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퇴양난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주민(국민, 시민, 인민 모두 마찬가지)들은 선거때만 주권자가 된다. 물론 대의민주주의 구조 하에서도 유권자들에 의한 직접적인 선거개입과 사후관리가 논의되고 있기는 하다. 주민소환제, 주민발의제, 주민투표제, 주민감사제 등등이 그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국민소환제, 국민발안제 등이 된다. 아직까지 이러한 제도들의 도입 논의는 진보진영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러한 제도들은 진보진영만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수진영에서 더욱 강조해야할 사안이기도 하다. 즉, 이 제도들은 진보와 보수의 구분에서 잣대역할을 하는 제도는 아니라는 거다. 정치란 어차피 힘의 논리이니까. 뭐 이건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 여기까지만 하고.

 

암튼 선거기간 동안 유권자가 행할 수 있는 정치참여는 기껏 거수기 역할에서 끝나버리는 것이 오늘날 이 땅의 현실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마법을 부리기 위한 전제로 이야기되는 것이 바로 정보의 공유인데, 21세기 한국 정치판에서만큼은 아직 꿈같은 이야기다. 정책정당을 표방하는 이 땅의 모든 정당들에게 있어서 한편으로는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책 마련하고 그걸 증명하고 메니페스토다 뭐다 하면서 검증당하는 골치아픈 과정은 생략한 채, 공천헌금 잘 챙기고 조직적인 선거운동원 동원 하면서 폭로전, 색깔전 펼치는 동시에 가끔 눈물정치, 구걸정치 하면 선거기간은 후딱 지나간다. 소위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에서 한국만큼 정치하기 쉬운 나라가 또 있을까...

 

제도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지만 그놈의 제도라는 것이 현실을 일정정도 규율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선거역시 그 과정 일체가 법과 제도에 의해 규정되고 이를 지키는 과정이다. 그럼으로써 선거의 본질은 정치세력간의 전쟁이지만 형식적으로는 페어플레이를 펼치는 모습이라도 보여져야만 한다. 그래서 법은 이러한 현상들을 일일이 규정하고 제어하려 한다. 그러나, "공공의 적 2"에서 설경구가 치를 떨며 이야기하듯 "법은 최소한"일 뿐이다. 사람 사는 모습이 사람 숫자만큼 다양한 것인데, 그걸 몇 개 조항에 일일이 다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공직선거법 역시 선거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의 최소한을 규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법이 집행되는 과정을 훑어보면 이 공직선거법이라는 괴물은 다른 법률과 매우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예컨데, 형법이나 민법과 같은 다른 법률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이 규율하지 않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즉, 형법에 규정되어 있는 각종 금지규범들은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처벌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민법 역시 마찬가지. 사인간에 이루어지는 각종 법률관계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공권력체계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근대 이후 민법의 원칙이다. 즉, 어떤 계약이 이루어졌을 경우 그 계약의 형태가 어떠하던 간에(요식행위가 있을 것을 법으로 정한 경우를 제외하고) 당사자간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국가권력은 개입을 하지 않는 거다. 이처럼 일반적인 법률들은 명문의 규정이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일단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 원칙이다.

 

공직선거법은 그 예외이다. 즉, 법률에 명문의 규정이 없는 행위는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원래 공직선거법의 해석을 그렇게 해야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운동 등과 관련하여 행하는 유권해석을 보면 공직선거법은 아주 희안한 법임에 틀림 없다. 법률이나 규칙에 근거가 없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보면 거의 10중 8, 9 선거관리위원회는 "하지 말라"고 유권해석을 한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예비후보자는 예외적으로 선거기간 전에 제한적인 형태로나마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미 공직에 있는 등 언론이나 유권자들에게 상당히 알려져 있는 기존의 공직자와는 달리 처음 선거에 등장하는 예비후보자는 상대적으로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알릴 기회가 없었기에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합리를 해소하고자 예비후보자에게 선거기간 전에도 일정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예비후보자가 할 수 있는 선거운동 중 하나가 해당 지역 유권자들의 10분의 1 선 안에서 자신의 홍보물을 만들어 발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공직선거법 제60조의3 제1항 제1호). 그런데 어떤 예비후보자가 이 홍보물에 좀 이름 있는 사람의 추천사를 실었다. 그랬더니 당장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공직선거법 위반이라며 이 홍보물 발송을 중단하라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근거는 공직선거법 상 예비후보자의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자는 본인과 본인의 배우자, 그리고 후보가 지정한 1인에 한하는데(공직선거법 제60조의3 제2항), 추천사는 이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공직선거법 제60조의3 제2항은 홍보물의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선거홍보용 명함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을 규정한 것일 뿐이다. 우편발송되는 홍보물의 내용에 대해서는 공직선거법 뿐만 아니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공직선거관리규칙에도 규정사항이 없다. 선거관리위원회의 판단은 전혀 적절하지 않은 과도한 확대해석인 셈이다. 이런 사례가 매우 다양하게 발견된다. 예비후보자 선거운동사무소 개소식 초청장을 2000장이나 보낸다고 이걸 불법선거운동이라고 하질 않나(지인, 당원, 동문, 단체 등에 보내는 것으로 해당 지역 내 유권자들에게 발송하는 것도 아니다), 초청장에 약력을 집어넣는 것이 선거법 위반이라고 하질 않나(공직선거법 제93조 위반)...

 

그러다보니 현장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운동원들은 어떻게 하면 선관위의 규제를 피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지를 머리털 빠지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지고보자면 어떻게 하면 불법행위를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공직선거법 자체가 지나치게 과도한 규제를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법의 해석에서조차 선거관리위원회가 공직선거법을 확대할 수 있는 범위까지 확대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이걸 다 따랐다가는 제대로 된 선거운동 한 번 해보지 못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돌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후보에 대해 뭔가 알아야 판단을 해볼 것 아닌가? 후보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인생역정을 살았는지, 정책이 뭐고 그 책임을 질만한지 등등을 유권자가 알아야 투표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의 선거법체계로는 돈 없고 연줄없고 빽 없는 자들, 선거하기 정말 힘들다...

 

이렇게 앞으로 근 한달 반을 보내다가는 모발의 두피탈출현상의 가속화로 이어질지 모르겠다. 성질나는 김에 선거법을 확 뜯어고치는 작업을 함 해볼까나 하다가도 그게 여의칠 않다. 공직선거법이 이렇게까지 규제일변도로 구성되고 그것을 적용하는 것 역시 행위의 보장보다는 행위의 규제쪽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은 그동안 이 땅의 정치꾼들이 싸질러놓은 못된 관행때문이다. 막걸리 선거, 밀가루 선거, 고무신 선거라는 비아냥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선거라는 것이 정책의 대결이 아니라 누가 총알(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의 대결이 되었었다. 힘있는 자들은 각종 바람(세풍, 안풍, 북풍, 기타등등 온갖 풍풍)을 일으켜 유권자들의 판단능력을 마비시켜왔고, 선거시기와 평상시를 가리지 않고 당락에 관련된 온갖 유치찬란한 짓을 자행했다. 그런 과정에서 선거법은 오늘날과 같이 규제 일변도의 기형적 형태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그거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 불합리하다고 지적받은 선거법의 내용을 와장창 뜯어고친다고 해서 신진정치세력들의 공직선거참여가 활발해지고 건강해진다는 보장도 없다. 되려 그동안 규제일변도의 선거법때문에 전전긍긍했던 보수기득권 정치인들이 제 세상 만났다고 얼쑤좋다 할지도 모른다. 이놈의 거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다.

 

덧말 : 언론도 그렇다. 강금실이 보라색으로 몸을 꾸미고 등장하면 그건 온통 뉴스가 되지만 교육재정확보를 통한 대학등록금 현실화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법을 어떻게 하는 것은 나중에라도 가능하겠지만 이 경마장 중계하듯 섹쉬한 것만 찾아다니는 언론의 관행은 언제 가능할라나? 애초 불가능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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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7 14:50 2006/04/1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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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거판 보면서 열받는 게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2. 역시 사람은 알아야하는거로군요 >_< 선거법이 그렇다니... 앤드... 요즘 뉴스보면 죄다 현상 일변도의 이야기들... 짜증이 확 솟구치더군요 >_< 행인님 힘내시길 >_<

  3. <color default="yellow"><align default="right">한국언론</align></color>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