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

날씨가 딱 뜨끈한 오뎅국물에 따끈한 정종 한 "꼬뿌"하면 그럴싸한 판이다. 술 끊은 행인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직 알콜과의 직접대면을 통해 세상시름을 잊고 계시는 주당 여러분께서는 요런 날씨에 한 번 뜨끈한 오뎅국물에 따끈한 정종 한 "꼬뿌"하시길 권한다.

 

남자들의 경우, 지금은 많이 없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술 못마시면 '취급'을 안 해주던 분위기가 있었다. 공장 다닐 때, 동기 중의 하나가 술이라면 냄세만 맡아도 얼굴이 벌개지는 녀석이 있었는데, 술 못마신다는 이유로 타박 꽤나 받았더랬다. 행인이야 오히려 선배들을 골로 보내는 경우가 많아서 술자리의 귀빈대접을 받았지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술 잘마시는 것을 무슨 자랑으로 알았고, 누가 술을 잘 마시나를 놓고 우열을 가리는 엉뚱한 짓도 곧잘 했다. 술에 취해 주사부리는 것은 쉽게 용서가 되고 술값 퍽퍽 내지르는 것이 "싸나히"다운 것으로 인정되는 분위기. 달래 마초냐...(뭐 행인도 꼴마초 중의 하나였다고 해야하나...  ㅡ.ㅡ+)

 

그러다보니 술자리에서 괜히 호승심이 발동해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하는 경우도 꽤 있었더랬다. 가장 최근에 이런 짓을 했던 것은 2000년 3월 초, 학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였다.

 

'원생'이가 된 행인, 지도교수 수행이라는 미명 하에 학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따라갔다. 가서 온갖 시다바리는 다했지만 어쨌든 학부생이 아닌 '원생'이로서 처음 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또 다른 기분이 들게 했다. 무슨 원로가 된 느낌이랄까... 뒌장...

 

암튼 첫날, 밤에 있을 행사에 필요한 음식이며 술이며 기타 등등을 준비하느라 행인 비롯한 스탭들, 방구석에 모여 요리재료를 썰고 다듬고 지지고 볶으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한 4시쯤에 따로 모여 시작한 작업이 저녁식사를 끝내고 난 시간이 되어서야 얼추 정리가 되었다.

 

해서, 주로 대학원생들과 고학번으로 이루어진 준비팀 중 저녁식사를 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대충 준비했던 음식들을 가운데 놓고 저녁을 대신했다. 여기 술이 빠질 수가 없는 노릇. 이미 준비과정에서부터 한잔 두잔 마시던 소주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부임한지 얼마 안 되던 A 교수가 방엘 들어왔다.

 

모두 일어서서 인사를 하자, 이 교수님, "어? 자네들 술마시고 있었나?"라고 묻는다. 한 잔 하시라고 하자, 지금 신입생 대상 강의가 있으니 강의 끝나고 돌아오겠다, 그 때 한 잔 하자, 어디들 가지 말고 기다려라 이러면서 다시 나가신다.

 

교수님이 나가자 다시 앉은 일행들, 연신 웃고 떠들면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소주를 마셨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내일 일정을 위해 많이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해서 그다지 심하게 마신 것은 아니었다. 이래저래 하는 동안 얼추 밤 9시경이 되었을 무렵, 예의 그 A교수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아직은 젊은 A교수, 학생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것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친근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뭐 이런 자리를 진작 마련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못했다, 앞으로 잘 해보자 이런 상투적인 이야기가 오가면서 각자 자기 앞에 있는 잔에 소주를 채우고 씩씩하게 "위하여"를 제창한 후 소주잔을 비웠다.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일단 이 A 교수, 자기 눈 앞에 잔이 비어 있는 것을 참지 못했다. 잔이 비면 비는 족족 잔을 채웠다. 더불어 술잔이 오랫동안 차 있는 것을 참지 못했다. 잔이 채워졌다 싶으면 하던 말을 끊고 "위하여"를 외쳐댔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가 A교수는 잔을 '꺾는' 것을 참지 못했다. "싸나희가 어딜 잔을 꺾나? 원샷! 원샷!"

 

하늘같은 교수님께서 이렇게 원샷 메들리를 열창하는데 잔을 꺾을 배짱을 가진 넘이 없었던 것인지 다들 예의바르게 원샷으로 행동통일. 행인이야 뭐 원래 그렇게 마시던 바이니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애초 페이스보다 훨씬 빨라진 고강도의 술잔비우기가 연속되자 다른 멤버들이 버거워하기 시작했다.

 

교수님이 술잔을 빨아대고 있는데 먼저 일어나기도 뻘쭘해서 이제나 저제나 이양반이 좀 취해서 먼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는데 도통 취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왠만큼 술 한 잔 한다는 젊디 젊은 넘들도 눈이 풀리고 말이 헛나오기 시작하는 판인데, 이냥반 아직도 끄떡이 없다. 거 참 술 잘 하는 분이구나 하고 생각하던 행인, 한 순간 묘한 점을 발견했다.

 

이 A 교수, "자, 모두, 위하여!"하면서 "원샷!"하는 소리를 남발하고 있었다. 한편 그러면서 잔을 '꺾는' 학생들은 귀신같이 지적하면서 잔이 비도록 술을 톡톡 털어넣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있는 거였다. 어찌된 사연인고 하면, 이분은 "원샷!" 어쩌구 하면서 학생들이 술을 마시는 동안 술잔을 입에만 대고 있다가 다른 학생들이 잔을 내려놓을 때면 마치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이 났다는 것처럼 입에 댔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게 말이야~" 이런 식으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이 소주 대여섯잔을 마시는 동안 이 A 교수는 한 잔이나 두 잔 정도의 소주를 마실 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술이 취하지 않을 수밖에... 이미 어느 정도 술을 마셨던 행인, 이 사실을 깨닫자 심히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 수가, 술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이 냥반을 한 번 골려줄까 고민하고 있는 행인이었다.

 

자리가 길어지자 한놈 두놈 일어나는데, 그냥 내일을 위해서 일찍자고 일찍 일어나겠다는 식의 변명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서 자리를 일어나는 넘들의 대부분의 대사는 "애들 자는지 확인하고 올께요"라던가 "잠시 화장실을 좀..."하는 식의 구태의연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변명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애들 자는지 확인"하러 간 넘은 같이 뒤비 자는지 돌아오지 않고, "잠시 화장실을 좀..." 했던 넘들은 변기에 빠졌는지 도통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 거진 열명 가까이 모여있던 넘들이 자정 지나 새벽 2시쯤 되었을 때는 한넘도 남지 않고 사라지고 술자리에는 행인과 A 교수만 남게 되었다. 둘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게 되자 행인, 이제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심정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까이꺼 죽기 아님 까무러치기지 뭐...

 

"자, 한잔 하자. 원샷!" 이러면서 A 교수가 술잔을 치켜 들었다.

"예, 감사합니다"

술잔을 입에 대면서 A교수를 슬쩍 쳐다봤더니 역시 이냥반, 은근슬쩍 입에 대던 술잔을 내려놓는다. 잔을 비우자 A 교수, "그래서 말인데..." 하면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려는듯 하며 얼른 소주병을 들고 잔을 채우려 한다.

 

행인 잽싸게 "선생님 한잔 받으시죠.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하곤 빈잔을 들이밀고 후다닥 소주병을 낙아채듯 뺏아들어 잔을 채워줬다. 당황한 A 교수, "어어... 그래..." 하더니 잔을 받아 자기 앞에 있던 잔과 나란히 앉혀 놓는다.

 

"한 잔 주셔야죠."

"어어... 그래..."

 

이렇게 한 잔.

 

다시 좀 지나자 또 "자, 위하여~!"하며 잔을 부딪친다. 잔을 부딛치고 행인은 역시 바로 마시고 교수님은 잔을 내려놓고.

 

"선생님, 잔이 안 비었네요?"

"아, 그런가?"

 

역시 A 교수,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술에 있어서만큼은 자존심이 있었던 것인지 잔을 비우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자 마자 냉큼 홀라당 마셔버렸다. 이런 식으로 그 때부터 서로 잔이 비었는지를 확인해가며 술을 마시기 시작.

 

새벽 4~5시쯤 되었는데, 이분이 자기가 오전에 세미나에 참석해야하기 때문에 일찍 서울로 가야한단다. 그래서 먼저 일어나더라도 이해를 해달란다. 이해하다뿐인가? 제발 그래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그러나 먼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을 한 이후에도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겉으로는 웃고 즐기면서 화기 애애하게 자리가 이어지는 것 같았지만 방안의 공기는 격렬한 투쟁의 장 바로 그것이었다. 빨리 먼저 뻗어라... A 교수는 행인을 먼저 보내고 싶은 거였고 행인은 A 교수를 먼저 보내고 싶은 거였다.

 

방 바닥엔 몇 병인지 모를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고, 안주도 별로 먹지 않으면서 서로 소주를 먹이고 KO를 시키기 위해 온갖 벼라별 짓을 다 하고 있는 상황. 이미 항문 끝에서부터 목구멍 바로 밑에까지 술이 차 있는 행인, 여기서 더 마시다간 진짜 사단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시시각각 머리속에서 튀어올랐지만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A교수도 마찬가지였던 듯 한데, 이미 진작에 눈이 풀리기 시작했던 이분이 새벽 동터올 무렵부터 말까지 새기 시작했다.

 

자기가 한 때, 안동을 주름잡던 주먹이었다는 둥, 공부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한다는 둥 하다가 잠시잠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 하기도 하더니 다시 한 때 날렸던 이야기를 침튀겨가며 하질 않나... 행인은 계속해서 "예, 예, 아이구 그러셨어요..." 어쩌구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고. 그 와중에도 서로 죽어라 하는 심정으로 소주잔에 술을 따르는 두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행인도 이제는 더 이상 배가 불러서 술을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다. 대장과 소장에서 술이 출렁거리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있는 사람은, 또는 술로 배채운다는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 심정을 능히 알 수 있으리라. 결국 행인, 몇 잔만 더 하고 손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야, 이거 막잔 하고 일어나야겠다. 세미나도 참석해야하고..."

 

아아... 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항복선언이냔 말이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용솟음치는 승리의 감격! 이라기 보다는 앞으로 딱 소주 너댓잔만 더 들어갈 수 있었던 짧은 대장기관을 원망하던 그 절망감이 눈녹듯이 사라지는 그 심정. 감동 그 자체였다.

 

행인은 막잔을 '원샷' 했으나 A 교수는 마지막 잔을 비우지 못했다. 입만 대고 일어서 나가는 A 교수. 그래도 마지막까지 교수의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듯, "오늘 일정 차질 없이 잘 진행하고 애들 잘 보고. 알았지?" 하면서 주의를 잊지 않는다. 어련하시겠어요...

 

A교수가 방을 나간 후 시간을 보니 8시가 넘었더라... 애들 깨워 아침일정 진행하게 하고난 후 먼저 술자리에서 도망쳤던 넘들 둘을 데리고 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뜨거운 해장국 훌훌 불어가며 퍼먹으면서 해장술까지 한 잔 한 행인. 승리감에 도취되어 숙소로 돌아와보니 A 교수는 먼저 서울로 갔단다. 아... 그 정신에 그래도 세미나에 참석하려는 그 의지. 감동했다. 그리고 오리엔테이션은 예정대로 잘 진행되었다.

 

후일담이지만, 나중에 A 교수를 뵌 자리에서 "그날 세미나는 잘 하셨나요?" 하고 묻자, 이분 하시는 말씀... "세미나는 무슨..."

 

그날 세미나에는 참석도 못했고, 그 덕분에 욕 좀 얻어 잡수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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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0 23:57 2007/03/10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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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분다...



    새벽녘 A교수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깝쇼? ㅋ

    Behind Story
    원래 덧글에 올렸던 그림은 요거였는데,
    잠시 후 지웠슴다.
    다른 날 같으면.. 기냥 올렸을텐데.. 오늘 처럼 추위에 길거리에서 '맞은'사람이 많은 날엔... 적절치가 않을 것 같아서요.
    ㅎㅎ 그래도.. 뽀너스로~

    두분다...

  2. 이런 글 너무 재밌어요.ㅋㅋ
    실실 웃으면서 술잔으로 공격하는.ㅋㅋ

  3. 행인님이 다른 인간을 KO시킬수있는 건 술인거 같은데, 그 술을왜 끊으셨는지?ㅎㅎ

  4. 역시 술은 훌륭한 것이에요.(응?)

  5. re/ 감사 감사~~^^ 그래서 지우셨었군요. 그래도 아래 이미지는 딱 그 때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었던듯... ㅋㅋ

    ScanPlease/ ^^

    산오리/ 그러게요... 저도 그 이유를 잘... 제 나름대로의 이유는 취생몽사 시작하면서 밝히기는 했지만 썩 설득력이 없다 보더라구요. ㅎㅎ

    박노인/ 음...?

  6. 푸하하, 어쩜 >.<
    다시 음주의 세계로 귀화하심이 어떨지;;

  7. 정양/ 다시 한 번, 놉!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