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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 대신 술

2012/10/03 17:20

대청소하다 옷장을 열어보니 습기가 가득하다.

옷엔 곰팡이도 슬은 것 같아서, 넣어둔 하마를 보니 물이 가득 먹었다.

집앞 가게에 물먹는하마를 사러 나갔는데 하마가 없다.

그냥 나오기 머쓱해서 소주 한 병 사들고 나왔다.

마셔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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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3 17:20 2012/10/03 17:20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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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은 글보다 넘치거나 모자란다.

나의 글은 나의 머리보다 과하거나 부족하다.

나의 머리는 나의 마음보다 격하거나 잔잔하다.

나의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겠다.

그냥 돌멩이였으면 좋겠다. 차갑고 딱딱한 돌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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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30 09:41 2012/09/30 09:41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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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값 못하고 지난 며칠 푼수맞게 소원하던 비,

그 비를 새벽에 실컷 맞았다.

포기, 포기... 포기하는 게 서럽고 슬프다.

그래도 포기다!

그냥 간밤에 맞은 비에 쓸려간 거면 좋겠다.

미련스럽게 몸뚱아리 어딘가에 달라붙어서 날 괴롭히진 않았으면.

맹추.

 

속옷까지 흠뻑 젖어서 오빠집에 들어갔다.

젖은 옷을 허물처럼 벗어놓고 잠들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엄마가 옷들을 다 빨아서 선풍기로 말리고 다림질까지 해두셨다.

맹추. 나 말이다.

 

그냥 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지.

내가 소중한 것 보다는, 날 소중히 여기는 분들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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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3 10:43 2012/07/13 10:43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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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또' 바뀌었다. 참 자주도 바뀐다...

양력으로 치자면 해가 바뀌고 한달 하고도 여드레가 지났고,

음력으로 치더라도 벌써 대보름이 지났으니, 대개의 사람들은 얼추 지난 해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계획을 세우고 각오를 다지는 일들을 마쳤겠지.

나이 들수록 해 바뀌는 데 심상해져 그냥 하루하루가 바뀔 뿐이라 여기고 세월을 넘겨왔다.

 

앞으로 몇번이나 더 해를 보내고 맞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은 날들은 줄면 줄었지 느는 것은 아닐 것인즉,,, 섭섭한 노릇이다.

 

1. 브레히트가 이런 말을 했단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우리가 걸어온 과거와는 다르다"라는...

 

'격동의 해'라고도 하더라. 2012년, 많은 일을 도모하고 실패하고 희망을 찾는 일이 반복될 터다.

이미 지난 1월, 3자통합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을 반대하는 민주노총 조합원 서명운동을 벌였고,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안건이 상정됐지만, 정작 제대로 된 토론조차 못해보고 회의는 유회됐다.

내가 몸담고 있거나, 발 담그고 있는 조직 역시 이런 정세에 직접적으로 얽혀있다고 볼 수 있는데,

나는 올해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 더 열심히, 혹은 조금 더 센, 혹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활동의 질적 변화를 도모하고 싶고, 그러할 때인데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으니 난감할 따름이다. 아...

 

2. 남 탓하지 말고 잘 놀아야겠다.

 

2011년에 그나마 잘한 일 몇가지를 꼽으라면,

얽힌 일정 속에서도 몇 번의 시간을 뽑아내 야구장에 간 것이다. 조용필 콘서트도 봤다. 더 젊었(어렸)을 때 갔더라면 좋았을 걸 잠시 생각했지만, 주변 관객을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아! 주제파악하고 차를 처분한 것도 잘한 일로 꼽으라면 꼽겠지만 이건 좀... 지금 많이 아쉽다.

 

2011년에 잘못한 일도 많다.

88라이트가 단종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미리 사두지 않아서 꼼짝없이 당했던 것.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던힐, 마일드세븐, 디스 따위를 떠돌고 있다.

야구장에 더욱 자주가지 못한 것은 후회스러운 일에 속한다. 야구장에서 더욱 열광하지 못한 것, 자주 가지도 못하면서 간만에 갈때 지각한 것, 사직구장이랑 대구구장 못간 것, 집에 케이블을 설치하지 않아서 중계를 못본 것,,, 기타 등등

매년 그렇지만 내년에는 다른 일을 하리라 마음먹고도 결국 대비하지 않아서 같은 일을 계속 하고 있을거라는 상실감에 빠져서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는 것 역시 고질적 병폐다.

 

이젠 나만이라도 아직 나에게 가치가 남아있다 여기며 투자해 보려 한다. 무엇을? 생각해봐야지.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않으려 한다. 무엇을? 물론, 노는 것! 야구장, 여행, 산,,, 기타 등등

 

3. 사람, 사람을 어째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괴팍한 성깔 때문에 인간관계는 꾸준하게 좁고 얕아져왔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뭔가를 공유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잘못인지 잘한일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건 아직 각오를 다질 수가 없다.

'왕왕왕왕~ ' 소리와 함께 내 그림자가 점점 줄어들어 점이 돼버리기 전에, 가닥을 잡아야지.

다만, 내 주위에 몇 남지 않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만큼 최선을 다하리라는 것 정도는 진심이다.

 

하핫, 좀 우스운 각오의 글 꼬라지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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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8 10:02 2012/02/08 10:02
Posted by 흐린날

풍수지탄(風樹之歎)

2011/12/26 10:31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922년에 나신 외할아버지가 90세에 이르도록 정정하시더니 지난 6월20일, 갑작스럽게 몸이 안 좋아지셔서 중환자실로 입원하셨다.

외가는 전남 장흥인데, 이제 그곳에는 돌봐줄만한 사람이 없어서 큰딸인 우리 엄마가 계신 화순 병원으로 오셨다.

 

그때는 금방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자손들이 줄줄이 병원을 찾았다. 중환자실과 일반병동을 오가며 그렇게 여섯달을 더 계셨다.

그러다 12월22일 생을 마감하셨다.

1977년에 할머니, 1978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96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올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일모레 칠순을 바라보시는 어머니는 "이제 나는 완전히 고아가 돼버렸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이렇게 나의 할아버지 세대도 마감해버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외할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외갓댁에서 상을 성대히 치렀었다.

마당에 멍석을 깔아 조문객을 맞고, 꽃상여를 꾸몄었다. 밤에는 상여를 띄우며 걸판진 놀이판도 벌어졌다.

발인한 뒤에 상여행렬이 동네를 두루 지나며 노제를 두 곳에서 지냈고, 개토하며, 하관하며 제사를 두어번 더 지냈다.

외할아버지는 상여조차 없이 외갓댁 마을회관에서 노제를 지내고 바로 선산으로 가서 외할머니 곁에 15년 전에 마련해 두었던 가묘에 묻히셨다.

당신은 유림으로 한 평생 사시며 그 누구보다 장례절차에 대해 꼬장꼬장하셨지만, 정작 당신의 행사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아니, 복잡하지 못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에 돌아가셔서 기억이 선명치 않다.

다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이제부터는 웃으면 안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기억만 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장례 과정을 거치면서는 생각도 많았고 기억도  또렷하다.

어쨌든, 생각을 다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그냥 흘려버리고싶지도 않다.

어른이 돼서도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았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나중에 곱씹기로 한다.

외할아버지 빈소에서, 나는 손발을 무척 바지란히 움직였다.

평소에 집안일에 보탬되는 일이라고는 단 한가지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왕 그곳에서 사나흘을 보내야 한다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나보다 어린 사촌동생들에게 일을 시키기도 하고, 꾀부릴 여유도 주면서 여하튼 나는 한 시도 쉬지 않고 표 안나게 잡일을 했다. 오죽했으면 발인하는 날은 온 몸의 살들이 아파올 정도였다.

외할아버지 홀로 외롭게 외갓댁에 지낼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가끔씩 들러 봉투를 내미는 것 뿐이었는데도, 외갓댁 머나먼 친척들은 그런 나를 칭찬하곤 했다. 기실 그런 참한 일을 하는 외손주는 우리 삼남매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식장에서 쳐주는 축은 따로 있었다. 궂은 일을 하고 있는 나는 그저 궂은 일로 보시하는 '여식'일 뿐이었고, 출세해서 남보기에도 그럴싸한 행색으로 찾아와 두툼한 조의금봉투를 내밀고 바쁘다며 총총히 사라지는 자손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내가 그나마 주목받은 것은, '외조부' 상가임에도 천리길을 마다않고 조문을 와준 동지들 덕이다.

서울에서 온 자손들이 다들 "멀어서 오지 말라했다"며 조문객 없음에 대해 그럴싸하고 실제 그러한 이유를 들먹이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집안행사에서 별로 본 적도 없는 꾀재재한 외손녀를 찾아온 조문객들은 그들에게 놀라웠을 터다. 외손의 조문객은 큰딸인 우리 엄마의 자식들인 오빠와 나에게만 해당이었던 터라, 평소 막내딸 직업이 무엇이라 친척들에게 딱히 설명하지 못하던 엄마도 조금은 어깨가 펴진듯 했다.

 

체면치레 좋아하시던 외할아버지도 흡족하셨으리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만다.

마음만큼 중요한 것이 겉치레 아니던가. 하물며 그 결정판인 '상례(喪禮)'가 아니던가.

 

어쨌든 더웁고 선선하던 시절 병상에 계시던 외할아버지는 눈이 많이 내리고 춥디 추웠던 지난 12월24일에 외할머니 곁으로 가셨다.

평소 주변에서 많은 죽음을 보고 겪어왔던 터라, 이제는 더이상 '죽음'이 감정까지 건드리지는 않는듯 하다. 외할아버지 입관 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손이 나뿐임을 알고 조용히 입관실에서 빠져나오기도 했다. 실상, 외할아버지의 죽음보다는 섧게 우시는 어머니 때문에 가슴 아팠던 상(喪)이었다.

이제 부모님의 '죽음'이 성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 불경스러운 생각일까. 늘 계시는 게 아닐 거라 알고 있을진대, 어이 부모를 대하는 자세는 후회를 반복하게 되는 것인지.

나이 불혹 넘어서도, 그저 철없는 막내딸일 뿐인 내 처지가 새삼 한심스럽다.

마침 해가 바뀌는 대목이라, 다르게 살기를 모색해볼만한 적당한 때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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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10:31 2011/12/26 10:31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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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안개가 집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아니, 어제 밤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커튼을 꼭꼭 여미고 방구석에 우두커니 쪼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안개의 등장 시간을 추측할 도리가 없다.

 

12층에서 내려다볼 때는 저 아래 있는 땅 위에 솜이 깔린 듯 보이지 않다가,

1층으로 내려오면 안개는 다시 멀리 달아나 있기 마련인데,

오늘은 12층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또 기차를 타고 달리는 내내 주위를 안개가 휘감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편할 때도 있네.

안개 너머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아 답답하거나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냥 내 주위를 다 감싸버리니, 그것이 도리어 포근하고 좋네.

 

이러다 문득 길 끝까지 선명해서 그 길 끝에 높이 솟은 산봉우리까지 보이면, 또 그게 좋을 때도 있듯이...

 

어쨌든 내가 심상한 상태는 아닌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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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4 13:45 2011/10/24 13:45
Posted by 흐린날

제자리로...

2011/10/11 09:19

다시 머리를 잘랐다.

머리가 긴 동안 잠시, 내 가슴에 따순 바람이 살랑거렸다.

그걸로 됐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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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1 09:19 2011/10/11 09:19
Posted by 흐린날

뛰뛰빵빵~~~

2011/09/19 17:10

시원섭섭...

2006년 7월20일.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뒤 받은 퇴직금으로 159,098Km 주행한 카렌스를 샀더랬다. 내 생애 최고의 지출이었다. 며칠 전 그 차를 팔았다. 주행거리는 293,000Km가 찍혀있었다.

사실 당장 차값에도 눈이 멀었지만, 이젠 차에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혹했다.

설렁설렁 적었지만 지난 5년간 써온 차계부를 훑어보니, 돈도 많이 들였고 사연도 많았다.

 

강변북로에서 왼쪽에서 갑자기 끼어든 차 때문에 한강에 퐁당할 뻔 한적도 있다. 그때 나이롱이 아닌 진짜 환자로 3주 가까이 입원치료를 받았다.

택시가 옆구리를 박았고, 택시 과실이었지만 이러저러한 정황 때문에 그냥 보내기도 했다.

선배가 아는 카센터를 소개해줘서 차를 맡겼지만, 그 선배가 카센터 주인한테 미처 조치하기 전에 연행돼 구속되는 바람에 수리비는 제값을 다 치루기도 했다.

GPS라는 것을 달기 전까지는 과속딱지값으로 낸 돈만 합해도 집을 샀을지 모른다.

엄마가 구슬로 한땀한땀 짜서 만들어주신 핸들커버는 차를 넘기기 전에 갈무리를 해뒀다.

최근 1년은 차에 문제가 생기면 갈등의 연속이었다. 폐차냐 수리냐...

 

결국 차는 넘겨졌다.

그런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도, 팔려간 내 차도...

 

집에가다 파주출판단지를 지날 때 그냥 휘리릭 영화관 이채로 들어가서 시간맞는 영화를 종종 봤었는데, 그 짓은 좀 어렵게 됐다.

 

"폐차냐 수리냐" 고민하던 나는 이제 다른 고민을 하고 있다.

"새차를 살 것인가, 중고차를 살 것인가, 버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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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9 17:10 2011/09/19 17:10
Posted by 흐린날

역방향

2011/09/14 15:01

과거만 돌아보며 살아왔더니, 현재도 미래도 금방 과거가 돼버리고...

마치 기차 역방향에 앉은 것처럼 지난 것들만 들여다보며 지금 이 '순간'이 지나버린다...

 

나의 현재를 찾고싶고,

나의 미래를 꿈꾸고 싶다.

 

왜 지난 일에 이렇게 얽매여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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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4 15:01 2011/09/14 15:01
Posted by 흐린날

여기는 유성기업 아산공장 앞이다.

이미 합의한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에 관한 교섭을 시작했으나,

회사는 미루기만 하고 안조차 내지 않다가 노조가 2시간 파업을 진행하자 곧바로 직장폐쇄를 단행한 어처구니 없는 공장이다.

아니나 다를까, 현대차 자본이 기획한 시나리오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유성기업 아산과 영동공장 조합원이 일사불란하게 아산공장 앞에 모였다.

용역이 대포차로 조합원들을 치받고 달아나버렸다. 조합원들은 여럿 다쳤는데도,

대표차를 운전한 용역은 경찰서에 가서 조사만 받고 풀려났다.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고, 심해도 많이 심하고, '상식'의 기준을 어디다 둬야할지 헷갈리게 만드는 나라다.

 

그 직장폐쇄 이후 오늘이 78일째다.

지난 7월25일, 아예 사무실 문을 닫고 유성 아산공장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대대오가 많지 않을 것 같은 휴가기간에라도 조합원들과 함께 있자는 취지로 시작한 일이었다.

27일, 각계를 모아 기자회견을 연 뒤 릴레이농성에 돌입하기로 하고 조직을 시작했다.

25, 26일은 비가 억수로 쏟아졌던 날이다. 서울, 춘천 곳곳에서 물난리가 났던 날이다.

27일 아침. 서울에서 내려와야 할 기자회견 참가자들로부터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서울은 도로가 끊긴 곳도 많고 비도 계속 내려서 이동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은데 기자회견을 그대로 진행하냐는 거다.

어쩌겠는가. 폭우가 쏟아진다고 해서 자본과 정권의 탄압이 멈추진 않는 것을.

기자회견은 예정대로 진행했고, 도착시간이 들쑥날쑥하긴 했지만, 많은 분들이 와주었다.

백기완선생님, 범민련 이규재의장, 최헌국 목사, 권영국 변호사, 민주노총 충북본부장 등등.

물론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도 왔고, 김세균교수도 왔다...

춘천에서 오던 손미아 교수만 침수로 도로가 끊겨서 대성리에서 회군했다.

기자회견에 '기자'가 많지 않았던 것이 안타까웠지만, 기자회견이 끝난 뒤 노동전선과 사노위만 남고 대부분 돌아가버린 것도 안타까웠지만, 그리하여 릴레이농성은 시작되었다.

 

오늘로 아산에 내려온지 열흘째다. 릴레이농성을 정식으로 시작한 지 8일째다.

그리고 직장폐쇄된 지 78일째다.

 

유성 동지들이 저점으로 쓰고 있는 공장 맞은편 비닐하우스는 컴퓨터도 쓸 수 있고 인터넷도 된다.

릴레이농성단은 농성장을 유성기업 앞 굴다리 밑에 차리는 바람에 인터넷 사용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 스마트폰을 가진 동지들이 속속 농성에 결합하면서, 릴레이농성장에서도 인터넷 이용이 손쉬워졌다.

농성하며 벌어진 재미난 일들을 까먹기 전에 여기 적어두려 한다.

이런 곳에서는 사소한 일과 말들이 울림을 주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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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3 08:45 2011/08/03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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