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성과 민주주의의 관계?
소위 '연동형비례대표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연동형비례대표제'라는 말 자체는 동어반복이다. 비례대표제라는 게 표와 의석의 연동을 말하는 것이니 그렇다. 마치 '참여민주주의'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데, 아무튼 뭐 이미 굳어진 용례이므로 굳이 따질 이유는 없겠다.
그런데 소위 진보 또는 좌파블럭에서 이 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하는 가운데 논거로 삼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하지만 이 논거에서 진보(좌파)는 보다 진보적인 의회의 구성이 가능해지는 것을 민주주의의 달성으로 전제하는 듯한데 이건 아무리 봐도 오류다.
연동형비례대표제는 '더 많은 민주주의' 혹은 '더 다양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곧장 진보(좌파)적 사회체제의 구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어떤 기회에 나는 비례성을 강화하는 정치관계법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나 이것은 제도의 가치중립적 이상(민주주의의 심화와 확대 그 자체)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그것이 특정한 어떤 세력에게 유리하기때문에 주장하는 것은 아님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이때 토론자께서, 정치관계법 개혁이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어느 쪽에 더 유리한 것이 아니라면, 굳이 진보가 비례성강화를 주장할 이유가 뭔가라는 질문을 주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답은 한결같은데, 이 정치관계법 개혁의 과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자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이고, 그것은 보수적 민주주의자든 진보적 민주주의자든 모두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진보주의는 민주주의의 취지에 더 부합하고 더 다양한 민주주의를 위해 비례성을 요구할 수 있다. 보수주의는 사회구성원의 더 넓고 깊은 동의를 확보하여 민주주의적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비례성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런 생각과는 달리,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여전히 비례성을 강화하면 진보정당 또는 진보적 인물의 정계진입이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진보적인 정책을 실물화하기에 좋다는 이론을 펼친다. 난 이런 분들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례성이 강화되면 현재 빵살이를 하고 있는 자의 '변00당'이나 지난 탄핵정국에서 몰려나온 '태극기부대'를 저변으로 하는 조원진의 '대한애국당' 소속 인물들의 정계진출도 더 쉬워지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요즘은 그래도 좀 나아졌지만, 초창기에 이 질문을 하면 대부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자칭 보수라고 하는 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연동형비례대표제에 대해 뜨악해 하고 있고, 그런 반응이 나오니 이쪽에서는 당연히 이 제도가 이쪽에 유리하니까 저것들이 저렇게 반응하는 거라고 생각했을테니.
이 대목에서, 난 '민주주의'라는 말을 좀 더 보편타당한 용어로 인정하고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급진적 민주주의'니 뭐니 하면서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당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경향도 존재하는데, 난 오히려 그런 입장들이 민주주의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이라는 의심이 점점 더 강해진다. 아닌 말로, 그 '실질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좀 거칠게 이야기하면 '내로남불' 바로 그것이다. 내 말 들어주면 민주주의, 내 말과 다르면 반민주주의...
그러므로 비례성이 강화되면 비례적으로 민주주의가 강화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비례성이 강화된 후 사회적 환경이 진보에 친화적인 형태로 변한다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기 정체성의 사회화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민주주의가 강화된다는 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다양하게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어떤 이념지향이 더 강화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