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 3

2005/06/05 01:14
꽃들 3


- 십오척 담장 밑을 거닐다 우연히 발견한 꽃. 나팔꽃보다 가는 줄기에 촘촘히 핀 묽은 꽃송이들. 누군가 일러준 그 꽃의 이름은 별꽃...

구태여 물어보지 않아도
난 네 이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별꽃

아름다운 것만 보면
불안한 시절에

더 이상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다는 듯
가는 줄기에 촘촘히
박힌 붉은

당신의 핏줄 한 올 뽑아 널면
이토록 붉고 선명한 꽃
피울 수 있나요

아직
가슴에 달린 붉은 수번 하나조차
힘겨운 내게
묻는가

붉은 것만 보면
가슴이 뛰는 시절에


- 문부식의 [꽃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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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14 2005/06/05 01:14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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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통

2005/06/05 01:13
내가 죽으면
술통 밑에 묻어 줘.
운이 좋으면
밑둥이 샐지도 몰라.

모리야 센안(일본 선승, 7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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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13 2005/06/05 01:13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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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2005/06/05 01:13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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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13 2005/06/05 01:13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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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기

2005/06/05 01:12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이후
자신에 대한 역겨운 중상비방문에 대해
친구 폴리냐크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언제나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앞으로도 세 배나 더 착해져서 악한 사람들을 이겨낼 것입니다.
그들은 나를 괴롭힐 수는 있겠지만
내가 복수에 나서도록 할 수는 없을 거예요" 라고 썼단다.

난 결코 착하지 않지만,
복수에 나서지 않는 것 역시
착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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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12 2005/06/05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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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비

2005/06/05 01:11
원재길의 '나는 걷는다 물먹은 대지 위를' 이라는 시집에 있는

[여우비]

느닷없는 물방울의 소란
창유리 더듬는 바람
물 반 모금으로 혀뿌리 적시고
햇볕 속 달리는 빗발을 본다

창틈으로 몇 장 나뭇잎
겁 없이 날아들 때
무념무상
먼 구릉으로 아스라이
천둥도 건너오고

괜찮아 생명스러운 것들
별일 아닐 거야
잠깐 빗줄기에 멍드는 뜰
날리기 무섭게 내려앉는 흙먼지
모든 건 잠깐 지나가는 악몽의 배경일 뿐

낮도둑도 망자(亡者)의 뼈도
다 찍히는
저기 벽면을 보아라
명암 참 선명하기도 하지
무심히 걸치는 구름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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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11 2005/06/05 01:11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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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마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 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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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09 2005/06/05 01:09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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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낸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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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08 2005/06/05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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