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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서랍을 정리하다 발견했다.

현중노동조합 파업지도부.

"노동해방이 빨리오기를..."이란 글귀가 가슴을 후벼판다.

손수건에서 노동해방이 빨리오기를 바라는 노동자의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서툰 저 글씨체는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올해로 12년째 무쟁의를 기록해 여러 보수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현중노조.

그 현중노조에 파업지도부가 있었던 시절이라니...

이 손수건은 대체 몇 년도에 만들었던 것일까.

색상이나 글귀, 판화를 갖다 쓴 것들로 미루어도 충분히 오래된 손수건이라고는 짐작되지만,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노동해방'이라는 아픈 말.

게다가 '파업지도부'...

 

2003년이었다. 박일수열사 투쟁.

그때, 현대중공업노조는 상급조직인 금속산업연맹으로부터 제명당해 민주노조 언저리에서 깔끔하게(?) 퇴장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도화선이 될 역사적 투쟁을 벌였던 현대엔진 당시 노조 위원장이었던 권용목은 9월23일 뉴라이트신노동연합(신노련) 창립대회를 열었고,상임대표를 맡았다.

바로 그 1987년에 현대엔진 회장이었고, 권용목을 해고했던 이명박은 환하게 웃으며 참가해 그 자리를 빛냈다. 그들은 찐하게 화해했나보다.

 

2006년 9월23일은 현대중공업노조가 12년 연속 무분규를 기념하는 축제(?)를 연 바로 다음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년 2007년은 87년 대투쟁이 일어난 지 꼭 20년째다.

 

차마 잊혀질까 두려워 현대중공업 무분규기념 잔치에 관한 기사를 여기 옮긴다.

우리 제발, 이 단체('노조'라 하기 싫다)를 닮지 말자. 이 단체에 예의를 갖추지 말자.

그리고 이 단체 말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자.

 

'Copyrights ⓒ (주)이비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라고 쓰여있지만, 출처를 밝혔으니 '무단' 전재는 아닌 듯 해 재배포한다.

올해로 '12년 연속 무분규(無紛糾)' 기록을 세우며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기업으로 언론과 국민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는 현대중공업 노사(勞使)가 다시 한번 화합의 축제를 연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22일 저녁 6시부터 사내 광장에서 임직원과 가족 등 약 4만여명이 참가하는 '현중(現重)가족 한마당 큰잔치'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2003년부터 시작된 '현중가족 한마당 큰잔치'는 올해로 4회째를 맞게 됐으며, 올해도 현대중공업 노사는 이 자리에서 그간에 구축한 신뢰를 또 한번 확인하며 화합을 과시하게 된다.
이날 행사는 △노사화합 이벤트 △한마당 큰잔치 공연 △불꽃놀이 순으로 약 3시간 가량 진행되며, 한마당 큰잔치 공연에서는 임백천, 노사연 씨 사회로 송대관, 주현미, 한혜진, 최성수, 거북이, 조관우, 장혜진, 바다, 사랑과 평화, 안혜지 등 인기가수 10여명이 출연해 공연을 펼쳐진다.
또 행사도중 깜짝이벤트로서, 얼마 전 이 회사 김성호 노조위원장 앞으로 감사편지를 보내 언론에 크게 보도된 바 있는, 전경 아들을 둔 서울 도봉구의 성순옥(50세)씨가 내려와 현대중공업의 12년 무분규 행진을 축하할 예정이다.
이날 성씨의 깜짝 출연은 감사편지를 받은 김성호 위원장이 보답 차원에서 직접 초대해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현대중공업은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3일 동안 사내체육관에서 각 사업부별 노래자랑을 실시해 총 36팀에 1천3백여만원 상당의 상품을 지급하는 등 노사화합 잔치를 앞두고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 대해 회사 관계자는 "무분규 12년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한 임직원과 가족, 그리고 협력사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행사를 마련했으며, 노사가 함께 새로운 미래를 다짐하는 화합의 대축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도 "이번 노사화합 큰잔치는 선진 노사관계의 뿌리를 더욱 튼튼히 내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며, 앞으로도 국민과 조합원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선사하는 신뢰받는 노조로 거듭 날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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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9 22:35 2006/10/19 22:35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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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나들이

2006/10/09 20:54

참 오랜만에 조계사에서 종각을 지나 청계천 거쳐 을지로까지 걸었다.

긴 거리는 아닌데, 예전하고 많이 달라졌고 풍경이 참 낯설었다.

찻집에 앉아 한가로이 차를 마시는 사람들.

건물밖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서 수다떠는 사람들.

종각역은 바뀌어있다. 서점 주변에 나무계단을 만들어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일과시간의 청계천도 여유로웠다. 사람이 많진 않았다.

을지로 골목으로 접어드니 빼곡한 건물과 지나다니는 오토바이, 사람들...

예전에는 무척 많이 걸어다녔던 것 같다.

거의 매일같이 집에갈 때는 명륜동에서 창경궁까지, 또는 종로까지 걸어다녔다.

어떤 때는 집이 있는 아현동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1991년이었던가, 10월31일에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듣자고 종로 레코드가게를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그날은 술도 안마셨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길로 내쳐 우이동 계곡까지 걸어갔다. 밤11시쯤 시작된 걷기는 새벽 3시가 넘어서 그쳤던 것 같다.

 

'시내'

요즘은 시내라는 개념이 없어진 듯 하다.

사람사는 곳이면 어디든 불야성이고, 번쩍거리는 술집과 쇼핑몰들이 들어서서 번화가가 따로 없다.

예전엔 "어디가냐?"라 물으면 "시내!"라고 대답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나의 첫 시내나들이는 중학교 1학년때였다.

나까지 다섯, 똘똘 뭉쳐다니던 철없는 계집애들이 첫 시내나들이에 나섰다.

엄마한테 애들이랑 시내 놀러가기로 했다고 하자, 가지 마라고 할 줄 알았던 우리 엄마는 내 동전지갑에 5백원짜리 지폐를 넣어주시며 맛있는 거 먹고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하셨다.

 

그때 광주에서 시내는 어김없이 딱 '충장로' 한 곳이었다.

내 또래 아이들은 시내에 나가면 가는 코스가 거의 정해져있었다.

충장로 초입에 있는 우다방(우체국 앞이 약속장소로 애용돼서 광주사람들은 모두 우체국 앞을 우다방이라 불렀다)에서 만나고,

목화가든에서 돈까스를 먹고, 나라서적이나 삼복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다가

지금에 비하면 동네 편의점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볼 게 많았던 백화점을 돌아다니고, 충장로를 하릴없이 오락가락 걷다가, 지치면 궁전제과에서 팥빙수를 먹는 식이다.

그 모든게 다 충장로에 있었다. 우다방에서 시작된 충장로는 1가, 2가, 3가를 거쳐 화니백화점까지 가면 얼추 구경거리가 끝났다.

 

그때 우리 다섯은 아마도 삼양백화점에 가서 플라스틱 반지를 샀던 것 같다.

"우리 사랑 영원히~"라는 식의 닭살스러운 글귀를 새겨서 나눠 끼고, 평생을 함께할 듯한 우정을 다짐했던가. 빨간색 뭉툭한 반지...

그게 나의 첫 시내나들이였다.

 

나를 뺀 네명은 지금 어디서 뭐하고 살까. 가끔 생각난다.

고등학교 때 다 다른학교로 갈렸지만, 변치말자던 우정은 나름대로 오래 갔다.

 

내 친구 홍숙이. 공부를 제법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참 착했는데, 지지리 궁상이라 할만큼 가난했던 친구다. 보건전문대를 나와서 광주시내에 있는 내과 의원에 취직해서 곧잘 다녔었다. 우리 엄마도 몇 번 그 병원에서 친구 빽으로 치료도 받으셨으니까. 그러던 홍숙이는 어느날 수녀가 되겠다며 떠났다. 수녀복을 입은 홍숙이가 참 예쁠거라는 생각을 했고, 그 뒤로는 만나지 못했다.

 

또 내 친구 지숙이. 털털했지만 공부도 잘하고 집도 잘살았던 지숙이는 오빠 네 명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컸다. 우리는 늘 지숙이 집에 가서 비틀즈며 듀란듀란이며 조이며 마이클잭슨이며 신디로퍼 노래를 들었던 것 같다. 우리들 중 전축이 있는 집은 지숙이네 뿐이었으니까. 대학가자마자 연애한다고 법석이더니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한다해서 광주까지 내려갔다. 없는 돈에 멋진 액자를 사고 축하카드가지 끼워넣었다. 식장에 도착해서야 신랑은 엊그제까지 연애하던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황급히 포장을 풀어 카드를 빼냈다. 나도 몇 번 본 그 남자친구 이름을 지숙이라는 이름과 나란히 카드에 썼기 때문이다. 아이도 낳았다던데 잘 살고 있는지... 

 

진. 진이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그러더니 대학교에 가자마자 자신에 대한 투자를 많이 하는듯 했다. 영어학원도 다니고,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하고. 그렇게 자신감 넘치던 진이가 연애를 시작하면서 예뻐지더니 느닷없이 울며 나타났다. 사귀던 오빠한테 아이가 있다는 거다. 아직 어렸던 우리에게는 참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 일로 한동안 괴로워하던 진이는 어느날부터 다시 자신감을 찾았고,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10년쯤 전, 진이가 호주에서 잠깐 들어왔는데, 광주 내려갔다가 금방 다시 호주로 나가야 한다며 만나자고 연락이 왔었다. 그때 난 신문 마감하는 날이라서 힘들다 했고, 그 뒤로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은숙이는 영등포 목화예식장에서 결혼을 했다. 은숙이는 대학 가자마자 외모를 가꾸고 꾸미는 데 공을 들였다. 그러다 졸업하던 해에 선을 봐서 몇달만에 결혼식을 한다는 거다. 결혼식 간 것도 모자라 심지어 은숙이 신혼여행을 배웅하러 공항까지 따라갔다. 예의 풍선 달린 우스꽝스러운 승용차에 신랑 신부와 함께 타고. 가잔다고 어떻게 그렇게 난짝 따라나섰던고...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수원으로 이사왔다고 놀러오라는 전화가 몇 번 걸려왔고, 그때마다 난 바쁘다했고 이젠 연락이 없다.

 

360도 가운데 1도만 고개를 틀어도 세상은 많이 달라진다.

고개 숙이고 영등포 거리만 걸어다니는 것과

가끔 고개 들고 걸으며 한블록만 더 지나쳐 보는 것은 많이 다를 것이다.

영등포를 비껴 다른 곳으로 나서거나 숨는다면 많이, 무척 많이 다를 것이다.

오늘도 간만의 산책이 옛 친구들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는가.

해가 저문 뒤에 여의도공원을 걸어 사무실로 돌아올 때도 나름대로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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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9 20:54 2006/10/09 20:54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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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꼭 해보고싶은 게 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을, 그 사람이 누구든

내 오른손 주먹을 꼭 쥐어서

내 앞에 있는 사람 얼굴을, 진짜 세게!

오락실 앞에 있는 펀치 하듯이

진짜로 세게 치고 싶다.

그래서 그 주먹을 맞은 사람이

옆으로 퍽, 날아가듯 쓰러졌으면 좋겠다.

그걸 한번 해보고 싶다.

 

하고 나면 후회하겠지.

이러다 술 취해서, 혹은 문득 정신을 잃고,

아니면 나도 모르게 뭔가에 홀리듯...

내 주먹을 날려버리는 게 아닐까?

그럼,,, 큰일인데...

 

눈 딱 감고 해버린 다음에,

기억 안난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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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8 23:19 2006/09/28 23:19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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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을 영원히 치유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내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들과 단절하지 않는 이상...

 

나는 배신자다.

오늘 내 가슴 속은 내가 때론 믿었던 동지들, 늘 믿었던 동지들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찼다.

나는 배신자다.

오늘 내 가슴 속은 내가 속한 모든 이른바 '조직'에 대한 실망과 증오로 가득찼다.

내가 때론 믿었던 동지들은 배신자다.

그들은 때론 믿고 때론 같이 이야기하고 때론 같이 행동했던 '나'에게 '단절'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내가 늘 믿었던 동지들은 배신자다.

그들은 늘 그들을 믿고, 늘 그들과 같이 행동하고자 했던 나에게 '실망'을 안겨줬다.

저들은 배신자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저들은 1천5백만 노동자, 80만 조합원을 우롱했다.

우리 모두는 배신자다.

말과 행동이 다른 우리 모두는 배신자다.

굽어진 것을 바로 펴지 못하는 우리는 모두 배신자다.

 

그리고 나는 바보 멍청이다.

내 마음의 병을 고쳐주고자 하는 이에게 '나'를 설명할 수조차 없는 나는 바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하고싶은 일을 알지 못하는 나는 진짜 멍청이다.

 

잠시 '생각'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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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9 22:39 2006/09/19 22:39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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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들

2006/09/17 23:07

토요일,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열렸다.

지난 해 6월에 16회 추모제를 했고,

올해 9월, 17회 추모제를 했다.

그 사이 세상을 떠난 동지들이 너무도 많아서,, 제단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포항 건설노동자 하중근열사,

청구성심병원 이정미동지,

전북의 조문익선배,,,

 

제단에 올려진 영정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매년 똑같은 얼굴들인데도,,, 새삼스럽다.

 

조문익선배는 왜 그리도 활짝 웃고 있는지,

박상윤선배는 장난을 걸어오는 듯하고,

정성범동지는 많이 아파보인다...

 

한경석동지 영정에서는 고인의 살았을 적 삶처럼 당찬 기운이 배어나오고,

김진균선생의 온화한 웃음은 정말 감당하기 힘들다...

 

제1회 추모제가 열렸던 1990년.

난 그때 추모제가 열리던 성균관대학교 금잔디광장에 있었다.

추모제 장소가 몇 차례 침탈되기도 했고,

그 해에 목숨을 내던진 열사가 너무도 많았기에,

그날 추모제는 눈물바다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진혼굿을 하던 흰 옷 입은 여인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던가...

 

최근에는 열사마다 약력을 옷감에 인쇄해서 전시를 한다.

올해도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이 열사들로 가득찼다.

사연도 많다.

스스로 몸을 불사르기도 했고, 목을 매달기도 했다.

고문받다 죽기도 했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의문의 죽음도 많다.

경찰에 맞아 죽은 힘없고 억울한 이들도 헤아릴 수 없고,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했으며,

제 몸보다 다른 이들과 세상을 먼저 보살피다 몹쓸 병을 얻은 이들도 있다.

 

아...

'죽음'은 어찌도 이리 매번 살아있는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고,

왜 또 매 순간 기억되는 것을까...

'추모'만 하고 돌아서서 잊는다면 차라리 좋을 것을...

 

그들 모두가 살아 돌아왔으면 하는 실없고도 어리석은 소망을 갖게 만드는...

아,,, 아름다운 이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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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7 23:07 2006/09/17 23:07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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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끈지끈...

2006/09/13 13:37

아는 선배 전화번호가 떠서 받았다.

대뜸 "이기 머꼬. 민주노총 배제 안했으믄 찬성했을꺼라 말이가"

난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뭐라고?"

선배는 계속 화를 낸다.

"배제 안했으믄 찬성했을끼냔 말이다. 진짜 너무하네. 피켓이 왜 다 이모냥이고"

난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2년 반동안 배워왔다.

"아~ 그거, 왜 나한테 그래? 나야 모르쥐~"

 

참 간편하다.

잘못된 거, 항의하는 거는 모두 남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그게 자연스러워졌다.

누가 잘못했는지 몰라도,

그저 "아~ 난 몰라" 하면 그 뿐이다.

 

난 몰라~ 난 몰라~ 난 몰라~

난 늘 모른다...

 

난 상상속에서 그들을 모두 천하에 못되먹은 넘들로 만들지만,

현실 속에서도 못된 짓, 또는 잘못되는 탓은 죄 그넘들 몫이다.

 

난 여전히 모른다...

머리는 계속 아프고, 배는 계속 고프고,

내 검은 지갑은 어디갔나?

카드 분실신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무실서 잃어버린거면, "아~ 그넘들이 그랬군, 난 몰라~" 하고 말았을까?

 

지끈지끈 zz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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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3 13:37 2006/09/13 13:37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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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프다

2006/09/07 19:29

오른쪽 머리통이 몹시 아프다.

오늘 아침 느닷없이 지끈거리는 두통이 찾아와 잠에서 깼다.

오호~ 처음 겪어보는 통증이다.

편두통에도 시달려봤고,

체했을 때 오는 두통도 겪어봤고,

그냥 머리가 지끈거리는 두통도 당해봤다.

 

그런데, 이번 두통은 그 세가지 증세가 합쳐진 것이다.

오른쪽 관자놀이 위쪽을 뾰족한 부리가 쉼없이 쪼아대는 것 같고,

조금만 움직이면 덩달아 머리통 속에 든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같이 움직이며 울리는것 같고,

속이 메스꺼워 토할듯 하며 어지럽고... 흐흠...

 

난생 처음 "나 아파 죽겠다"고 전화를 걸었다.

아침부터 그딴 전화를 받은 그 친구도 황당했겠지만,,,

막상 그 친구가 "왜 그러냐?"고 하는데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냥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 친구는 올 수 없는 지경이니 119를 부르라고 했다.

나중엔 내 살덩어리들까지도 아프고, 머리가 너무 아프니 나중에는 무서웠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배가 아파서 119 불렀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머리가 아파서 119 불렀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질 못했다.

그래서 안불렀다.

사실, 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 이유는 알려놓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내가 정신을 잃더라도,

내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놓아야 할 것만 같은.

안 그러면 찾거나 걱정할까봐...

 

이제 곧 다시 집에 가야 하는데,

머리가 여전히 아프다.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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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7 19:29 2006/09/07 19:29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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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패

2006/03/07 13:57

노 동 해 방 패

고 박창수 열사

고인은 전노협의 강화와 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일천만 노동자의 가슴에 노동해방 정신의 지표로서 귀감이 되었기에 전노협 대의원대회를 맞이하여 천만 노동자의 이름으로 이 패를 드립니다.

1995년 12월 3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위원장 양규헌


* 민주노총 전북본부에서 2월16일날 10주년 대의원대회를 한다고 한다.
당초 조문익동지 살았을 며칠 전, 그에게 공로패를 주기로 예정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문익동지는 그 날을 며칠 앞두고 다른 세상으로 갔다.
전북본부에서는 故人에게 '공로패'를 주는 게 맞는지, 드린다면 문구는 어찌해야 하는지 고민됐었나보다.
어찌어찌 나에게까지 문의가 와서 참고할 만한 게 있을까 해서 전노협 백서를 찾아보았다.
전노협은 1995년 12월3일 해산대의원대회에서 故 박창수열사에게 '노동해방패'를 수여했다.
이 문구를 전북본부에 보내드렸다.
아... 어찌 우리는 이리도 제자리인가...
우릴 이끌만한 동지들은 떠나가고,
남은 자들은 제자리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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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7 13:57 2006/03/0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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