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정치는 없다

12월 3일은 세계 장애인의 날이었다. 여의도에서는 기념집회 및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을 위한 투쟁대회가 있었다. 쌀쌀한 날씨, 회의때문에 참석을 하지 못해서 더 차갑게 느껴지는 집회의 날씨였다.

 

현재 국회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발의되어 있는 상황이다. 원래 이 법안은 장애인의 문제를 더 이상 복지수혜의 차원에서 논할 것이 아니라 "인권"의 차원에서 논하자는 취지로 법사위에서 발의되었다. 그러나 상임위 선정과정에서 보건복지위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 법안이 상임위에서 논의되기는 아직 요원한 듯 싶다.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자는 취지에는 아무도 반대할 의원들이 없고, 그동안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현실적으로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부정할 의원들은 없다. 그럼에도 왜 이 법안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있다. 우선 장애인차별금지법안의 내용이 법률적으로 논의하기에는 여러 한계를 가지고 있다. 법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장애인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이야기를 법조문의 형태로 나열해놓아 다른 법률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고, 특히 감독기구의 문제가 걸려 난항이 예견되기도 한다.

 

또한 복지부의 안일한 행위도 문제다. 자기 밥그릇을 다른 기구에 뺏길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자체 법안을 내놓은 복지부는 그러나 실효성 있는 대안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더불어 장추련이 내놓은 안에 대해서도 사실 은근히 국회에서 논의되기 보다는 현 상태로 계류되기를 바라는 눈치다. 로비도 하겠지...

 

그런데 법안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나 복지부의 자세는 이 법안이 논의되지 않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국회가 이 법안에 대해 미적거리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의원들의 자존심때문이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상당히 어이가 없을 정도다. 내지는 우리사회에 아직까지 큰 정치라는 것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할 것이다.

 

법안 논의에 대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정작 법안에 대한 논의를 자꾸 회피하는 의원은 다름 아닌 열우당의 장향숙 의원이다. 본인이 장애인이고 장애인과 관련한 운동을 계속 해오던 사람이기에 장향숙 의원이 본 법안에 대한 논의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은 얼핏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장향숙 의원은 본 법안을 준비하고 발의하기까지 애를 쓴 장추련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장추련이 왜 본인을 놔두고 다른 의원, 그것도 다른 상임위의 다른 당 의원을 통해 발의했느냐는 것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안은 민주노동당 노회찬의원을 통해 발의되었으며, 노회찬의원은 보복위가 아닌 법사위 의원이다.

 

장향숙 의원이 가지고 있는 첫번째 불만사항은 왜 하필 법안발의 상임위가 법사위였냐는 거다. 장추련이 애초 복지위가 아닌 법사위 의원을 통해 발의를 요청했던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복지수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장애인 정책이 그동안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데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판단때문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문제를 "인권"의 측면에서 접근해야한다는 판단을 하는 것은 그 결과 이들에게는 절실한 타개책이었고,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인해 복지부를 긴장시킬 수 있는 전술로서 법안 발의 상임위를 법사위로 요구했던 것이다.

 

장추련은 올해 초에 각 당에 법안을 보내면서 법안발의를 해줄 수 있는가를 타진하였고, 법안발의의 조건으로 내건 몇 가지 중에 하나로 법사위 발의를 내걸었었다. 이에 대해서는 장추련 쪽에서 열우당의 장향숙 의원과 한나라당의 정화원의원 등에게 설명을 한 바 있었고, 이들은 이미 그 취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따라서 장향숙 의원이 이 부분에 대해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고, 어차피 복지위로 소관상임위가 결정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별달리 문제가 발생할 부분도 아니다.

 

장향숙 의원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불만은 왜 자기를 통해 발의하지 않았느냐는 거다. 특히 하필이면 민주노동당에 그 법안을 주었냐 하는 거다. 사실, 장향숙 의원으로서는 이 부분에서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장애인 당사자로서 의원직을 수행하고 있는 자신이 이 법안을 발의할 때 법안에 힘이 붙을 수도 있는 한편 본인 스스로에게도 장애인을 대표하여 큰 건 하나를 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애인 단체들은 이미 작년에 "교통약자의이동편의증진법"을 민주노동당을 통해 발의하여 제정까지 하게 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장향숙 의원의 입장에선 지난번 건은 민주노동당에게 주었으면 이번 건은 자신에게 주는 것이 형평상으로도 맞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장향숙 의원은 애초부터 이 법안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상황들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처음 이 법안을 각 당에 회람시키고 발의여부를 물었을 때,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열우당조차도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하지 않았다. 특히 법안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우리에게 주면 알아서 하겠다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을 뿐이다.

 

더구나 장향숙 의원은 보복위 소속 상임위원이다. 장추련이 애초부터 보복위로 발의를 하려면 모르되 법사위로 발의하도록 해달라는 조건을 달고 있었을 때는 이에 대해 상응하는 제스쳐를 취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행동은 전혀 취하지 않고 그저 달라는 이야기만 했을 뿐이다. 장추련의 입장에서는 장애인 당사자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의원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임에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거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장추련이 수차례 장향숙 의원에게 개인적으로나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향숙 의원은 여전히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여당이자 최대의석을 가진 정당인 열우당에서 당론으로 이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결정만 하면 얼마든지 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법안이 가지고 있는 한계나 복지부의 어정쩡한 입장은 이 논의과정에서 해소될 수 있다. 그런데 아예 법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만큼 적극적으로 이 법안에 대해 의견을 개진해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의 생존이 달린 쌀개방 문제를 그렇게 강력하게 밀어부치던 정부여당이, 그 정부여당 안에서 장애인의 문제에 대해서만은 누구보다도 강한 발언력을 가지고 있는 의원이 누가 보더라도 별 거 아닌 문제로 장애인차별금지법안에 대한 논의조차도 회피하고 있는 이 상황은 이해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용서도 되지 않는다. 그 법안이 어느 당에서 발의되었건 어느 의원이 발의했건 간에 민중을 위해, 고통받고 있는 장애인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합당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면 최소한 적극적인 논의라도 해줘야하는 거 아닌가?

 

어제 집회에서 몇몇 분들이 삭발을 했다. 행인이 잘 알고 지내는 사람도 삭발을 했다. 독감때문에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인데, 뿌연 눈구름 아래서 삭발을 했다. 이틀 전에 만났을 때, 독감든 목소리를 쥐어짜내면서 삭발을 한다고 하길래 말릴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가 차마 그 말을 못하고 한숨만 쉬고 말았다. 그리고 진짜 그분의 머리카락이 남김 없이 잘려 떨어졌다.

 

안타깝다. 우리에게 큰 정치는 아직 멀은 건가? 당리당략도 아니고 개인차원의 자존심때문에 시급히 해결되어야할 과제가 무심하게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다. 투쟁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저 구호는 너무나도 냉혹한 현실이다. 그 현실 앞에 세상은 또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눈 내리는 차디찬 겨울 하늘 아래 장애인들의 염원마저 얼어붙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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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4 04:56 2005/12/04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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