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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솔직해지기,

 

 

*

 

"이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가능하겠어요."

 

기린언어워크샵 도중에,

관찰-느낌-욕구-부탁 모델의 연습을 위해 몇 분이 자원해서 아침 님과 이야기 하시는 걸 함께 지켜 보던 옆 분이 내뱉으신 말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에 스스로가 매우 부끄러워져서 나 혼자 어쩔 줄을 몰라했는데,

눈 주위로 피가 쏠려 금새 왈칵하고 밀려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까지의 워크샵이 흥미로웠고 기대보다 더 편안하고 즐거웠던 건 사실이지만,

일기를 쓸 때, 일상의 기록뿐만 아니라 내 심경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마지막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일기 쓰는 일을 마칠 수 없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초조함과 허전함, 꺼림칙함이 계속 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자칼의 언어에 대한 기린언어의 문제의식이나 질적인 유대 관계와 대화자 서로의 만족을 위한 기린언어가 추구하는 목표에 대해서는 머릿속에서도 가슴속에서도 너무너무너무 공감하고, 이를 위한 방법들을 얻고 싶었고, 노력해보고 싶었지만, 맨 위의 저 말을 듣는 순간에 나는 내가 계속해서 나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 불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과연 내가-자기 자신에게 조차 솔직하지 못했던, 이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때문에 불편했던 게 아닐까.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

솔직해져야 할 자기 자신이란 걸 발견한지가 얼마 되지 않는 나로서는,

솔직해지기까지 해야 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대강 짐작해보자면 작년 가을과 겨울 부근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내가) 해야한다고 여기는 일에 더 얽매여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 과연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게 있기나 한걸까 라고 생각했을 때.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은 내게 분리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왔던 이전과는 달라지게 된 때. 오직 나 혼자 있을 때-나의 익명성을 담보받을 수 있을 때-만 편안함을 느끼고, 세상에서 제일 편하다고 여기는 그만큼 외로웠을 때..

 

바빠져야 했다. 바쁘면 어떤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이건, 나를 볼 수 없어도 알아서 이해한다. 바쁘면 약속을 잡지 못해도 이해해준다. 마땅한 공적인 이유가 없이는 약속을 거절하지 못해서 쩔쩔매는 나는, 나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해낼 자신이 없었고, 바빠지는 길을 택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순간이 많았지만 그 순간들에서도 나만의 생각에 잠길 수 있는 틈들이 있었다.

 

혼자서 나에 대해 하는 생각은 대부분 무성한 가지를 뻗치고 뻗쳐 결국 뿌리 근처에 처박히거나, 공간 가득 단어와 문장들로 채워나가 보지만 물 받아 놓은 욕조 속에 구멍뚜껑을 열어 놓은 듯 고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나를 관찰하기. 특히 타인과 접촉할 때의 나. 직접 만나 이야기하든, 문자를 주고받든, 전화통화를 하든, 편지를 쓰든,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든..

 

지금 생각하면 딱히 충격적이라 할 것도 없는데, 그런 일들을 반복하면서 내가 충격받아가며 알게 된 게 많았는데 그 중에 최고는, 대화를 할 때, 나라는 사람이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를 내가 봐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혹은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방어적인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져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잊게 되는 때가 많았다.

 

(지금 나는 포스트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어서 당황 중..)

 

사람들이 좋았지만 사람들을 대할 때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울렁증, 풀리지 않는 긴장, 답답함. 점차 불균형한 것이 보이는 관계들에서 나는 알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관계에서 나는 없었다는 걸. 아니, 있었겠지만(그래야 관계가 생성되니까..) 나는 무시하고 있었다는 걸.

 

그 즈음 읽었던 한 책에서 아래의 문장을 봤을 때, 한참을 멈춰서 바라보았던 게 기억난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타인을 속이지만 정신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인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_- 오래되서 흑)

 

곰곰이 생각해보고 관찰해봤을 때,

그동안 나는, 내 안의 많은 욕구들, 내 안의 많은 목소리들을 들리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거라고, 그래서 단 하나의 욕구와 목소리만이 진짜라고 진실이라고 진리라고 최고선(善)이라고 스스로를 속여왔던 게 아닐까 싶었다. 

더 기가막힌건, 나 자신은 진심으로 '몰랐다'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기억을 재구성해보면 딱히 몰랐던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인정하지 않았을 뿐.

 

'보여지는 나'와 '관찰하는 나 혹은 보여주는 나'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살아왔고,

그 불균형한 관계가 길어지다 보니 우울했던 게 아닐까.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게 정말 싫어서,  타인을 무척이나 배려하는 듯이 행동하고 노력하지만, 사실은 타인을 배려해야지만이 마음이 편할 수 있는 나를 가장 배려하려고 노력했다는 것, 상처주는 게 싫다고 중얼대는 마음에는 내가 상처받는 게 너무 두려워서 라는 걸 인정하고 나서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었다.

 

기린언어워크샵을 들으면서, 아직 나는 많이 멀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여성주의를 공부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내가 스스로의 다양한 욕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면, 내 발화가 나에게 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억압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앞으로

나의 다른 목소리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와 나의 평등한 대화를 위해서 내 욕구들을 위계짓지 않은채 다양함을 제대로 바라보고 싶다. 

 

기린언어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 여성주의를 공부하고 실천하려고 한다는 건,

'착해지는 것'이나 '착해지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나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 내 생의 의지를 다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폄하할지도 모르지만, 정말 언젠가 언니네글에서 봤듯이 이게 정말 개인적인 방식이라 할지라도 작디 작은 개인에 불과한 나로서는 '부조리하고 비열한 일상'에 전염되지 않고 살아남겠다는 나름의 저항, 절실한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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