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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6/07
    친절? 희생?(1)
    하노이
  2. 2007/06/05
    ( )에게 쓰는 편지,
    하노이
  3. 2007/05/20
    태그?!
    하노이
  4. 2007/05/20
    이런 슬픈 모습으론 안돼 웃어봐 (2)
    하노이
  5. 2007/05/20
    태그 - 스킨 수정 중
    하노이
  6. 2007/05/13
    딸내미도 인간, (6)
    하노이
  7. 2007/04/27
    실어증,
    하노이
  8. 2007/04/24
    잔인한 4월, (2)
    하노이
  9. 2007/04/21
    어른, (1)
    하노이
  10. 2007/04/21
    숨은 고뇌,
    하노이

친절? 희생?

 

 

"친절하긴 친절한데, 그냥 친절한 게 아니라 뭔가 의도가 있는 친절같아."

 얼마 전 술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내 단점이라며 이렇게 은근슬쩍(사실은 대놓고) 말해주었다.

 누군가에게서 내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나쁘지 않다. 그것도 직접 해준다면 감사한거지. (라고 생각하려고 하다 보니 점차 정말로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전에는 그래도 기분은 좀 나빴는데 요즘엔 그냥 더 듣고 싶어서 궁금해질 뿐...)

 

아무튼 궁금해졌다. 내 어떤 행동에서 이렇게 느낀다는 건지. 알듯 모를듯.

 

'그냥 친절한 거'랑 '의도가 있는 친절'이랑 뭐가 다른 건지도 궁금하고..

 

내게 친절한 행동에 대한 의도가 있다면,

(사실 스스로는 내가 친절하다고 생각해본적 없다. 단지 소심할 뿐-_-.. 물론 나 스스로도 내가 내 마음 쓰는 게 괴로워서 날 위해 하는 행동들이 '친절'로 비춰질 수 있다는 건 불현듯 깨달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내겐 사소한 문제가 아닌 일들이라 신경쓰는 건데 마치 내가 더 '착해서'라거나 '친절'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혹은 희생해서 하는 일이라 여겨질 때도 있어서.. )

그냥, 얘가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것 정도?  이런 것두 뭔가를 '바라는' 일이니까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가? 바란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딱히 좌절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좋아해주지 않으면 아닌거지. 그렇다고 내가 또다시 원망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 더 소원해져야 하는 것도 아닐텐데.

암튼 잘 모르겠다. 나중에 더 물어봤는데 다른 말 하는 듯 해서 ..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말해달라고 부탁해봐야지 하는 생각.

 

그냥 드는 생각인데 친절과 희생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예를 들어,

'엄마가 베푸는 친절', 이란 건 상상할 수 있나?

친절한 엄마. (친절한 금자씨 식의 그런 반어적 형용사의 뜻으로 말고....)

누군가는 엄마가 '희생'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그게 엄마의 '본래 마음(모성)'이라고 한다.

 

"우리 엄마는 참 이기적인 사람이야"란 말은 어디선가 들을 수 있어도,

"우리 엄마는 참 친절한 사람이야"라는 말은 어색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엄마라는 사람들은 '원래' 그래야 하는 사람 같거든. 대체 왜?

 

원래 그래야 하는 엄마이지만 동시에 또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대체 왜 그러고 살어, 란 느낌. 대체 왜 희생하는 거야, 하는 느낌.

본인들도 자기가 하고 싶어 그랬는지,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했는지는 모르지 않을까.

그런 류의 구분이 스스로에게 필요한가?

 

이전에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      ) 하는 아빠' 라는 말의 괄호에다가

술 마시는 아빠

담배 피는 아빠

때리는 아빠 

하는 말을 넣는 것과

 

술 마시는 엄마

담배 피는 엄마 

때리는 엄마

라는 말을 넣는 것은 미묘하게 어감이 다르다고.

 

 

<내 남자의 여자> 드라마를 보다가 준표(김상중)가 지수(배종옥)에게

"당신은 너무 과잉친절이야. 그거 폭력이라고."라는 류의 이야기를 하는 걸 봤었다.

준표는 화영과도 이런 류의 이야기를 나눈다.

"마누라로는 딱인데, 재미없지?"

 

언젠가 강연에서 세상의 여러 게임의 룰은 여성이 어떻게 행동하든 욕먹을 수밖에 없도록, 혹은 질 수밖에 없도록 '누군가에게만' 유리하도록 짜여져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엄마나 부인이 친절(희생)하지 않으면, 애들이 삐뚤어지고, 남편은 바람나지만(여자가 사근사근한 맛이 없어서)

엄마나 부인이 친절(희생)해버리면, 애들은 삐뚤어지고(엄마가 너무 애를 감싸고 돌아서), 남편은 바람난다(부인이 귀찮아서, 구속해서).

 

내가 좋아서 한 일에 대해 내가 친절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어쩐지 느낌이 이상하다

그렇지만 어느날 불현듯 내가 좋아서 하긴 했지만 내가 한 일에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할지 너무나 혼란스러울 때 나는 쉽사리 내가 희생한 거였나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서 그런가. 덜 슬퍼서 그런가. 진짜 덜 슬픈가?

결국 나의 마음 혹은 나의 인성에만 주목할 게 아니라 내 주변의 관계와 상황이 어떤지에 따라

내 행동, 내 주변 사람들의 행동들을 다 주목해야 여러 의미들을 발굴해내고 읽어낼 수 있을텐데

 

'엄마'같은 것처럼

주변에 많은 것들을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버리는 거...

답답하다 어엄청.

 

내가 내 엄마란 사람에게 '당연시'하는 것들을

떠올려보면 정말 장난아니다. 매번 깜짝깜짝 놀란다.

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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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게 쓰는 편지,

 

 

있잖아, 너를 만나기 이전의 일인데, 나는 사람에 대한 조급증에 시달렸던 때가 있어.

사람이 제일 신기하고, 사람이 제일 고마워서, 바로 지금 내가 닿을 수 있는 사람들과 가능하면 자주자주 만나서 함께 시간 보내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어. 하루에 밥은 어째서 3끼밖에 먹지 않는 걸까, 사람과 밥을 함께 먹는다는 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계속해서 밥 약속을 잡아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좋을텐데. 하루에 왜 24시간 밖에는 없는 걸까. 나는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시간도 많아야 하는데.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때면, 지금 이 사람과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싶고, 이야기를 듣고 싶고, 내 이야기를 모두 다 하고 싶어 어쩔 줄을 몰랐어.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만나서, 내가 지치지 않는 건 아니었어. 사람들을 만나서 계속해서 시간을 신경쓰고, 이야기들을 고르고 고르고 골라서 그나마 지금 꼭 말해야 하는 것들을 골라내 보려고 하고, 그 사람의 말 한마디 한마디 하나의 의미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했지. 홀로 있을 때조차도 누군가를 만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나타나 나를 움직이게 했지.  

 

그런데 있잖아, 그때 내가 누군가를 만날 때면, 늘 내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던 걸지도 몰라. 내 조급증에 오히려 사람들이 가려졌을지도 몰라. 조급함과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너무 컸던 나는, 점점 버거워졌어. 이 사람도 저 사람도 그 사람도.. 만나고 싶은데 만나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마음대로 잘 안되잖아. 만났을 때,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드러낸다는 거, 마음대로 잘 안되잖아. 매번 아쉬워하고 아쉬워했지. 그래서 점점 더 두려워지는거야. 버거워지는 거야.

그때 난 왜 그리 조급했을까. 나는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을 그리워했고, 그리워하면 할수록 아쉬움은 쌓여만 갔을까.

 

어느 날 문득, 내 안에 사람에 대한 아쉬움만큼이나 타인들에 대한 원망도 함께 쌓여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서는, 놀랐어. 어쩌면 나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도,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내가 나 자신은 단 한 번도 찾아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내가 나를 찾지 않는다면, 과연 나는 누구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내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하고, 만나고 있어. 하지만 나는 또, 내 안의 여러 ‘나’들과 다투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화해를 모색해보려고 하면서, 이전처럼 없는 척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해. 그리고 사람에 대한 조급증도 조금은 가라앉아서,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급한 마음이 오히려 사람을 멀리 하도록 하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어.

 

가끔 내가, 너에게 집착을 갖지 않는 것 같아서 너를 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실망하지는 말아. 그래, 어쩌면 지금 나는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여러 '나'들이, 불현듯 찾아와준 '나'로 인해 자기들 이야기를 너무나 시끄럽게 해대는 바람에, 혼자 있을 때도 쉬이 지치는 그런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서 내 주위에 대해 이전보다 더 둔해보일지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나를 발견하면서, 나는 이제는 내가 타인들을 다르게 좋아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기도 했거든.  그 어떤 수식어로도 규정되지 않는, 나 그리고 너, 우리들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그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어. 그러니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노력해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본다면, 변화란 것은, 내게도 네게도 이미 시작된 건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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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아까 전에 진보넷에 추가된 기능인 태그 를 써보기 위해서

스킨을 수정했고 하나의 포스트에 써봤다

그런데,

 

'태그'-란 거,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태그 란 거에 대해서 무엇을 잘 모르겠냐면,,,

(어떻게 말로 표현해내기 힘든 엉클어진 생각쪼가리들이 머릿속을 막 휘돌고 있어서

무언가로 확 잡아 내기가 힘들다 흑)

나에게 필요한 걸까,  

나는 어떤 식으로 쓸 수 있을까,

태그를 쓰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어떻게 쓸까

 

이런 것과 관련되어서 잘 모르겠다고 하면 될까?

 

아무리해도 말로 잘 안나오니까

단편적인 느낌들을 나열해봐야지.

 

예를 들어, 내가  '여성주의'와 같은 것을 태그로 쓸 수 있을까?, 하는 것..

내게 있어, 나의 여성주의는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세계관,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주의 라는 말 자체에도 계속해서 물음표를 던지게 되니까, 그게 하나의 고정된 틀을 가진 건 아니지만.

나는 내가 어떤 말을 하고, 글을 쓰고, 행동을 할 때

내가 의식적으로 '이게 내가 여성주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라고 느끼지 않을 때,

그게 여성주의적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런 때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쓰는 어떤 포스트에는 여성주의 란 태그를 붙이고, 어떤 포스트에는 붙이지 않는 게 이상할 거 같다.

만약 '여성주의'란 태그를 쓰게 된다면,

그 태그를 쓰지 않는 포스트가 있다는 게 이상할 거 같다는 느낌.

으-

여성주의와 비슷하게..

'인간관계' 같은 건 어찌해.

 

더 구체적인 용어들을 생각해내면 괜찮을까.

내가 언어에 약해서 그런가-_- 고민도 된다 ㅎㅎ

 

으악악

다른 사람들이 태그 쓰는 거 요리조리 참고 해보고

나도 일단 써보면서 고민해보려고 생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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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슬픈 모습으론 안돼 웃어봐

 

 

*

 

영화제와 광주순례가 있던 수요일부터 토요일 밤, 그리고 일요일 새벽부터 지금까지.

멀고 먼 시간들처럼 느낌이 이상하다.

극과 극을 오가며, 이게 저건가, 저게 이건가

내가 행복한건가, 행복했던가, 울고 있었나, 울고 싶었던 건가, 화가 났었나, 화를 내야 했나,,

이런 저런 감정의 외줄타기에 지쳐서 잠시만 모든 걸 놓아두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어.

 

시험기간 단비가 되어주었던,

뒤늦게 보기 시작한 거침없이 하이킥을 내리 몇 개씩 이어보아도

지리하기만 하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계속해서 꾸역꾸역 배에 무언가를 집어넣으면서

토할 것 같을 때까지 먹어대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어도

시간이 흐르는 것 같지 않다

 

*


"어쩌면 큰일이야

왜 이렇게 내 기분이
구제불능의 상태로

나빠지고 있는 걸까

 

이런 슬픈 모습으론 안돼 웃어봐
이런 우울한 마음으론 안돼 웃어봐
이런 불길한 생각으론 안돼 잊어봐
이런 지친 기분으론 안돼 힘을 내" 

 

아흥-

무심결에 오소영 노래를 들어보는데

듣다가 마음이 쿵쾅쿵쾅 뛰어버렸다.

 

슬픈 모습, 우울한 모습, 불길한 생각, 지친 기분이

딱히 '안될' 건 없지만,

기왕이면 웃으면 좋고, 힘 내면 좋잖아. 그럴 수만 있다면.

 

냐항. 그렇잖아.

 

 

오소영 1집 <기억상실> 중 "준비"

 

 



 

"준비"

 

내 방 조그만

창문 가득히
새 그림자

지나가던 오후
잠이 덜깨 희뿌연 시야에

들어오는 내방 풍경

어지러운 내방 풍경


지저분한 이불을 밀치고

거울에 비춰본 내 모습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듯

낯설기만 하지

 

이런 슬픈 모습으론 안돼  웃어봐
이런 우울한 마음으론 안돼  웃어봐

 

지겨운 지하철의 흔들림

이젠 익숙해질만도 한데
이런 기분으로 잘할 수 있을까
또 실수하는 건 아닐까

 

이런 불길한 생각으론 안돼 잊어봐
이런 지친 기분으론 안돼 힘을 내


어쩌면 큰일이야

왜 이렇게 내 기분이
구제불능의 상태로

나빠지고 있는 걸까

 

이런 슬픈 모습으론 안돼 웃어봐


이런 우울한 마음으론 안돼 웃어봐


이런 불길한 생각으론 안돼 잊어봐


이런 지친 기분으론 안돼 힘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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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스킨 수정 중

 

시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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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내미도 인간,

하노이님의 [제 2회 여성인권영화제, ] 에 관련된 글.

 

-

 

엄마가 서울에 한 번 올라오시려고 맘먹고 계시길래

기왕이면 나 영화제 준비하는 거 구경할 수 있을 때 오라고 살살 꼬셨다.

엄마가 보러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또,

뭐 '여성인권'영화제라는 말을

흘려가듯이 던져놓긴 했지만 올라와서 행사모습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걱정도 된다.

"학교에서 하는거야?"라는 말이나,

"네 '작품'은 언제 하는 건데?"

라는 말을 물으시는 걸로 봐서는 내가 영화제에서 맡은 부분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은 것도 같은데..-_-;

 

"학교에서 준비하는 건 아니고..." (운동단체에서 주최 하는거야..)
"내가 영화를 만든 건 아니고..." (여성인권영화제라는 주제를 가지고 영화를 선정했지..)

미처 못다한 말은, 엄마가 올라오시면 직접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쩐지 엄마가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문득 좀 쫄기도 했다.

 

내 엄마와 아빠란 사람들의 딸내미에 대한 과대평가/망상증은

내가 학교에서 사시/행시를 쳐다도 보지 않고 딴 짓거리나 하는 걸로 좀 많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아빠딸은 대한민국에서 3%에 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나

어떤 일을 준비하건 내가 '중심'이 되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거라고 믿는 거는 여전하다.

나는 당신들 딸내미일뿐만 아니라 그냥 인간이기도 하다구요..

 

어쨋든 엄마가 올라오면 좋겠다.

계속해서 부산에 너무너무 가고 싶어서 이번주에는 확 내려가버릴까 하는 충동에 크게 휩싸였지만

내가 내려가게 되면,

분명, 왕복차비를 피눈물흘리며 아까워하는 내 엄마란 사람은 

딸내미가 오고 또 일주일 간격으로 자신이 (돈 써서) 오는 일을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라서

꾹 참고 서울에 눌러 붙어 있었다. -_-.. 그러니 오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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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어증,

 

"그녀에 따르면 세계란 마음 깊은 곳에서 병을 앓고 있는 자신에게 창을 겨누고 서 있는, 다른 나라 말을 쓰는 흉악한 사병들과 같았다. 어쩌면 그녀가 앓고 있을 병이라는 것은 실어증과 같은 것이리라. 의사소통이란 애당초 버린 지 오래이며 자신을 조금이라도 돌보지 않으면 곧 자신은 그 흉악한 세계에 점령 당하고 말 것이라는 절박감이 그녀에게는 확고했다." <카르타필루스> 中

 

 실어증인 사람들의 자살률이 0%에 가깝다고 하는데,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말할 거리도 없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이 자살도 할 수 있다는 것은, 소통이란 게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 아닐까.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1970년 <성의 변증법>의 마지막에는 "이제 우리는 지상에 파라다이스를 다시 창조할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가능한 것은 그 지식을 통하여 자살하는 것, 망각이 뒤따르는 지구상의 지옥을 창조하는 것이다."는 문구가 있단다. 

 

 자신의 지식으로 자신이 발딛고 있는 지상에 파라다이스를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그 지식으로 나와 혹은 타인과 소통하는 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될까. 망각이 가능하여 지옥이더라도 계속해서 숨쉬며 살 수 있다면 모르지만, 망각-내 기억에서, 내 몸뚱아리에서 뿌리까지 파내어 모두 없었던 일로 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알기에, 어쩌면 선택지는 매우 좁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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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4월,

 

 

잔인한 4월이라고 하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해.

그만큼 치열할 수 있는 기회가 가득한 4월이야.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들도,

찾아보면 언제나 치열할 수 있지만, 4월은 특히 기회가 풍부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당신이 아프고, 힘들고, 눈물 흘린만큼

(물론 그걸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들이 더 있겠지만)

그것만큼 당신이 살아있다는 거, 당신이 무언가 하고 있고 말하고 있고 행동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은 있어요 반드시.

 

언제든 투정부리고 짜증내고 분노하고

그리고 같이 웃자. 함께 살자. (<-이런 말이 무서워진지는 꽤 오래야. 가벼이 하는 말 아니라구!)

 

나도 보고 당신도 보고 우리도 보면서

그렇게 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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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어른이 된다는 게 만약,

자기 행위에 대한 명쾌한 정당화가 가능해지고

마음은 아파도, 고민은 필요없는 면죄부들이 줄지어 늘어나는 거라면

어른이 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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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고뇌,

레이님의 [[테스트] 자아검색] 에 관련된 글.

 

 

운명론자, 회의론자, 결정론자.. -> 고로 은둔형.

이런 느낌. 하하하하.

 

 

 

 

 

당신은 무언가 미묘한 정신적 두려움이 항시 의심과 불안을 야기시키는데, 이것은 마음속에 무언가 고통과 죄의식을 감춘 내향적이고 고독한 은둔자 타입의 사람임을 암시합니다. 당신은 내부의 강력한 규율과 예민함을 계발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 대한 두려움, 의심, 그리고 자신감의 결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전의 삶에서 저질러진 나쁜 행위들에 대해 제한을 가하려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당신은 운명지워졌다고 생각하고 사회로부터 은둔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있어 내부의 강한 규율은 당신의 과거 삶에 대한 부채를 상환하고자 하는 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길에 서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밖으로 끄집어 내지 않으면 만성적인 질병의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내면의 두려움이나 불안감에서 가급적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당신은 고독을 사랑하는 편이며, 일반 대중과 접촉하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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