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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는 재건되어야 한다[뒤메닐&비데]

좌파는 반드시 재건되어야 한다

 

제라르 뒤메닐 & 자크 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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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회는 “안정될” 것이고, 사회파트너들이 대화한 다음 상호화합의 자세를 취할 것이라는 식의 농담들이 언론을 타고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다. 그래서 현재 아무하고나 모든 것을, 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한 “토론”이 ─ 거의 절대적으로 ─ 대단히 유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좌파 패배의) 충격이 그 자체로 “어떤 협의”에서 질식시킬 것 같지만, 감소시킬 수 없는 이익을 위한 프로젝트들과 아이디어에 계속 결합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역사의 거대한 분절(分節)들을 분석할 때, 이러한 접근법의 우수성이 곧바로 나타난다. 어떻게 하나의 사회계급이 그의 지배를 강제하는가? 실패할 경우에는 누구와 동맹하는가? 칼 마르크스의 영감으로, 좌파의 지배적 분석은 혁명이 제도들과 소유관계들이 “지배계급의 역할을 가장 오랫동안 충족할 수 없게 된”(1848년 공산당선언) 사회그룹에 봉사할 때마다 혁명의 돌발 사태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결과적으로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어렵게 만든다고 한다. 1789년 프랑스 부르주아는 기업과 이익의 자유를 요구했다 ; 부르주아는 그 때 귀족과 성직자와 동맹한 봉건적 절대왕정과 충돌해야만 했다 ; 부르주아는 그 때 프롤레타리아와의 (일시적) 동맹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

농민대중과 도시시민과 동맹한 프랑스 부르주아의 모습을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다. 다른 지역의 부르주아들은 가난한 농민들과 프롤레타리아의 운명에 그들의 운명을 섞어 넣기를(혼합해 가기를) 거부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알베르 소불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가 민중이 부르주아에게 계속 종속될 것이라는 조건에서만 귀족계급과 대항하는 민중과의 동맹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가 되었다면, 부르주아는 19세기의 독일처럼, (민중과의) 동맹을 너무나 위험하다는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소한 이탈리아에서도 동맹을 분명히 포기했을 것이다.”(프랑스 대혁명, PUF, 1965)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일, 다시 말하면 정치활동에 도시빈민들의 개입을 (오늘의 베네수엘라와 같이)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의 모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이것은 바로 부르주아와 토지귀족이 연합한 영국혁명의 모델이다. 영국에서는 역시 선택에서 개인적인 취향이나 또는 이념적 토론과 일찍이 생산자와 도매업에 크게 연관된 거의 모두의 이익에 관해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 귀족은 ─ 보다 더 기생충과 같았던 프랑스의 귀족과는 정반대로 ─ 맹아상태로 떠오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투쟁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3자의 게임에 있어서, 역사의 흐름은 드디어 때를 만난 부르주아가 인민과 같이 권력을 잡고 귀족과 화합해서 역사를 전진시켰다.

좌파는 오랫동안 “노동대중”의 우위를 부르짖고 자본주의에 반대해 노동자를 정치적으로 동원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사회세력의 교체를 위해 노동대중을 이끌어 가려고 고심했다. 때때로 노동대중 역시 ─ 프랑스의 인민전선정부 기간(1930년대 후반), 농민들과 비(非)조합원 노동자들과 나중에는 엔지니어와 중간간부들과 동맹을 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국정전반을 좌파가 장악할 수 있었다. 30년 전부터 사회주의자 또는 노동자를 위한 교육의 전망이 전도되고 있다. “중산계층”에게 특전이 주어지고 인민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신민주주의자들”, 영국의 “새로운 노동자들” 그리고 대부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사회의 중심을 다시 잡으려는 현상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5년 전, 프랑스의 전(前) 사회주의 재무장관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현재 드골파 사르코지 대통령의 주선으로 IMF총재가 되었다 ─ 역주)은 왕년의 낡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소멸을 이론화했다:“제일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에서 불행하게도 우리는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조용한 참여를 기대할 수 없다. 역사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참여가 때때로 폭력을 표출하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썼다. 칸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은 너무 단순하고 실제적인 분석”은 “무효화” 되었다고 기록함으로써, “중간계급”에 모든 미덕을 부여했다:“임금생활자의 저축이 늘어남에 따라 노동수입과 자본의 수입간 기능적 차이점은 봉급으로 사는 개인들과 자본의 이익으로 사는 사람간의 구별이 많은 유사성과 함께 이 이상 더 발견되지 않게 되었다”<불꽃과 재, 글라세 출판사, 파리, 2002>

경제학자 제랄 뒤메닐과 자크 비데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확실한 토대들에 관해서 토론하기를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계급의 역사적 역할을 흐리게 하거나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에게 민족 그리고 세계차원에서 새로운 동맹들을 기획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 아마도 ─ 유리한 입장을 다시 잡기 위해 필요한 토론을.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위한 또 하나의 다른 마르크스주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폭풍 속에서, 좌파는 쇠퇴기에 들어가고 있다. 세계화의 예외국가로 평가된 프랑스도 앞으로 이러한 일반적 국제정세의 대열에 줄서게 되었다:정치적 라이벌들의 주장들 간의 역사적 약화(弱化)현상. 니콜라 사르코지씨는 반동적 우파의 연설들과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주도함으로써 가장 취약한 민중계층이 잘 알아듣게 말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그 자신만이 좌파가 구상했던 여러 희망들을 실현할 수단을 가졌다고 설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좌파의 이념들에 동조하면서 동시에 좌파의 선도자들을 제압했다. 사르코지의 최후의 집중공격이 “마지막 투쟁”에서도 이길 것인가?

수십 년간, 정치투쟁으로 점철된 좌파의 권력에 대한 도전은 2차 세계대전 종전을 계기로 중앙에서부터 주변부까지 복합적 다원주의에 따른 “사회민주주의의 대타협”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자본주의는 반식민지 전쟁과정에서도 계속 전개되었지만, 자본주의적 소유의 특권들은 약화되었다 ; 실질 금리의 완화, 배당금 분배의 취약성, 비(非)금융부문의 우세, 증권시장의 약한 상승세. 그리고 민족적 산업, 공공서비스, 사회보장제도(세큐리테 소시알), 고용정책, 그리고 경제발전 등을 구축했다. 좌파정치 세력에 의해 때때로 운전된, 완전히 “사회화된” 역동성은 1968년에 그 정점(頂点)을 기록했다.

갑자기 이 도약이 부러지고 말았다. 1970년대 말, 자본주의자들은 공격능력을 재발견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역사적 사이클에 참여한 것이다. 30년 후, 전반적 정세는 긍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족적(足跡)을 남긴 길에는 귀로(歸路)가 없다. 좌파이념 자체에서, 좌파 프로젝트들의 실현가능성 뿐만 아니라 좌파의 표상(表象)인 미래까지도 의문이 자리를 잡았다. 신념을 잃은 것과 같은 공허한 감성과 음험한 절망이 마비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산서를 작성함에 있어서 ─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좌파의 상승기부터 역사적 쇠퇴기에 이르기까지 ─ 좌파자신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만일 이것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단계를 예정하는 조치들을 마련하기 위해서, 좌파에게 과연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벨기에 브뤼셀 나토 본부 앞에서 벌어진 가면 시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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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칼 마르크스에게 모든 것을 요구함으로써, 우리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라는 사실을 옹호한다. 왜냐하면 공동의 문화 속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2개 진영이 분열하는데 공헌한 것이 마르크스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르크스주의 창설자의 신화는 허위의 논리에 도달하게 된다.

현대의 사회질서는 하나가 아니라 2개의 지배적 사회세력들을 구성하고 있다:“자본주의자들”의 세계 외에 또 하나의 다른, 조직자, 사적 그리고 공적 경영자들, 모든 부문의 전문가들 ─ 능력을 갖춘 유능한 간부들 ─ 의 세계와 연결되고 있다. 이 2개의 세력들은 “근본적 인민계급”의 총체와 갈등과 연계로서 대립되고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과거의) 2계급이 아니라 3계급들의 게임인 현대적인 계급투쟁을 이해하게 된다.

“영광의 30년” 을 지배한 “사회민주주의의 대타협”에서, 사회당 또는 공산당을 수시로 대표했던 근본적 인민계급과 유능한 간부계층 간에 동맹이 실현되었다. 근본적 계급들은 중간간부들과 주동인물로 엔진세력을 형성했다. 이들 2개의 사회구성체에서 많은 영감(靈感)이 나왔다. 민족국가는 사회적 국가가 되었다. 기업과 정치의 경영은 자본보유자들을 광범위하게 피하는데 성공했다. 사람들은 이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경제(混合經濟) 모델이라고 불렀다. 이제 어떤 조건에서 그것이 사라졌는지를 이해하고 이 대상의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 남았다.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재출발하자. 그의 핵심이념은 현대세계에서 계급구조가 사람의 자연적 우월성의 요구를 구시대의 세계처럼, 이전(移轉)하지 않지만, 시장경제가 부여한 대로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을 확인해 주는데 있다. 마르크스가 설명하기를, 이 시스템은 노동자 자신이 개발할 수 있는 상품을 제조하는 조건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가 바로 자본주의이며, 이는 상품만은 아니다. 시장은 그 자체로 계급관계는 아니지만, 최후의 순간에는 제조업의 것이 된다. 시장은 사적(私的) 소유권자에게 생산수단을 제공한다. 마르크스는 말하기를, 이러한 상품의 모태(母胎)에서 끝장을 내야만 하며, 바로 이 상품의 모태가 나머지 모든 것의 조건을 결정지우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크스가 첨언하기를, 현대기업의 한 가운데서 사회차원으로 일반화된 다음 시장으로 대체를 가능하게 하는, 다른 통합조정의 합리적 원칙이 뜨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조직화”, 최우선적인 균형유지, 그리고 이 이상 더 생산의 귀납적 결론은 없다. 노동계급은 넘치는 힘을 여기서 얻는다:임금노동자는 기업에 잘 적응하고 말 것이다:혁명은 자유노동자와 평등노동자들 간의 협의기구를 기초로 하는 후기상품시대를 개막하게 될 것이다.
이 “위대한 이야기”는 영웅적 혁명으로, 세계의 운명을 바꾼 해방을 위한 투쟁들과 개혁들로 점철된 20세기의 핵심적 유토피아를 요약해 주고 있다. 근본이론을 참고하면, 여하튼간에 그것은 애매모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직이 시장에 따라서, 계급의 한 요소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다른 요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회의 현대적 형태는 이러한 2개의 기둥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계급의 지배는 상대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2개의 세력들이 교대하고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소유권을 통해서 실시하고 또 하나의 세력은 ─ 경제조직, 행정기구, 문화를 확보하는1) ─ ‘능력’을 통해서 집행된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제안한 계급구조의 분석법상 중요한 수정을 의미한다. 그는 이에 대해 왜 사회학에 등록되고 일반상식으로 알 수 있는 이러한 이중적 지배를 피하는지를 알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왜 이념은 조직 속에서 계급의 한 요소임을 확인하지 않고, 병리학(病理學)처럼, 관료를 다루는 접근에서 생소하게 되는 것인가?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적 소유권에 직면해서 능력을 갖춘 유능한 간부계층과 민중계급 간에 다소간 은폐되어 있는 전술적 절충을 위한 연설을 통해 역사적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현존 사회주의”든 또는 “자본주의 속의 사회주의”이든 간에, “노동운동”의 공식적 독트린을 구성한 이유가 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노동계급”과 경제적 문화적 규제의 중심과의 타협이 계속 거부되면서도, 지향하는 양면적 계급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모든 것들과의(“노동자들의 협회”, 공식적 목적) 협력은 정도의 차이는 조금 있지만, 공공기관의 보호 아래 조직화된 경제의 형태를 취한다. 모든 권력은 조직자들의 권력을 동일화하게 된다.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는 권력의 최고지도부에서 2개의 사회적 지배세력들이 교대로 지배했다. 1933년까지(미국의 뉴딜정책 초기까지) “금융자본”이 지배했다. 그 다음 1970년대까지는 조직화된 유능한 간부계급이, 마지막에는 새로운 “금융자본”이 주도했다. 금융자본이 승리했을 때, 그의 자신의 것인 사회적 변화의 역동성을 조직자들에게 강제했다. 조직의 상층부가 지배적일 때는, 그는 금융에 대항해서 민중계급과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역사읽기의 일람표는 자본주의와 병행하는 현존사회주의의 잡다한 운명들을 밝혀주었다. 이것은 기업들과 거대한 사회와 국가들 수준에서 검증할 수 있는 서방진영의 “경영권력”의 강력한 부상과, 다른 한편으로는 유일한 지배계급으로 승격한 조직자들의 손에 집중된 권력을 재빨리 방임해 버린 동방진영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시하도록 유도했다. 이 현상들의 평행선은 깊고도 천부적으로 구조화 된 결집력이 현대적 사회형태로 대체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시스템의 집중력과 여기서 저기로의 이행(移行)은 언제나 토론의 대상이다.

민중계급과 “능력있는 유능한 간부계층”의 동맹은 1960~1970년대에 한층 강화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이 동맹은 제3세계의 자본주의와의 전투에서, 라틴 ─ 아메리카의 혁명세력의 상승기와 세계차원의 학생 ─ 노동자들의 운동에서 결정적이었다. 프랑스의 경우를 말하면, 학위가 사회적 지위를 이미 보장하고 있는 모든 부유한 청년 학생들이 전통적 우파세력이 그들의 계급의 힘을 지탱해주고 있던 낡은 문화적 배경들을 1968년에 진동시켰다. 이러한 충격에 자극을 받은 노동계급이 하늘을 향해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다소간 전국적으로 40일에 걸친 대파업이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왜 그 때부터 역사가 다른 길을 취했으며, 금융의 갑작스런 복귀는 무엇을 낳았는가?

사회민주주의의 대타협에서 금융소득과 권력의 제방(堤防)이 알 수 없는 상항에서 진행되었다.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부터 밀턴 프리드만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계급의 이론가들은 처음부터 국가차원이든 세계차원이든 계획과 아울러 프로세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금융이 호전성(好戰性)을 재발견함으로써(1929년의 기억이 흐릿해지다), 금융권력이 특히 중앙은행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유럽시장의 새로운 금융시스템의 출현에 따라 재건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의 타협의 도정에서 부닥친 암초는 ─ 1970년대 초 달러위기부터 시작해서 ─ 근본부터 약화시켰다. 1970년대 구조적 위기, 특히 인플레이션의 비등에서 보인 타협주도세력의 무능은 노동계급의 저항에 대해 “철권”의 결단으로 대결한 마거리트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을 구현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권력의 등장을 촉진했다. 1979년 금리는 소득이 최저로 급락한 자본가계급을 위해 참신한 바람을 불어 준 전례가 없는 (고금리) 수준을 유지시켰다. 제3세계의 부채상환은 위기였다. 새로운 규율이 노동자들과 경영인들에게 강제되어 부담을 주었다.
무역과 금융세계화의 거대한 자본주의적 경향은 구시대 사회질서가 경제발전정책에 순응하게 됨으로써, 어떤 분야의 기술발전으로 새로운 조건들이 생기면서 우위에 서게 되었다. 세계화는 그 성격을 바꾸었다. 세계화는 식민지적 착취를 다시 기도하고,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을 격렬한 경쟁으로 몰아가는 미국의 패권아래 세계차원의 노동의 새로운 분업을 강요했다. 중국의 기적이 라틴아메리카의 상처들을 은폐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능력있는 유능한 간부계층은 금융을 다시 장악했다. 사태의 주도능력을 박탈당하고 민족국가의 국면에서 그들 자신의 것이었던 목표들이 왜곡됨으로써, 이 계층은 유럽에서와 같이, 대륙의 계획으로서의 논리를 다시 세울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대타협에서 신자유주의 대타협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들은 프랑스보다는 미국과 영국에 더 충성을 보이면서 기꺼이 (신자유주의에) 다소간 가담하게 되었다.

유능한 간부들의 정치적 대표들이 신자유주의적 옵션에 가담했을 때, 개인적 배신은 없었다. 모호한 커리어와는 달리, 사회민주주의와의 대타협의 노출을 유도했던 역사적 조건들은 사라졌다. 좌파에게 불이 붙었다! 그리고 질문이 근본적 (인민)계급들에게 제기되고 있다:어떻게 정치적 주도권을 다시 잡을 수 있는가?

해답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2번째 관점을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3자 게임을 하나의 2자 게임으로 이행시키는가? 어떻게 계급들의 3자의 도식을 정치무대를 지배하는 양자의 형태로(좌-우파의) 구체적으로 이끌어 나가는가? 다수결원칙 정부의 민주주의적 도식에서, 좌파는 근본적 계급들과 유능한 간부계층 간의 동맹의 불확실한 정치현실을 구성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의 혁명적, 또는 개혁적인 전환기에는, 임금노동자들이 역사적 역동성에서 유능한 간부들과 문화인들의 “유능한” 사회계층들을 향해 눈을 돌릴 때, 좌파가 역사적으로 부상했다. 그 때는 지식인들과 모든 분야의 조직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운동”의 전위(前衛)가 되어서 스스로 자리매김함으로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좌파”는 유능한 간부계층이 좌파에서 사회민주주의와 타협하거나 또는 우파와 타협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서 내용이 흔들려 불안정한 사물을 지칭하는 명목상의 좌파일 뿐이다. 거대한 좌파, “좌파중의 좌파”는 자연적으로 보장되는 체제가 아니다. 이것은 민중의 조류(潮流)가 민중 자체의 여망인 해방의 역동성 속에 유능한 간부들을 가담하게 할 때 일어나는 하나의 사변(事變)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지배적 계급의 2개의 구성체들의 연합은 늘어나며, 꽉 조여졌던 나사는 대부분 풀어진다.
오늘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노동의 세계는 동력요소가 되었던 생산에서 전략적 거점인 중앙집중력을 상실했다. 유능한 간부계층과의 동맹은 의문시되고 있다. 근본적 계급들은 역사적 곤경에 처해 있다.

난관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소유의 주변화(周邊化)를 필요로 하는 권력이 스스로 존재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파트너와 동맹을 통해서 건설하고, 그러나 동시에 ─ 위로부터 전문가와 지도부의 특권에서 ─ 하나의 계급의 적수(敵手)가 남게 되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지배는 이중적이며 전투는 2개의 전선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근본적 계급들이 스스로 분열하고 있는 분파들의 정치적 단결이 실현되는 조건에서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선천적 분파작용은 정치판에서 분산되어 흩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유계급”인 우파는 독립 노동자들과 제일 낮은 저임금 계층을 선호한다. “유능한 조직력이 강한” 좌파는 공공기관의 임금노동자들과 일반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길을 통해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희망하는 임금노동자들을 흡수하려고 한다.

이러한 긴장은 민중연합 프로그램의 요구들을 허실한 그림으로 만든다. 해방, 개혁 또는 혁명의 강력한 시대, 현대역사에 이정표를 세우는 것은 정치적 단결과 동맹이다. 유럽에서 세계차원까지 보다 지역적인 것에서 제일 광범한 영역까지, 발전하는 것 이외에 미래의 선택은 없다. 그리고 목표들을 급진화해야만 한다.

생산수단의 공유화와 소득의 적절한 분배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공동의 삶의 조건들, 다시 말해서 동시에 양성(兩性), 환경, 노동, 건강, 교육, 학문연구, 도시화 등에 있는 것이다. 이익과 추상적인 부(富)의 논리인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은 존재의 구체적 조건들과 사회생활의 생산에 대한 지배력을 위한 투쟁인 것이다.
근본적 계급들이 어떻게 다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을까? 정치조직의 개혁과 다원주의 정당구조의 개혁이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총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자주적이며 영속적이고 상황에 적응하는 운동의 다양성만이 2개 전선의 전투를 날마다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자본주의의 언제나 새로운 공격들과 민중투쟁의 결과인 이익을 우회시키는 “엘리트”의 관행. 그래서 자본주의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거대한 좌파를 뜨게 할 정당들과 민중운동의 지성적, 도덕적, 정치적 합의, 즉 공생(共生)이 시급한 과제이다.

자본주의적 “세계시스템”은 계급의 구조를 전개시킨 민족국가의 생존양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중심부와 변두리에서 대립했다. 또 그것은 지배와 전쟁에 대해, 계급관계를 비대칭적 관계로 변모시켰다. 오늘날 유럽대륙에서 고전적 민족국가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생산과 정부의 현대적 논리를 보여주는 역사적 운동은 잉태중인 ‘세계-국가’의 형태 속에서 단기적으로 같은 모태(母胎)에서 재생산을 유도하고 있다.

미국은 모든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권력으로 제국주의적이며 조직적인 세계화의 센터가 되어서, 현재 형성과정에 있는 글로벌 계급의 “국가화”를 지배하는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어느 정도 목표에 도달하고 있다. 냉전과 삼각구도 ─ 미국과 캐나다, 유럽연합과 일본 ─ 그 자체의 2개의 세계의 대립에서 나머지 지구의 전역에 재수출을 명령하면서, 자본집중의 하나의 극점(極點), 유일 극점의 제국주의적이며 패권주의적인 계급구조로 대체되고 있다. 출현도상에 있는 세계차원의 권력집중의 새로운 형태에 대항해서, 계급과 인종과 인류의 투쟁 사이에서 집중적으로 윤곽을 잡아서 투쟁과 저항을 위한 단결을 확립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몰락징조가 조명됨과 동시에, 모든 종류의 민족주의와 분파주의가 내포한 모순들로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이러한 인식은 매우 취약하다. 여기서 우리는 국제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정치판을 아직은 준비할 수 없다.

이것은 기대할 만한 운동의 한 형태이긴 하다. 사회적 기초들, 그의 “세계성”, 그의 이념성을 역시 추구함으로서,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위한 또 하나의 다른 마르크스주의는 아직은 여전히 발견해야 할 미래의 과제로 남아 있다. 제라르 뒤메닐 & 자크 비데 | 번역·주섭일 본지 상임고문

1) 알터마르크스주의(Altermarxisme)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위한 또 하나의 마르크스주의, 프랑스 대학출판사(PUF), 파리, 2007, 우리는 5~6장에서 자본주의사회의 계급구조에 대해 구별하면서도 아무튼 집중되는 2개의 이론화를 제시한다.
  • 기사입력: 2008-03-19 19:01:58
  • 최종편집: 2008-03-20 08:5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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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 세계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대안적 세계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해외 학술동향] 프랑스 ‘제5회 콩그레 마르크스 인터내셔널’
 
이기라 / 프랑스통신원·
 

   
   

“새천년의 벽두부터 자본주의는 새로운 폭력과 예속화의 동학을 펼쳐 보이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 노동자들을 경쟁으로 몰아넣으며, 그동안 쌓아온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여성운동, 제3세계 투쟁의 성과들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국가적 정체성과 자율성을 제거하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상품화된 대용품으로 용해시킨다. 또한 우리를 생태학적 재앙으로 몰아넣고 있다.”

 

과연 ‘또 다른 세계화’는 가능한가? 그렇다면 어떤 다른 세계? 어떤 대안적 세계정치?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투쟁들이 필요한가? 누가, 누구와, 그리고 누구 혹은 무엇에 대항한 투쟁인가?

 

파리 소르본과 낭테르에서 오는 3일부터 6일까지 나흘 간 열리는 ‘제 5회 콩그레 마르크스 인터내셔널(Congrs Marx International)’은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던지는 긴급한 물음들에 답하고자 한다. 이 대회는 학술지 『악튜엘 마르크스(Actuel Marx)』를 통해 접속한 좌파학자들이 중심이 돼 1995년부터 3년마다 열고 있는 대규모 국제학술대회다. 세계 각국에서 온 4백여 명의 연구자들이 철학,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여성학, 생태학, 법학 등 10여개의 학문분과에서 하위 세션들을 나누어 발표와 토론을 진행하는 올해의 주제는 ‘대안세계주의/반자본주의 : 대안적 범세계정치를 위하여’다. 단, 대회명에 붙여진 ‘마르크스’라는 이름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와는 분명한 거리를 둔다는 전제 하에,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들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도구들의 원천이라는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유효성과 상징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니.

 

1970년대 이래,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공세는 사실상 이전까지의 사회적 투쟁의 성과였던 이른바 ‘사회적 보수주의’에 반대하면서, 신자유주의 또는 세계화로 표현되는 ‘개혁’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마치 한국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진행된 자본과 시장의 자유화가 이전 독재정권들의 개입주의로부터의 탈피라는 정당성과 함께 ‘민주화’와 ‘개혁/진보’인양 포장된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산업시설의 해외이전을 통한 고용의 축소, 사회양극화를 야기하는 비정규직의 확대와 대규모 실업을 양산하고 있으며, 경쟁적 노동시장의 세계적 확대와 고용 불안정화를 통한 임금감축을 위해 시민의 사회적ㆍ정치적 권리, 사회보장 관련법, 각종 공공서비스 영역마저 축소 혹은 파괴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새로운 세계적 질서, 전지구적 시장질서화를 거부하기 위한 대항적 힘으로서, 다양하고 이질적이면서도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 연대할 수 있는 대안적 세계정치가 요청되는 것이다.

 

철학 분과에서는 대안적 세계화 기획의 철학적 전제들과 논리적 귀결점들을 검토하고, 자본주의적 세계화 비판을 위해 동원 가능한 개념들과 대안세계화의 인류학 및 정치학, 범세계정치의 기초들을 고민한다. 특히, 마르크스가 『자본』의 첫머리에서 제시한 상품 물신숭배론에 대한 다각도의 재조명이 눈에 띈다. 정치학 분과에서는 반자본주의적이고 대안적인 범세계정치의 구축을 위해, 세계 각지의 지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회, 정치적 투쟁들의 내용과 그것의 진전과 한계들을 검토한다. 사회학 분과에서는 사회적 투쟁들과 그것의 정치적 표상과의 단절이라는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그동안 등한시했던 사회운동 사회학과 정치적 표상 및 제도 사회학의 교접을 시도하고, 사회운동과 대안세계화 운동의 정치적 영역 구축의 특정한 형태들을 여러 지역들 간의 비교적 접근을 통해 검토한다. 역사학 분과에서는 과거와 오늘날의 ‘개혁’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오늘날 혁명이라는 관념의 의미를 되짚는다. 사회주의 분과에서는 지난 20년간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급속한 전지구적 확산과 함께 새롭게 요구되고 있는 새로운 사회주의를 모색한다. 보다 상세한 정보는 『악튜엘 마르크스』 홈페이지(http://netx.u-paris10.fr/actuelmarx/)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기라 / 프랑스통신원·소르본대학 정치사회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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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영-연세춘추와의 인터뷰(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대안 사회 운동)

윤소영-연세춘추와의 인터뷰(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대안 사회 운동)
  • 글쓴이: aleato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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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07.13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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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운동의 두 개의 기원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의 확산을 어떻게 보십니까?

-오늘의 반전 운동은 두 개의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1999년 코소보 전쟁을 계기로 2001년 영국에서 조직된 '저항을 세계화하자(Globalise Resistance)'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운동은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계기로 '전쟁을 중지하라(Stop the War)'는 구호를 채택했습니다. 올 들어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이 운동은 그러나 영국과 유럽 일부(특히 그리스)에 국한된 현상일 뿐이지요.

이 때문에 반전 운동의 또 다른 기원이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 반세계화 운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대안세계화 운동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세계화에 반대해서 사회운동이 주도하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대안으로 제시한다는 것이 대안세계화 운동의 핵심이지요.

대안세계화 운동은 1997-98년 아시아 위기를 계기로 토빈세 도입을 주장한 프랑스의 아탁(ATTAC,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99년 시애틀에서 벌어진 세계무역기구(WTO) 반대투쟁으로 확산된 대안세계화 운동은 2001년부터 매년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리는 세계사회포럼(WSF)-1995-96년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던 스위스 다보스의 세계경제포럼(WEF)에 대한 반대를 상징하는 명칭-으로 발전했지요. 우리나라에서 대안세계화 운동은 2000년 자유무역협정.세계무역기구반대국민행동(KoPA) 결성과 2001년 세계사회포럼 참여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세계사회포럼은 처음부터 세계화와 군사화에 반대하여 대안세계화 운동과 반전 운동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왔습니다. 지난 2월 15일 미국 반전연합(ANSWER)의 제안을 유럽사회포럼, 세계사회포럼이 수용하면서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세계적으로 조직되었던 것이 그 증거지요.


대안세계화 운동으로서 반전 운동

*이 두 반전 운동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나요?

-우선 이론적으로 볼 때 레닌의 고전적 제국주의론에 대한 평가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레닌에 의하면 자본주의 열강이 주변부를 식민지로 분할, 재분할하는 것이 제국주의의 핵심이고, 이 과정에서 야기되는 열강간의 경쟁이 바로 전쟁의 원인이지요. 이런 고전적 제국주의론을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 대안세계화 운동의 핵심적 주장입니다.

이런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제국주의의 경제적 기초에 대한 1960-70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쟁을 알아야 하는데, 우선 레닌이 원용하는 힐퍼딩의 독점자본, 금융자본론, 부하린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요. 나아가 레닌의 자본수출론을 현대화하려던 자본국제화론도 전후 미국자본주의를 특징짓는 자본의 초민족화를 설명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요.

이런 입장에서 결국 '금융을 지배적 요소로 갖는 세계적 축적'으로서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대한 분석이 제출되는 것입니다. 금융세계화는 대체로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1970년대 런던의 유로달러시장과 초민족은행(TNB)이 주도하는 단계와 1990년대 뉴욕의 증권시장과 금융화된 초민족자본(TNC)이 주도하는 단계가 그것이지요. 금융화된 초민족자본이란 지주회사를 핵심조직으로 하는 '산업을 지배적 요소로 갖는 금융그룹'을 가리키지요.

첫째 단계에서 둘째 단계로 이행하게된 계기가 바로 1980년대 외채위기와 이를 해결하려던 베이커 플랜(외채상환조건의 재조정) 특히 브래디 플랜(외채의 증권화)이었습니다. 그 결과 대부자본(은행신용)에서 가공자본(증권)으로 금융자본의 형태가 변화하면서 신흥공업국은 이른바 '신흥시장'으로 변모했지요. 1994년 멕시코나 1997-98년 아시아처럼 외채상환 대신 '시장'의 위기가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는 1930-5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주의 정부가 시도했던 외채상환거부(moratorium)와 세계경제로부터의 이탈(delinking)의 가능성은 점점 축소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브래디 플랜이 상징하는 '워싱턴 컨센서스'란 인민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반격이었던 셈이지요.


*이런 차이가 전쟁론과는 어떻게 관련됩니까?

-레닌의 고전적 제국주의론의 정치적 결론은 식민지 분할, 재분할을 위한 자본주의 열강간의 경쟁, 결국 제국주의 전쟁입니다. 바로 여기서 민족주의나 애국주의는 물론이고 평화주의나 도덕주의도 비판하는 '혁명적 패배주의' 입장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계급투쟁)으로 전화시키자'는 러시아 혁명의 구호가 나왔던 것이죠.

이처럼 20세기의 전쟁 중 영국과 독일간의 1차세계전쟁이 가장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었습니다. 미국, 소련과 독일간의 2차세계전쟁이나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을 제국주의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을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요. 게다가 1989-91년 소련을 비롯한 이른바 '현존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이른바 '탈냉전' 시대에 들어와 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전쟁의 시작은 1991년 1차 이라크 전쟁(이른바 '걸프전쟁')이었습니다. 이는 1995년 보스니아 전쟁과 1999년 코소보 전쟁 등 두 차례에 걸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른바 '발칸 전쟁'),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치러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거쳐 오늘 2차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새로운 전쟁이 각자 나름대로의 개별성을 갖고 있음은 물론이지만, 식민지 분할, 재분할을 위한 자본주의 열강간의 경쟁으로서 제국주의 전쟁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갖는다는 공통성에도 주목해야 하지요.

단적으로 말해서 새로운 전쟁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를 위한 '통치성'(governability)을 유지하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즉 중심부가 금융세계화에서 주변부를 선별적으로 포섭하거나 배제(또는 심지어 절멸)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새로운 전쟁이라면, 그 원인은 주변부에 대한 중심부의 '공동지배'(condominium)에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유고슬라비아 전쟁이나 그보다 훨씬 덜 주목받고 있지만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련의 저강도 분쟁이 전형적인 새로운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를 고전적 제국주의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강변하는 입장에서는 이라크 전쟁을 특권화하게 됩니다.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 심지어 미국과 러시아, 미국과 중국간의 갈등이 악화될 것이라고 예단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그대로 쓴다고 해도 그 새로운 내용은 범대서양적 규모에서 전개되는 미국과 유럽의 초민족화된 신자유주의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참고로 동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신자유주의의 초민족화는 미,일 동맹과 중국사이의 잠재적인 이해갈등 때문에 일정한 특수성을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그렇다면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해 프랑스, 독일 같은 유럽 일부 나라가 반대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1차 이라크 전쟁, 유고슬라비아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달리 2차 이라크 전쟁에서 프랑스와독일이 미국에게 반대하는 동기로 세계 제2의 석유매장량을 갖는 이라크에 대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지적하는 분석이 있습니다. 석유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 지배에 대해 유럽이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유럽 정부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 결코 일관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프팡스의 경우 시라크의 우파 정부가 사회운동이 반전구호를 독점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선수를 쳤다고 분석되기도 하며, 독일의 경우 지난해 선거때 슈뢰더의 좌파 정부가 정권 재창출을 위해 반전 구호를 활용했다고 분석되기도 합니다.


금융세계화에 평행하는 군사세계화

*새로운 전쟁과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관련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군요.

-우선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평행하는 군사세계화에 주목해야할 것입니다. 이 말은 1990년대 미국의 군수산업이 인수, 합병과 구조조정을 통해 금융세계화에 포섭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1980년대 이른바 '2차 냉전'을 통해 부활한 군사케인즈주의가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혁되고 있다는 뜻이지요.

미국의 대이라크 최후통첩 이후 주식시장이 상승하는 동시에 유가가 하락하고 있지만, 전쟁을 통해서 미국경제가 다시 활성화될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빈약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의 국민소득에서 군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대 말 거의 8% 까지 상승했지만, 2000년에는 2차 세계전쟁 이후 최저치인 3.8%로 하락했고 2002년에도 4.3%로 상승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전쟁의 원인을 군비지출을 통한 경기부양이라는 경제적 측면에서 찾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를 위한 통치성이라는 정치적 측면에서 찾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세계체계론 식으로 말하자면 헤게모니 상승을 특징짓는 '좋은 전쟁'과 달리 세게모니 쇠퇴를 특징짓는 '나쁜 전쟁'은 결국 경제에도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죠.

게다가 '전쟁이란 단지 또 다른 수단(군사력)에 의한 정치의 추구(Fortsetzung)일 뿐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로 더 이상 새로운 전쟁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미국의 헤게모니뿐만 아니라 베스트팔렌체계라 불리는 세계자본주의의 국가간체계도 쇠퇴함으로써 '신중세적 무질서'가 도래하고있다는 사실의 증후겠지요. 정치적 목적과 군사적 타겟이 혼동되고 또 왜곡된 타겟이 목적을 변질시킴으로써 전쟁이 일종의 광기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경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지 않으십니까?

-물론 2000-01년 미국의 신경제가 '경착륙'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 생각으로는 신경제가 '연착륙'했으며 앞으로 10년 정도는 더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2년 미국경제의 이윤율이 1973-75년 도는 1979-82년 수준으로 떨어졌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1970년대 대불황에 빠졌던 미국경제는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1990년대 들어와 증권시장과 정보, 통신, 미디어 산업을 토대로 하는 이른바 '신경제'로 발전합니다. 신경제가 지표상으로 후퇴하기 시작한 것은 2000-01년부터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997-98년 아시아 위기를 계기로 미국경제의 이윤율도 점차 저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민족자본의 이윤율이 급속히 저하했지만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를 주도하는 기관투자가(연금기금. 투자기금, 보험회사 같은 이른바 '소액주주들')와 금융화된 초민족자본(직접투자(10% 이상의 지분을 획득하는 증권투자)와 인수, 합병)의 이윤율이 급속히 상승했기 때문에, 2000년까지 미국경제의 이윤율 저하가 감속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사실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최대의 수혜자가 미국경제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가 이윤율 저하를 무한정 지연시킬 수는 없지요. 이 때문에 2000년 4월 주가, 특히 나스닥이 붕괴하면서 정보산업이 동요하고 또 12월 초민족자본 엔론의 회계부정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경제지표가 급속히 악화되었던 것입니다.

'금융세계화의 두 번째 단계'는 이렇게 위기와 전쟁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위기 속에서 새로운 전쟁의 확산이 시도되고 있다고 해도 199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경제에서 군수산업이 차지하는 위상이 이미 크게 변화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1991년 3대 군수기업에 들었던 제너럴 모터스(GM)는 2001년 10대 군수기업에서도 완전히 탈락했고 5위였던 제너럴 일렉트릭(GE)만이 간신히 10위를 유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 10대 군수기업의 수주액 절반을 차지하는 1,2위 군수기업인 록히드 마틴과 보잉은 주가총액으로 보면 각각 65위와 48위인 반면, 겨우 수주액 3%를 차지하는 제너럴 일렉트릭은 주가총액 1위의 기업이지요.


한반도 전쟁위기의 진정한 쟁점

*이라크 전쟁 이후 한반도에서도 전쟁위기가 발생할까요?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전쟁의 무대가 되어버린 서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까지의 이슬람 문명권이나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와 비교해본다면 동아시아나 한반도의 분위기는 아직 한가하다고까지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이 끝나는 대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핵, 미사일, 생화학무기) 문제를 제기할 것이 분명합니다. 독일을 제외한다면 일본과 남한에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은 동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사활적 이익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미국은 1995년 <<동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안보전략>>을 통해 중국에 대한 외교, 안보정책을 봉쇄정책에서 포용정책으로 변경한 바 있으며, 1997-98년부터 이를 북한에도 적용하려고 시도해왔습니다. 여기서 '포용'이란 'engagement'를 가리키는데, 이를 더 정확히 번역한다면 중국에서처럼 '접촉' 또는 '교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햇볕 정책'이란 미국의 대 북한 포용정책을 김대중 정부가 자기 식으로 번안한 것일 뿐이지요. 포용정책 또는 햇볕정책이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별도로 구상된 정책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특히 주목해야 합니다.

어쨌든 1970년대 말부터 지속적인 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해 왔던 중국은 미국의 포용정책에 따라 작년에는 급기야 세계무역기구에도 가입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이와 달랐지요. 북한이 개혁, 개방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없었던 것도 문제였겠지만,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는 것이 제 개인 생각입니다. 즉 대북한 포용정책 자체가 중국의 양해 아래 전쟁억지를 위한 미군 주둔과 한국군 군비 현대화를 전제함으로써 포용정책과 봉쇄정책을 갈등적으로 결합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결국 2차 한국전쟁의 가능성이 포용정책의 내재적 모순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2002년 1월 부시의 <<연두교서>>에서 '악의 축'발언 9월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서 선언된 이른바 '부시 독트린'(전쟁억지론에서 예방전쟁론 또는 선제공격론으로의 전환), 10월 켈리 방북직후부터 악화된 북한 핵문제 등은 2차 한국전쟁의 가능성을 말해주지요.

그렇지만 막상 그 현실성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1994년과 비교해 볼 때 오늘의 상황에서는 군사적 해결에 대해 더욱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고들 하는데, 특히 그 사이 영변 이외의 지역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핵시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전쟁위기 속에 감추어진 진정한 쟁점은 경제적 제재 같은 비군사적 방법을 통해 북한의 '체제붕괴' 또는 '정권교체'를 유도할 수 있는가 여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탈봉쇄정책이 단순한 포용정책이 아니었던 것처럼, 탈포용정책도 봉쇄정책으로의 단순환 복귀는 아니겠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포용정책을 주장해왔던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이 흡수통일정책을 주장해왔던 신보수주의자들의 입장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포용이란 평화공존을 유지하면서 경제통합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을 안정화하자는 것이었지요. 반면 신보수주의자들은 북한의 붕괴를 적극적으로 유도하여 흡수통일을 실현하자고 주장했었지요.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도 이제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효율성과 투명성을 무시했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북한의 궁극적 붕괴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지불한 거액의 달러를 노무현 정부가 문제삼는 속사정이야 차차 밝혀지겠지만, 어쨌든 이런 사태 전개도 우연만은 아니겠지요.

동시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햇볕정책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마도 이는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인민주의에서 탈피하는 것이 아직은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주류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을 자신의 계승자로 선택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할수 있겠지요.

작년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반전운동에 대해서도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반전은 곧 반미를 뜻합니다. 그러나 촛불집회는 소파 개정과 미군 철수 사이에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코포러티즘으로 환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세계화 운동이 아직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대안세계화 운동과 결합하지 못하는 반전 또는 반미운동은 도덕주의나 민족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사회운동으로서 노동자운동의 부활을 위하여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나 새로운 전쟁에 대한 진정한 대안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대안은 장기적인 사회운동밖에 없지요. 1350-1450년 이른바 '100년 전쟁' 시기부터 진행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4, 5 세기에 걸친 수많은 사회운동(천년왕국, 르네상스, 종교개혁, 계몽주의, 시민혁명)을 통해 실현된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사회운동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19세기 이후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갈파한 대로 생산력 발전과 신분제 폐지등 인류의 진보를 상징했었으나, 21세기의 자본주의는 인류의 절멸을 예고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한번 인류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모색하는 장기적인 사회운동을 시작해야 할 것인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자운동이 사회운동으로 부활해야 할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당과 노조를 중심으로 한 20세기의 노동자운동은 19세기의 노동자 운동을 교훈 삼아 여성운동과 결합할 수 있는 더욱 신축적인 조직형태를 발명해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세계적 규모에서 전개되는 대안세계화 운동과 반전 운동의 성공적인 결합을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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