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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와 함께 한 강화도 소풍

 

 

이주노동자와 함께 한 강화도 소풍

 

지난 4월 19일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강화도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따뜻한 봄기운을 느끼며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이하 센터) 앞에 65명의 참가자가 모였고, 관광버스 1대와 자가용 1대를 나눠 타고 즐거운 소풍을 떠났습니다.

 

 

인터내셔널 버스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스리랑카, 몽골, 인도 등 세계 각국의 이주노동자들이 모인 버스 안은 시끌벅적한 이주노동자들의 말소리와 들뜬 분위기로 북적거렸습니다. 버스가 출발하고 센터 이상재 팀장님을 시작으로 참가자들의 소개가 이어졌습니자다. 다들 조금씩 어색한 한국말로 자신의 이름과 간단한 소감을 밝히면서 얼굴을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인사가 끝나자 파키스탄의 아지프씨는 원더걸스의 노바디가 듣고 싶다며 기사님에게 요청했고, 버스 안 모니터에서는 한국의 최신대중가요 뮤직 비디오가 나왔습니다. 이주노동자들도 다들 대중가수들에게 관심이 많았는지 모니터로 이목이 집중되었고, 마지막에 원더걸스가 나오자 아지프씨는 ‘원더걸스 사랑해요’라고 외쳐서 많은 이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강화도로 향하는 버스는 한국 노래와 아시아 곳곳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인터내셔널 버스’였습니다.

 

 

새가 먹을 것, 사람이 먹을 것

강화도로 가는 도로가 오마이뉴스배 마라톤 때문에 일부 통제되면서 예상보다 도착시간이 2시간가량 지연되어 소풍 참가자들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예약한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식당은 65명분의 해물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속속들이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파키스탄과 스리랑카 이주노동자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파키스탄 이주노동자 한 분이 녹두전 속의 고기를 발견하고서는 ‘이거 햄이에요?’라고 물으셨고, 확인 결과 돼지고기로 밝혀졌습니다. 질문하신 분 옆에는 두 분의 파키스탄 분들이 더 계셨었는데 그 중 한 분은 이미 녹두전을 먹은 상태라 크게 낙담하고 괴로워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식사하면서 ‘파키스탄의 고기’에 대한 이야기가 꽃을 피웠습니다. 파키스탄에서는 주로 닭․소․양고기를 먹고 한국과는 다르게 소보다 양이 더 비싸고 맛있는 고기로 대접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파키스탄 가서 한국에서는 비싸서 못 먹는 소고기를 실컷 먹어봐야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저는 목이 말라서 물을 한 통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시던 파키스탄 이주노동자 세분이 모두 물을 컵에 가득 따라 벌컥벌컥 마시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익숙하지 않은 식당 문화와 어색한 언어가 파키스탄 분들이 선뜻 물을 주문하지 못하게 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 이주노동자들이 있다는 상황을 세심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혼자서 필요할 때 물을 갖다 먹은 저의 부족함을 깨우쳐 준 계기였습니다.

 

제가 앉은 테이블에서 ‘녹두전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스리랑카 이주노동자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는 또 재미있는 일이 하나 벌어졌습니다. 스리랑카 분들은 ‘섬나라’ 출신이기 때문에 해물이 너무 흔해서 그런지 해물탕에 들어간 조개, 꽃게 등을 먹지 않더군군요. 그래서 왜 안 먹냐고 물었더니 촌철살인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런 거 새나 먹는 거 에요. 사람 먹는 거 아니에요.” 스리랑카에 가게되면 새에게서 해산물을 빼앗아 와야겠습니다.

 

 

봉천산과 언어장벽․나이장벽(?)을 뛰어 넘은 수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강화도 북단에 위치한 해발 291m 봉천산에 올랐습니다. 얕은 언덕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정상에 오르니 땀이 뻘뻘나서 다들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물이 없어서 갈증에 시달려야 했고, 어떤 한국인 자원활동가는 화장실이나 외진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 정상에서 배가 아파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소풍 온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서의 추억을 많이 남기고 싶었는지 산 정상에서 쉬는 시간 내내 강 건너 보이는 북한의 개풍군과 아름답게 핀 진달래,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지막 단체 촬영 때는 5대가 넘는 디카가 촬영을 기다리고 있어서 일반 등산객의 손을 빌어야 했습니다.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앞뒤에 있는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과 서로의 궁금한 점에 대해서 대화를 많이 나눴습니다. 한국에는 무슨 과일이 많은지, 한국에는 왜 호랑이가 없는지, 인도네시아 말로 전후좌우(前後左右)는 무엇인지, 인도네시아 바퀴벌레는 얼마나 큰지, 한국 사람들은 왜 개고기를 먹는지, 인도네시아 배드민턴계의 상황은 어떤지,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물가는 몇 배나 차이가 나는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느덧 산에서 내려와 버스에 다다랐습니다. 구김 없이 해맑은 모습이 좋아 보여서 제가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눈 인도네시아 친구 ‘니노’는 무척 동안(童顔)이었습니다. 이주노동자라고 하면 왠지 나이가 많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어서 굳이 나이를 물어봤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1990년 생 20살. 19살이었던 작년에 한국에 들어왔는데 아직 부모님이 많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찡했습니다.

 

 

최저임금법 개악 저지로 달려가는 버스

도로 정체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예정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주최 측인 센터의 이상재 팀장님은 아쉽지만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고 이주노동자들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은 원래 일정이었던 ‘바다 구경’을 꼭 해야겠다며 ‘일치단결’하였고, 결국 하나 된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초지진으로 버스를 잠시 돌렸습니다. 비록 ‘발리’처럼 멋진 해변은 아니었지만 한국의 바다가 신기한지 또 한 판 거하게 기념촬영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랐습니다. 국적은 달라도 시원하고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가 봅니다.

 

인천으로 되돌아가는 버스에서는 다음 주 일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주노동자들의 의견을 묻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상재 팀장님은 우선 현재 정부의 최저임금법 개악 상황과 이주노동자를 차별하는 중소기업중앙회의 ‘외국인근로자 숙식비 부담기준’을 설명하고, 다음 주일요일에 있을 이주노동자 최저임금삭감에 반대하는 서울집회와 센터에서 진행되는 한글교실 중 어디로 참석할 것인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버스 안은 술렁였고,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집회에 참석하겠다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그 와중에 “다음 주 한글교실은 아예 하지 말고 모두 집회로 가자.”는 과격한(?) 의견도 터져 나왔습니다. 경제위기로 고환율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임금조차 빼앗아가려는 국가와 자본에 대한 분노는 국적과 피부색을 초월하였고, 버스는 이미 최저임금법 개악 저지를 위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7시가 조금 안되어 인천에 도착했고 다음 주를 기약하며 삼삼오오 헤어졌습니다. 저도 소풍으로 친해진 니노와 다음 주 집회에서 보자고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비록 9시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앞으로 이주노동자를 만날 때 어떤 자세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해야 할지 스스로를 성찰하게 해준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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