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과 기획
이하 뇌피셜....
하긴 내 일기장에 내 맘대로 뇌까리는 게 뭔 문제겠냐만은.
22대 총선이 어떻게 끝나든, 좌파정치세력은 제도권에서 상당한 거리로 물러나게 될 거다. 거두절미하고, 난 이 상황을 좌파정당운동세력이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명확한 재고를 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실물적 변화를 주도하는 '정치'를 할 것이냐, 아니면 자위적 써클주의에 만족할 것이냐.
선거때마다 자칭타칭 군소 진보정당들이 하는 이야기는 소금물이거나 등대거나였다. 집권을 바라는 게 아니라 이 땅의 소금이 되고 싶다, 등대가 되고 싶다 운운. 헛소리들이다. 말로는 변혁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의 위치는 바닷물 속 소금의 비율 정도 또는 절해고도 끝자락에 홀로 서 밤이 되어야 불을 밝히는 등대를 자처하는데 변혁이 따라 오겠나.
그 역할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정도 역할에 만족할 거 같으면 정당을 하는 거보다는 써클활동을 하는 게 더 명료하고 기동력 있는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냥 정치써클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보라. 더 쎈 이야기, 더 '원칙적'인 이야기, 더 위력적인 투쟁이 가능하다. 갖다 들이박으면 되니까.
정당은 구조와 줄타기를 하며 제도화를 우회하지 못하는 한계 속에서 이념과 강령을 실물로 만드는 책임을 자처한다. 이 책임은 지지자들의 확보를 통해 완수되며, 따라서 정당은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지지기반을 넓히고 단단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지지기반이라는 건 정당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비로소 형성되고 강화된다. 어떤 확신인가? 내가 '조금만' 밀어주면 얘들이 된다는 확신이다. 여기서 '조금만'이라는 걸 주목하자. 굳이 '조금만'이라는 건 내가 선택을 할 때 이미 이 정당이 어떤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권의 가능성이다. 이들이 집권하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사실 해당 정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있을 때에야 솟아오르게 된다. 전혀 집권의 가능성도 없는 정당이 좋은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그 정당 말대로 되면 좋지라는 생각보다는 되지도 않을 정당이 말만 그럴싸하게 한다는 취급이라도 받는 게 아니라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좌파를 자처하는 정당의 활동가들 중 상당수가 이런 구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지금의 길을 열심히 걸으면 언젠가는 대중들이 이해해줄 것이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그들의 주장이 언젠가는 현실이 된다. 왜냐하면 세계는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변화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 언젠가가 언제 오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언젠가가 도래했을 때 대중은 지금의 대중이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그 언젠가의 대중은 자신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어떤 현실이 지금 이 정당이 주장하던 이상이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결과는? 그 언젠가의 어떤 이상을 이야기했던 정당은 그 언젠가가 도래할 때까지 살아남아 있기도 어려울 뿐더러 살아남아 있다고 한들 여전히 또다른 그 언젠가를 희구하면서 한 줌의 써클로 남아 있을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언젠가 도래할 어떤 현실은 세월에 따른 변화일 뿐 변혁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 변화는 다른 우파적 변화와 함께 도래한 아주 일부 좌파적 변화일 뿐 세계는 오히려 더 보수적으로 변화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변화의 이유는 결국 지금 변혁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현실적으로 어떠한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치활동을 하고 정당을 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이 세계의 소금이며 등대이기만을 바라는 좌파정당은 자기 정당정치의 소명은 망각한 채 '진보'적 혹은 '좌파'적 구라를 치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다했다고 선언한다.
말은 누구라고 못하겠냐.
22대 총선은 아마도 좌파들에게 양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령이 될 거다. 제도권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사멸할 것인지. 물론 정치를 한다는 것이 진보당류 혹은 전국회의를 등에 업은 양경수 따위의 위성정당, 민주당 빅텐트 아래 의석 몇 석을 확보하는 속물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건 그냥 밥벌이일 뿐 변혁을 향한 정치와는 관계가 없다. 좌파가 말하는 정치는 단지 밥벌이를 의미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변혁을 위한 정치를 위해 좌파는 일단 명확한 구도설정을 해야 한다. 확실한 정치지향을 명확하게 보이는 정치세력 간 구획과 재편이 필요하다. 녹색정의당은 이런 재편이 필요한 이유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저 어설픈 합종연횡은 대중들에게 어딴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뿐 아니라 거기 결합해 있는 각종 정치세력들의 본색조차 희석시켜버린다. 저건 녹색인가 노랑색인가? 그 안에 빨강색은 있는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래 계속해서 이야기해왔던 건 분리정립한 정치세력이 자기 색깔을 먼저 분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진보신당은 '진보의 재구성'을 운운하면서 대중성 확보를 위한 '적녹보' 카드를 내세우면서 도대체 뭘 하려는 정당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지 못했다. '진신류'라고 하는 일군의 정치성향이 사회적으로 규정되었지만, 그게 그래서 뭘 하겠다는 건지 분명치 않았다. 그나마 선명성을 만들어 나가도 시원찮을 시기에 노심조가 통진당으로 튀어 나가면서 사실상 진보신당이라는 당은 이들 명망가들에겐 그저 단기간 존속이 전제되었던 정류장 같은 가설정당에 불과했고, 그것도 모르고 순박하게 노심조와 함께 하는 정치를 꿈꿨던 진신류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렸다.
통합진보당은 좌파니 진보니 하는 엉성한 구획으로 어중이 떠중이 모아놓으면 어떻게 된다는 걸 보여준 짬통의 모범이었다. 짬통의 내용물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그 부패의 끝은 폐기였다. 통진당은 깨졌고, 정의당으로 분립한 노심조와 인천연합은 22대 총선까지 그럭저럭 붙어 있을 수 있었다. 와중에 잔류 통진당은 정권의 탄압에 해산되었고. 잔류 진보신당은 사회당 끌어들여 노동당 만들었다가 풍비박산이 됐다.
이후 행보를 보면 통진당 후신은 민중당을 거쳐 진보당으로 이행한 후 민주당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고, 사회당류는 노동당을 나가 기본소득당을 만들더니 역시 민주당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두 당은 민주당 안에서 의석을 만들었고, 22대 총선에서도 의석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정의당은 녹색정의당이라는 이상한 비례용정당(지역구에 심상정 등이 출마한다고 해서 녹정당의 비례용 정당의 성격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아닌 말로 녹색당 잔류파가 협정을 어기고 지역구에 후보를 내게 되면 녹정당은 녹색당의 위성정당으로 전락하게 되는 거다)을 만들었지만, 선거 끝나면 다시 해산하여 녹색당파는 녹색당으로 복귀하고 녹색정의당은 정의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될 거다. 의석확보에 실패하거나 기껏 한 석만 남기게 된 정의당 안에서는 인천연합의 준동이 거세질 거고, 세력재편을 하지 않는 한 활동가들의 정치적 전망 자체가 사라지게 될 거다.
여기서 좌파는 다시 재편되어야 한다. 난 정의당의 노동그룹과 노동당이 명확한 전망과 정치적 경로에 합의하고 정치세력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선 통합이니 결집이니 하면서 진보신당과 노동당을 초토화시키고 내뺐던 과거 행적에 대해 정의당 노동그룹의 진정한 반성과 평가가 있어야 한다. 한편, 기존에 노동당 내에서 사회당의 숙주노릇을 하다가 팽당한 채 당에 남아 마치 자신들이 당을 지키고 있었던양 하면서 사회주의를 운운하고 있는 과거 신좌파 그룹의 반성과 평가가 있어야 한다. 김길오에게 스폰 받으면서 그 일당을 위해 프락션을 하고 김길오파 랭커들과 형님아우 하며 지내던 자들이 사회주의를 언급한다는 거 자체가 개코미딘데, 아직도 정신들을 못차리고 있다. 이들이 과거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게 되면, 노동당 분당 사태 당시 당 활동을 버렸거나 마지못해 정의당에 합류했지만 결국 정치활동에서 손 놔버린 활동가들을 다시 규합할 수 있을 거다.
이렇게 해서라도 규합된 좌파조직은 좌파정당을 결성하면서 자신의 색깔을 보다 명확하게 하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난 보라색이니 적녹보니 하는 포괄성이 결코 좌파의 선명성이나 대중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녹색은 녹색당에게 맡기자. 보라색도 다른 적합한 정당에 맡기자. 적어도 좌파정당으로 재구성되는 정당세력은 노동을 가운데 두고 노동을 중심으로 세계를 분석하는 입장을 명백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 포괄성은 중심을 두었을 때 확보될 수 있는 거지 중심 없이 이것 저것 다 갖다 붙인다고 확보되는 게 아니다. 노동중심성의 개념을 다시 세우고, 거기서부터 정치활동을 전개해나가는 좌파정당을 재구성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정당의 정치활동이 단지 소금이나 등대역할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집권을 지향한다는 것이 대중에게 인식될 수 있다면, 22대 총선 이후의 정국이 결코 절망적이지만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22대 총선이 바로 그러한 정치세력을 대중들이 필요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