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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함께, 사람답게, 행복하게: 보건의료노조 고려수요양병원지부 심희선 지부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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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채영, 귤

정리 귤

* pdf 파일 다운받기  [5. 보이지않아도 - 고려수.pdf (322.40 KB) 다운받기]


5월 어느 맑은 날 합정동 한 까페에서 심희선 보건의료노조 고려수요양병원지부 지부장을 만났다. 우리는 일, 노동조합, 사람들,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이야기는 듣자마자 깔깔 웃음이 터질 정도로 즐거웠고, 또 어떤 이야기는 듣다가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해준 심희선 지부장은 시종일관 씩씩하고 생기 넘쳤다.
신문 보도나 SNS로 접한 고려수요양병원 노조 소식은 주로 사측으로부터 몇 천만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는 식의 힘든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인터뷰를 하기 전에는 쉽지 않은 싸움을 하는 만큼 투쟁하는 사람들도 많이 힘들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고려수요양병원 노동조합 사람들이 느끼는 힘듦이 분명히 있었다. 사측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민주노총 조합원이란 이유만으로 다른 직원들로부터 당하는 크고 작은 따돌림, 손으로 모든 치료를 직접 해야 하는 직무 자체의 어려움 등등… 그러나 이 힘듦을 ‘함께’ 이겨내면서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사람다운 대우를 요구하는 고려수요양병원지부의 지난 1년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또 이 이야기를 밝고 생기넘치는 말투로 전해주는 심희선 지부장을 보면서, 우리는 작고도 큰 희망을 느꼈다.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싸우고, 연대하고, 서로를 보살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살아내고 있다.

 

병원이 쓰다 버리는 ‘건전지’, 치료사


심희선 보건의료노조 고려수요양병원지부장은 서울 금천구에 위치한 고려수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물리치료사다. 고려수요양병원은 이름처럼 요양 환자 외에도 재활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많이 오는 병원이다. 이 병원의 물리치료사들은 주로 중풍 환자, 부상을 입은 운동선수, 또는 뇌손상이나 척수 손상으로 인해 몸을 가누는 데 어려움이 있거나 몸에 마비가 온 환자들을 직접 손으로(手) 치료하는 일을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 세 살 때부터 고려수요양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기 시작한 그녀는 올해로 딱 10년차 물리치료사가 되었다. 많은 물리치료사들이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이 가능하다는 점, 병원에서 일하는 전문직이라 직업적 안정성이 있다는 점, 직무 자체가 주는 보람 등을 이유로 이 직업을 선택한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에서 자랐고 빨리 독립하고 싶었던 심희선 지부장 역시도 그와 비슷한 이유로 물리치료사가 되기를 선택했다.
그러나 실제로 일을 하면서 알게 된 물리치료사들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물리치료사의 평균 근속 연수는 3.3년밖에 되지 않으며, 10년째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의 경우가 오히려 드문 사례였다. 그녀는 도무지 일을 오래 할 수 없는 노동조건을 그 이유로 꼽았다.

 

“오 년 이상 치료사 일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손으로 모든 치료를 하는 이 직업의 특성상 근골격계 질환에 정말 많이 노출돼요. 치료사들이 손목 인대 나가고, 디스크 걸리는 게 정말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에요. 회사는 정규직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을 알아보면 무기계약직 형태로 고용하는 게 일반적이고요. 휴식시간도 딱히 없고, 바쁜 동시에 스트레스도 많아서 피부 질환, 호흡기 질환을 달고 살아요. 여성 치료사들의 경우에는 부인과 질환으로 많이 그만둬요. 회사는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오래 일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우리 치료사들이 놓인 조건은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니까 그만두고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죠.”

 

치료사들은 하루 8시간을 일한다. 이 8시간은 30분씩 16개의 타임으로 나뉜다. 치료사들은 보통 16개의 타임 중 11개, 12개 타임을 오롯이 환자를 치료하는 데 쓴다. 나머지 타임들은 차트를 작성하거나 다른 행정 업무를 보거나 동료 치료사의 치료를 돕는 등, 직접적인 치료는 아니더라도 치료와 연결된 일들을 하는 데 쓰인다. 중간에 쉬는 시간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없다. 그녀는 치료사들이 놓인 이런 상황을 ‘건전지’에 비유했다.

 

“기계 같아요. 쉬지도 않고 계속 환자를 보는 것은, 자기 몸을 챙기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3.3년을 넘겨서 일하기가 쉽지 않죠. (치료사들이) ‘건전지’ 같은 거예요. 병원 입장에서는 이 ‘건전지’들을 3년 쓰고, 더 버티지 못하는 ‘건전지’가 나가 떨어지면 더 싼 임금의 ‘신입 건전지’로 갈아 끼우는 거죠.”

 

그녀는 이렇게 나가 떨어지는 ‘건전지’가 일년에 열두 개, 새로 들어오는(신규채용) ‘건전지’가 일년에 열다섯 개 정도 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 병원에 입사하면 회사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다, 일하게 해주겠다’고 말하면서 젊은 치료사들에게는 ‘연애도 하지 말라’고 얘기해요. 가장 젊고 건강해서 많이 일할 수 있을 때 ‘집중’해서 일하라는 거예요. 그러다가 오 년, 칠 년, ‘얘가 좀 오래 일했네’ 싶은 생각이 들면 ‘너 근데 결혼은 안 하니?’ 이렇게 말해요. 회식 자리에서 중간 관리자가 ‘야 근데 너네 몇 살이냐? 슬슬 나갈 때 되지 않았냐?’ 농담처럼 던지면, 겉으로 보기엔 농담이지만 그 얘기를 듣고 아무도 웃을 수가 없어요. 우리한테는 생계의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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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 듣는 팀장’이 본 병원의 민낯


10년 전 처음 입사했을 때, 심희선은 ‘이 병원에서 조금 힘들더라도 일을 잘 배워서 쭉 물리치료사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컸다. 그녀는 오랫동안 ‘말 잘 듣는 직원’이었고, 병원에서도 그녀를 좋게 평가했다. 이런저런 점들이 맞물려 그녀는 ‘좋은 게 좋은 거’, ‘오래 있지 않을 테니까 편하게 있자’는 마음으로 순조롭게 팀장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팀장이 된 후 각 팀의 팀장들과 중간 관리자만 참석하는 ‘팀장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기존의 생각에 다소간 의문을 품게 되었다. 팀장 회의에서 논의되는 내용과 실제 직원들에게 전달되는 내용이 달랐고, 병원이 지시하는 사항들이 직원들을 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직접 느꼈기 때문이다.

 

“팀장 회의를 들어가면서 좀 달라졌어요. 팀장 회의를 들어가서, 나한테 얘기했던 것들이 사실이 아니었고, 여기 팀장 회의에서의 논의사항과 이 직원들한테 전달되는 내용이 너무 다르고, 그리고 지금 여기서 정해지는 것들은 직원들을 위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바뀐 거 같아요. 그래서 좀 문제제기도 하고, 왜 굳이 이렇게 해야 하는지 따지기도 했죠. 그런데 이건 저 혼자 한다고 되는 게 아닌 거예요. 혼자 하면 아무래도 힘이 약하고, 이건 내가 ‘아 이거 조금 잘 해주세요’ 이렇게 말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어요. 내가 팀장으로서 부탁하는 수준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전반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녀가 팀장으로 근무하던 2014년, 총 세 번의 취업규칙불이익변경이 있었다. 병원은 의무적으로 지급해야 하는 연차를 15개에서 6개로 줄이고, 외조모상을 당했을 때 3일을 쉴 수 있게 하던 것에서 1일을 쉬게 하는 것으로 취업규칙을 바꾸려고 했다. 중간 관리자들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다’라며 직원들로 하여금 취업규칙변경 동의서에 서명을 하도록 은근슬쩍 강요했다. 이에 심희선은 이의를 제기하고, 팀원들에게 ‘과반 이상이 동의하지 않으면 취업규칙을 변경할 수 없으니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은 서명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왜 매번 이런 결정을 직원들과 이야기하지 않고 통보하는지에 대한 불만이 컸어요. 저희에게는 항상 통보였어요. ‘위에서 결정된 사항이다’ 하고 끝.”

“저희 팀원들한테 얘기했죠. ‘지금 이 싸인을 하는 것은 우리 연차가 열다섯 개 있는데 거기서 다 깎아버리고 여섯개만 남기겠다는 거다, 뺏기는 거다’라고 얘기를 하고, ‘이것이 ‘취업규칙불이익 변경’이라는 건데 거부해도 된다. 이건 나의 의사표현이고 과반수가 넘어야지 성립이 되는 거기 때문에 싸인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한테 불이익을 주는 자체가 불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연차를 반토막 내는 것에 정말로 동의를 하지 않으면 서명을 안해도 된다.’ 결국엔 저희 팀만 (서명) 안했어요.”

 

심희선의 팀이 ‘서명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전달하자마자 중간 관리자는 종례 시간(!)이 마치자마자 찾아와 “선동하는 거냐”, “(팀장으로서)네가 이러면 되냐”는 폭언을 쏟아놓았다. 직원 몇 명이 연차를 간다고 해서 병원이 손해를 입는 것은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회사는 여태까지 연차수당을 지급한 적도 없었고, 연차를 쓴 치료사가 치료해야 하는 환자는 다른 치료사가 치료해왔다.)

 

한편 팀장으로 일하는 동안 그녀를 힘들게 했던 또 다른 일이 있었다. 바로 팀별로 권고사직자 명단을 제출하는 일이었다. 병원은 경영난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삼성 코엑스 바로 앞 땅을 사서 몇 층짜리 건물을 짓고 4호점을 오픈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팀별로 권고사직자 명단을 제출할 것을 각 팀장들에게 명령했다.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2015년도에 취업규칙 변경을 하면서 권고사직자 명단을 제출하라는 중간관리자의 통보가 있었어요. 팀장한테 문자로 월요일까지 각 팀에서 권고사직자 명단을 제출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낼 수 없다고 했죠. 나에겐 인사 권한이 없고, 회사가 어려워서 직원을 잘라야 하는 거라면, 회사의 수익을 공개해라, 그리고 직원들한테 (몇 명을 해고시켜야 한다는) 이 내용을 공개해라. 그래서 직원들이랑 합의가 되면 이번에 연봉 홀드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러면 아무도 안 잘린다. 그리고 다음 해에 수익이 많이 난다면 그때 올려주면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안 잘릴 수 있는데 왜 굳이 이 명단을 제출해야 되냐고요.”
“이 명단이 공개 안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이 (권고사직 명단에 오른) 사람이 자기가 이 명단에 올랐음을 알았을 때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냐는 거죠. 아니 이 일자리가, 다음달의 내 카드값이고 누구한텐 어머니 아버지 약값이고 누구한텐 자기 생계인 거예요. 근데 그걸(권고사직을) 어떻게 이렇게 쉽게 말하냐. 우리 병원이 그렇게 어렵냐? 그렇게 어려우면 까자! 직원들한테 까자. 다 같이 공유하자 이게 제 제안이었어요.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지났는데 계속 명단 제출하라고 하는 거예요. 끝까지 안 했죠, 할 수 없다고. 어떤 팀장은 자기 이름 내고. 팀장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기 모가지까지 내놓으면서 이거 해야 되냐는 거예요. 그거 아니잖아요, 미쳤나봐. 정 안되면 차라리 희망퇴직자 구하자고 했어. 계속 이럴거면 희망퇴직자 구할 수도 있고 다같이 연봉 홀드할 수도 있다고. 우린 연봉제니까. 그런데 (사측이) 아무것도 안하는 거예요. 이유를 물었죠. 제일 쉽다는 거예요! 이제 이 사람들의 민낯인 거잖아요 이게.”

 

이렇게 옥신각신하던 와중에 뇌손상 환자를 치료하다가 손가락이 꺾이는 부상을 입은 그녀가 산재 신청을 하자 병원 측에서는 “우리는 당신을 팀장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그녀를 팀장 자리에서 강등시켰다. 2015년 치료부 팀장 선거에서 평범한 치료사들에게 가장 많은 표를 받아 팀장이 된 심희선이 병원이 임명한 팀장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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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만들었다, 노동조합


이 일련의 일들은 늘 통보식이었던 병원의 의사결정과정을 좋지 않게 생각해왔던 치료사들의 불만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전반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친한 몇 명의 직원들과 노동조합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던 심희선은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가장 힘들거나 싫은 것은 무엇인지, 노조가 생긴다면 무엇이 개선되면 좋겠는지를 다른 직원들에게 물어보고, 설문지를 돌렸다. ‘기계 취급받기 싫다’는 답변이 많이 돌아왔다. 직원들과 대화하지 않고 중간관리자를 통해 무조건 통보하는 의사결정 방식, 말로는 ‘너는 평생 내가 데리고 간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오 년 이상 일할 수 없는 노동조건, 사람을 ‘갈아치우는’ 병원의 억압적 행태에 대한 불만 역시 많았다.

 

 “저희는 중간관리자한테 불만이 많았어요. 그 사람이 하는 행동들은 너무 치료사를 위한 게 아닌 거예요, 결국에는 치료사들 목 밟고 일어나서 자기 혼자 잘 살겠다는 건데, 남들 모가지 밟고 일어나가지고 그거 인정받아서 대체 뭘 하겠냐는 거죠.  ‘중간관리자로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명단 제출하라고 하면 당신 잘라야지, 당신이 대안을 말해라. 당신이 대안적인 걸 제시를 해라, 왜 그런 거 밖에 못하냐? 당신도 딸이 둘이나 있는데 당신 그 월급 없으면 살 수 있냐. 이 사람들도 똑같다. 근데 왜 당신 살겠다고 그렇게 하냐 왜 말하지 않느냐.’”

 

물론 이렇게 갈등을 드러내고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의 지지만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중간 관리자에게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서 갈등을 표면으로 꺼내놓는 그녀를 못마땅해하는 다른 직원들도 적지 않았다.

 

“제가 일 년 동안 문제제기하는 과정에서 저한테 반감이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왜 이런 데 불만을 제시해서 왜 불안하게 만들어? 왜 갈등을 만들어? 저 사람(중간관리자) 말 잘 들으면 되는데…’ 그 회사와 갈등을 겪었다고 하는 것이 그 중간관리자(와의 갈등)이었거든요.”


“근데 또 이 사람을 챙기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심적으로 많이 챙겨준다. 근데 심적으로 많이 챙겨주는 거랑 별개로 내 생계를 쥐고 흔드는 사람이 어떻게 좋을 수가 있어요? 자기한테 어떤 권리가 있고 뭘 요구할 수 있고 이런 지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객관적 판단이 안 서니까 되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더라고요. 되게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좋은 사람인데 (심희선이) 괴롭힌다. 그래서 그때 그 중간 관리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저를 찍었던 아주 밑에 있는 직원들한테 가서 ‘야 너 이 손모가지를 잘라버려야 된다, 너 심희선 찍었잖아’ 이렇게 말을 하는 거죠.”

 

2015년 4월, 설립총회를 하고 노조를 정식으로 띄우는 국면으로 접어들자 이런 갈등상황은 더욱 심해졌다. 노조를 띄운다는 이야기가 설립총회 며칠 전 유출되었고, 중간 관리자들은 노조를 만들고 있다고 지목된 직원들을 불러 몇 시간씩 협박과 회유를 반복했다. “너희가 이런다고 뭐가 바뀔 것 같냐”, “결국 너희 무덤 파는 일이다”같은 이야기를 며칠 동안 몇 시간씩 반복해서 듣자 사람들의 사기가 다소 꺾이기도 했다.

 

“2015년 4월 3일에 출범식을 하자고 정했어요. 그런데 그 일정이랑, 노조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유출됐어요. 그러니까 4월 1일부터 삼일 내내 중간 관리자랑 다른 관리자들이 직원들을 계속 부르는 거예요. 너 잘 생각해라, 너네가 뭐 할 수 있을 거 같냐, 달라질 거 같냐 이런 회유들이 계속 있었어요. 그러면서 마지막 날(4월 3일 설립총회 당일)에는 한 시간 동안 소리 지르면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이게, 늘 억압받고 그런 사람들은… 저희가 어떤 분위기였냐면, 손들고 내 의견을 말하는 것조차 연습을 해야 하는 정도였어요. 저 또한, 그 공간에서 오년 육년 칠년동안 젖어 있으면서 ‘아, 이런건 좀 안 되지, 손들고 얘기하는 건 좀 아냐’, 이런 분위기에 늘 위축되고, 모든 걸 그냥 수용해 버리곤 했고요. ‘아 이것은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건 아니다’ 이런 내 판단 보다는 주어진 것들을 모두 수용해 버렸던 내가 있으니까 이걸 깨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오랫동안 ‘나’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나’에게 주는 압박은 정말 엄청나요.”
“못 왔던 친구들도 있어요. 설립총회 때 오기로 약속했는데 겁나서 못 온거죠. 하물며 사회 보겠다고 했던 친구도 안 왔어요. 나중에 설득해서 데리고 오긴 했는데.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립총회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드디어 영양부와 치료부 직원 스물일곱 명으로 구성된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고려수요양병원지부가 설립된 것이다. 

 

“너 민주노총이지? 얼굴만 봐도 딱 알아. 이마에 써 있어.”


물론 예상했던 대로, 사측 그리고 사측과 친한 다른 직원들의 은근한 따돌림과 왕따를 비롯한 고립시키려는 시도 또한 전보다 심각한 수준이 되었다. 대다수가 낮은 연차의 직원이었던 조합원들에게 선배 직원들의 지위를 이용한 괴롭힘은 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노조 한다고 밝히고 나서는 저희 조합원들한테 괴롭힘을 가하는 게 본격화됐어요. 그때부터 왕따 시작인 거예요. 저희가 처음엔 조합원 전부를 공개하지 않았어요. 근데 저희들한테 ‘너네 얼굴만 봐도 니네가 민주노총인지 안다’고, 민주노총이라고 이마에 써 있다는 거예요.”


“’너는 그 쪽 사람이지?’ 그러면서 인사를 안 하는 거예요. 인사 안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막 무시하는 거죠, 근데 저랑 같이 있었던 친구들은 다 어린 친구들이었어요. 병원이 안 그래도 군대식 문화가 심한 편이었는데 연차 높은 선배가 얘네를 엄청 왕따 시키고, 온갖 청소와 잔심부름을 밑에 연차들한테 시키면서. 말을 안하고 인사 안하고 동기들끼리 쌩하고… 마음 여린 조합원들한테는 정말 큰 상처가 됐죠. 그래서 삼 개월 지나고서는 조합원 공개했어요. 공개해야 덜 괴롭힌다, 이게. 우리가 노골적으로 ‘하지 말라!’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 전까지는 ‘왜? 왜요? 민주노총이라 괴롭히는 거야?’ 이런 말도 못하는 거예요.”


“되게 마음 여린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십 개월 동안 엄청나게 왕따를 당했어요. 나중에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떨려서 못 있겠다고 하는 거예요. 인사 안하고 없는 사람 취급 하는 건 기본이고, 쓰레기를 일부러 떨어뜨리고 그 친구한테 발로 밀면서 ‘누구 씨 이것 좀 치워줘요’하고, 환자분들이 여름에 다 같이 수박 나눠먹자고 들고 올 때가 있는데 그거 자르고 썰고 치우는 건 다 그 친구 몫인 거죠. 막 때리고 그런 게 아니라 모욕을 주는 방식으로… 나중에는 버티다 버티다 결국에는 퇴사를 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괴롭힘당하다 보면, 그 경험이 정말 트라우마가 돼요. 이 친구는 퇴사해서 다른 병원에 취직한 지금도 그 병원 관리자들이나 다른 직원들이랑 이야기하거나 잘 어울리지 못한대요. 사람을 믿기가 힘들어서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민주노조가 설립된 지 일주일 만에 한국노총 철도사회산업노동조합 소속의 사측 노조가 설립되었다. 70명 규모였다. 심희선 지부장이 이끄는 민주노조는 설립 일주일 만에 교섭권을 잃었다. 새로 생긴 노조는 민주노조가 제안하는 공동교섭도 개별교섭도 모두 거부했다. 또한 사측은 민주노조가 영양부와 치료부에서 조직되자 영양부를 외주화시켜 조합원 절반을 말 그대로 ‘날려 버렸다’. 민주노조 조합원이 스물일곱 명에서 열세 명으로 줄어들었다. 한술 더 떠 재활치료를 주로 하는 병원에서 암 전문 요양병원으로 업종을 변경하면서 전체 직원 백사십 명 중 칠십 명이었던 치료부 인원을 삼십 명으로 축소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재활치료를 받는 환자들의 수는 줄지 않고 그대로다. 사측은 치료사들로 하여금 추가근무를 하게 하면서 더 적은 인원을 더 높은 강도로 ‘굴리고 있다’. 
물론 어떤 회사이든 사측에서는 민주노조가 설립되는 것을 싫어하고,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업종 변경을 하면서까지 노조를 고립시키려고 하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수위가 높은 대응이다. 심희선 지부장을 포함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사측에게 당한 일들을 듣는 내내 ‘노조혐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또한 이런 ‘혐오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1년 넘게 노동조합 활동을 지속하는 고려수요양병원지부 조합원들이 정말 대단하고 존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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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렇게 싸우고 있다: 보람으로, 연대로, 연결된 관계로


교섭권을 잃은 상태에서도 조합원들은 그간 병원이 체불한 임금, 멋대로 줄여버린 연차 복구, 그 밖에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피켓팅 시위를 하고, 병원과 법적으로 다퉈 체불임금을 받아내는 등 실제로 유의미한 변화들을 만들어냈다. 그 변화의 결과들은 소속 노조의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병원 노동자들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이었다.

 

좌절하고 쓰라리더라도 싸움을 지속할 수 있는 힘, 상처받은 서로를 보살피며 서로가 있는 공간을 일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이 힘은 그렇다면 어디서 나올까? 심희선 지부장은 그 힘의 원동력으로 치료사 일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일에 대한 애정, 조합원들 사이에 맺어진 ‘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평등한 관계 자체,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매 순간 느끼는 거창하지는 않지만 벅찬 순간의 감동들, 다른 단위들과 연대하며 느끼는 가슴 찡함 등등을 꼽았다.

 

“일 자체가 주는 감동이 있어요. 치료사와 작업치료사들은 정말 의미있는 일을 해요. 저희 병원에 오는 환자분들은,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오는 경우도 있고 대체로 몸이 많이 불편하세요. 걷지 못하는 상태로 왔던 분이 저희와 같이 운동하고 걸어서 나가요.”

“물리치료사들이 큰 동작, 걷고 이동하고 바닥에서 휠체어로 갈 수 있게 하는 등의 움직임들을 담당한다고 하면, 작업치료사들의 경우는 조금 더 작고 세세한 동작들을 담당해요. 예를 들어서 마비가 온 환자들은 입안까지도 마비가 되어서 음식을 씹어 먹을 수 없는 경우들이 있어요. 저작(씹는 행위)이 안 되는 거예요. 입 안에서. 혓바닥도 근육이잖아요. 그것도 다 안되는 거예요. 보통 콧줄로 식이를 넣거나 배에 구멍을 넣어서 직접적으로 식이를 넣어요. 이런 분들에게 먹는 걸 연습시키는 사람들이 작업치료사들이에요. 환자분들의 혓바닥을 일일이 다 빼고, 혓바닥을 움직이고 입안에 있는 것들을 같이 운동시키고, 기도로 넘어가면 위험하기 때문에 식도로 넘어가게 하기 위해 연습시키는 일을 해요. 이 외에도 작업치료사들이 하는 치료의 종류가 많아요. 직업이 작가인 환자라면, 이 사람은 걷고 뛰는 것보다는 앉아서 글씨를 쓰는 걸 원하겠죠? 오른손을 못쓰면 왼손을 쓸 수 있게 하거나, 여행하는 사람이나 탐험가라면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어떻게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재활을 돕기도 하고요.”

 

심희선 지부장은 밥을 씹어서 먹고, 물을 벌컥벌컥 마실 수 있고, 움직이고 싶을 때 움직일 수 있는, 원하는 동작을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사람의 삶의 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를 강조했다. 작업치료사들은 소동작 치료를 담당하고, 물리치료사들은 몸의 큰 근육들을 움직이게 하는 치료를 담당한다.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따라서 치료사들 간의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중요하고, 치료사들 각자의 삶의 질이 중요하다. 치료사의 삶의 질, 건강상태가 환자의 치료와 환자와 맺는 관계에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치료하는 내가 행복하지 않고, 내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과연 어떤 치료가 나오겠어요. 치료사들 대부분이 5년 이상 일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우리 병원 친구들에게, 조금 더 적은 환자를, 중간에 휴식하는 시간도 가지면서 조금 더 여유롭게 찬찬히 치료할 수 있으면 어떻겠냐고 물어보면 아무도 그만두겠다고 대답하지 않아요. 치료사들이 직업에 대한 애정이 있지만 일하는 환경과 조건이 너무 열악해서 일을 지속할 수가 없는 거예요.”

 

또한 그녀는 점점 더 이윤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병원을 운영하려 하는 고려수요양병원의 현실, 더 나아가 한국의 의료 현실에 대한 걱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점점 더 병원이 치료사들을 쥐어짜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많은 중소병원들이 이미 민영화되었고, 병원들이 그때그때 ‘좀 더 돈이 되는’ 병원으로 업종을 변경하는 것도 너무 쉬워요. 재활이 트렌드였을 때는 재활병원 하다가, 암이 조금 더 돈이 된다 싶으면 암병원으로 바꿔 버려요. 그러면서 이 직장 아니면 생계가 없는 치료사들을 해고해 버리고요.”
“의료는 공공성을 정말 많이 잃어버린 것 같아요. 병원이 환자들을 받는 게 실비보험 위주로 가버려요. 실비보험을 가입한 환자들은 비급여 치료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비싼 실비보험을 든 사람들이 비급여 치료에 대한 지원을 더 많이 받게 되고, 결과적으로 보험료가 상승하게 돼요. 무엇이 돈이 되는지를 따질 게 아니라 무엇이 공공성에 부합하는지를 따져야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는 치료를 받을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또한, 이렇게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고려수요양병원지부 조합원들이 어떻게 삶과 투쟁을 함께 꾸려나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역시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사측이 체불임금을 지급하면서 포괄임금으로 지급되던 수당을 회수해서 조합원들의 월급이 백만 원씩 깎여 어쩔 수 없이 후원주점을 열었던 때를 회상하며 사람들의 변화를 느낀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후원주점을 했을 때 조금 부끄럽기도 했어요. 다른 분들은 해고복직투쟁이나 법정소송비 마련하려고 주점을 여는데 우리는 우리 생활하는 문제 때문에 주점을 했으니까, 그런데 어떡해요. 이 월급 없으면 우리 애들 다 나가떨어질 텐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 주점이 정말 잘 됐어요. 다른 노조 분들이 저희를 귀엽게 봐주셨던 것 같아요. 양초를 만들어서 2만 원에 팔았어요. 완전 도둑들이죠? 근데 이 친구들이 동양시멘트노조 분들한테 그 양초를 세 개나 판 거예요! 그분들한테 그걸 팔면 어떡해, 이것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정말.”
“저희 조합원들은 시위나 집회, 운동 같은 거 하나도 모르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연대집회 가고 이런 데에 약간 거부감이 있었는데, 이런 연대의 힘을 직접 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주고 품앗이하는 걸 보면서 정말 많은 힘을 얻었다고 너무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집회나 공동투쟁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바뀌는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노조 활동을 하는 매 순간이 찡하고, 사람들의 변화를 보는 것이 벅차다”는 그녀는 민주노조 설립 1주년 기념집회 때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행복하게 웃었다.

 

“노조 하는 모든 순간이 찡하고, 사람들한테 감동을 많이 받아요. 얼마 전에 설립 1주년 기념식을 했었는데, 마지막에 읽을 결의문을 좀 특별하게 쓰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조합원들이 한명 한명씩 앞으로 나와서 ‘나 OO는 ~~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저는 제가 이 병원에 있는 한은 ~~하겠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고,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조합원이 ‘정년까지 다니겠다’, 다른 친구는 ‘내가 지부장 할 때까지 다니겠다, 지부장을 하겠다’, ‘정년까지 하겠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얼마 전에 결혼한 친구는 아기를 낳고 그 아기가 자라서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할 때 ‘엄마 직업은 물리치료사야’ 이렇게 말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는 그렇게 오래 일하지 못하거든요. 사실 우리의 목표이자 바람은 그냥, 정년까지는 어렵더라도, 우리가 일을 계속 하고 싶을 때까지는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자는 것일 수도 있어요. 안전하게, 다치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아 우리가 정말 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구나’ 그런 것을 느꼈어요.”

 

병원 측의 노조파괴공작 때문에 조합원도 스물 일곱에서 열세 명으로 줄어들었고 교섭권도 잃는 등 적지 않은 부침이 있었다. 그렇지만 일당백 같은 조합원들 덕분에 마음이 든든하다는 심희선 지부장에게 노동조합은, 활동은, 사람들은 어떤 의미일까.

 

노동조합을 통해 ‘우리’를 배운다


“제가 복이 많죠. 저희는 간부들만 삼십 대고 다른 조합원들은 다 이십 대, 제일 어린 조합원은 스물 다섯 살이에요.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함께 싸우고 배우면서 단단해지고 있으니까 우리가 열세 명인데 느껴지는 건 꼭 천삼백 명 같아요. 일당백.”
“저희는 회의하면 늘 총회에요. 조합원 수가 많든 적든, 이렇게 많은 조합원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노동조합이 많지 않잖아요. 저희는 항상 과반수 이상이 모이고, 모든 것을 함께 결정해요. 제가 지부장이지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건 ‘회의하고 밥 먹을래, 밥 먹고 회의할래’ 정도밖에 없어요. 회의를 하면 열세 명의 열세 가지 의견이 나와요. 우리는 항상 위에서 이미 결정 끝났다는 사항들을 통보받는 식으로 일해 왔는데, 노동조합에서는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이야기해요. 이렇게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조율해서 결정하는 체험을 이 사람들이, 그리고 제가 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몸으로 배운 것들이 절대로 잊어지지 않겠죠. 그 에너지가 엄청난 것 같아요.”


“우리가 일하는 곳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싸움도 싸움이지만, 저는 지금처럼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할 때,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존중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돼요. 내 의견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함께 싸우는 ‘우리’가 있다는 게, 그런 게 정말 사람답게 사는 것 아닐까.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전에 저는 제가 가장 중요했어요. 이 각박한 세상에서 나 이외의 사람들, ‘우리’를 생각하는 게 너무 힘들잖아요. 저는 활동을 하면서 ‘우리’를 배우고, 날 둘러싼 이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내가 느끼는 행복이라는 것도 반쪽짜리라는 생각을 해요. 물론 30년을 저만 생각하면서 살았으니까 힘들 때는 예전의 관성이 나오기도 하지만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문제인 것 같아요.”

 

최근에는 세 명의 비공개 조합원이 새로 가입하기도 했다. 일년 간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병원에게 구천만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고, 심희선 지부장이 팀장에서 강등당하고, 왕따와 따돌림을 당하는 그 모든 과정을 보았음에도 기꺼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다. 이것을 ‘희망’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건 조합원들의 행복이에요. 항상 이야기해요, 져도 된다. 물론 지면 안 되지만(웃음). 저는 어디 가서 ‘우리 애들’이 자기 할말은 하고 위축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끔 퇴사하고 다른 데서 일하는 예전 조합원들을 만나면 다 옮긴 병원에서 어떤 부당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막 이야기해요. 노동법을 배우고,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걸 한번 알게 되면 그 전처럼 살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괴롭힘 당하다가 나간 친구도, ‘내가 못 버티고 이렇게 나가버려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요. 절대 그 친구 잘못이 아닌데도요. 자기가 놓인 상황이 너무 힘들고 버틸 수 없으면 그만둘 수도 있죠. 제가 느낀 건, 그렇게 내가 버티지 못했다고 나를 너무 혹독하게 혼내면, 죄책감만 가지고 있으면 또 도전할 수가 없잖아요. 저는 사람들이 괴롭힘 당한 기억도 있고 아픈 기억들도 있지만 좋은 기억들을 더 많이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딛고 일어날 수 있게. 저는 그 사람들 다시 다 데려올 거예요, 같이 또 계속 할 거예요. 아니면 그 사람들이 어쩌면 다시 힘을 얻어서 자기 병원에서 새롭게 노조를 시작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사진으로 본 고려수요양병원지부 사람들의 얼굴은 카페에서 한참을 이야기한 심희선 지부장의 얼굴만큼이나 밝고 활기 넘쳤다. 반짝반짝하는 열여섯 개의 얼굴들, 하나같이 표정이 살아있었고 즐거워 죽겠다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치열했고, 연결되어 있었고,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는 끈끈한 연대의 힘이 느껴졌다.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정말 두려울 것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여기 작은 곳에서, 화내고 분노하고 싸우고 울고 웃고 돌보고 보살피고 사랑하고 살아가고 있다. 세계와 연결되어 끊임없이 상처받는 것, 그리고 그 상처를 돌보고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조금씩 내 몸을 전과 다르게 변화시키며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존엄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답게 살고 있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   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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