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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드님과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추석을 앞두고 고향에 벌초하러 가는 중에 이소선 어머니께서 돌아 가셨다는 문자를 받았다. 40년 동안 노동자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 일하셨고, 이 나라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분이 가셨는데 애도의 마음을 전하면서, 흔적을 남겨야겠다.

 

벌초를 마치고 밤에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어머님 뉴스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남긴 글들을 읽어 보았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이야기 사진 그리고 영상까지 되뇌이며, 안타깝고 슬퍼하는 마음 절절하다. 평소에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멀리서 농사하는 한 사람은 '어머니'의 노랫말을 되새겼다. 

 

"사람사는 세상에 돌아와 너와내가 부둥켜 안을때 .... 어머니 해맑은 웃음의 그날 위해" 그러면서  "청춘을 받친 전태일, 평생을 받친 그의 어머니! 이소선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라고 한다.

 

다음날 일요일 오후에 여럿이 어울려 조문하러 병원으로 갔다. 조문 온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작은책 사람들을 만났고, 하종강 선생님도 조문을 마치고 딸과 함께 차를 타고 나서는 참이었다. 장례식장 앞에는 노동조합 정당 정치인 단체 등에서 보낸 수많은 화환들이 끝없이 놓여있다. 이어지는 조문 행렬 속에 잠시 두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대학로로 나와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맑은 하늘이 보이는 옥상에서 맥주를 마셨다. 주인 양반도 이소선 어머님 추모 리본을 달고 있다. 곧 이어 '바위처럼'을 시작으로 '그날이 오면' '솔아 솔아 푸른솔아' '광야에서' '사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 들려 준다. 오랜만에 시원 곳에서 여럿이 어울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다음날 저녁 '어머니의 길 따라걷기'를 한다고 해서 다시 나갔다. 전태일 다리에서 함께 일하던 여공 아주머니들의 증언이 있었다. 동화, 평화, 통일 상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여서 '삼동회'가 되었다고 한다. 그 상가 옥상에 청계피복노조가 있었고, 사무실을 지키기 위해서 경찰들과 처절하게 싸운 이야기, 군복을 입고 오는 경찰도 있었다고 한다.

 

동대문을 거쳐서 창신동으로 들어서면서 어머니와 함께 기거하면서 지내온 오도엽시인은 골목골목을 누비며 소개를 한다. 어머니께서 안경을 맞추었던 가게, 약을 대놓고 사던 약국, 동네 슈퍼 곳곳에 어머니의 흔적이 서린 곳이라고 한다. 골목에는 전태일 재단도 있다. 2층 불꺼진 방이 어머니의 방이라고 한다. 어두운 지금쯤 불이 켜져 있어야 할 텐데...말이다.

 

걷기 대열을 '유가족협의회'  사무실이 있는 '한울삶'으로 인도한다. 마당에는 유가협 어른들이 손님들이 온다고 막걸리 상을 봐 놓으셨다. 유가족께서 한분 한분 나오셔서 인사를 하면서,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유가협을 기억해 달라고 하신다. 나누어서 집 안을 돌아보는데, 이제까지 민족과 민주화를 위해 돌아가신 열사들의 사진이 붙여있다. 이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오늘이 있었을텐데.... 말이다.

 

오늘 영결식장을 들어서는데 평일 일하는 시간이기는 하지만, 모인 수가 좀 적어 보였다. 추모의 말씀들을 듣고, 장사익의 '봄날은 간다' 라는 노래도 들었다. 헌화는 시간상 다 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쳤다. 풍물패를 앞세우고, 상여 만장, 그 뒤로 많은 조문객들이 뒤 따랐다. 어머니가 사시던 집이 보이는 동대문을 거쳐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노제를 지낸다.

 

노제를 지내는 중에 어제까지만 해도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뉴스를 장식했던 박 변호사가 나와서 조사를 한다. 좀 어색하게 보였는데, 나 만일까? 대학로에서 미처 헌화를 하지 못한 이들은 이곳에서 헌화를 하는데, 여기서도 시간이 모자라 운구행렬을 꾸린다. 검은 캐딜락에 어머니를 모시고 그 뒤로 많은 조문객들이 따른다. 대학로에서부터 지금까지 뒤 따르던 조문객들이 여기서 저기서 훌쩍인다. 작은책 일꾼은 방송과 인터뷰를 하면서도 계속 훌쩍였다고 한다. 동대문에서 차량으로 마석공원 묘지로 이동한다.

 

많이 배우고, 큰 권력을 가지고, 돈 많은 사람,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데 보잘것 없어 보이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면서 그를 보내기를 아쉬워 하는 것일까? 그 분의 삶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이제 또 이렇게 큰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언제 나타나실까? 모르겠다.

 

일전에 희망버스를 타면서 말했다.

 

예수, 전태일, 김진숙.

예수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 그 다음으로 전태일 이야기다. 그런데 이 두사람은 직접 만나거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김진숙. 그의 이야기를 몇번 들은 적이있다.  .......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이들은 스스로 삶을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산 삶 자체를 모두가 알고 있기에 감동하고 두 주먹을 불끈쥐게 만드는것 같다. 역사는 삶으로 말하는 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소선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아드님과 마나 편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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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늘 말,  성서는 계속해서 기록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면 전태일의 이야기가 뒤이어 쓰여져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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