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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가타야마 유타카

[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가타야마 유타카

  • 자동차 칼럼니스트

입력 : 2009.08.28 03:01

닛산의 쇠락은 그가 해고되면서 시작됐다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가타야마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작고 무능한 일본 닛산을 가차 없이 몰아붙여 결국 뛰어난 회사로 변모시켰다."

1980년대 말 MIT 신입생들의 필독서 중 하나였던 '심판(The Reckoning)'에서 저자 데이비드 핼버스탐(David Halberstam)이 닛산의 미국 진출에 지대한 공헌을 한 가타야마 유타카를 평한 대목이다. 가타야마가 미국 닛산 사장으로 취임했던 1960년대 미국 소비자들은 덩치가 큰 GM·포드 차량에 빠져 있었다. 경제적인 소형 일본차가 미국에서 호응을 얻을 가능성은 요원해 보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였던 일본차의 미국 진출을 성공시킨 사람이 바로 가타야마였다.

가타야마가 닛산 Z카 앞에 섰다. / 닛산의 초대 미국법인 사장으로‘Z카 신화’를 일궈낸 가타야마.
1909년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난 그는 1935년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닛산에 입사한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에서 처음 자동차 동호회를 조직했을 만큼 차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노조가 장악한 닛산의 사내 문화에 심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노조원 선거에 나가라는 권유를 무시한 이후, 사내에 많은 적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마케팅 능력이 매우 탁월한 그는 사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인재였다. 그는 1958년 1만6000㎞를 달리는 호주 랠리경주 참가를 주도했는데, '기술도 없는 닛산이 이미지만 구기는 것은 아니냐'라는 사내 반대를 무릅쓰고 우승, 전후 일본 국민의 자존심을 살리면서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를 시기한 사내 정적(政敵)들은 그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맡겼는데, 바로 닛산의 미국 진출 임무를 책임질 미국 닛산 초대 사장직이었다. 가타야마는 그 도전을 즐겼다. 당시 미국에서 성공을 거둔 독일 폴크스바겐의 경영을 벤치마킹하고, 고객과 딜러 요구사항을 정확히 파악해 이를 반영했다.

미국시장을 뚫기 위해 틈새시장을 노린 그는 일본 시장에만 치중하려는 본사와 수많은 논쟁 끝에 당시 BMW 1600을 벤치마킹한 510(일본명 블루버드)을 미국에 출시, 2년 만에 미국 내 판매를 3배로 늘리는 대성공을 거둔다.

가타야마에게 최고 영광의 순간은 세계적인 명차 중 하나로 평가받는 닛산 페어레이디(미국명 Datsun 240Z)의 개발과 출시였다.

그는 회사가 주저해 하던 고성능 스포츠카를 미국에 내놓기로 마음먹었다. 보수적 디자인을 강요하는 사내 분위기에 밀려 의기소침해 있던 수석 디자이너 마쓰오 요시히코에게 "싸고 경제적인 차만 만들어서는 해외시장에서 이기기 어려우니, 해외업체들이 우리를 주시할 만큼 놀랍고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야 한다"며 힘을 실어 줬다.

페어레이디는 일본 내수차를 개조해 수출하던 당시 관행을 깨고, 처음으로 해외용으로 따로 개발한 차량으로, 미국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510과 240Z의 성공으로 닛산은 북미에서 선도적인 외국 자동차 회사로 우뚝 솟았지만, 가타야마는 그간의 놀라운 업적에도 불구하고 1975년 사내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해고당한다. 이후 닛산의 혁신성은 빛을 잃어간다. 1983년 미국 자동차 전문지인 '카&드라이버'는 기사에서 "당신은 어디로 갔습니까, 가타야마씨?"라고 쓰며 쇠락해 가는 닛산을 개탄했다.

가타야마는 1998년과 2008년 각각 미국·일본의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명예를 회복한다. 그러나 파벌과 현상유지에 집착하던 닛산은 이후 미국에서의 심각한 판매악화를 겪으면서, 1998년 프랑스 르노에게 매각되는 비극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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