사람들은 그 출발점에다 사람들을 많이 모으며 또한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우리의 왕이 원하는 경주이니 우리는 나중에 상급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일곱 명은 오직 왕의 뜻을 이루기 원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사람이 달리기를 시작하자 그 왕의 아들이 와서 쪽지를 전해주었다. 그래서 첫 번째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가 하여 펴보니 거기에는 자기가 평소에 알고 싶었던 궁금한 것들이 정확하게 써있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사람은 그것을 재미있게 읽으며 끝까지 달렸다. 그리고 자기에게 정해진 만큼을 달린 후 두 번째 사람의 손을 치니 그 왕의 아들은 그 두 번째 사람에게도 동일한 쪽지를 전해주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사람도 자기가 궁금해하던 것을 재미있게 읽으며 기쁘게 달렸다. 그리고 일곱 번째 사람까지 모두다 이와 같았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출발점에 서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게에서 맛있는 것을 사와서 먹느라 그 경기에는 관심도 없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가 가게에 가서 맛있는 것을 많이 사먹는 이것이 왕의 뜻이요 왕이 원하는 경주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맛있는 것을 제일 많이 가진 자가 그 이어 달리기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므로 그는 달리는 자들의 뒤를 쫓아가면서 발을 걸어 넘어뜨리거나 온 몸을 때렸다. 그러면서 말하길 우리는 왕의 이름과 왕의 뜻으로 너희를 이렇게 처단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일곱 사람은 그들의 방해와 고문에 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이어달리기를 마쳤다. 그러므로 그 왕은 자신이 준비한 금 면류관을 그 일곱 명에게 씌워주고 자기의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앉혀주었다.

 

이와 같이 아버지께서는 초대교회 때부터 항상 일곱 교회를 통해 진리의 비밀을 이어놓으셨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때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오직 아버지의 말씀을 가지고 직접 다스렸다. 그리고 초대교회 이후의 다른 교회시대의 일곱 교회들도 역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그 진리의 비밀을 가지고 다스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를 따르는 자들은 오직 아버지의 그 뜻만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진리를 따라 마음과 그 행위를 오직 아버지와 아들께만 드린 교회는 항상 일곱 교회요 또한 마지막 교회인 오늘의 시대에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거듭난 자들 가운데 그 부활의 약속을 믿고 그 무엇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로 정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내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진리를 깨닫고 순종해 거룩을 이루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과 이방의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께 받은 그 피를 뿌렸다. 그리하여 그 피로인해 온 유대와 사마리아 소아시아와 로마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과 그 행위를 오직 주님께만 드린 자의 피를 통하여 복음이 증거되는 것은 모든 교회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교회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대환난 때에 목 베임을 통한 피 흘림이 남아있다. 그리하여 라오디게아의 일곱 교회가 회개와 천국의 복음을 땅끝까지 다 전파한 후 그 마지막 피를 흘림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시고 이 땅에 내려와 그 천년왕국을 이루시는 것이다.

 

이처럼 누구든지 그 약속을 은혜로 받은 후 믿음을 가지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원한다면 의롭지 못한 자기를 부인하고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또한 복음을 다 전한 후 마지막에는 피의 순교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교회시대에 그 길을 걷는 자들은 때로는 기뻐하며 때로는 크게 기뻐하니 그것은 그 길에서 자신이 알고 싶어하던 진리의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들은 진리에 순종하므로 거룩에 이른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룬 그들이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에 이르러 자녀 됨의 그 약속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정하신 그 진리와 생명과 구원의 십자가 길은 고난의 길이되 기쁨과 소망의 길이다.

 

또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드리면 그곳에 자신의 입과 손과 발과 몸도 드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되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자신의 마음이 있는 그곳에 자신이 원하여 스스로 드린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자신이 정하신 그 길을 자원하여 걷는 자들을 사랑하시며 기뻐하시니 아들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에 늘 평화를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 믿음으로 그 길을 걷는 자는 어느 시대든 마음에 평화도 항상 있다.

 

결국 이 땅에서 사람들의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하는 자를 볼 때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마지막에 그 환난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설교하는 자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화가 늘 충만하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마음에 없다면 그는 누구의 제자요 무엇을 바라보고 달리는 자이겠는가? 그리하여 육과 세상을 가지고 있는 거짓된 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 마지막 때에 사망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적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아버지의 택하신 자들을 핍박하는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그리스도의 당시에는 유대민족도 또한 이방민족들도 동일하게 흑암에 붙들린 자들은 모두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 머물게 하므로 다른 자들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그들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부딪히므로 서로가 서로를 사망으로 인도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쇠사슬로 묶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무덤에 거하다 그날 그리스도를 만났던 그 영혼은 오직 한 명이었으니 마태도 처음엔 한 명으로 기록했으나 원수는 사람들이 말씀을 보고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나님보다 윗사람을 두려워하는 서기관들을 통해 늘 이곳 저곳을 고치고 빼고 더한다. 그러므로 마가와 누가의 글은 그대로 놔두고 마태의 기록에서만 두 명으로 바꾸었으되 거룩하신 영께서는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진 영혼들과 갈급한 영혼들에게는 올바른 깨달음을 허락하신다.

 

말씀에 불순종이 쌓이니 먼저 영이 흑암에 감싸이고 또한 돌이키지 아니하니 혼도 붙들리고 계속 불순종하니 결국 자기의 몸까지 내어주고 무덤에 거하던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말에 순종치 아니하였으며 세상의 높은 곳에 올라가 자신이 모든 영광을 언젠가는 취하겠노라 늘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자였다. 또한 날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거짓말도 다하였으며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는 늘 빼앗았다. 그러므로 사망이 임한 그 영혼을 보며 기억해야 할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어린 생명일 때 자기부모의 말에 불순종하는 자녀들은 늘 나쁜 것들이 그의 안으로 들어갈 것이요 둘째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것들을 빼앗는 자들은 악한 것들이 열 배로 들어갈 것이요 셋째 세상의 영광을 취하겠노라 다짐하는 자들에게는 그것들이 백배로 들어가리니 그것은 아버지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그의 마음과 혼과 몸이 놀이터요 안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에게는 군대가 들어있었는데 흑암의 군대조직은 적으면 200에서 300이요 많으면 수천도 넘는다. 하지만 숫자만 많다고 군대가 아니요 그 조직의 수가 12이 넘어야 군대라 칭하는 것이니 예를 들어 어떤 소대장이 자기 밑에 30의 부하를 데리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조직이다. 이때 그 소대장의 위치에 있는 흑암을 강한 자로 칭하는데 바로 그런 강한 자들이 12을 넘어야 흑암의 군대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 강한 자들 가운데 가장 더럽고 악한 자가 그 흑암의 군대에서 가장 높은 자이되 흑암의 세력은 오직 자기의 위에 있는 강한 자의 말만을 듣기에 강한 자라도 다른 강한 자의 밑에 있는 죽은 영혼들에게는 명을 내릴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군대의 조직은 원수와 그와 함께 타락한 사자들도 마찬가지니 원수는 오직 자기의 밑에 있는 종에게는 명할 수 있으나 그 종의 밑에 있는 다른 종들에게는 오직 자기의 밑에 있는 그 종을 통해서만 명령을 내린다.

 

한편 흑암의 세력들이 사람에게서 발할 수 있는 육체의 힘에도 기준이 있으니 한 성인의 어둠의 세력이 들어갔다면 그 흑암의 영적인 힘과 그 살아있는 사람의 육신의 힘이 합해지니 두 성인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어둠의 세력 다섯이 한 성인에게 들어가면 계산상으로 그는 나무를 땅에서 뽑을 수 있을 것이요 100이 들어가면 강한 철판을 뚫을 수 있고 500이 들어가면 집 한 채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육체를 이룬 뼈와 살의 한계가 있으며 또한 영적인 어둠의 세력도 물리적인 한계가 있기에 가장 큰 힘을 내도 오직 쇠사슬을 끊을 수 있을 정도다. 또한 흑암들은 갑자기 많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차츰차츰 사람을 정복하니 구체적으로 그 당시 무덤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그 영혼은 2321의 흑암들을 품고 있었으되 그는 어릴 때부터 조금씩 그의 육신에 악한 것들이 들어갔으며 어느 순간에 그의 육신의 모든 감각을 그들이 붙든 후 큰 무리가 그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또한 어둠의 세력들 1000을 기준으로 삼아 그 이상이 되면 반드시 행위로 나타날 것이요 이하로도 그 악한 것들이 행위로 나타낼 수도 있으나 1000을 넘을 때까지 강한 자들이 잠잠하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늘 이루는 그 일을 위함이되 때로는 한 흑암도 더럽고 악한 행동을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를 사망으로 이끌기 위한 일들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며 즐기는 것이 어둠의 세력의 특성이다.

 

흑암의 세력은 육을 입고 숨쉬며 사는 동안 십자가의 피를 통한 자신의 죄들의 용서와 거듭남을 거부했으니 사망으로 들어간 자들 가운데 그 마음이 가장 악한 자들이다. 즉 자신이 그리스도께 받은 그 사망의 심판을 이미 사망으로 들어간 원수를 통해 생명으로 바꾸고자 세상과 사람들을 음란과 불의와 죄악으로 이끌어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의 욕심과 영광과 의를 위해 불의와 죄악을 행하는 것은 원수의 그 마음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원수의 뜻대로 사람과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는 그들을 가리켜 원수의 자식이라고도 부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에 거하는 목자들이 자신의 육의 욕심과 높아짐과 의를 기뻐하며 아버지의 말씀을 이용해 백성들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에 바울처럼 돌이키는 자가 있기를 원하시며 그들을 보고 너희 거짓의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흑암의 세력가운데 강한 자는 오직 원수의 밑에 밑에 밑에 있는 나부랭이 종의 명대로 움직이는 자들이니 자신만을 위한 욕심과 영광과 의로 가득한 자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그들의 일이다. 또한 그런 마음을 품고 외모가 좋아진 자들을 통해 세상을 불의하고 불공평하고 악하게 이끌되 불신자들보다는 살고자하는 자들과 첫사랑을 굳게 붙들고 있는 자들과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늘 가시로 더욱더 내리누른다. 그들은 또한 많은 자들의 영혼을 한꺼번에 추수하여 사망으로 데려가기를 원하므로 시대마다 전쟁을 준비한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에도 이 세상의 적그리스도들과 잘생긴 자들을 통해 한민족의 환난과 그 마지막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한 개인에 대하여는 불의와 선악으로 묶어 사망으로 데려가는 일을 행하고자 그들은 자신이 붙들고 있는 사람이 육의 욕심과 기쁨을 즐기며 세상을 따르게 한다. 그러나 육은 썩어질 것이요 이 세상은 결국 영원한 형벌로 들어감을 깨닫고 오로지 아버지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은 자신의 안에 있는 헛된 우상들을 제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주신 아버지와 아들께로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 또한 음란과 미움과 질투와 혈기와 비판과 거짓과 질병도 당연히 흑암의 세력이 전해주는 것들이요 사람의 혼을 붙든 경우 그 결과로써 나타나는 증상들을 보고는 사람들은 빙의 다중인격 정신분열 공황장애 간질 환청 우울증 대인기피증 강박증 악몽 성도착증 공포증 불면증 치매 동성애라는 말들을 붙인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 가운데 자기의 정신이 때로는 있는 것과 하나도 없는 것이 있으니 전자는 육체의 질병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자기의 죄들을 회개하고 돌이키므로 자유함을 얻을 수 있고 후자는 아버지께서 그 영혼의 살고자하는 마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먼저 온전케 해주신 후에 그가 이제는 온전한 마음과 인격으로 자기의 죄들을 회개하게 된다.

 

그런데 무덤에 거하던 자는 후자의 경우였으니 그리스도께서는 군대에게 붙들린 그 영혼을 먼저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그의 안에 있던 흑암의 세력들도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이 붙들고 있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것을 느꼈다. 그러므로 가장 강한 자가 나와 그의 입을 붙들고 당신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질문을 했으니 그것은 우선 대화를 통해 자기의 시간을 늘리고자 함이었다. 둘째 의미는 어둠의 세력들도 그리스도는 거룩한 자들을 찾으시는 것을 아니 당시에 죄로 인해 이미 죽은 이 자는 거룩한 자가 아니요 죄를 선택한 더러운 자라는 법적인 고발이며 그리하여 이 자와 당신과 상관이 없으니 이 자도 또한 자신들도 그냥 내버려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악한 자의 참소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심은 오직 그 영혼의 살고자하는 마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기에 군대를 내어쫓으려 하셨다. 이때 악한 자들은 자신이 이제는 그의 육체에서 나가야 함을 깨닫고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구했으니 그것은 자신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 땅 위에 그대로 거하도록 그 땅 아래로 보내지 말아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사망의 심판을 받은 그들이 무저갱으로 내려가는 것은 이미 사망으로 들어간 그 원수와의 관계이며 천년왕국의 끝에는 둘째 사망의 심판이 있으니 즉 계속 악을 행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니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신 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그때 강한 자는 옆에 있는 짐승들에게 들어가겠노라 허락을 요청하되 자기생각으로 그리스도께서 어디로든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까 두려웠다. 그러므로 믿지 못하는 그들은 그 두려움과 의심으로 인하여 그 요청을 한 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재빨리 14마리의 돼지들에게 들어가버렸다.

 

그러나 원수는 서기관들을 통해 거의 2천 마리의 돼지 떼로 바꾸어 기록했으니 그 이유는 자신이 행한 불법은 숨기고 그리스도를 더욱더 험한 사람으로 기록하여 알리기 위함이다. 즉 그리스도는 오직 사람만을 생각하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창조하신 짐승과 또한 식물과 또한 다른 모든 자연들은 원치 아니하신다는 거짓말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민족들에게 복음이 다 전해진 후 그리스도께서 둘째하늘과 그 안의 낙원을 이끌고 이 첫째하늘로 들어오셨을 때 원수와 사람들이 더럽힌 자연과 그 마지막 전쟁으로 황폐케 된 이 땅을 오히려 태초에 자신이 선하게 창조하셨던 에덴동산과 그 안의 만물처럼 깨끗하게 회복시키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그 영혼은 아버지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 자유를 얻었으나 흑암으로 인하여 혼적인 능력이 전혀 없는 자들은 아버지께서 그들의 살고자하는 마음을 보시고 은혜를 먼저 베푸시고 나중에 온전한 마음과 인격을 찾은 후 자신이 범했던 죄들을 회개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깨끗함을 얻은 후 그리스도께로 자기의 모든 죄들을 다 내어놓고 아버지께로 회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을사람들은 자기의 이웃이 온전케 된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께로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유는 첫째 그 마을에서 또 다른 어떤 이에게 그러한 형벌이 내릴까 두려웠으니 그들은 자신의 죄들을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아 영생 얻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그 강한 자를 다시 불러 다른 어떤 이에게 들어감을 명할까 두려웠으니 그들은 그리스도를 생명이 아닌 형벌을 주는 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셋째 자유함을 얻은 그 이웃이 자기들을 향하여 무엇인가를 말할까 두려웠으니 그것은 그 동안 고통가운데 있던 자기이웃에게 행했던 그들의 죄악들에 대하여 이제는 그가 온전케 되었으니 누구누구가 나에게 이러이러했다고 말하며 나와 같은 처지에 거하게 하므로 나도 그에게 똑같이 대하겠노라는 말을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짐승이 아니고서야 은혜를 입은 자가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말과 행위를 하리요? 물론 요즘엔 짐승보다 못한 악한 자들도 종종 있으니 자신이 십자가의 피로 형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그 첫사랑의 은혜를 잊고 늘 자판을 두드리며 자신의 입을 열어 믿는 지체들에게 더러운 말들과 가시들을 쏟아내므로 죽은 자가 자신을 장사시키고자 보내는 그 죽은 자들을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가 큰 것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길 원했으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그가 살던 곳에 두셨으니 그 이유는 자신이 전하지 못한 선한 말씀을 그 영혼을 통해 전하게 하심이었다. 또한 그가 그리스도께 받은 그 은혜를 자신의 식구와 친척과 친구에게 알리어 그들도 함께 그 은혜를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선 잠잠히 자신의 입을 다물고 자신의 옛 생활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식을 듣고 기회가 될 때에는 늘 그곳에 찾아가 그리스도께로 말씀을 듣고 또한 다른 이적들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유대전통으로 인하여 인자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은 약했으되 자신이 얻은 그 은혜만큼은 잊지 않았다. 또한 불행하게도 진리를 찾으려 애쓰지 아니했기에 진리의 깨달음은 없었으나 오로지 예수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온전케 되는 것만을 전하며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을 따라다니는 제자들 중에 11명은 자신이 직접 부르셨으나 애비의 힘으로 물질과 권세를 가지고 있던 그 마지막 제자는 자신이 부르신 제자가 아니요 그가 오직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따라다닌 자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제자들은 12명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외에도 자신을 진실하게 따르는 영혼들은 그들의 마음과 결단이 약해도 모두다 자신의 제자로 보셨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마가는 새로운 것을 꺼리며 늘 불안한 마음가운데 있었으니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항상 뒤로 도망가 숨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요한과 베드로처럼 가장 앞에 서서 적극적으로 따르지 못했으며 그로 인하여 12제자에는 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아무리 연약하고 자신감 없이 항상 저만치에서 거리를 두고 자신을 따라다녔어도 그의 능력을 보심이 아니요 오직 그의 살고자하는 마음과 순종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자신의 제자로 인정하셨다.

 

또한 유대인들은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일을 이방인들처럼 의사가 하는 것이 아니요 치료와 마무리 제사까지 오직 성전에 거하는 목자들이 행한다. 그러므로 누가는 자기 애비의 권세로 성전목자들 가운데 서기관의 위치를 얻어 윗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꼼꼼하게 글을 남기는 일을 행하고 있었으나 중간에 이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결단과 함께 의사의 일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랐으니 그리스도께서는 누가도 자신의 제자로 인정하셨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마가와 누가도 말씀의 목격자가 되어 보고들은 대로 기록할 수 있게 하셨고 거룩하신 영께서도 계시를 주셨기에 그들이 붓을 들어 그 복음서들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다른 서기관들과 70인과 120인 중에도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던 자들이 있었다. 또한 성전의 독사새끼들 중에 가장 악랄한 자로써 의문의 율법에 갇혀 신령한 율법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말씀을 아는체하며 그저 세상의 명예욕으로 가득 차 대제사장만을 바라보고 온 힘을 다하던 자도 살고자하는 마음으로 돌이켰기에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주셨으며 거룩하신 영을 통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기에 복음의 비밀을 기록해 이방인의 신령한 교회에 여러 서신서들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 12제자들 외에는 그리스도를 따라다녀도 제자라고 표현하지 않았으나 마태는 꼭 12제자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면 다 제자라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마태는 그리스도께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이 말씀의 비밀을 들었던 그 영혼을 제자 중에 또 하나라고 기록하는 것이요 누가는 그냥 다른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따라다니기는 했으나 12제자에 속하지 못한 한 제자가 자신의 애비를 잃었다. 그러므로 그는 부친을 장사하러 떠나기 전에 다녀오겠노라고 주님께 인사하러 나왔으되 어리석은 자들은 이 말씀을 보며 나는 제자이니 가족을 장사하지 않고 주님 위해 가족도 버리겠다 말한다. 한편 교만한 자들은 그럴듯한 말로 사람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가르친다. “영이 산 자는 영이 죽은 자를 장사하면 안 된다.” “율법을 장사하라는 의미다.” “영혼을 살리는 일이 중요하니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복음전하는 것이 육의 부모를 모시는 것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만일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다면 그의 육의 애비를 누가 장사하리요? 셋째하늘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그의 육의 가족들을 누가 돌보리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육의 애비의 장사를 다녀오며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영적인 의미를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기억하길 원하셨다.

 

첫째 사람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자신에게 없는 것은 주고 싶어도 못 주고 오로지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남과 나눌 수 있음이니 생명이 없는 자가 생명이 없는 다른 자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에게 생명을 못 주되 오직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아버지의 영생을 전해줄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오직 아들의 십자가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정하셨으니 누구든지 자기의 생각에서 돌이키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그 십자가의 길에서 새 생명을 이룰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그 평화의 복음을 다른 자들에게도 나누어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생명이 없으면 생명을 전할 수 없으니 생명 있는 자만이 생명 없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에게 생명을 전해줄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의 씨로 영이 거듭난 자는 회개와 영의 거듭남의 생명을 전할 수 있고 거듭난 후 그리스도를 따르며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얻는 영광의 복음도 나누어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복음이 있다 하여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생명 얻을 기회를 얻어야 하며 또한 간절히 생명을 원해야 한다. 즉 생명 없는 자는 육의 기회가 있을 때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져야 생명 얻은 자를 통해 그것을 전해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중생이 없는 영혼의 영원한 죽음을 모르니 숨이 붙어있는 자신이 살아있는 줄 알고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어리석은 말을 하되 거듭난 자들 가운데 자신의 생각과 의를 따르느라 의를 따르지 않는 교만한 자들은 자신이 복음을 들었고 새 생명 가운데 있노라 말하되 복음의 비밀과 새 생명이 무엇인지 모른다.

 

둘째 생명 없는 자가 생명 없는 자에게 생명을 줄 수 없는 것처럼 죽은 자가 죽을 자를 장사하지 못하며 또한 한다 하여도 죽은 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이미 그를 선악의 죄와 세상으로 삼킨 자가 하는 것이다. 고로 이것은 사람의 육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세계이니 사람의 영혼이 육에서 나오면 그가 쌓은 죄와 거룩에 따라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상급이나 혹은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사망으로 들어간 그의 육이 작은 알갱이(쿼크/렙톤)의 창조재료인 티끌로 돌아갈 때 원수가 세포들을 가져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용한다. 그 이유는 마지막 때에 이 세상으로 올라올 자신을 예비하기 위함이니 자신이 육을 입고 나오기 전에 144000의 목을 베는 짐승들을 만들고자 하되 스스로 지혜롭다는 그가 티끌로 알갱이를 빚어 세포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적인 세계에서는 죽은 자들조차 죽을 자를 장사하지 못하고 오직 거짓말의 아비가 그를 장사하고 있으니 사람이 어찌 죽은 사람을 장사할 수 있으리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에게 천륜과 인륜을 다하도록 공평하신 뜻을 주셨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므로 슬픔을 당한 자가 떠난 자의 마음을 깨닫고 행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는 각 사람의 영혼이 그리스도께 아뢰는 공통된 소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남은 가족들은 죽은 자를 장사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육이 땅으로 돌아가며 그 영혼이 심판대에 섰을 때 그가 받을 생명과 사망의 상급과 또한 그가 어디로 갈지를 아버지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법적인 심판대에서 정하신다. 그런데 그때 심판대에서 모든 영혼들이 한 가지를 늘 그리스도께 요청하니 그것은 그가 다시 이 첫째하늘로 내려와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가기를 원함이다.

 

그 영혼들이 가족들에게 가기 원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이니 사람들의 표현으로 하면 다음과 같은 영적인 유언을 전하기 위해서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이여 내가 인생을 살아보니 또한 죽어서 심판대에 서보니 돈을 따라가거나 이 세상의 영광을 구하거나 주님을 믿는다며 마음 없는 행위를 열심히 드리는 것이 사람의 목적이 아니요 마지막에는 죄와 거룩에 대한 심판과 상급이 있으니 부활을 소망하며 거룩의 믿음을 가지고 거룩에 애쓰며 자신의 영과 혼과 육을 거룩하게 지어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니라.” 즉 그들의 공통된 마음은 무저갱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그 부자와 같으니 부모로써 자기의 자녀들이 나중에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도록 어릴 때 늘 공부하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은 인격체이니 공부도 자기가 좋아야 하고 목적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영혼들에게는 12제자들만이 아니요 연약한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 늘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12제자가 아닌 그 제자는 이미 그전에 들은 바가 있었기에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으며 또한 자신이 들은 대로 순종하고자 했다. 즉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를 따르며 받은 복음을 깨닫고 순종하므로 거룩을 이루어 새 생명을 얻은 후에 또한 자신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의 영혼들도 불쌍히 여겨 생명을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의심 가운데 순종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마음도 불쌍히 여기셨으니 그것은 그가 비록 의심가운데 있으나 순종하려는 그 겸손한 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보고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실 때 거처가 없었으며 가난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생각으로 가르치는 자들은 나는 집도 없고 가난하며 아무것도 없으니 네가 만일 이 길을 가려면 너도 무소유가 될 것이니 그럴 각오가 되어있느냐는 뜻이라고 전하며 자신을 제자로 여기니 뿌듯하다. 그래서 그가 말한 대로 사는 자인가 하여 들여다보면 이방인들과 똑같다. 한편 어떤 자는 지금은 마지막 때라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되 결혼해서 아기들을 줄줄이 낳고는 앞에 서서 설교하길 홍수가 나서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그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며 울분을 토한다. 최고봉은 이것이니 혼자 있을 때 늘 음행을 즐기는 자가 돌이키지는 않고 지금은 환난과 재림이 임박한 마지막 때이니 우리 함께 깨어서 신부단장하자며 사람들을 모아놓고 입을 돌리길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며 자위한다.

 

그러나 우리의 구세주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동일한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어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계셨으니 어찌 음식을 취하지 않고 대변을 보지 않으셨겠는가? 거처가 없어 날마다 산에서 주무셨겠는가? 또한 자신을 세상과 사람들이 아니요 오직 아버지께만 맡기셨으니 주식과 땅과 보험은 취하지 않으셨어도 공적인 복음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원수의 시험을 이기기 위한 그 40일 외에는 오로지 일용할 만큼의 영과 육의 양식을 늘 취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앞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니 곧 인자에 대한 예언이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창조원리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도 짐승도 동일하게 그들의 육신이 죽을 때가 되면 자기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를 찾도록 창조하셨으니 그들은 자기가 자라 나온 곳으로 돌아가 그곳에다 자신의 육신을 묻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앞으로 자신이 죽음을 당할 때 사람들과 또한 짐승들도 하는 그 일조차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가증스러운 자들은 그가 가난했으며 또한 거할 처소도 없었다고 가르치며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알리되 머리 둘 곳만이 아니요 다른 모든 것들도 철저하게 준비하다 결국 머리 둘 곳 없는 그 마지막 죽음은 피한다. 그리하여 그런 육신적인 준비들과 양들을 위한 죽음의 거부는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요 바리새인이었음을 스스로 증거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언이요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니 그리스도께서 그 죽음을 맞이하실 때 그를 따르던 제자들 즉 친구들은 모두다 도망갔다. 또한 그의 육의 어미도 자기의 생각을 따르며 육과 세상으로 분주하여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다가 오로지 주님이 돌아가실 때에 십자가로 나아왔다. 게다가 그의 육을 담는 그곳도 자신이 마련한 것이 아니었으니 오직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고 자신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사단의 자식이란 소리를 들으며 극한 고통가운데서도 십자가의 죽음만을 끝까지 이루셨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그 참된 생명을 이루고자 죽음을 당하실 때에 사람들과 짐승들이 하듯 그 모든 것을 다 하지 아니하시므로 인자의 그 예언을 그대로 이루셨다.

 

한편 이 예언의 말씀이 나온 상황과 대상이 있었으니 우선 그리스도를 좇아 다니던 한 서기관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는 참으로 마음이 악했으니 자신이 영의 생명을 얻고자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라다닌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보니 그가 왕이 될 때에 자신도 그 왕의 자리에 함께 가길 원하여 따라다녔다. 즉 그는 율법공부를 다 마친 후에 자신이 서기관자리에서 바리새인이나 혹은 장로로 올라가지 못할 것을 이미 예측하고 그리스도를 좇아 다녔다. 그러나 인자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쪽으로 형편이 기울어지자 얼마 못 있다 그리스도를 버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좇지 못한 그 서기관은 생명도 얻지 못하고 또한 세상의 명예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그 악한 서기관이 바로 그때 자신의 그 마음을 숨기고 그리스도께서 어디를 가든 자신은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겠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왕이 될 때 자신도 그 자리에 함께 앉을 때까지 따르겠다는 것이지 자신도 머리 둘 곳 없는 그 죽음까지 따라가므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겠다는 마음이 아니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악한 마음을 아시니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리요? 너의 마음을 돌이키라는 말을 인격체에게 계속해 반복하시리요? 아님 다 큰 성인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시리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악한 서기관에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아니하셨으니 그것은 그가 자기의 사람이 아닌 것을 이미 아셨기 때문이다.

 

한편 서기관의 고백 바로 전에 열두 제자 중 한 명이 그들이 이제는 육의 안식도 취하기 원하여 쉴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제자의 마음은 정말 육신의 안식을 위해 쉴만한 곳을 찾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와 제자들에게 계속적으로 사람들이 붙으니 그의 육적인 욕심과 영적인 교만으로 자기의 사람들을 고르고자 함이었다. 즉 그 제자는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그리스도의 말이 아닌 자신의 육적인 말을 들을까 하여 자기를 따를 자들을 고르기 위한 생각을 가지고 쉴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제자는 믿는 자들 중에서 지금으로 말하면 저 불쌍한 사람들의 육을 돕자고 말하는 자들의 조상이니 동성애는 죄요 내 안의 음란은 성령이 주는 것이고 바벨론의 공산주의는 마귀정권이요 바벨론의 자본주의는 하나님이 세웠으니 묶였던 자가 자유케 되는 그 영광의 날은 내 안의 죄를 이기는 날이 아니요 북한정권이 무너지는 날로 여기며 노래 부른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서기관에게는 무슨 말씀을 하지 아니하셨으나 그 전에 그 제자가 사람들을 자기에게 이끌어 자기의 말을 듣게 하므로 자기가 높아지고자 쉬는 곳을 찾는 그 잘못된 마음을 아시고 그 대답으로써 그 제자에게 주셨던 말씀이 곧 이 인자의 예언이었다.

 

이처럼 가룟유다는 늘 다른 자들보다 자기가 더 육적인 이익을 얻고자 했으며 또한 그 육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가 아닌 오히려 육을 많이 가진 자신을 따르도록 이끌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또 한번의 기회를 주어 그가 잘못된 마음을 돌이키길 원하셨기에 그에게 머리를 둘 곳이 없는 인자의 그 죽음에 대해 알리셨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 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오직 육의 욕심과 세상에 있었으며 또한 살고자하는 마음도 없었으니 그는 자신에게 생명의 기회를 주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돌이키지도 못했다.

 

그런데 2천년 전의 이런 상황은 이 마지막 때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니 어떤 제자는 물질의 어려움과 사람의 수가 적은 것을 보며 십자가라 생각하여 적음으로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그의 안에 있고 풍부한 물질과 많은 수를 이룬 제자는 큰 것으로 높인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일 그 마음을 돌이켜 처음에 약속한대로 죽기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한다면 그들은 육의 사망으로 들어간다. 반면 어떤 제자는 처음부터 자신이 목적으로 삼은 그것을 복음을 이용해 다 이루었으니 내려오지 못할 만큼 높아졌다. 그러므로 그가 만일 거짓을 돌이키지 못하면 영혼의 사망으로 들어감은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른 그 제자의 마지막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의 왕자가 백성들 가운데서 얼굴이 예쁜 여자가 아니요 오로지 자신에게만 마음을 주는 깨끗한 여자와 혼인을 하고 싶었다. 그러므로 그 왕자는 큰 왕궁 문을 열고 나가 자기나라의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마음을 이리저리 바꾸지 않는 여자를 택했으나 외모는 많이 딸렸다. 하지만 그 왕자는 그 여자에게 진실한 사랑을 베풀고는 이러한 말을 해주었다. “나는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오직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당신을 맞으러 돌아올 때까지 당신의 마음이 오직 나만을 기다리며 당신 자신을 나를 위해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요.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왕궁에 거하는 사람들이 당신과의 혼인잔치를 잘 준비하도록 또한 당신이 나를 맞이할 준비를 잘 하도록 나의 종들에게 시켜 왕궁에서 나팔을 불게 하실 것이요.” 왕의 말을 듣자 그 여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그 왕은 혼인잔치를 준비하러 왕궁으로 돌아갔으며 그 여자는 자기자신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세상의 친구들이 재미있는 곳에 놀러 가자고 하면서 찾아왔다. 하지만 그 여자는 자기의 신랑 될 남자를 위해 준비할 것이 있다면서 거절했다. 또한 외모가 좋은 남자가 좋은 것을 가지고 찾아와서 큰 관심을 보였으나 자신이 받은 첫사랑을 잊거나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잘생긴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또한 자신도 자기의 모습을 그에게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왕궁에서는 빵빠라빵 빵빵빵 빵빠라빵 하면서 큰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에 궁전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그 나팔소리를 듣고 혼인잔치를 더 열심히 준비했으며 그 여자도 그 나팔소리를 듣고 자신을 더욱더 자신을 아름답고 정성스럽게 가꾸었다. 그리고 두 번째 나팔이 불자 왕궁에 거하는 종들은 혼인잔치를 거의 마무리했으며 그 여자도 자기의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거의 다 끝냈다. 그러나 왕에게 자기의 마음을 두고 있는 그 여자 외에 다른 세상사람들은 그 나팔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다 종들이 마지막 나팔을 크게 불자 왕궁의 문이 열리며 일하는 사람들이 나와 빨간색 카펫을 그 여자가 거하는 곳까지 깔았다. 그리고 왕궁에서 나온 멋진 종들이 그 왕자가 기다리는 왕궁의 문 앞까지 그 깨끗한 신부를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그 남자는 그 여자를 자신의 품에 안고 혼인잔치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세상사람들은 그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께서 종들을 통하여 이 첫째 하늘에 울려 퍼지게 하시는 그 나팔소리는 교회의 머리요 신랑인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정결한 신부를 데리러 나오시기에 준비하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들 가운데 십자가를 통해 받은 그 첫사랑의 은혜를 잊지 않고 깨어있는 영혼들과 또한 자기의 생각이나 이 세상을 따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혼들은 그 나팔소리를 듣는다. 그리하여 이 마지막 때에도 아버지의 그 뜻과 나라에 마음이 있는 그 영혼들이 그 나팔소리를 듣고 더욱더 자신과 공동체의 거룩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원수가 이끄는 이 세상에 빼앗기므로 첫사랑을 잃은 영혼들은 그 나팔소리를 듣지 못한다. 거듭남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생각과 의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영혼들도 듣지 못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첫사랑을 잊지 않은 영혼들과 자기를 따라오는 자들에게 어두운 죄와 세상을 이기는 진리의 빛을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자들이 무엇으로 어떻게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선악의 죄와 싸우며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의로움과 거룩함을 이루고자 애를 쓰리요?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많은 자들이 노아의 때와 같이 자기의 마음을 육과 이 세상에 두고 먹고 마신다.

 

     그런데 이렇게 어떤 자는 듣고 어떤 자는 듣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다시 오실 그때에 울려 퍼지는 그 마지막 나팔소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종들이 왕이 곧 나오신다는 의미로서 예비의 나팔을 불 때 아버지께서 아들의 안으로 임하시니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둘째 하늘의 문을 열고 나오신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자기와 함께 거할 영혼들을 자기의 성문 앞에 부르신다. 그러면 바로 그때 신랑을 맞이하는 자들과 그를 위한 모든 자들은 주님의 종들이 부는 그 나팔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리하여 종들이 영과 혼과 육이 정결한 자들을 공중으로 데려가니 휴거 된 그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첫사랑을 잊은 영혼들과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던 영혼들은 그 마지막 나팔소리도 듣지 못할 것이다. 거듭난 영혼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두므로 두 마음을 품고 이방인과 같이 이 세상을 바라보고 달리는 자가 어찌 그 신령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요? 심지어 그들은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들을 통해 마지막 때의 심판을 끝까지 알리셔도 끝까지 돌이키기를 원치 아니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그 뜻과 영원한 셋째 하늘에 마음이 없었던 영혼들은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 즉 자신을 거룩하고 깨끗하고 흠 없게 준비하지를 못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그 선악의 죄와 함께하며 이 세상에 마음을 둔 자들이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오실 때 사망으로 들어가거나 또는 아무런 준비 없이 대환난의 침상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영혼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이루게 되는 그 거룩에 마음과 믿음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피를 의지해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선악의 죄와 또한 세상과 싸워 이기므로 거룩을 이룬다. 그리고 그 대환난에서 그리스도의 환난복음을 다 전한 후 목 베임으로 산 제사를 아버지께로 올려드린다. 그리하여 그 휴거 된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므로 죄와 세상을 이긴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과 제사장으로서 이 땅으로 내려와 천 년 동안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린 후 아버지께서 계신 영원한 셋째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사람들은 흔히 이방인이라고 하면 유대인의 12지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로써 이스라엘의 밖에 거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이방인들 가운데는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당시까지 유대인들과 함께 거하던 이방인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그들을 함께 따라 나왔던 이집트인들이 있었으며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로 다닐 때에 포로가 되거나 자진하여 그들과 함께 광야 길을 걸었던 주변의 이방인들도 있었다. 또한 라합과 그의 가족들도 처음에는 이방인이었으나 그 일 후에 유대인들과 함께 거했다. 또한 예루살렘성전이 세워진 후에 여호와의 구원의 이름을 듣고 여러 지방과 민족에서 포로들이 돌아올 때 함께 온 자들도 있었다.

 

이처럼 할례를 받은 후에 이스라엘과 함께 살게 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맺은 관계는 요즘에도 색깔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거할 때 벌어지는 일을 보면 이해하기 쉬우니 그들이 어렸을 때는 함께 어울리며 친밀한 관계를 맺지만 성인이 되고 성숙해지면 서로가 다른 것을 깨달았기에 그 친밀한 관계가 변하여 오히려 더 원수의 관계가 되었다. 그러므로 악한 유대인들은 자기의 조상 때부터 자기들과 함께 살던 그 이방인들의 후손들을 형제자매로 받기보다는 늘 낮게 여기며 종처럼 대우하므로 아버지께서 주신 그 계명들에 순종하지 못했으며 유대인들과 함께 거하던 이방인들 중에 악한 자들도 유대인들을 미워하며 싸웠으니 그들도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당시에 이렇게 유대인이 아닌 유대인으로써 유대 땅에 거하는 자들의 수효는 남자가 1872명이요 여자가 2134명이 있었으며 성인의 나이인 12세가 되지 않은 어린 남자는 881명이요 어린 여자의 수는 822명이었으니 그들이 바로 유대인의 하속이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태어난 자기의 민족을 떠나서 다른 민족들이 거하는 땅에 살겠다는 것은 사람이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하속의 조상들은 자기가 속한 그 뿌리를 떠났으니 그것은 그들이 유대인들에게서 육적인 것을 더 얻거나 혹은 이 세상의 나라에 속한 타락한 육적인 이스라엘에 그 어떠한 소망이나 영광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은 썩어질 육과 이 세상의 헛된 소망을 버리고 오직 율법과 계명과 법도에 순종하여 거룩에 이르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그 부활의 생명에 이르고자 자기가 태어난 민족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하속들과 그들의 조상들 가운데 자기의 민족을 떠나올 때 가졌던 그 첫 마음을 지키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택함의 은혜를 얻고도 거룩을 저버린 유대인들처럼 그 거룩한 뜰로 들어가 그들의 손을 펴되 오로지 썩어질 것들과 헛된 것들만을 구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그 거룩한 곳으로 들어와 거룩한 행위의 모양을 보이되 영원한 생명을 주는 자신을 이방인들의 신처럼 섬기던 그들에게는 눈을 돌리시고 귀를 막으셨으니 그들도 육적인 유대인처럼 그저 아버지의 마당만 밟을 뿐이었다.

 

반면 그들 가운데 자신이 여호와를 만날 때의 첫 마음을 끝까지 지키므로 자기의 마음에 우상을 허락하지 않은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전에도 또한 그리스도의 당시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을 위한 뜰에 들어갔을 때 오직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룩에 이르고자 애썼다. 즉 그들이 자기민족의 풍습을 버리고 유대인의 약속과 또한 그 거룩한 행위의 능력을 따른 것은 그들이 오직 아버지의 뜻에 이르고자 함이었으니 아버지께서는 이방민족에서 유대로 들어와 거룩에 애쓴 그 하속들에게 은혜를 내리시어 그들을 의롭고 거룩케 하셨다. 또한 그들이 썩어질 육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그들에게도 지키셨으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후 그 영혼들도 거룩한 몸을 입고 그 거룩한 성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도 또한 아들께서도 그들을 보실 때에 이제는 더 이상 이방인이나 유대인의 하속들로 보시지 아니하시고 오로지 유대인의 자녀들 가운데 딸로 여기신다.

 

그러나 이렇게 동서로부터 많은 유대인 아닌 유대인들이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그 약속을 이루는 동안 오히려 바깥의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가는 유대인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처럼 보이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유대인만이 아니요 자신의 십자가 이후에 있을 그 일곱 교회시대에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모든 영혼들에게 선포하신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경고의 말씀을 깨닫고 돌이키는 이방인에게는 영생의 유익이 있다.

 

그러므로 각 교회시대마다 또한 어린양의 다시 오심이 임박한 이 마지막 때에도 나는 그리스도를 안다 믿는다 따른다 말하되 거룩에 마음이 없는 이방인들이 있으니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육과 또한 자신이 나왔던 이 세상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십자가의 첫사랑을 회복하고자 자신의 심령을 찢기보다는 그저 때가 되면 아버지의 앞에 나와 마음 없이 행위만을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마음 없는 더러운 곳에는 임하시지 못하시니 그들이 비록 거룩한 곳에 나와 늘 예배를 드리며 여러 가지 행위들을 열심히 드린다 할지라도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받으시거나 그들의 몸을 성전으로 삼으시지 아니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음을 보시는 그리스도의 심판에 따라 그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나는 세상에 있을 때 오직 예수이름으로 모든 것을 했는데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라는 불평과 불만이다.

 

이와 같이 유대의 주변에서 온 이방인들은 그가 어느 시대에 거하든 나는 예수를 믿는다 따른다 또한 예수님을 좋아한다 라는 말을 하되 그들의 마음은 오로지 그 육을 어떻게 채울까에 가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바로 그런 육적인 이방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엄중하신 심판의 선포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들이 말씀을 듣고 보았을 때 생명과 소망이 없는 이 헛된 세상에서 마음을 돌이켜 이미 약속된 그 푯대의 생명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당시만이 아니요 교회시대와 이 마지막 때에도 늘 입으로만 믿는다 따른다 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귀로 또한 눈으로 이 어두운 곳에 대한 말씀을 분명히 듣고 똑똑히 보게 하시는 것이다.

 

반면 십자가의 피로 영이 거듭난 후 이 땅에서는 비록 주변에 거하되 그들이 이 세상을 등지고 광야와 섬들에 거하는 이유는 자기의 생각이나 의나 사람의 가르침이나 이 세상의 풍조에서 돌이켰기 때문이요 십자가아래에 모이는 그날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바벨론의 주변에 거하며 마음과 믿음을 오로지 거룩에 두고 마음과 몸과 정성과 뜻을 다해 거룩에 애쓴 그들도 부활시켜 어린양의 신령한 신부나 이방인가운데 거룩한 아들과 딸로 삼으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한 육체의 생명 얻은 그들이 영적유대인과 함께 천년왕국과 또한 그 끝에 맏아들을 따라 올라갈 영원한 셋째하늘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가까이에 거하므로 기쁨과 영광이 충만해지며 아버지의 모든 것을 누리며 그 의롭고 거룩한 나라를 영원토록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한 의로운 왕이 높은 산의 꼭대기에 있는 왕궁에 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왕이 산밑에 있는 도시사람들을 가만히 보니 그들은 돈을 취할 수 있다면 무슨 일도 다했으며 배가 불러도 더 챙기려고 늘 거짓말했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과 첫사랑을 나눈 남자에 만족하지 않고 힘있는 남자를 따라다녔으며 남자는 자기의 아내가 있음에도 늘 기회를 만들어 다른 여자와 즐겼고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거나 서로가 부부를 바꾸어 취했다. 또한 자신이 높은 곳에 올라가고자 자기의 가족도 다른 사람에게 내주었다. 그러니 자신도 깨끗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불의와 죄와 실수를 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보통이었다. 한편 도시를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자기의 욕심과 앉은 자리를 위해서만 움직였으며 많은 사람들의 앞에 서서 말하는 자들은 무슨 말을 하든 무엇을 하든 그것은 오직 자기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서는 부하고 강한 자는 대우를 받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는 늘 서러움을 당했다. 이에 그 왕은 불의하고 죄악된 그 도시를 심판하고자 했다. 하지만 자기만 사랑하는 그 악한 자들 가운데서 진심으로 그 불의하고 죄악된 도시에서 나오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 심판 전에 다 구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나와 자신을 섬긴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나라를 다스리는 영광을 주고 싶었다. 그 왕은 이러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자기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들아 너는 저 산밑에 있는 도시로 내려가서 나의 뜻과 계획을 전한 후 다시금 왕궁으로 올라오며 너의 발자국을 선명하게 찍어놓아라. 그러면 저 불의하고 죄악된 도시에서 벗어나 이 좋은 곳에서 왕자와 공주가 되기 원하는 자들은 이 산꼭대기까지 올라오는 것이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인내하며 너의 그 발자국을 따라 끝까지 올라올 것이니라.” 왕의 말을 듣고 난 후 그 아들은 산밑에 있는 도시로 내려가 자기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다 전했다. 그리고 왕궁이 있는 산꼭대기를 향했으니 다섯 사람이 그 아들을 따라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더럽고 불공평한 세상이라고 말하면서 거기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그 세상에 미련이 있거나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편 많이 가진 자들은 거기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면서 죽을 때까지 즐기고 싶었다. 이제 그 아들은 산꼭대기를 향해 바라보며 가장 빠르고 쉬운 길로 올라가며 발자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다섯 사람의 눈에는 그 길이 가장 멀고 험하게 보였으며 또한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첫 번째 사람은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았으며 두 번째 사람은 한 발은 산을 향해 한 발은 도시에 두고 다리를 벌리고 서있었으며 세 번째 사람은 자기의 눈에 빠르게 보이는 곳으로 가다 웅덩이에 빠졌고 네 번째 사람은 자기의 눈에 쉽게 보이는 곳으로 가다 악한 짐승들에게 쫓겨 다녔다. 그러나 다섯 번째 사람은 불의하고 죄악된 자신과 그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간절히 가졌다. 또한 왕궁에 도착해 영광을 얻게 되는 그 소망을 늘 품고 그 아들이 찍어놓은 발자국만 따라갔다. 그러자 그 아들은 자기를 따라오는 그 사람에게 맛있는 빵과 물을 늘 주었으며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항상 들려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기쁨으로 그 고난을 참고 인내하며 끝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왕의 약속대로 그는 그 아들과 함께 왕자로서 그 의롭고 높은 나라를 다스리는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그 불의하고 악한 도시를 사랑한 사람들은 모두다 심판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에 이르는 그 길을 오직 자신의 십자가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영원한 셋째 하늘의 성소에서 아버지의 영광과 얼굴을 보는 그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 원하는 영혼은 거듭남의 은혜를 얻은 후 그 어떤 행위나 율법에 빠지지 아니하고 오직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간절히 가진다. 또한 마음에서부터 이 불의하고 죄악된 세상을 벗어나기 원한다.

 

     그러나 사람은 육의 한계가 있으며 또한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니 마음은 있어도 자신이 마음대로 그것을 못한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영께서는 아버지의 그 뜻과 때와 계획에 따라 그 영혼을 이 어두운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이끄신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 진리와 생명의 길을 내셨기 때문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만이 그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그 영혼에게 자신의 그 살과 피를 주신다. 그러면 그는 그 영광스러운 것을 의지해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선악의 죄와 싸운다. 또한 원수가 그에게 메어놓은 세상의 줄들이 하나씩 풀리니 결국에 그는 그 어둠의 죄와 어두운 이 세상을 이긴다. 오직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죄와 세상을 이기는 빛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걷는 그 십자가의 길에는 혼적인 고난이 있다. 날마다 자기의 생각과 의를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말씀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환난과 더불어 순교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 길에는 육적인 고난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룬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 아들과 한 몸을 이루기 원하는 영혼들에게는 말씀의 기초를 시작으로 거룩한 것과 영광스러운 것을 차례차례 주시어 마음과 영혼에 늘 기쁨과 평화를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고난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른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마지막에 그 환난에서 아버지께로 피의 제사를 드리므로 넉넉히 이기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거룩한 육체를 입는다. 그리하여 영화롭게 된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왕국을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며 또한 그 후에 셋째 하늘의 영원한 기쁨과 다스림에도 그리스도와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한 나라안에 어떤 지역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어떤 지역에는 사람들의 수가 적다. 예를 들어 변두리나 시골지역에는 5만 명이 넘고 경기도에는 100만 명이 넘는 시도 있으나 둘 다 동일하게 시라고 칭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당시에도 어떤 지역에는 많이 어떤 지역은 적게 살았으니 예루살렘은 지금으로 말하면 사람의 수가 가장 많은 특별시와 같았고 나사렛은 작은 시와 같았다. 그런데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자신의 욕심과 영광을 구하며 늘 원수의 말을 듣고 말하며 행하는 악한 자들이 있으니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백부장이라는 위치는 사람의 수가 100명인 마을을 대표하며 책임지는 자이되 그 마을에 꼭 100명만 거하는 것이 아니요 마음의 명부에 기록된 인구수와 일치하지 않았으며 또한 어떤 백부장에게는 50명을 어떤 백부장에게는 30명을 더해주기도 하였기에 당시 백부장이 다스리는 마을의 사람 수는 대체로 100명보다 훨씬 더 많았다.

 

또한 그리스도 당시에는 지금의 군대조직과 달랐으니 만일 악한 이방인들이 쳐들어오면 성인의 나이인 12세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나가서 함께 싸웠으나 여자는 항상 집안에 거하며 집안일을 도왔다. 그러므로 백부장과 천부장은 행정적인 책임과 더불어 군사적인 권세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자들에게 위협과 죽임을 당할 수도 있으니 자신의 안전을 위해 자기의 주변에 늘 칼을 든 종들을 두고 다녔으며 밤에는 칼을 든 그 군사들이 밤새워 그들을 지켰다. 구체적으로 백부장과 천부장은 늘 여섯 부류의 종들을 데리고 있었으니 우선 칼을 잘 이용하는 종들과 집안의 일을 하는 종들과 집밖의 일을 하는 종들과 가정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종들과 자녀들을 가르치고 보호하는 종들과 다른 모든 종들을 관찰하는 종들을 데리고 있었다.

 

결국 백부장과 천부장은 그 힘으로 어떠한 두려움과 타협 없이 의롭고 공평하게 마을을 다스리며 또한 모든 백성을 아끼며 정직하게 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야곱으로부터 12지파를 이룬 후 이집트에 있을 때에도 또한 광야에 있을 때에도 백부장과 천부장이 자기의 목숨을 바쳐 백성들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처럼 그 자리에 앉아 백성들을 위해 선하게 다스리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욕심과 자리만을 구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런 자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고 섬기고자 함이 아니요 오로지 자신에게 있는 부유한 것을 다른 자들에게 보여주며 또한 자신이 앉은 그 자리가 합당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마음을 가지고 많은 종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리하여 그런 마음을 품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자는 앞에서는 입술로 백성들을 위한다고 말하며 돌아다니되 뒤에서는 늘 백성들을 속이며 그 자리를 통해 자기의 유익을 얻고자 자기의 자리를 굳게 지켰으니 지금의 높은 자들과 똑같았다. 또한 사람들은 지금은 종이 없도다 라고 하며 너와 나가 동등하다라고 말하되 세상을 가만히 보아라! 아직도 그 물질이 있는 자들은 물질이 없는 자들을 늘 물질로 사서 종을 만들어 온갖 더럽고 위험한 일을 시키며 모든 물질을 쌓아놓되 자기가 부리는 자와 그 가족을 책임지기는커녕 종의 가치가 없어지면 잘라버린다.

 

당시 가버나움은 두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을 때 나온 백부장은 가버나움의 두 백부장들 가운데 한 영혼이었다. 그 영혼은 성품이 선하였으며 또한 다른 영혼들을 늘 불쌍히 여기는 자였다. 그러므로 자기의 종이라 하여도 자기의 종같이 여기지 아니하고 늘 한 가족으로 여겼으니 낮은 종들에게도 늘 공평하게 나눌 것을 나누어주었다. 또한 항상 자신만을 위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온 가족들과 또한 온 종들을 위하여 애쓰는 자였다.

 

하지만 그 선한 백부장의 종들 가운데 한 종이 그 병에 걸려 그 몸을 온전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병은 자신의 마음을 이미 원수에게로 빼앗겼기에 원수는 그의 두 번째 단계인 육체의 기능을 자신이 잡아 사망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육체에 어떠한 충격이 올 때에 흑암의 세력이 그 한 부분과 또한 다른 한 군데를 동시에 잡기에 그 병에 걸린 자들은 그 잡힌 한 부분을 이용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원수는 자기가 원할 때마다 그 부분을 이용하여 그가 끝까지 아버지께로 나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부인하게 하므로 영원한 사망으로 이끌고자 함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아들의 그 피를 의지하여 아버지께로 나와 자신의 죄와 범한 허물들을 회개하면 아버지께서는 그의 육체 안에 군데군데에 죽은 피가 머물러 다른 피를 그 육체로 퍼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그 썩은 피들을 종을 통해 거두어주신다. 그러므로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죄들을 회개하고 돌이킨 자는 그 피가 이제는 원래처럼 온 몸을 돌게 되니 그 병에서 온전케 된다.

 

그런데 자식들이 만일 악한 부모를 따르며 보고 자라면 자식들도 부모처럼 악해져 서로간에 결국 원수로 변하듯 악한 지도자의 밑에는 반드시 악한 종들이 밑으로 들어가 서로 헐뜯고 끌어내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반대는 반대이니 그 선한 백부장의 종들 가운데서 한 영혼이 예수그리스도의 소식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 종은 그 병에 걸려 자기의 옆에 누워있는 종이 그 병에서 일어나길 원했기에 자기의 주인에게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주인은 늘 선한 마음이 있기에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유대인으로써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아의 앞에 나아와 속죄의 권위가 있는 그리스도의 앞에 그의 마음을 다 내어 놓았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백부장의 선한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으니 그의 마음중심을 보시고 그에게 거룩이 담긴 복된 말씀을 허락하시므로 그가 생명을 얻었으며 또한 그의 종도 육만이 아니라 영의 구원도 얻었다. 즉 병으로 인해 누워있던 종도 자기의 주인에게 거룩을 전해 들었을 때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를 믿고 자신의 허물들을 돌이켰기에 영이 거듭나는 그 은혜와 육의 깨끗함도 얻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 백부장을 향하여 말씀하신 이만한 믿음이라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첫째로는 그 영혼이 자기의 핏줄도 아닌 낮은 종을 살리고자 하는 그 선한 마음을 뜻하는 것이요 둘째로는 그가 이 세상의 다른 그 누구에게로 찾아가지 아니하고 가장 먼저 창조자에게 나와 자신과 또한 자신의 종의 영혼을 맡긴 것에 대한 마음과 믿음을 뜻하는 것이니 당신의 마음 안에는 과연 그만한 믿음이 있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