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겨레신문을 잘 안 본다. 물론 창간 초기에는 열심히 봤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한겨레신문을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바보처럼 웃고 있는 얼굴이 어른거리고 몇 년 전부터는 노무현 현 대통령의 심술궂은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들으면 참을 수 없는 짜증으로 불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피해다닌다. 제발 빨리 신문과 방송에서 사라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한겨레 신문을 펼쳐 읽었다. 가끔 이 코너에서 배울게 있다고 생각해서다.

나는 민중(民衆)이란 그다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신 인민(人民)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민중이란 단어는 마치 대중(大衆)이란 단어처럼 익명적이고 낯선 무매개적인 사람들, 좀 무리해서 말하자면 어중이떠중이들을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반면, 인민은 김수영의 시 “풀”에서 처럼 바람보다 빨리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고립을 깨고 자기의식적인 연대를 통해 뭉친 사람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민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내포와 외연이 일치하는 개념이다.

요즘은 또 다른 단어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을 본다. 다중(多衆)이라는 단어다. 개념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의미에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지면서 끊임없이 그 내포와 외연을 다듬어가는 과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떤 철학자가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개념의 창안이라고 했다지만 그가 사용하는 개념들 중에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단어를 주워 모아 얼기설기 엮어 만들어낸 그런 “새로운” 개념은 하나도 없다. 하나의 개념이 역사성을 가지는 것은 개념이 현실에 대한 실천적 반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유레카] ‘피카소’와 ‘인민’ / 07. 10. 10

1969년 6월7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크레용 제조업체 삼중화학공업 사장 박진원씨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이 회사가 8개월 전 내놓은 크레파스와 그림물감 등의 상표로 프랑스 화가 ‘피카소’의 이름을 쓴 게 문제였다. 공안당국은 피카소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한 전력이 있고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그림을 그린 좌익 화가라며, 그 이름을 상표로 쓴 것은 “국외공산 계열에 동조하고, 찬양고무하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검찰은 ‘피카소 크레파스’ 등의 상품 광고를 더는 못하게 하고, 시중에 이미 풀려나간 제품에서도 ‘피카소’란 이름을 모두 지우게 했다. 검찰은 심지어 텔레비전 드라마에 ‘피카소’란 별명을 가진 등장인물을 기용한 제작자를 불러 조사하고, 쇼 프로그램에서 “피카소 그림같이 훌륭하다”는 표현을 쓴 사회자를 소환해 ‘의도’를 캐묻기도 했다.
군사정권 시절 공안당국은 ‘노동’이나 ‘인민’같은 단어를 쓰는 것도 ‘불온’하게 봤다. ‘노동’은 북한의 조선노동당에, ‘인민’은 인민군, 인민공화국에 들어간 단어라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노동’은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 자유당을 만들면서 애초 그 이름을 ‘노동당’이라고 지으려 했을 만큼 누구나 자연스럽게 쓰던 표현이다. ‘인민’도 조선왕조실록에 ‘국민’보다 훨씬 많이 나오는 단어로, 영어의 ‘피플’에 가장 잘 맞는 표현이다.
피카소의 이름이나 이런 단어에까지 ‘불온’ 혐의를 씌운 것은 일종의 강박증일텐데, 치유가 참 어려운 모양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지난주 방북한 길에 서해갑문을 들러보고 방명록에 “인민은 위대하다”고 썼다. 그러자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의 전유물처럼 돼 버린 용어를 썼다”며 트집잡는 이들이 또 나왔다. 그들은 아마 지금도 ‘피카소’의 이름을 결코 입에 담지 않을 게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1/09 13:19 2012/01/09 13:19
https://blog.jinbo.net/greenparty/trackback/176
YOUR COMMENT IS THE CRITICAL SUCCESS FACTOR FOR THE QUALITY OF BLOG POST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