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알고는 싶다

2008/11/23 01:21

이맘때 쯤의 만남.

 

그냥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다.

 

아침 해가 뜬 뒤에야 잠든 탓에 좀체 눈도 떠지기 전이었다.

10시쯤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 차가 고장나서 카센터에 있으니 들러서 데려가라는 거다.

우리집에서 벽제 추모공원으로 바로 가면 30분, 일산 그의 집 앞으로 들렀다 가면 한시간.

추모공원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11시인데 말이다.

난 아직 눈도 안떴는데.

 

추운데도 나이드신 선배가 나와있겠다 하니 어쩌겠는가.

만나기로한 곳에 갔는데, 역시 나이드신 선배는 내 수고를 덜어주겠노라고 내 차 진행방향을 되짚어 갔고,

결국 길은 어긋났다. 한참 후 백밀러에 뛰어오는 선배가 보인다.

마음이 급한 나는 선배가 타자 마자 기다린 생색을 내며 기어를 넣었고,

2단으로 바꾸려는 순간, 그 선배는 기어를 잡고 있는 내 손을 붙들고 반갑다고 너스레를 떤다.

"놔! 운전하잖앗!"

 

이런저런 안부를 물어온다.

일하기 힘들지는 않느냐, 별일 없느냐,,,

별 말 하고싶지 않던 내가 슬슬 짜증나던 차에

"거긴 주5일근무 하고 있니" 정말 경우없는 질문이다.

"주5일? 그냥 상황대로 하는거지 뭐" 그 형이 다시 하는 말이 허걱이다.

"주5일근무를 하도록 해. 주5일근무가 좋아."

으이그.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추모공원에 도착했다.

8년 전 이맘때 목숨을 끊은 선배 앞에 섰다.

선배가 죽기 전, 어린아이였을 때만 보았던 형의 아이들이 와 있다.

벌써 중2와 초5가 됐다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내 앞에 선 그녀는 나보다 한두살 아래다.

그녀는 서른도 채 되기 전에 남편을 잃고서,

혼자 두 아이를 저토록 이쁘고 착하고 씩씩하게 키워낸 거다.

아이들은 깍듯하게 우리에게 인사하고,

엄마가 제사상 차리는 것을 돕고,

눈치없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한마디씩 건네는 것에 공손하게 대답한다.

여전히 철없고 내멋대로인 내 눈에도 그녀는 위대해 보인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선배에게 "어쩜 아이들이 저렇게 잘 자랐을까..." 진심어린 감동을 뱉어냈다.

내 말을 들은 선배는

"어렸을 적에 힘들 일을 겪은 아이들이 조숙하고 올곧게 자라는 것 같더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은 힘든 일을 당해도 저렇게 된다. 사랑하고 베푸는 방법을 배우고 자란 거다.

사랑을 못받고 자란 아이들은 간혹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 선배는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너도 살아온 걸 보면 사랑하고 베풀 줄 알아야 하는데, 왜 안 그러지?"

나도 진정어린 대답을 했다.
"난 받고만 자라서 받을 줄만 알고, 베푸는 법은 몰라~"

 

아이들과 헤어지며, 중학생 딸아이 손에 만원짜리 몇 장 쥐어주고 돌아서는데,

아이들 엄마가 내 손을 꼭 쥐고 "꼭 집에 한 번 오세요. 밥 해드릴께요~" 라 한다.

가슴이 찡한게, 그녀는 여신임이 분명하다...

저런 그녀가 키워낸 아이들이니 올곧을 수밖에...

 

아침에 후배의 온갖 패악질을 감내하고 내 차를 얻어탔던 선배.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시간을 내서 날 만나고, 이야기하고, 밥을 먹고,

우울할 때는 이런 책을 보라며 책을 주고, 명절 땐 불러서 선물꾸러미를 챙겨주던 선배... 

 

오늘 아침에 난 그 선배에게 또 그렇게 패악질을 부린 거다.

형 때문에 길을 돌았고, 형 때문에 늦었노라고 투덜거리는 나에게 그 선배는

"그냥 좋은 일 한다 쳐~"라며 웃기만 했었다.

 

저녁에 열네살짜리 딸아이 지원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감사했어요^^ 아침부터 수고하셨어요 감기 조심하세요 차가 막혀서 지금 도착했어요   ♥지원♥"


난 부끄러워서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11/23 01:21 2008/11/23 01:21
Posted by 흐린날
태그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s://blog.jinbo.net/grayflag/trackback/251

댓글을 달아주세요

  1. 2008/11/24 18:5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답장을 보내는게 어떨까요? 문자 생까이면 서운하던데... ㅎ

    저도 신경질 참 잘부립다.. 문제는 저에게 잘해주고 부드러운 지인들에게 더 그런다는 거죠.. 후회되고 부끄러울때가 많이 있어요.. 님의 글을 보니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덧글 남겨봅니다..
  2. 2008/11/25 01:0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라디오님! 이 죽일넘의 성깔을 우짜까요...ㅠ,ㅠ
  3. 2008/11/25 13:3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죽일넘의 성깔... 알면 됐다.
    니가 성깔 부릴때마다 마구 패달라고 부탁해봐 주위 사람들에게... 특히...
  4. 2008/11/25 13:46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dh502님! 조만간 한번 봅시다. 내가 성깔 지대로 부려줄테니깐~
    그러면 마구 패든 말든 맘대로 하쇼!

<< PREV : [1] : ... [66] : [67] : [68] : [69] : [70] : [71] : [72] : [73] : [74] : ... [276] : NEXT >>

BLOG main image
by 흐린날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 (276)
일기장 (149)
기행문 (20)
좋아하는 글들 (47)
기고글들 (13)
내가찍은 세상 (45)
내가 쓴 기사 (1)
울엄니 작품 (2)

글 보관함

Total : 250723
Today : 78 Yesterday :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