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 침대

군복무를 마치고 복직을 했는데, 이와 동시에 묘한 술버릇이 두 개나 생겼다. 하나는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 다른 하나는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곳에 숨어들어 잠이 드는 것.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은 아마도 통신대 가설병 노릇을 하면서 술마시고 작업하던 것이 버릇이 되었던가 보다. 그런데 쥐도새도 모르게 술자리에서 사라져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잠이 드는 버릇은 왜 생겼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암튼 이 버릇때문에 객지에서 노상취침하다가 골로갈 뻔한 일이 한 두번이 아닌지라 남들에게 피해는 주지 않았어도 굉장히 위험한 술버릇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어쩌랴, 그게 버릇인걸... 나중에 두 가지 버릇 다 고쳐지기는 했는데, 암튼 그런 의미에서 술을 끊은 것이 어찌보면 다행스런 일인지도 모르겠다.

 

 



인천에 콕 틀어박혀 공장생활을 하다보니 서울이 가까워도 친구 만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엉덩이가 굼뜨기로 한 몫하는 행인이다보니 사실 돌아다니는 것도 수월치만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취미가 여행인 것을 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어쨌든 서울나들이 하기가 영 고달픈 노릇이었어도 가끔 고등학교 동창들 만나면 왜 그리 재미있는지.

 

그리하여 하루는 또 기운차게 일을 마치고 서울로 달려가 친구들을 만났다. 구로동 근처에서 집합했다. 여전히 구로공단의 바람냄새는 이곳이 공단지대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면서 콧구멍을 간지럽혔다. 진학한 놈 하나 없이 죄다 공장생활을 하던 친구들이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기껏해봐야 먹고 사는 이야기나 자리에 합류하지 못한 다른 친구들 이야기들 뿐이었지만, 원래 친구사이는 그래서 재밌는 거다.

 

해서 신나게 놀고 열나게 술퍼먹고 이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무튼 놀고 먹고 마신 것까지는 훌륭하게 해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필름이 끊겨버리고야 말았다. 드문 드문 기억이 나긴 하는데 그 기억은 완전히 공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튿날 알게 되었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잘 곳을 찾고 있었다. 날씨는 꽤 쌀쌀했고, 얼른 어디 따뜻한 곳에서 자고 싶다는 충동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곤 또 기억이 없다가, 어느 순간 아주 안락하고 기분좋은 이부자리를 발견했다. 주변의 다른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이부자리만 보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준비해놓은 이부자리 같았다.

 

아무렇게나 엎어져 자고 있다가 추위때문에 잠시 눈이 뜨였던 듯 하다. 아마 자다가 이불을 다 걷어차고 잔 모양이다. 그래서 다시 발치에 있던 이불을 끌어다 머리 위까지 푹 뒤집어 쓰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꿈나라로 향했던 행인...

 

그렇게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는데, 암튼 자다가 깼다. 몸에 약간의 한기가 돌기는 했지만 특별히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술이 덜깨서 그런지 몸이 굉장히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 위까지 뒤집어 썼던 이불을 들추어냈다.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시원한... 엥???

 

뿌옇게 흐렸던 시야가 밝아오면서 이상한 광경에 한동안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었다. 눈 앞에 똑바로 파란 하늘이 보이는 거다. 게다가 흰 구름들이 술술 뒤로 물러나는 것도 보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이불을 훌렁 제끼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게 왠일인가? 눈 앞으로 나무들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버스도 지나가고 있었다. 왠걸? 자동차도 지나가고 차량도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있던 이부자리, 아니 내가 타고 있던 무엇이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정신을 차리고 보았더니 내가 있던 곳은 아늑한 방이 아니라 트럭 위였다. 그리고 따땃하게 덮고 잤던 것은 이불이 아니라 트럭에 씌우는 천막, 전문용어(?)로 '호루'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랬다. 잘 자리를 찾고 있던 행인은 남의 트럭 위에 올라가 잠을 잔 것이었다. 그리고 이불인냥 호루를 뒤집어 썼던 것이고. 아침에 일어나 일나가던 어떤 아자씨는 자기 트럭 위에 어떤 정신나간 넘이 드러누워 자빠져 자는 줄은 생각도 못한채 트럭을 몰고 달려가고 있었던 거다.

 

찬바람이 마빡이고 옷깃이고 죄다 훑으며 지나가는데,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출근도 하지 못할 상황이 도래할 판이었다. 달리는 트럭 위에서 앞으로 전진, 전진 하여 아저씨를 불렀다. 하이고, 이런 젠장맞을, 아저씨는 쌀쌀한 날씨에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뽕짝 구성지게 틀어놓고 앞만보고 달리고 있었다. 이건 그냥 불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한 손으로 트럭 뒷창문에 달린 칸막이를 붙잡고 몸을 바깥으로 내서 아저씨가 운전하고 있는 바로 옆 창문을 손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아저씨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아저씨의 입과 눈이 순간적으로 평상시 크기의 세 배 이상 확장되더니 급히 핸들을 꺾었다. 갑작스런 차량의 흔들림에 행인, 그대로 아스팔트 바닥에 추락할 뻔했으나 특유의 순발력과 조상 전래의 은근과 끈기를 동원, 끝까지 트럭에 매달려 있었다.

 

트럭이 서고 아저씨가 화들짝 놀란 얼굴 그대로 차 문을 열고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당신 뭐야?"

"아, 그게..."

"거기서 뭐하고 있었어?"

"잠을..."

"당신 미쳤어? 사고 나면 어떻게 할려고 그래???"

"죄송..."

"아, 아침부터 왠 미친X 때문에 간떨어지는줄 알았네..."

"그저 죄송..."

 

이 아저씨,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담배 한 대 입에 물더니,

"거긴 왜 올라갔어?" 한다.

"글쎄 그게 저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아서..."

"술 많이 자셨수?"

"예, 좀 많이 취했던가 봅니다."

"다신 그러지 마슈. 아, 나정도 되니까 그래도 안전하게 차 세웠지 어디 간 약한 사람 잘못 건드렸다가 기절이라도 하면 댁도 죽고 그사람도 골로 가는거야."

"예ㅡ, 그저 죄송..."

 

트럭은 떠나고, 황량한 국도변에 혼자 떨어진 행인, 여기가 도대체 어딘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어디란 말이냐... 아깐 잘 보이던 택시도 보이지 않고, 시골길 비스무리한 곳인데 버스정류장도 보이지 않는다. 큰일이다. 터덜 터덜 걸어가는데 마침 빈 택시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대충 줏어탔는데 천만다행스럽게도 트럭이 달려가던 그 길은 서울에서 부평쪽으로 가던 국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 그 놀란 아저씨의 얼굴이 기억난다. 얼굴 전체가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악하던 눈빛, 쫙 벌어진 입. 그건 압권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아저씨도 간이 그다지 큰 사람은 아니었던듯 하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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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07 00:15 2004/12/07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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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 언제나 그럿듯 형의 이야기는 다시 들어서 다시 듣고 싶은 묘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다신 이제 형의 술드시는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이 동생 먼가 아쉬움의 파도에 몸서리칩니다.

  2. 음.... 글쿤... 하지만 머 울 bto에게 좋은 일이 있음 혹시 또 모르잖냐? ㅋㅋ

  3. 그래서 요즘 술을 안드시는 건가요?

  4. 산오리/ 아니요 ^^ 그 버릇은 20대가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졌거든요. 그냥 정말로 끊어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ㅋㅋㅋ

  5. 흐흐. 저는 행인님의 입을 통해서 더 실감나게 들었지요. 이런 양반이 술을 끊었다는 것은 대행인가 불행인가.... 고민이 됩니다요. ^^

  6.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일이 버러질 수 있는건지...난, 도무지 이해가 안갈 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상상이 안된다. 행인이 술을 먹었다는 사실이..

  7. 으에에...기절.
    저도 정말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 달리는 트럭 위에 누워있기.

  8. ㅋㅋㅋ.. 그러나 저러나 술꾼들 술 끊는 게 골초들 담배 끊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울 것 같기도 한데 정말 대단하오.

  9. 어쩜.. ㅋㅋ
    어제는 토론회 중간에 여의도엘 다녀오느라,
    얘기도 제대로 못했네요, 죄송.. ^^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10. 북적북적~~
    행인님의 인기만점 카테고리는 '취생몽사'인가보아요~
    롤러코스트를 타듯 짜릿하면서도 탄성이 나오는~ 모 그런 느낌^^

  11. 이젠 맥콜만 드셔도 취하시는데

  12. rivermi/ 그게 문제에요... 동병상련 아닐까요?? ㅋㅋㅋ

  13. 저도 블로그 만들었어요, 후후
    열심히 말고 쉬엄쉬엄 관리할려구요 ^^;;
    근데,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덧글다는데에 놀랐다는..
    이건 분명 새로운 문화적충격;;

  14. hi/행인님! 포스팅 인기에 비하면 난 새발의 피지..
    제가 어찌 비교되리오...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