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길을 잃다
- 원재길

꽃그늘 나무 그늘
흙더미 한쪽
스르르 무너지는 소리의 그늘
돌연 서늘히
눈앞 스치는 구름
드문드문
꿈결로 날아가는 꽃가루 그늘

귀 기울이면 들린다
물은 흙을 살리는 핏방울
벌레들 사각사각
핏물의 길을 연다
사람 흔적 없는 곳
나는 멍한 얼굴로
팔다리 그림자 내려놓고
그 위에 가만히 앉는다

스스로에게 묻노니
그늘끼리 허공에 풀려
몸 섞는 풍경은 아름다운가
지난날 더듬는 마음은 즐거운가
골짜기 어두워진 뒤까지 머물며
모든 생각 지우고 이곳에서
남은 삶 접는 건 어떨까

또다시 묻겠노니
사람 냄새가 늘 역겨웠던가
습한 날 팔뚝끼리 닿았다가 떨어질 때의
따뜻한 비린내
한눈팔며
다른 하늘로 가는 꽃잎 쫓는 이 순간
정떨어질 새 없이 사람 소리
다시 그리운 이 변덕은 사랑스러운가

- 원재길 시집 '나는 걷는다 물먹은 대지 위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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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30 21:36 2006/08/30 21:36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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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런 것이 두렵다...

하워드 진 극본, 윤길순 번역, 마르크스 출연.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에 나오는 대목이다.
마르크스가 무대에 올라 하는 이야기...

"
한번은 내가 예니에게 말했지요.
"당신은 내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알아?"
그러자 예니가 말하더군요. "노동자 혁명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
"아니, 혁명은 일어날 거야. 그런데 그것이 피퍼 같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것. 권력이 없을 때는 알랑거리는 아첨꾼이다가 권력을 잡으면 난폭한 깡패로 변해 큰소리나 뻥뻥 치는 허풍선이가 되는 사람들 말이야. 이런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대변한다면서 내 사상을 세상에 해석해 줄 거야. 그리고 새로운 성직 계급을 조직하겠지. 파문과 금서목록, 종교재판, 총살형 집행대가 있는 새로운 위계질서 말이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질거야. 자유가 있는 공산주의는 한 백 년쯤 뒤로 미루어놓고, 세계를 자본주의 제국과 공산주의 제국 두 개로 나누고 말이지. 그들은 우리의 아름다운 꿈을 짓밟고, 그 꿈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기 위해 또 다른 혁명을 감행할 거야. 어쩌면 그게 두 번 세 번이 될지도 몰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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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18:02 2006/05/29 18:02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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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

2006/03/20 11:06
권세에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
권세에 가까이 할지라도 물들지 않는 사람은 더욱 깨끗하다.
권모와 술수는 모르는 사람을 높다 하나 알아도 이를 쓰지 않는 사람을 더 높다 할 것이다.

<채근담> 中에서

* 채근담 : 중국 명(明)나라 말 홍응명(洪應明;自誠)이 지은 책. 책의 이름은 송(宋)나라 왕신민(汪信民)의 소학(小學) 가운데 <사람이 항상 채근(菜根)을 씹을 수 있다면 백사(百事)를 이룰 수 있다>에서 따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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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0 11:06 2006/03/20 11:06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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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라의 애공이 공자에게 '유가의 선비로서의 행동은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답변한 공자의 설법은 『예기(禮記)』 「유행(儒行)편」에 기록돼 있다.

선비는 보배(옛 성왕의 도)를 벌려놓고서 초빙되기를 기다리고 부지런히 힘써 닦아 쓰여지기를 기다리며, 충성과 신의를 품고서 등용되기를 기다리고, 힘써 실천함으로써 벼슬자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닦고 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기거(寄居)에 엄격하고 어려움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거동은 공경하고 말은 반드시 신의를 앞세우며 행동은 반드시 알맞고 올바릅니다. 길을 나서서는 편리한 길을 다투지 아니하고, 여름이나 겨울에는 따스하고 시원한 곳을 다투지 않습니다. 그의 목숨을 아끼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며, 그의 몸을 보양하는 것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대비(對備)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금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아니하고 충성과 신의를 보배로 삼습니다. 땅 차지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의로움을 세우는 것으로써 땅을 삼으며, 재물을 많이 축척하기를 바라지 않고 학문이 많은 것을 부로 여깁니다. 벼슬을 얻는 일은 어렵게 생각하되 녹(祿)은 가벼이 생각하며, 녹은 가벼이 생각하되 벼슬자리에 머무는 것은 어렵게 생각합니다. 적절한 시기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으니 벼슬 얻는 일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의로움이 아니라면 화합하지 않으니 벼슬자리에 머무는 것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선비는 재물을 탐하는 태도를 버리고 즐기고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 이익을 위하여 의로움을 손상시키지 않고, 여럿이서 위협하고 무기로써 협박을 하여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의 지조를 바꾸지 않습니다. 사나운 새나 맹수가 덤벼들면 용기를 생각지 않고 그에 대처하며 무거운 솥(鼎)을 끌 일이 생기면 자기 힘을 헤아리지 않고 그 일에 착수합니다. 과거에 대하여 후회하지 아니하고 장래에 대하여 미리 점치지 아니하며, 그릇된 말을 두 번 거듭하지 않고 뜬소문을 두고 따지지 않습니다. 그의 위엄은 끊이는 일이 없으며, 그의 계책을 미리 익히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뛰어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친근히 할 수는 있어도 위협을 할 수는 없고, 가까이하게 할 수는 있어도 협박할 수는 없으며,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사는 데 있어 음락(淫樂)을 추구하지 않으며, 음식에 있어 맛을 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과실은 은밀히 가려줄 수는 있어도 면대(面對)하여 꾸짖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꿋꿋하고 억셈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충성과 신의로써 갑옷과 투구를 삼고, 예의와 정의로써 방패를 삼으며, 인(仁)을 추대하여 행동하고 정의를 안고 처신합니다. 비록 폭정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입장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스스로 처신함이 이와 같습니다.

선배는 좁은 집 허술한 방, 사립문에 거적문이 달린 집에 살며, 옷을 갈아입어야 나갈 수 있고 이틀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할 형편이라 하더라도, 임금이 응낙한 데 대하여는 감히 의심치 아니하며, 임금이 응낙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히 아첨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벼슬하는 태도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옛 사람들에게 뜻을 두며, 지금 세상에서 행동하고 있지만 후세의 모범이 됩니다. 마침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 임금이 끌어주지 아니하고 신하들은 밀어주지 아니하며, 아첨을 일삼는 백성들 중에 붕당(朋黨)을 이루어 가지고 그를 위협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으나 그의 뜻을 뺏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위태롭다 하더라도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끝내 자기 뜻을 믿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그들의 걱정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선배는 빈천하다고 해서 구차하게 굴지 아니하며, 부귀를 누린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임금의 권세에 눌려 욕을 보지 않으며, 높은 자리의 사람들 위세에 눌려 끌려 다니지 않고, 관권(官權)에 눌리어 그릇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선비(儒)라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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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0 11:06 2006/03/20 11:06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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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아남는 것은 없다.
이 땅과 산뿐

- 인디언 추장 흰영양이 미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져 죽기 전에 부른 '죽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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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0 11:03 2006/03/20 11:03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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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2006/03/07 13:55
내가 사는 파주에는 안개가 참 많다.
때론 안개가 막막하기도 하고, 때론 푹신하기도 하고,
때론 나를 불안하게 하기도 하지만, 가끔 아늑해지기도 한다.
갑자기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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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7 13:55 2006/03/07 13:55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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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城

2005/08/16 14:17
土城

잔돈푼 싸고 형제들과 의도 상하고
하찮은 일로 동무들과 밤새 시비도 하고
별것 아닌 일에 불끈 주먹도 쥐고
푸른 달빛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면서
바람도 맞고 눈비에도 시달리는 사이
햇살에 바래고 이슬에 씻기는 사이
턱없이 뜽금없이 꿈에 부풀기도 하고
또 더러는 철없이 설치기도 했지만
저도 모르게 조금씩 망가지고 허물어져
이제 허망하게 작아지고 낮아진 토성

지천으로 핀 쑥부쟁이꽃도
늦서리에 허옇게 빛이 바랬다
큰 슬픔 큰 아픔 큰 몸부림이 없는데도

신경림 [쓰러진 자의 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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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6 14:17 2005/08/16 14:17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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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거친 들판으로 오라
- 구로동맹파업 정신을 되살리며
백무산

한 그루 푸르른 나무가 쓰러졌다
비바람 천둥번개에도 의연하던 나무가
지축을 뒤흔들던 지진 해일도 꺾지 못하던 나무가

암울한 한시절의 어둠을 몰아내고
푸른 새벽을 이고 오던 나무가
메마른 대지 위로, 갈라터진 가슴 위로,
방황하던 우리의 정수리 위로
폭포처럼 시퍼런 정신을 쏟아 붓던 나무가
삶의 공포, 생의 불안을 떨쳐내던 너른 그늘을 가진 나무가
때로는 봄날 연인의 가슴처럼 따뜻하던 나무가

그 나무가 쓰러지자
생기를 잃어버린 숲은 다시 잿빛 바람에 휘감겼다
저 그늘 아래 사람들을 보아라
저 눈빛을 보아라
저 가슴을 헤쳐보아라
저 손들을 보아라
진리를 고뇌하고 한점 티끌을 부끄러워하던
그 반짝이던 눈빛들은 잿빛이 되었구나
무엇이 진실일까, 무엇이 인간의 의로움일까?
활화산처럼 타던 가슴들은 식은 죽그릇이 되었는가

저 손에 손에 힘주어 쥐고 있는 것은 무언가
잃어버릴까 두려워 돌아서서 손을 감추고
눈을 희번덕이며 돌아보는 저 눈빛은
진실밖에 그 무엇도 잡을 수 없던 그 빈손들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가 딛고 일어서야할 그 거치른 대지가
그 대지가 이제는 부동산이 되었는가
전위는 코스닥이 되고 혁명의 열정은 로또 대박이 되고
붉은 머리띠는 계급장이 되고
내어 뻗던 주먹은 권력이 되었는가

어제 저녁 술상을 탕탕 치며 부정을 저지른 동지들을 욕하며
정의에 불타던 자들이 오늘 아침 2억 3억 통장이 들통 나서 끌려가고
오늘 아침 기자회견에 양심선언으로 결백을 주장하던 자들이
저녁에는 복날 개처럼 질질 끌려서 가는구나
타락과 부패의 복마전이라고 돌을 던지던 그곳
반란과 전복을 꿈꾸던 저 국가권력기관으로부터
그 무엇도 아닌 무릎 꿇고 도덕적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 치욕은 어쩌고 머리띠를 두르고 성명서를 낭독하고
그 신성한 행위를 끌어다가 썩은 것을 지키는 도구로 삼기도 하는구나
그러나 어쩌랴 이미 집권을 꿈꾸었으니!

여기까지 끌고 왔구나, 험한 길 가시밭길 피흘리며 왔다더니
끌고 오지 말아야 할 것도 끌고 왔구나
끌고 와야 할 것도 많이 버리고 왔구나
잃어버릴 것이 있는 계급은 이미 오염된 계급이다

이제 그만 밖으로 가자
들바람처럼 훌훌 들판으로 가자
내 식구들 입에 밥술 들어가는 일밖에 아무일도 않는 이들
우리 패거리 힘 생기는 일밖에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이들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고 인간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차별없는 세상은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 자들이여
해방은 이미 저들 너른 평수의 아파트에 와있고
이미 예금잔고 속에, 재산 목록 속에 와있고 벼슬길에 와있으니
저들의 목소리가 큰 세상이여
저들을 뒤로 하고 이제 들판으로 가자

저기 길게 쓰러져 누운 나무를 보아라
하늘 닿을 듯 크고 푸르던 나무가 아니던가
쓰러진 나무 위로 불어오는 잿빛 바람을 보아라
저것은 언젠가 우리 가슴 가슴에서 뜨겁게 타오르던 나무가 아닌가
저 거치른 대지를 기억하는가
마구 가슴이 뛰던 저 들판을 기억하는가
그곳에서 울고 뛰고 환호하며 서로를 껴안던 날을 기억하는가
여기, 쓰러진 나무의 뿌리를 찾아 다시 일어선 이들을 기억하는가
땅에서 쓰러져 다시 땅을 딛고 일어서는 이들을 기억하는가

들판으로 가자, 광장으로 가자, 광야로 가자
비바람 천둥이 치는 인간의 광장으로 가자
삶의 대지
생의 푸른 숲
인간의 지평
생명이 파도처럼 춤추는 인간의 광장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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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5 12:57 2005/07/25 12:57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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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은 없다

(소나타) 

- 파블로 네루다


만일 내게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그렇게 됐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난 돌멩이들이 어둠을 드리우는 땅바닥에 대해,

흘러가며 부서지는 강에 대해 얘기해야 하리라.

내가 아는 거라곤 새들이 잃어버리는 사물들,

뒤에 남겨진 바다, 혹은 울고 있는 내 누이뿐,

왜 하 많은 지역들이 있는 걸까, 왜 하루는

다른 하루와 합쳐지는 걸까? 왜 검은 밤이

입 속에 쌓이는가? 주검들은 왜?

만일 어디서 왔냐고 내게 묻는다면, 난 얘기를 나눠야 한다, 부서진 사물들과,

너무나 가슴 아픈 연장들과,

흔히 썩어 있는 덩치 큰 짐승들과

그리고 쓰라린 내 가슴과,


엇갈린 건 추억도

망각 속에 잠자는 누런 비둘기도 아니다.

그건 눈물 젖은 얼굴,

목구멍 속의 손가락,

그리고 나뭇잎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

흘러간 하루의,

우리의 슬픈 피를 먹고 자란 하루의 어둠,


여기에 제비꽃이, 제비가 있다.

시간과 감미로움이 거니는

긴 꼬리의 달콤한 엽서에

나오는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있다.


그러나 그 이빨 너머로 뚫고 들어가지는 말자,

침묵이 쌓아가는 껍질을 물어뜯지 말자,

난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니까,

수많은 주검이 있다.

붉은 태양이 무너뜨리는 무수한 제방들이,

뱃전을 때리는 수많은 머리들이,

입맞춤을 가두고 있는 무수한 손들이,

그리고 내가 잊고 싶은 하 많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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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29 2005/06/05 01:29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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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날, 눈가에 물 한방울!
4월30일, 울산플랜트 2차 상경투쟁단 오금철단장이 국회 앞 문화제 때 읽은 글...

천리길을 달려달려 이렇게 왔습니다
좁은 찻간에 다리도 못 펴고 마른 빵 입에 물고 그렇게 서울로 서울로 눈물을 머금고 왔습니다.

나는 68년, 여수 호남 정유에서 조공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군대에도 가고 월남전에도 참전하여 72년 6월에 제대를 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온몸의 살갗이 벗겨집니다.
오늘은 팔에서, 내일은 다리에서 내 몸의 살점이 떨어져 나갑니다.
한여름에도 짧은 팔을 입을 수 없이 살아온 인생이지만 고리 원자력 발전도 울진 원자력 발전도 공사해서 죽어라고 일만 했습니다.
사막의 뜨거운 모래 폭풍이 부는 이라크에서도 일을 했고 일본에도 가고 어디라도 달려가 일을 했습니다.
말그대로 산업 역군이었습니다.

일등 국민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어느 잡지에서 애국 애족 애사라고 합디다.
이 가운데서도 외화를 벌어들이는 사람들을 산업역군이라 합디다.

그런데 나는 무엇입니까.
산업역군은 간데 없고 검사들과 경찰들은 나를 빨갱이라 합니다.
도대체 나는 무엇입니까.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것뿐인데 끌려가고 구속되고 수배되고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됩니까.
나라의 윤리가 이렇지 않습니다.
자본이 썩었습니다.
정치가 썩었습니다.
경찰, 검사가 썩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정치가, 검사들이 이 정도까지 썩었는지 몰랐습니다.
정말로 몰랐습니다.

울산은 지금 전쟁 중입니다.
너무 억울한 전쟁입니다.
제가 참전한 월남전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이 전쟁에는 젖먹이를 들쳐업고 나온 아주머니들이 태반이요,
얼마나 절박하면, 이 놈들이 얼마나 나쁜 놈들이면 이러겠습니까.
아이들한테, 아저씨들 잡아가는 나쁜 경찰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솔직히 나는 근로기준법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법에만 있는 것이었지 현실은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초등학생도 이해하고 국민 누구나가 이해하는 것입니다.
먹고 씻고 쉬고 일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것 뿐입니다.
밥알보다 모래알을 더 씹어야 하는 점심 도시락도 그나마 비가 오면 빗물에 말아먹는 꼴이 됩니다.
공장 담벼락에 숨어서 도둑놈처럼 작업복을 갈아 입어야 됩니다.
누가 우리들의 이런 짐승같은 생활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돈을 더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답게 생활하고 좀더 인간답게 일하고 싶은 것 뿐입니다.
30년 전에 전태일 열사가 외친 근로기준법을 우리가 외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얼마 전에 나는 알았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살아온 날을 이렇게 이야기하려니 눈물만 납니다.
서러움이 무엇인지 한 번 보고 싶다면 나를 보면 됩니다.
우리 동료들을 보면 됩니다.

파업하며 안 운 날이 없습니다.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이 납니다.
그야말로 피눈물이 납니다.

내 삶이 왜 이렇습니까.
원인이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된 겁니까.

새벽밥 먹고 현장에 와서 옷 갈아입을 장소가 없어 도로에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쇳가루 시멘트 가루 날리는 낙장에서 비가 쏟아져도 피할 곳이 없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 이런 현실, 내 돈 주고 먹는 도시락 모랫바람 없이 한 번 먹어보자는 것이 무슨 죄입니까.
화장실 한 번 당당하게 가 보자는 것입니다.
먼지 구덩이 쇳가루라도 털고 퇴근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루일을 마치고 땀에 흠뻑 쩔어도 손 씻을 세면장, 샤워장 하나 없는 게
건설일용노동자들의 오늘의 현실입니다.

국민 3대 의무가 교육의 의무,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안 지킨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노동자 기본권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것입니다.
기본권이 원래 그런 겁니까?

성수대교가, 삼풍백화점이 왜 무너졌습니까.
그게 다 부실공사 아닙니까.
다단계 도급제 때문 아닙니까.
다단계 도급이 시공 관행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한단계만 없어도 삼풍백화점이 왜 무너지겠습니까.

그런데도 검찰과 경찰들은 우리더러 폭력배라고 합니다.
우리더러 테러리스트라고 합니다.
말이나 됩니까.
우리는 명예가 없습니까.
뻑하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고발하는 사람들만 있지 우린 늘 당하고만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파업은 잘못된 시공 관행을 바로 잡아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파업은 우리의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내 나이 내일 모레면 60을 보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죽음을 생각하지만 앞으로도 공장에서 일하게 될 후배들에게 남길 유산이라고 생각하여 죽을 각오로 싸울 겁니다.

업체는 협상에 코빼기도 안 보이고 검사는 우리더러 사상이 불순하다며 빨갱이 타령에 정신이 없습니다.
경찰은 조합원이 모였다면 곤봉들고 방패들고 여차하면 다 쓸어버리겠다고 폭력배 타령을 합니다.
사장 좋을 짓만 알아서 합니다.
손발이 착착 맞습니다.
생판 듣도보도 못한 법으로 우릴 구속하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게,
바로 법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린 진짜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많은 세월을 살았습니다.
중학교 졸업하고 여태까지 일하며 살아왔습니다.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인간이라면 잘잘못을 알 겁니다.
검사들이 못 배워서 우릴 구속 시킵니다.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이야기 하는 게 죄입니까.
나는 자식들한테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없는 사람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참 나쁜 놈들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좋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발 좀 말 좀 해 주십시오.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하루 여덟시간 노동 준수하고 식당, 휴게실, 세면장 설치하고 주, 월차 수당 지급하고 유급휴일 보장하라.
건설산업법과 산업안전법을 지키고 안전장구를 지급하라.
무리한 잔업 중지하라.
노동조합 탄압 중지하라.
불법 대체인력 파견 마라.
간부조합원 폭력연행 중단하고 구속자 석방하라.
사용자는 단체교섭에 나오고 단체협약을 체결하라.

울산 SK 상경투쟁단 대표 오금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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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26 2005/06/05 01:26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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