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사태에 대해 마지막으로...
어차피 당분간은, 아니 상당한 기간 동안 서로 겉도는 이야기만 하다가 끝날 거라고 보이기에 더 이상 조국에 대한 이야기는 할 생각이 없다. 다만,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했던 나름의 이유는 정리해야겠다.
우선 조국 본인의 문제. 조국은 80년대 사노맹(이었다고는 하나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에 대해선 논외로 하고) 활동을 했다고 하고, 교편을 잡은 이후에도 소위 ‘좌파적’ 포지션을 취하며 사회개혁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해왔다. 겉으로 보여졌던 그의 삶은 훌륭했으며, 부조리한 사회와 불화하는 인텔리겐챠의 전형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제대로 진보하기 위해선 이러저러한 이념과 제도와 심지어 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비겁하고 치사해서는 안 되며, 공정과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세상이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며, 그렇게 살지 않거나 그렇게 사는 것을 방해하거나 심지어 그렇게 살지 않음으로써 부와 명예를 누리는 자들과 결연히 싸워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바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기에 이 사회가 그럭저럭 전진해왔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그럭저럭 사는 데도 버거웠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부와 명성을 손에 거머쥔 사람들처럼 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 많은 사람은 자신이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다는 그나마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과정에 조국 같은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조국 사태’를 경유하면서, 그동안 그토록 훌륭하고 아름다운 말을 했던 사람이 실은 그렇게 살고 있던 ‘가붕개’들은 계속 그렇게 살라고 독촉하면서, 정작 자신은 이너서클의 기득권을 향유하며 그 기득권을 대물림하기 위해 자신이 사람들에게 살라고 했던 방식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조국 사태’의 경과는 나중에 살피더라도, 이 사태의 원인제공을 조국이 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당연히 그렇기에 ‘조국’ 사태가 된 것이고, 따라서 이 사태의 원죄를 조국이 감당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그 개인의 일탈이 개인적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조국 개인의 문제는 그냥 조국 개인의 문제로 끝날 수 있었다. 그가 누구보다 독특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들, 그런 류의 상류층의 일탈은 부지기수로 보아왔던 일이고, 당사자에 대한 사회적 실망은 그 개인이 책임을 짐으로써 그저 간혹 경험하게 되는 해프닝으로 정리되어왔기 때문이다.
조국 ‘사건’을 조국 ‘사태’로 확정시킨 건 조국 주변에 포진한 일군의 무리들이었다. 여기엔 조국의 문제가 음으로 양으로 그들 자신의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류도 있었고, 특정한 정치적 목적-예컨대 검찰개혁-에 바쳐진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부류도 있었다. 전자와 후자는 그 의미와 지향이 달랐지만, 조국이라는 매개를 공유하며 사건을 사태로 확장하는데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조국을 기껏해야 ‘잡범’에 불과한 범법자로 만드는 것의 부당함을 강조하면서 조국을 검찰개혁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으로 승화시켰다. 이들 가운데에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었던 지식인 계급의 구성원들이 있었는데, 나는 조국 사태가 한국사회의 계급적 갈등구조를 치명적으로 심화시킬 것이라는 예감을 이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조국 사태’를 경유하면서 분노하며 수치스러워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조국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진보를 추구하면서 보수반동과 대척하는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실정법의 한계를 넘어 민중의 법을 지향하는 법학자였고, 어떤 이는 경제사회적 문제의 근간을 계급적 대립으로 보면서 노동자 민중의 주체화를 고민하던 사회학자였으며, 어떤 이는 교육문화적 측면에서 지배계급에 의해 배제된 소수자의 몫을 드러내고자 했던 문화인류학자였던 등등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가, 조국 사태 초기에 조국이 어떤 실정법을 어겼느냐며 조국을 감쌌고, 조국의 불법, 탈법, 위법행위가 드러났을 때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정도는 관행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부끄러움도 없이 주장했다. 그러더니 결국 조국의 범죄행위는 검찰권력의 자의적이고 과도한 표적수사, 별건수사의 결과로서 부당한 결과라고 하더니 심지어 검찰의 증거조작, 증언교사를 통해 만들어진 조작범죄라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조국을 감싸고 도는 사람들이 바로 조국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우리 사회의 진보를 이야기하고, 진보를 위해 이러저러한 투쟁이 필요하며, 노동자 민중이 신념과 원칙을 지키면서 모든 억압과 차별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는 말을 주구장창 해왔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몇십 년씩 평생을 해오던 사람들이 정작 조국 사건이 터지자 자신들이 해왔던 말과는 정반대의 행태를 옹호하면서, 그동안 ‘동지’라고 호명해왔던 이땅의 가붕개를 향해 조국이 나쁜 놈이 아니라 검찰이 나쁜 놈이라며 딴소리를 해댔다.
이 모습을 본 노동자 민중, 특히 청년세대는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그동안 저 훌륭한 사람들이 제시하는 올바르고 정당한, 자유와 평등이 만개한 세계를 기대해왔다. 그 세계를 만드는데 바로 저 훌륭한 사람들이 구루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었고, 그들이 말한 이야기들을 자신들의 삶의 기준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조국 사태를 겪으면서, 저 훌륭한 사람들이 결국은 조국과 같은 계급의 일원이었을 뿐이고, 그들의 훌륭한 이야기는 결국 자신들은 가붕개들이 누릴 수 없는 지위에 속해 있으면서 그 기득권을 영구 향유하기 위해 가붕개들이 현실에 안주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저 훌륭한 사람들이야말로 한국사회의 계급적 갈등구조를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그 기득권을 대물림하는 사람들일 뿐임을 알게 된 거다.
조국이 실정법을 어겼다는 건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다. 어떤 실정법을 어겼냐가 문젠데 사실 그것조차도 앞서 말했듯 그냥 본인이 책임지고 적당히 넘어갔으면 큰 문제가 없었다. 조국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나? 형법에 위반하는 체제전복적 활동을 했나? 그렇지 않다면 그를 사상범이나 양심수로 볼 이유가 없다. 강도·강간·살인 같은 범죄를 저지른 강력범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의 범죄는 사문서위조 행사 등의 죄이고 그것도 자기 자식에게 한정된 범죄였으며, 애초 범죄가 없었으면 합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던 누군가가 그 범죄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만큼의 책임을 지고 자숙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범죄였다. 그래서 ‘잡범’ 소리가 나오는 거고, 사실 그가 할 바를 다했다면 이 소리도 안 나올 수 있다.
여담이지만, 바로 이 ‘잡범’이라는 말에 화들짝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이들 반응은 어이가 없다. 잡범을 잡범이라고 하지 뭐라고 할 건가? 그가 잡범인 것과 그 잡범 때문에 사회적 사태가 벌어진 건 동시에 논의할 수 있는 이야기다. 잡범이 사회적 사태의 핵심이 된 건 그와 그를 보위하고자 했던 자들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교수는 페북 어느 글에 단 덧글에서, “그들(조국과 그 주변 군상)과 서민의 사이가 그리 멀지 않다”는 취지의 입장을 개진한 바가 있다. 계급 간 문화적 차이는 그 이격의 정도가 상당하며, 그러한 차이는 부지불식간에 삶의 형태와 발화되는 언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페북 덧글러는 “그들”이라고 표현하면서 마치 자신은 그들과는 다른 위치의 존재인 것처럼 포지셔닝을 한다. 상대적 의미를 가진 지시대명사로서 “그들”은 대상을 가지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그 대상이 “서민”으로 나타난다. 그의 표현에서 “그들” 안에 속하지 않은 그는 “서민”의 일원인 것처럼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실상 그는 “그들”의 일원으로서 조국의 문제적 행위를 희석시키고 있다. “서민”과 “그들”이 다르지 않다는 취지로. 어차피 니들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인도 전문가인 닉네임 ‘환타옹’은 조국사태가 정점을 찍던 시기에 이런 글을 남긴 바가 있다(환타옹 페북에서 펌 ).
“운동이라는 게 결국은 말빚이다.
청춘의 시절 내가 했던 말이 너무나 커서, 차마 다른걸 못하는 일종의 천형 같은 거다.
노동의 신성함을 노래하던 나는 차마 주식같은 거, 투자같은 거, 할 수 없는 거지. 온전히 나의 노동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내 삶으로 보여주는 게, 운동이라 생각한다.
내 주변에는 다행히 그런 사람들이 많다.
꽤 명문가에서 태어나 지금은 꽤 번듯하게 사는 녀석들도 자신이 20대 때 했던 말빚 때문에 지 새끼들 유학도 특목고도 안 보내고 버틴다.
다 조국같은 게 아니다. 물론 이 문제는 부부가 생각이 같아야 가능한 일인데, 다행히 비슷한 인간들끼리 잘 만나서 잘들 살아낸다.
적어도 나한테 운동이란 그런 거다.,
난 임대아파트에 사는데, 자식이 없어 그런가 심각한 차별 같은건 모르고 산다. 물론 둔해서 그럴수도 있겠으나.
중산층의 놀이터 동네 생협에서 왜 티비에도 종종 나오는 작가가 그런데 사냐는 정말 철없는 질문같은….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이다..
이 동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날 알아봤고 세테기 한번 나오니 거의 그때는 엘리베이터 탈 때마다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더라.
그 즈음에 9층에 사는 현재 고딩인. 당시 초딩이 그러더라,
아저씨가 같은 아파트 살아서 좋아요.
자기 반에서 친구들과 자기가 아는 유명한 사람 배틀이 붙었는데 같은 아파트 사는 내가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하더라고.
그냥 그때 티비 나왔으니 그런 거겠지만,
울컥했다.
임대아파트 산다고 얘들이 따돌리니?
그렇단다. 자기랑 안노는 아이들 있다고.
강연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걔 기도 살려주고, 실존하는 신기한 털보가 있단 것도 아이들에게 뵈주고, 물론 말은 꺼내지 못했다.
비슷한 경험을 몇 번 했다.
당신이 함께 살아서 다행이다.
송구하고 황송하고, 당황스러운데. 그때 결심했다. 어차피 여기서 쫒겨날만큼 많이 벌지는 못하니(간당간당 걸려있긴 한데) 최대한 여기서 버티겠다고.
그래 이것도 또 내 삶에서의 운동이구나 싶었다.
이런 나나 내 주변 사람들에게 조국의 삶은 모욕적이다.
물론 나는 그보다는 훨씬 못났지만,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이리 사는건 아니다. 청춘의 시절 내 말빚때문에, 아니 그 옳음을 벗어날 명분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혹은 오기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내내 분노하는 지점이다.
나와 내가 존경하는 내 친구들의 삶이 무척 웃겨졌다. ㅋㅋ 불법이냐 아니냐? 그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 나갈쯤 나이 서른에 우리라는 민가가 유행했다.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지금 바라보는 하늘과 같은 하늘이었음 좋겠다. 최소한 내가 타도하고자 했던 저들과 같아지지는 말자고.
이리 사는 사람이 하나쯤 있다고 보여주는 게 의미있다고 생각해서 버텨내고 있다.
그 지점에서 난 조국이나 혹은 과거 운동의 빛으로 존재하는, 내 옆에 선 사람이 하나라도 있기를 바랬다.
진보는 부자면 안되냐고?
아니, 하지만 그런식으로 사회적 부와 권력을 쟁취하면 안된다.
한 때, 당신의 동지들은 지금도 각자의 삶에서 그때 했던 이야기 상기하며, 버텨내고 있다.
소소하지만 항상 전선인 어떤 땅에서 말이다.”
유사한 사례가 내 주변에 무수하다. 자식을 특목고나 유한계급들의 자식이 제법 모인다는 대안학교에 보낼지 고민하다가 일반 고등학교에 보낸 사람들, 여전히 주식이며 부동산이며 코인이며 하지 않는 사람들, 국가건강보험의 건전화를 주장하며 실손보험 등 민간의료보험을 거부하는 사람들, 감당하기 어려운 혹서기에 에어컨을 돌렸다며 죄책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라고 해서 조국보다 못나서 그러고 있었겠는가? 이들은 조국처럼 유명하지도 않고,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에게 조국처럼 영향력을 끼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조국이, 혹은 조국 주변의 수많은 조국들이 했던 또는 해왔던 말들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말은 번지르르했지만 그 말처럼 살지 않은 조국과 조국들과는 달리 말이다.
조국 사태 당시에도 그렇고, 조국이 사면복권되어 다시 정치를 시작하게 된 지금도 그렇고, 여전히 조국 개인이 벌린 잡스러운 사건을 ‘조국 사태’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이 활개를 친다. 바로 이들이 내 분노와 수치의 원천이다. 이런 자들을 믿고 함께 할 동지라고 여겨왔던 내 자신의 안목 없음과 비루함에 분노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거다.
‘조국 사태’는 계급적 문제이기도 하고, 공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나친 공정담론이 계급적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를 희석시킨다는 비판을 보았는데, 그건 웃기는 소리다. 원천적으로 계급적 대립 자체가 계급 간 공정하지 않은 권력관계 때문이 아닌가?
‘잡범’에게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건 다른 사회적 문제를 간과하게 만든다는 비판 또한 한가한 잡설에 불과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조국이 잡범인 것과 잡범 따위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비화할 필요가 없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잡범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조국 사태는 이런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한편, 지금 이런 저런 문제 따질 때가 아니라 오히려 대통령의 사면권이 가장 큰 문제이므로 여기에 천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 역시 대표적인 물타기다. 아닌 말로, 그동안 대통령 사면권이 문제가 되지 않은 적이 언제 있었으며, 소위 한마디 한다는 사람마다 그럴 때 말 한마디 안 보탠 적이 있었는가? 새삼스레 이재명의 사면권이 전례 없던 핵폭탄급 문제라고 호들갑을 떠는 건 조국 외의 사안으로 관심을 돌려놓으려는 행태에 불과하다.
내게 있어 조국 사태는 이 땅의 기득권 세력, 부와 명예를 독점하고 있는 유한계급은 결국 어떠한 감언이설을 떠든다고 할지라도 자기 계급의 이해를 공유하며 다른 계급을 배제하고 소외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계기이다. 특히, 사회적 기생계급에 불과한 지식인 계급이 얼마든지 지배계급의 일원이 되어 노동자 민중의 등을 칠 수 있음을 상기시켜준 사건으로 조국 사태는 의미를 가진다.
살아 오면서 만든 관계가 있는 만큼, 난 앞으로도 사적으로는 이들과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때론 술 한 잔 같이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내 이념적, 사상적 동지도 아니고, 언제든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등에 칼을 꽂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과거의 소중한 인연을 이토록 살벌한 경계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일조한 조국을 그래서 더욱 용서할 수 없고.




